|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1일 목요일 오후 12시 29분 11초 제 목(Title): 한겨레21/ 아줌마 이혼 만세 [특집] 아줌마 이혼만세! 드라마 <아줌마> 신드롬… 박살나는 순종 이데올로기에 박수가 터진다 지난 1월9일 밤, 텔레비전을 켜놓은 많은 가정에서 박수소리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이날 시청자들을 흥분시킨 것은 축구 한·일전에서 펼쳐진 한방의 역전골이 아니라 한편의 드라마 속 이혼법정이었다. 드라마 <아줌마>에서 오삼숙(원미경)과 장진구(강석우)의 이혼판결이 난 순간이었다. 물론 감격에 겨운 목소리는 대부분 여성의 것이었다. 다음날 문화방송 홈페이지의 <아줌마> 시청자 게시판에는 역전의 용사 오삼숙에 대한 지지 메일이 쇄도했다. “작가님, 연출가님 감사합니다”,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이혼판결 속시원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다 눈물이 났다. 기뻐서”…. 한 네티즌은 “작가가 여성특별위원회에서 상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하는 제안까지 했다. 시청자들은 무슨 심보로 한 가정의 파경에, 여성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처라는 이혼에 쌍수를 들고 반긴 것일까? 드라마는 어쩌자고 용서와 화해라는 묵시를 깨고 법원을 나서는 원고 오삼숙의 발걸음에 위풍당당 행진곡의 배경음악을 깐 것일까? ‘19세기 아줌마’ 당당히 포문을 열다 드라마 <아줌마>의 바람이 거세다. 지난해 9월 말 ‘가부장적인 집안의 순종적인 전업주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변신하는 과정을 그린 코믹 홈드라마’라는 기획으로 시작된 이 드라마는 방영 뒤 두달이 지날 때까지도 그저 그런 드라마 가운데 하나로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11월 말부터 시청률이 가파르게 올라가더니 지금까지 30%를 달리면서 쾌속순항하고 있다. 정확히 순위로 따지면 1등은 아니다. 최근 방영이 끝난 서울방송의 <여자만세>나 한국방송공사의 <태조 왕건>에 여전히 밀린다. 그렇지만 <아줌마>를 두고 벌어지는 공방의 열기는 다른 드라마를 단연 앞선다. 이혼판결이 나기 전 일간지에 앞다투어 ‘아줌마를 이혼시켜라’는 압박성 칼럼과 기사가 등장했던 사실은 이 드라마가 뿌리고 있는 이상열기를 가늠케 한다. <아줌마>에 대한 여성시청자들의, 그리고 일부 남성시청자들의 지지는 이제 신드롬으로 변해가는 양상이다. 현실에서는 세쌍 중 한쌍의 부부가 이혼을 할지언정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되도록 피하는 이혼을, 뻔뻔할 정도로 씩씩하게 그리는 것에 시청자들이 갈채를 보내는 형국이나, 드라마에서 장진구가 던지고 오삼숙이 받아쳤던 ‘학문적 동지(이성친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있는 것은 아줌마 신드롬을 보여주는 예다. 주부가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아줌마>는 묘하게 갈리는 지류에 자리잡고 있다. 원류는 비슷했다. 전업주부로 장손의 맏며느리로 ‘월급없는 파출부’이자 ‘새경없는 몸종’인 오삼숙은 드라마 초기에는 ‘19세기 아줌마다’, ‘아줌마를 비하한다’는 비난의 화살을 받았다. 그러나 “나두 전에는 그눔의 한국사회가 쳐주는 거는 다 믿었어요. 오빠네처럼 살면 그거 진짜루 잘사는 거겠다 그랬어. 오빠네는 대한민국 최고 일류니까”라고 믿던 삼숙이 “솔직히 한국사회가 여태까지 나 사는 데 뭐 하나 보태준 거 있어? 나 같은 사람 속여먹고 주눅이나 들게 했지?”라며 당당하게 포문을 연 순간 그 흐름이 갈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아줌마> 신드롬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발생했다. 삼숙의 갈등은 남편이나 시어머니와의 것으로 축약되지 않는다. 삼숙의 싸움 상대는 남편과 시댁식구를 포함한, 자신을 둘러싼 제도이고 평생 자신을 훈육해온 순종 이데올로기다. 그는 하나씩 하나씩 자신을 감싸고 있던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감옥을 열고 나간다. 그래서 호주제 폐지나 엄마성 물려주기, 일가창립 신청 등 삼숙을 주눅들게 했던 지식인들의 ‘구호’가 오히려 그의 삶 속에서 온전하게 녹아들게 된다. 주부임을 밝힌 한 네티즌의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면 계속 결혼생활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라는 문제제기처럼 요즘 아줌마들의 문제의식에 <아줌마>는 자연스럽게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삼숙이 이혼을 하기까지의 심적 변화과정을 지루하리만치 차분히 보여주고 법적인 문제들도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그래도 착한 며느리’, ‘그래도 가정의 울타리’라는 강박의 성에 살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워버린 이 시대 여성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계간지 <이프>의 황오금희 편집장의 평이다. 황오 편집장의 말처럼 <아줌마>는 한달여간이나 재판상 이혼과정이나 위자료, 재산분할, 양육자 지정청구 등 법률적 문제들을 끈질기게 짚고 있어 일부 시청자들로부터 ‘이혼을 부추기는 거냐’, ‘지루하다’는 비판도 듣고 있다. 재미있는 건 주로 남성이나 젊은 시청자들로부터 이런 핀잔을 받는 반면 많은 주부들로부터는 도움이 된다는 호평을 받고 있는 점이다. 아줌마간의 계급차별 사진/각자의 자리에서 이해관계로 부딪치는 <아줌마>의 가족들은 가족주의의 허상을 깨면서 현실에 가까운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아줌마>가 기존 드라마와 갈리는 부분은 오삼숙이라는 인물의 역동성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중요한 변화는 드라마에서 관습적으로 그려온 가족의 하모니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장진구네 식구들 가운데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는 한 네티즌의 비난은 일면 맞는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고 있고 이모는 다정하게 설거지를 돕는 모습이 ‘정답’처럼 반복돼왔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엄연히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만.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파격의 정도는 장진구 아버지 역을 맡은 이순재씨의 모습에서 쉽게 드러난다. 이제까지 근엄하고 강직한 아버지 역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이순재씨는 <아줌마>에서 엎드려 방걸레질을 한다. 아들을 교수자리에 앉히기 위해 퇴직금을 내놓으며 체통을 차리기 위한 거짓말을 짜내고, 무참해진 며느리를 연민하다가도 아들의 애인이 집을 내놓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다. 장진구의 이혼과정에서 가족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발언하는 양상은 흥미롭다. 시어머니 옥자(정재순)는 갖은 고상을 다 떨면서도 위자료를 내놓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며느리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미행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위인이다. 시누이들은 어떤가, 삼숙이 이혼한다는 말에 신문기자인 이른바 엘리트 첫째 시누이는 아이맡길 데부터 걱정하고, 장씨 집안에서 비교적 이성적인 막내 시누이조차 오빠의 이혼이 자신의 결혼과정에 흠을 낼까봐 못마땅해 한다. 분명 드라마 속 장씨집안은 마치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집단 같다. 그러나 크고 작은 일상적 갈등으로 얽혀 있는 이 가족이야말로 여지껏 드라마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피해온, 그러나 주의깊게 보면 바로 우리 주변에서 살고 있는 현실의 가족에 가깝다. 이혼할 때 상대방을 배려해서 자신의 핏줄을 고분고분 넘겨주는 부모가 어디에 있으며 당장 출근길에 아이맡길 곳이 막막한데 더이상 아이를 봐줄 수 없다고 자르는 올케의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이해해줄 시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영화평론가 김소희씨는 “개개인의 상황에 대한 복잡함을 부여하면서 가정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상처를 안고 있는 공간으로 그리는 것에 시청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왜 아니겠어’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 복잡한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다. 시어머니와 오삼숙, 두 시누이, 그리고 넓혀보면 오삼숙의 올케인 최유미(견미리)는 실상 모두 ‘아줌마’다. 그러나 아줌마라고 같은 아줌마가 아닌, 아줌마간의 계급차별을 이 드라마는 조목조목 짚는다. 일단 고부와 시누이-올케라는 태생적인 계급차별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에서도 숙명적이다. 단지 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전업주부라는 ‘원죄’로 삼숙은 요리사, 청소부, 보모까지 떠맡아야 한다. 여기에 삼숙이 “먹물”이라 자주 표현하는 교양인과 비교양인의 차별까지 침투한다. 두 시누이들은 대학교육을 받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데 별 갈등을 느끼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당장 식사 때, 아이맡길 때만 되면 은근슬쩍 올케의 노동력에 기생하면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에는 ‘무식한’ 시누이를 배제하는 데 별다른 갈등을 겪지 않는다. 가장 소극적인 착취자인 두 시누이에게서도 암암리에 배어나오는 먹물의 허위의식은 이 드라마가 통렬히 조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장진구들’이 ‘장진구’를 욕한다? 사진/신문기자인 시누이는 올케의 이혼선언에 당장 애 맡길 데를 걱정한다. “지식인과 기층민의 결합”. 취중에 친구의 여동생을 건드려 임신시켜서 할 수 없이 결혼했으면서 이렇듯 자신들의 결혼을 그럴듯한(그러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로 묘사하는 장진구는 맥도 닿지 않는 전문용어를 구사하면서 아내 오삼숙을 무시한다. 포르노를 보다가 아내에게 들키자 “음란물의 유통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라며 둘러대는 이 한심한 작자는 “한톨의 진실됨도 없”으면서 기층민(아내)을 착취하는 데는 거리낌없는 이른바 ‘지식인’이다. 장진구뿐 아니라 오일권(김병세), 한지원(심혜진) 등 이른바 최고 엘리트라는 교수 집단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비정상적으로 묘사되는 군상들이다. 장진구 못지않은 위선자이면서 근엄함이라는 겉옷을 덧입어 더욱 역겨운 인물로 그려지는 오일권 앞에서는 장진구의 엉성한 거짓말마저 귀여울 정도다. 오삼숙을 만나서는 ‘페미니즘’ 운운하면서 장진구 옆에 소녀처럼 기대서 시를 읊는 한지원 역시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이 드라마에서 지식인에 대한 희화화가 지나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에 대해 작가 정성주씨는 “장진구라는 인물의 모델이 된 사람이 드라마를 보면서 장진구 욕을 그렇게 한다더라”며 알 듯 말 듯한 답변을 던졌다. 일면 위악스럽기도 한 드라마 속 지식인의 이중성에 대한 묘사는 지식인 집단과 많은 부분 교집합을 갖는 남성중심의 사회, 즉 아저씨 집단에 대한 아줌마의 가차없는 일격이기도 하다. 아줌마들의 지지와 비(非)아줌마, 반(反)아줌마들의 비판 속에서 드라마 <아줌마>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50회 분량이 기획된 <아줌마>는 3월 초 종영을 앞두고 있다. 현재 아줌마는 말 그대로의 ‘학문적 동지’와 함께 꿋꿋이 앞길을 준비하고 있고, 아저씨는 항소를 준비하며 꿈꾸는 처녀와 동상이몽중이다. <아줌마>의 끝은 어디일까? 열렬한 아줌마 지지자들의 우려와 달리 기층민 아줌마와 지식인 아저씨간의 재결합은 물건너간 상태다. 그럼 진구와 지원은 “결혼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 “영혼의 결합”을 할 수 있을까? 작가 정씨는 “그래도 장진구보다는 나은 인간인 한지원이 빨리 정신차리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운을 띄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특집] “결혼은 본성을 억압하잖니…” 닭살돋지만 재미있는 <아줌마>의 대사들 (장진구가 오삼숙과 이혼을 결심 뒤 오일권을 만나서) 진구: 미안하다. 결국은 내가 결혼제도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어. 일권: 뭐? 진구: 남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며 성장하구 늙어가는데, 결혼이 그 본성을 억압하잖니. 결국 결혼이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착된 거야. 우린 그 희생자구. 일권:이 새끼. (주먹을 날린다.) (취중에 오삼숙을 임신시킨 장진구가 청혼하던 때를 회상하는 오삼숙) 진구: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같이 가는 거야. 삼숙아. (아영이 수완에게) 아영: 우리집, 겉으루는 클래식, 속으루는 뽕짝이야. (한지원, 아이들과 자신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떼쓰며) 지원: 영혼보다 핏줄이 더 중요해? 나는 영혼의 동반자 아니야? 진구씬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야 된단 말야. 나는 자기의 영혼인데 어떻게 영혼을 버리구 핏줄을 택하겠다는 거야? 게다가 그 핏줄들이 나에게 왕따를 놓는데 진구씨까지 나를 가슴아프게 해야 되겠어? (오일권이 표절시비로 교수직에서 쫓겨날 줄 알았다가 무사한 것을 듣고 실망한 지원과 진구) 지원: 어쩜 무섭다. 진구: 아 난 정말 이럴 때 조국이 싫어져. 아니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원칙두 안 지켜지나? 반도덕적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서는 여과장치가 작동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지원아, (손잡으며)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두 유리알 같은 아니 수정 같은 양심을 지키면서 살자. 지원: 그래 언제나 맑구 올곧은(??) 시선으로 서로를 지켜보면서 살기루 해. (진구의 아이들을 키울 꿈에 부푼 지원) 지원: 음악회 같은 데두 데리구 가구 운동도 같이 하구 밤새며 토론두 해보구 그런 속에서 자유로운 정신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조화를 이루지 않겠어? 진구: 지원아. 지원: 응? 진구: 니 얘길 들으니까 비로소 정리가 돼. 지원: 무슨 뜻이야? 진구: 난 그동안 애들 교육 생각하면 아주 혼란스러웠거든. 근데 니가 오늘 방향을 잡아줬어. 자유로운 정신과 성숙한 시민의 조화라는. 지원: 그러엄. 쉽게 말하면 글로벌에티켓이 몸에 배어 있으면서 개성있구 매력적인 사회인. 진구: 바루 그거야. 난 바루 애들한테 그 점을 구현하고 싶었어. (지원의 아파트를 얻기 바라는 부모와 엉뚱한 생각을 하는 지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재하 집으로 피신한 진구를 재하가 비난한다.) 재하: 야, 이 장진구 같은 놈아, 너 그게 얼마나 나쁜 욕인 줄 알아? 세상에서 제일 나쁜 욕이야. (법원에서 조정을 받고 카페에 들어온 진구가 삼숙에게 양육할 자격이 없다고 자근자근 밟은 뒤 나갔다가 잊고 온 휴대폰을 찾으러 돌아오자 눈물을 흘리고 있던 삼숙은 진구를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삼숙: 내 가슴에 칼질을 하는 줄두 모르구 다 듣기만 했는데. 진구: 칼, 칼질이라니. 삼숙: 훈이, 견이가 니 밑에서 커서 20년 뒤에 아빠처럼 돼가지고 그렇게 개소리 흩뿌리고 다닐 걸 생각하니까 아찔해. 그때는 세상이 지금하고 달라져 있어야 하는데 당신 아버님처럼 돈 내고 교수자리 사줄래? 들키면 우리 오빠가 당신한테 시킨 것처럼 양심선언하라 그럴래? [특집] “배운 놈들이 더 못된 짓 한다” 한 인물이 완전히 발가벗겨질 수 있는 상황에 가장 많은 신경 써 인터뷰/ <아줌마> 안판석 PD 김혜수, 안재욱 등이 출연한 일요 드라마 <짝>을 연출했고 작가 정성주씨와는 <장미와 콩나물>에서 호흡을 맞춘 안판석 PD는 문화방송의 간판급 프로듀서 가운데 하나다. 초반기에 예상 외로 고전을 한 <아줌마>에 11회부터 책임 프로듀서로 긴급 교체돼 순식간에 시청률을 수직상승시킨 흥행사이기도 하다. -초반기에 시청률과 평에서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던 드라마가 중간쯤부터 확 살아났다. 안 PD로 교체된 즈음인데 인물 성격에서 특단의 변화가 있었나. =오삼숙의 성격이 바뀐 것은 없다. 오히려 베이스가 탄탄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억압받고 답답한 모습이 강해야 그만큼 치받는 것에 대한 임팩트도 큰 것 아닌가. -그래도 수동적이고 제대로 의사 표시도 못하던 삼숙이 갑자기 할말 다하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비약이라는 느낌이 든다. =갑자기 변했다고 볼 수 없다. 진구의 위선들이 스러져 내려가는 것이나 외도 등 외부의 변화가 오삼숙을 변화시켰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아무리 속좋은 사람도 인내의 한계에 이르면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성공비결은 뭔가. =시작 때의 토대를 오히려 개연성 있게 유지하면서 물고늘어져야 할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챙기려고 애썼다. 보통 결론에 등장하는 이혼이라는 심리적, 물리적 과정을 어물쩍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고 장진구와 오삼숙뿐 아니라 다른 관계들의 갈등구조 역시 현실적인 맥락으로 짚고 넘어가고자 했다. -캐릭터들이 과장되거나 왜곡되게 그려진다는 비판도 있다. =한 인물이 완전히 발가벗겨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런 극한의 상황이 오면 누구나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고 그때 드러나는 것은 지위나 언변으로 가려지지 않는 모습이다.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일 뿐 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일권, 최유미 부부나 지식인 집단에 대한 풍자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드라마는 삶에 대한 관찰이다. 사실 지식인 또는 스스로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더 많은 오류가 있지 않나. 막말로 배운 놈들이 못된 짓을 더 많이 하는 게 우리 사회 아닌가.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운데 실제로 드라마 진행에 영향을 끼치는가. 기획 때는 장진구와 오삼숙의 화해로 끝난다고 들었는데 이혼 판결도 시청자들의 강한 요구로 끌고 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처음부터 드라마의 명확한 선을 세우기도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인물과 상황이 만드는 개연성이 드라마를 움직이고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이혼이란 것도 등장인물이 이 짐만 덜면 살 것 같다고 생각이 듦직할 때 가능한 것이다. 오삼숙에게 남편과 가족이라는 짐이 숨쉬기 힘들 만큼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에 그 짐을 놓았을 때 발걸음도 그만큼 가벼울 수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 <아줌마>가 그리고자 하는 아줌마상은 어떤 것인가. =거창하게 이 시대의 아줌마상을 보여주려고 하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평범한 주부인 오삼숙의 인생드라마 ‘오삼숙전’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을 쫓아가다 보면 당도한 문맥이 있고 변화는 그 속에서 저절로 끌려 오는 것이다. 그 삶의 고비고비에서 시청자들의 삶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고 거기서 이른바 아줌마들의 교감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특집] 거짓과 위선, 함께 진저리쳤으나… <아줌마> 속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아줌마, 오삼숙과 최유미의 길 “훈이 아빠가 자기 친구긴 하지만, 썩 자랑스럽지는 않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등떠밀 듯 결혼시킨 게, 늘 마음에 걸릴 수밖예요. 아가씨가 사랑두 못 받구, 고생만 하며 사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픈 거죠.” “나는 괜찮아요. 원래 모자라구 배운 것두 없구, 그거 다 내가 모자란 탓이니까, 저 여자 참 안 됐다, 저러니 남편 사랑두 못 받는다, 별말을 다 들어두 싸죠. 그치만 애들 아빠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의 자리, 종속과 독립 드라마 <아줌마>에서 시누이 올케 사이인 최유미(견미리)와 오삼숙(원미경)이 주고받는 대화다.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올케의 오만함에 오삼숙은 몸을 떤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남편 장진구에 대한 모욕 때문이다. 오삼숙과 최유미는 <아줌마>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이는 두명의 아줌마 주자다.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 아래서 더 지독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주입받고 자란 오삼숙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결혼을 통해 오빠의 시녀에서 남편의 시녀로 자리바꿈한다. 그는 결혼생활 13년을 “밥줘, 옷줘, 몸줘, 줘, 줘” 하는 남편의 요구만 받고 살았다. 반면 풍족한 가정환경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으며 자란 최유미는 자신의 간판이 되어줄 수 있는 남자를 골라서 결혼했다. 삼숙이 남편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지식인의 책무’니 하는 언어도단으로 무시당하며 사는 동안 유미는 자신의 사업까지 꾸려가며 주식시장이나 아이들의 해외유학에 대해서 논의한다. 유미는 아줌마란 명칭보다는 ‘사모님’이나 ‘미시’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삼숙의 삶이 버리고 싶은 어머니의 삶, 종속이라면 유미의 삶은 많은 여성들이 꿈꾸는 딸의 삶, 독립이다. 적어도 앞의 대화가 일어날 때까지는. 사진/<아줌마>는 전통적 아줌마의 변화를 그리면서 이른바 미시 아줌마의 한계를 짚어낸다. 동부이촌동 촬영 현장.(이정용 기자) 그러다 두 사람은 남편의 외도라는 같은 위기를 비슷한 시기에 겪는다. 두 사람이 대응하는 방식은 닮아 있으면서도 판이하다. 영혼의 결합 운운하며 주접떠는 장진구에게 질릴 대로 질린 삼숙은 “꼴값 떨고 있네. 당신 같은 사람이 사랑이 뭔지나 알아”라고 초연하게 대응한다. 유미 역시 초연하게 대응한다. 그러나 유미의 초연한 대응은 상대방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분노를 극도로 절제한, 일종의 가면쓰기다. 이 지점에서 종속과 독립이라는 두 사람의 자리는 극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최유미가 독한 여자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봐요. 이른바 상류층의 여성들 중에는 유미가 말하는 것처럼 남편이 자신의 간판이고 가진 게 너무 많아서 하나도 놓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 많잖아요.” 잔뜩 찌푸린 날씨의 동부이촌동 야외촬영장에서 만난 견미리씨는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함께 차를 타고 오던 유미와 지원이 아파트 앞에서 처량하게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장진구를 피해 차를 돌리는 장면을 촬영중이었다. 촬영을 위한 고급스런 옷차림에 걸맞지 않는 소탈한 말투의 견미리씨는 사실 한해 일곱번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 맏며느리라고 한다. 촬영장에서 만난 오삼숙과 최유미는 언뜻 드라마 속의 캐릭터와는 반대로 보였다. 함께 차에 탄 견미리씨와 심혜진씨는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고 주위 스태프들과 장난도 치며 촬영을 진행하는 반면 원미경씨는 촬영 이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조용하게 있는 편이었다. 다만 식당에서 함께 나오는 장면을 찍는 훈이와 견이를 친자식 대하듯 추위에 떨까 꼼꼼히 챙기며 촬영을 마친 스태프들에게 싹싹하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드라마 속 아줌마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이곳에서도 강석우씨는 밖에서 몸을 숨기고 식당 안을 기웃거리는 ‘장진구적’인 연기를 하고 있었다. 삼숙, 페미니스트가 돼버리다 “오삼숙은 아주 솔직한 여자죠.” 원미경씨의 말마따나 오삼숙을 종속에서 독립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힘은 껍데기에 진절머리를 치는, 치장할 것 없는 이의 솔직함이다. “여자 때문에 헤어지는 게 아니에요. 장진구의 얼치기, 껍데기 같은 행동들이 싫은 거예요. 껍데기 시아버지, 껍데기 시어머니, 껍데기 시누이….” 하늘같이 모시던 시아버지를 똑바로 쳐보며 삼숙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배워온 미덕들을 무너뜨리는 주위의 칼날에 반응하는 오삼숙의 태도는 단호하다. 이것은 이전의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의 자아찾기와는 분명 다른 양상이다. 한국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페미니즘영화라고 평가받았던 80년대 영화 <안개기둥>에서 보듯 인형의 집을 탈출하는 노라식의 갈등과 방황은 고학력 엘리트 여성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묘사하는 방식 역시 침울한 일상과 긴 침묵, 그리고 폭발로 이어지는 해방선언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삼숙은 좌절하는 순간에도 씩씩하다. 시부모의 밥상을 차리고 남편의 세숫물을 받으며 받은 모욕과 좌절이기 때문에 그의 싸움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그러는 사이 그는 한지원처럼 페미니즘에 관해서 장광설을 풀어놓을 수 없지만 이미 페미니스트가 돼버렸다. 이혼을 결심하고 일가창립을 신청한 오삼숙에게 유미는 훈계한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우는 데 부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셔야죠.” 삼숙은 “언니처럼 배운 사람들이 호주제 폐지 서명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반응한다. ‘무식한’ 아줌마와 ‘엘리트’ 사모님간의 역전된 이 대화는 두고두고 기억될 장면이다. 이제 완벽해 보이던 오일권 부부도 끝이라고 내심 쾌재를 부르는 친구들에게 보란 듯 최유미는 남편을 대동하고 부부동반 모임에 나타난다. 그리고 말한다. “실망했니?” 그런 그를 친구들은 힐러리라고 부른다. 이렇게 조롱하는 주변인물들의 눈에는 질시가 섞여 있기도 하다. 속으로는 곪아터질 망정 겉으로는 작은 생채기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위선적이지만, 더욱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런 주변인물들의 태도다. 사실 애정과 안정은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된 오늘날 최유미식의 선택은 도덕적으로는 환영받지 못할지언정 현실적으로는 어쩌면 오히려 가능성 높은 선택일 수도 있다. 외국의 경우 남편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사회적 혜택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걸리는 신경증 환자들에 대해서 ‘황금가지 신드롬’이라는 병명이 붙여질 정도라니 현실의 최유미는 의외로 가까이 있다는 이야기다. “저 역시 최유미의 선택에 연민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이혼이라는 지난한 과정에서 받게 되는 심적 고통은 외도한 남편으로부터의 상처보다 더 크고 아플 수 있거든요.” 주변의 거짓과 위선을 떨쳐버리고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온 오삼숙. 주위의 격려와 지지가 있지만 그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지리멸렬하게 이어질 수 있는 위자료, 양육권 소송과 두 아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생계의 책임. 그리고 원하지 않아도 따라다닐 이혼녀에 대한 부당한 사회적 시선들. 반면 남편의 부정과 위선을 눈감고 전도양양한 현실의 길로 다시 돌아간 최유미에게는 어쩌면 평생 치유되기 힘든 분노와 환멸이 남아 있다. 정답은 없다. 다만 시청자들은 각각의 인물이 선택한 길을 따라가며 가까이에 있는, 아니 바로 나 자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 길을 성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특집] 이렇게 할말 다할 줄이야! 아줌마가 본 <아줌마>… 아 그 “꼴값 떠는 인종”들이 살떨리게 웃겨버렸다 방송담당 기자 시절, 허구한날 똑같은 드라마만 만드는 PD들과 허구한날 똑같은 기사만 쓰는 기자들이 면전에서 또는 서로의 등에 대고 드라마가 문제다 아니 기사가 문제다 하면서, 종종 아무 소득없는 입씨름을 벌이곤 했다. 의사소통이 아닌, 직종간 완력싸움에 불과했던 그 아웅다웅의 와중에서, 나는 늘 방송도 신문도 ‘시스템이 문제야’라는 대책 안서는 결론으로 도피하곤 했었다. 그들과 뒤섞여 살아온 나 내가 무슨 방송전문가라고, 얼마 전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대학 새내기들이 찾아와 우리 드라마 속에 비친 아줌마상의 문제점에 대해서 물었을 때도, 바로 그 시스템의 문제점을 들먹이며 잘난 척했다. 특정 작가나 특정 PD의 잘잘못을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어, 방송사 전체가 남성들의 왕국인 걸, 드라마를 만드는 PD나 드라마 기획안을 결재하는 방송사 간부 중에 여자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해, 드라마 PD의 절반쯤이 여자이고 방송사 간부의 절반쯤이 여자라면 그런 문제점은 기획단계에서 해결될 거라구 봐, 아무리 방송작가의 거지반이 여자면 뭘해, 방송사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꼴보수 남성권력집단과 거래하는 대다수 여성작가는 철저하게 약자이고, 따라서 간부나 PD의 시각에 맞춰 자기검열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걸, 이랬다. 그게 부분적인 진실이라고 아직도 믿고 있긴 하지만, 드라마 <아줌마>를 보면서 작가나 PD의 철학과 개성이 시스템의 철조망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인정하게 됐다. 한때 잘못된 시스템 아래서는 아무리 잘 만든 드라마도 안 만든 드라마보다는 못한 것 아닌가, 고상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부르디외 철학을 귀동냥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런 꼴보수들 밑에서 무슨 제대로 된 드라마가 나오겠나 하는 단순무식한 논리에서였다. 그렇다고 드라마가 무슨 진보이데올로기의 홍보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고, 지나친 거짓말만 안 한다면 하는 ‘낮은 포복’의 자세로 보아도 드라마마다 울화통터지는 대목이 너무 많고 재미도 없어서 성격에 문제가 있나, 스스로 자문할 지경이었던 거다. 드라마 <아줌마>도 처음부터 전폭적으로 믿기지는 않았다. 몇년 전부터 ‘아줌마’가 열악한 여성인권 현실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하고, 스스로도 하찮은 잡글 쓸 때 ‘아줌마’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터라서, 드라마 <아줌마>도 혹시 북치자 장구치는 장삿속 아닐까 먼저 의심스럽기부터 했다. 다시 말해서, 오삼숙이 그렇게 할말 다해버릴 줄은 몰랐다는 거다. 포스트모던이 어쩌구 ‘꼴값 떠는’ 장진구 같은 인종들, ‘호박씨 까면서’ 출세에 목매단 오일권 같은 인종들, ‘가면쓰고 행복한 척하는’ 최유미 같은 아줌마들, 똑똑한 척하면서 제꾀에 넘어가는 한지원 같은 공주족들, 오로지 제 아들 제 가정만 소중한 옥자 같은 시어머니들을, 나도 일기에 검버섯 필 만큼 오래 살아오는 동안 눈에 딱지 앉게 보아왔다. 아니 그들과 뒤섞여 살아오면서 내 속에도 그들 캐릭터의 살점들이 한데 뒤섞여 둥둥 떠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이 돼버린 건지도. 그러니 어느 날 아침 그들 모두가 ‘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드라마 속의 딴지일보처럼 한줄 대사로 그들 모두를 ‘똥꼬 깊수키 우끼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오삼숙을 보면서, 어찌 살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즐기면서 동시에 지지하고프다 한편으로 오삼숙 아줌마는,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도장 꾹 눌러 찍으며 결혼을 서약했던 상대는 남자도, 그 남자의 가족도 아니라 남자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는 제도였다는 것을 호주제 폐지 서명이나 일가창립 실천 등을 통해서 아주 직설적인 화법으로 강의하고 있는데, 그게 듣기 싫지가 않다. 물론 내 귀가 그쪽으로 뚫린 귀여서 그렇겠지만, 시청률이 높다는 걸 보면 남의 귀에도 그런 모양이다. 모든 여자가 가정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는 명제가 어불성설이듯이, 모든 여자가 이유불문하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도 언어도단이라는 상식을, 이처럼 상쾌한 이야깃거리로 만들어낼 줄이야. 드라마는 ‘전폭적으로 지지’할 무엇이 아니라 ‘즐겨야 할’ 대상이라는 걸 알지만, 쾌도난담처럼 결론을 내보자면, <아줌마>는 즐기면서 동시에 지지하고 싶게 만드는 드문 작품이다. (그런데 작가 선생님, 실제로도 이혼이 그렇게 쉬운가요?) 최보은/ 아줌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