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2.tnt1.red> 날 짜 (Date): 2000년 12월 17일 일요일 오전 10시 10분 02초 제 목(Title): 쿠로즈미 마코토/ 한국의 통일에너지는 동� #한국의 통일에너지는 동아시아의 희망# 목차: 저자소개 길라잡이글: 일본의 경제적성공? 1.한국의 변모 @한국사회에 있어서 권력의 의미 @유교적 미풍은 한국에 살아있는가? @한국의 변모 @새로운 세계 2.日本社會의 構造 @일본인의 빈곤 @儉約과 奉仕의 道德 @隨順시스템의 기능방식 @日本社會의 문제점 3.朝鮮文明과 日本文明 @普遍的 차원으로서의 길 @朝日思想의 對比 @문명의 관대한 통일 --------------------------------------------------------------------- 한국의 통일에너지는 동아시아의 희망. 구로즈미 마코토 지음. 김 용옥 옮김. ---------------------------------------------------------------------- 저자소개: 쿠로즈미 마코토교수는 한국의 일반독자들에게는 아마도 김용옥교수의 저술이나 강연을 통하여 제한된 범위에서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1950년 히로시 마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동경대학 윤리학과에 입학하여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내내 윤리학과에서 수학하였다. 대학원시절에는 동대학 중국철학과에 유학중이던 도올 김용옥을 만나 깊은 사상적 교분을 맺고 서로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쿠로즈미교수는 일본사상사학의 거봉인 마루야마 마사오 이래의 신진세력을 대표하는 정예로운 학자로서 일본사상사 및 동아시아 사상에 관하여 폭넓은 관심과 영향력있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김용옥교수의 삼국유사 강론에 초빙되어 최근 일본고대문화에 관하여 강연을 한 끝에 느낀 감회를 여기에 피력하였다. 민족감정을 초월하여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보다 거시적인 문화사적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생각케하는 깊은 내용 을 많이 담고있다.-신동아에 실렸던 편집자주, ---------------------------------------------------------------------- 日本의 경제적성공? 처음만나는 한국인이 던지는 질문가운데 가장흔한것중의 하나가,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다. 이런 질문을 내가 처 음 받은것은 약 십년전의 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 내가 접하는 한국인 들로부터 이러한 질문의 빈도수가 높아졌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 지만 이런 질문은 나에게 있어선 너무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러한 질문의 현실성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무시해버릴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첫째, 한국사회자체에 이러한 질문이 절박한 의미를 지닐만큼 어떤 질적 변 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째로는, "일본인의 경제적성공"이라는 이라는 이 한마디가 虛言이 아닌 확실한 리얼리티를 지니게 되어, 이러한 질문을 속물들의 화제라고 치지도외해벌수만 없는 어떤 사상적 현실을 나에 게 강요해왔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사태의 분석,비판은 물론, 그 참다운 의미에 관하여 본격적인 검증을 해보지않으면 아니되는 보편적숙제를 우리 에게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숙제에대한 나의상념의 환기를 계기 로, 한국,일본, 그리고 그 장래에 관하여 한번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 韓國의 變貌 한국사회에 있어서 "권력"의 의미 일찌기 군사독재정권시대에 있어서 모든 한국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들 삶을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상황,즉 권력의 귀추라는 문제에 쏠려있는듯 이 보였다. 다양한 사태가 결국은 권력이라는 문제로 수렴되고야마는 것이 다. 권력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결국 권력이야 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 잡는 강박관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 니라, 실제로 한국이라는 政體를 사로잡고 있는 내외의 구조가 그러한 것이 었다. 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적 느낌을 토로하는것에 그칠지는 모 르지만, 평화스러운 서울이나 지방의 거리에서 갑자기 만나는 굳은표정의 " 군인"들의 모습만큼, 필경 이 사회를 제압하고 있는것은 권력이구나!라는 느낌을 여실히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없었다. 이것은 한국사회내부자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둘러싼 국제관계에 관해서도, "통일"을 방해 하는 것은 국가간에 짜여진 다양한 권력의지의 음모의 결과라는 생각이 한 국인을 떠날수는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본주의,일본,미국,소련,중공... 이 모든 권력의지가 우리를 침해하고 우리의 통일을 방해한다는 생각은 결 코 무리가 아니다. 조선반도에는 모든 역사적,사회적 사태나 문제의식이 " 힘"이라는 것에 쏠려있다. 마치 거대한 힘이라는 암석이 머리위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그릴때면 나는 가슴이 아퍼온다. 그 반대에 서있는 나의 삶의 공간내부에는 모든것이 애매하게 용해해버릴 뿐, 마치 권력이라 는것은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한것처럼 느껴지는 틀 속에서 나는 살아왔던 것 이다. 권력이란 단지 정치세계만의 것은 아니다. 사회관계로서 구체화되어 나타나 는 사태들이야말로 훨씬 더 뿌리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김포공황에 내려, 물론 이방인의 눈이라는 어색함을 피할수 없겠지만, 금방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들의 권위중심적 행위방식이다.(이런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을 하는 자세를 보면 무언가 애교띤 자연스러움보 다는 복종적자세로 인사하는 것이 띈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윗사람의 태도 는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무시하는 듯이 태도를 취하면서 매우 위엄서린 폼 을 잡는다.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첫인사를 나눌때는 뭔가 미묘한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아래위로 재다가 자기위치를 정한다. 연령,학력,지위,재산,또 는 족보의 찬란함, 하여튼 여러의미에서 권세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 이 권위주위적 소용돌이를 형성하면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 한 인간관계의 역학은 한국사회속에 들어와 버리게 되면 곧 길이들어 별 느 낌이 없어져버린다. 토오쿄오의 무명교수인 나는 한국에 오면 마치 사람들 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한 위치에 놓여진 것같은 착각속에 사로잡혀 나도 "뭔 가 실제로 가진자" 처럼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이런 한 자유의 쾌적함은, 아마도 애들이던 어른이던, 일종의 절대적 萬能感을 자아내는 것일게다. 정말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정말 일상적 권력이라는 것에 대해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회의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특권적 감각을 증폭시켜 만끽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반대의 정황에 놓인 사람 의 감정의 세계를 엿들여다 보자! 권세를 쥐고있지못하다는 굴욕감은 그 반 대의 자존감과는 반비례해서 내적울분으로 축적되어 갈 것이다. 그럼 그것 을 피하는 길은 무엇인가? 제일좋은 것은 자기자신이 "그것을 획득하는 길 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의 프라이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별종의 현실을 관념의 절대공간 속에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는 현실과 자기 를 소외시켜, 어떠한 권세나 파멸의 현실에도 아랑곳 없다는 일종의 허무감 각을 자신에게 침투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유교적 미풍은 한국에 살아있는가? 만약 이상과 같은 모든느낌을 상,하의 사람들이 제각기 증폭시켜나간 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유교적으로 말해서 天地가 不交하여 上下가 隔絶하는 否卦(비괘)의 형국이 아닐 것인가? (비괘를 보면 양효가 세개[건개]하늘의 자리에 있고, 음효가 세개[곤괘] 땅의 자리가 있다. 양이 하늘에 있고 음이 땅에 있으면 서로 교섭치 않기에 불길한 것이다 반대로 양이 땅에 있고, 음이 하늘에 있어서 서로를 지향하는 형국이 되면 조화롭고 길한 것이다. 이때는 만사가 형통하는 泰卦가 된다. 역자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 尊大와 服從" 의 도덕을 많은 한국인들이 당연한 것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하면,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태를 더욱더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야말로 "유교 적 미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道德이라든가 모랄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수식되어야 할 것이 아 니라, 오히려 권력,권위의 횡포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바른 표현이 아 닐까? 단지 자기에게 권세를 휘감어가는 삶의 자세는 기껏해야 에고이즘(自己 愛)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사태가 이런한 맥락에서 반성이 될 수 없는 사회분위기라고 한다면, 에고이즘은 당연 "힘의 발휘"로서 정 당화될 것이며, 또 그래야 되는 것이다, 자타가 다 같이 이러한 에고이 즘을 허용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코드(code)가 무의식 적으로 그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상의 승인이 과연 어디로부터 주어지고 있는가의 문제는 퍽 깊은 철학적 문제가 되고 만 다. 우선 그러한 승인을 떠바치고 있는 적극적 구조로서 생각나는 것 은, 권세에 의하여 얻어진 가치내용이 가족 또는 일족이라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분배되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道德의 세계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가치가 타자에게 환원되는 것을 " 愛" 혹은 "仁" 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는 좁은 의미에서의 이기주의 를 뛰어넘는 행위로서 정당화되고 장려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共有,分有에 의하여 타자로부터 따뜻한 반응을 얻게되고 ,또 나의 행위가 타자에 대한 의무수행으로서 평가되어지면 질수록, 권 위는 더욱더 정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완전히 쓸데없이 보이 는 격렬한 포트래치(potlatch:미국인디안의 풍습으로 잔치때 재산을 나 눠주는 의식. 역자주) 가 그 사람이 "키마이가 좋다"는 것을 과시하는 가 하면, 또 인간적으로 훌륭하게 보일 수 있는 것도, 거꾸로 쳐박힌 권력의 요구일뿐이며 또 그러한 권력의 정당화의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정말 도덕의 정당화일까 하는 것은 좀 중대한 문제 가 있다. 이런 말을 내가 하는 것은, 완벽하게 회의가 없이 확신을 품 고있는 한국인의 유교도덕정서나 관념의 실제적 기능방식을 관찰해 보 면, 오로지 자기의 근친이나 綠者에게만 도덕이 쏟아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데 있다. 한국인의 제사, 즉 祖先崇拜도 그러한 것이다. 족보의 위세를 강화하는 친족끼리의 강력한 단합은 아름다운 것이로 여 겨지고 있다. 그렇지만 친지라는 것은 자기의 연장일 뿐이며, 실은 타 자로 간주될 수 없다. 孟子가 말하는 仁은 자기자신의 생득적 공감을 전혀 모르는 타자에게까지 확충시켜 해나가는 것이다. 仁愛가 오로지 자기와 자기의 연장으로서의 친지에게만 적용된다면, 그 것은 네포티즘(nepotism,족벌주의)일 뿐이며, 광의에서의 에고이즘의 토톨로지(악순환)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보다 확 대시켜 본다면, 이는 역시 권세주의를 넘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친족내부에서의 共同,共有가 강화될 뿐이라면, 그것은 권세의 증폭장치 일 뿐이며, 사회전체로서는 공연히 "隔絶" 과 "不交"를 조장하게 되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분명 친지끼리의 힘의 공유는 기분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분좋 은 힘의 亨受를 과시하고 있을때, 그것을 모두가 적나라하게 바라보고 있을때, 그것에 참여할 수 없는 한국인 타자들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 일까? 무관계한 "그 사람들"에게 힘을 쉐어(share)해야 한다고 생각하 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그러?힘을 과시해서는 안될 것이며, 될 수 있는대로 견제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인상은 지금은 꽤 옅어졌다. 그러나 내가 받은 한국사회의 인상은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강렬한 것이었다. 한국의 변모 1987년 6월의 노태우선언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밀려났다. 권력을 중심으로 상,하의 격절이 확대재생산 되어가는 불행한 구도가 붕괴되고, 上의양보, 즉 힘과 가치의 보다 넓 은 분배의 현상이 사회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前대통령의 네포티 즘이 적발되면서, 노동쟁의 빈발, 그리고 대학교수와 아카데미즘에 대 한 존경의 감소, 다양한 국면에 있어서의 권위=가치집중의 붕괴, 그리 고 분배의 요구가 현저하게 生起하였다. 이와 동시에, 교육열은 한층 더 과격화되고, 富에 대한 치열한 요구, 도시생활의 혼란, 범죄의 급증 , 사회적 혼란이나 무질서가 증대하여갔다. 나는, 몇몇의 사회문제를 걱정하는 한국인으로부터, "지금은 정말 개판이다,"라든가 심지어 前정 권, 혹은 그 앞의 시절이 훨씬 더 좋았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한국사회를 몸으로 체험하거나 분석해본 적이 없기때문에 現 象의 진위나 의미에 관하여 내적평가나 실감을 말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밖에서 한국사회를 쳐다보고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정치가의 疑獄(독직으로 감금되는 사건)이나 노동쟁의, 그리고 교수권위의 실추 도 "한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복할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심리도 아니며, 강건너 불을 편안히 바라보고 있는 즐거움도 아니며,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느낀 솔직한 인상은, 한국은 권력이나 권위의 직접적인 발휘에 의 존치 않고서도 유지할 수 있는 나라구나! 그러한 권력을 부정하는 세력 을 말살하지 않고 포용해온 훌륭한 역사를 지녔구나!라는 감복의 느낌 이었다. "민주화"의 내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정치무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아 니다. 민주화라는 것은, 사회의 가치나 권력이, 보다 넓게 말하면 "정 보"가 얼마큼 구석구석에 分配,分與되어, 공개와 참가가 보장되는 시스 템이 형성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외면적으로 "한심스러운" 혼란을 조장하는 듯이 보이는 사건들은, 크게 본다면, 오히려 그러한 분배가 사회에 점점 구체적으로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성숙과 충실에 수반되는 다이내미즘 의 표현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사회적 혼란이 서울올 림픽의 질서정연한 훌륭한 모습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양자는 그 내면에 있어서 상보관계에 있다고 나는 느낀다. 만약 서울올림픽이 일사불란한 군사정권의 전제주의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기만 하다면, 그렇게 파탄이 없이 멋있게 끝날 수 있었다는 기적적 사실을 포함해서,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造花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얼어붙은 아름다움은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유니크한 에네르기의 생동하는 표현이 넘쳐흐르는 측면들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만 올림픽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방금 "에네르기"라는 말을 썼지만, 최근 한국을 방문하는 누구든 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에네르기의 발출이다. 6.29사건의 의미도 오직 이 에네르기와 관련되는 것일 것이다. 내가 한국이 분명 "민주화" 과정에 들어갔다고 말한 것은 노태우씨가 민주적인 대통령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무관하다. 그러한 찬반의 논의 와 무관하게, 한국사회의 변화를 일으킨 주체는 한국사회자체며 그곳에 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전부터 축적되어온 지적,물질적,생활적 財(정보)가 사회적으 로 넓게 깔리면서 생겨난 중간층, 사회성장과 더불어 증가한 부나 지식 의 분여를 어느정도 향수하면서 성장한 중간적 주체며, 이를 한국적 맥 락에서 "市民" 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정치가도 아니며, 정치의 전위로서의 학생도 아니며, 프로레타 리아도 아니다. 그러한 그들이 정치적 혁명으로 간주될 수 없는 "사회 혁명"을 일으킨 것이며, 지금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정치교체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정권의 정체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등의 질문으로서는 이미 현대사회의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다. 그러한 광대놀음과는 무관한 차원으로 문제가 이행된 것이다. 현대사회를 단지 권력이라는 붓으로 소묘하려할 때, 일단 첨예한 선단 의 劇은 그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實, 그 참의 상황은 잃어버리고 만다. 문제는 이미, 직접정권의 동향에 있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분산화된 체 계인 사회구조의 측면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참실재인 사회의 모습을 종래의 정치론처럼, 권력교체의 드라마로서 묘사하거나, 오로지 "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이념의 싸움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이다. 따라서 "전략" 이라고 하는 참다운 의미도, 이미, 전쟁에 있는 것도 아니며, 권력투쟁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진 정한 實在가 되어버린 사회조직의 적절한 운영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 는가? 그 경영(management)과 참가(participation)의 구체적 모습이야 말로 참다운 문제인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그것에 관련되는 중요장치 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새로운 세계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변혁과정은, 진술한 바대로, 한국 의 사람들에 의한 지적, 물질적 財(정보)의 거대한 축적과 보편화의 노 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글로우발하게 본다면, 그것은 세계의 정보화, 경제화의 확산, 다시 말해서 전자기술에 의한 새로운 언어정보 수단의 개발에 기초한 지구규모의 새로운 가치정보의 생산, 유통, 사회 화의 형성운동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군비확장, 냉전구조라는 권력장치를 평가절하시켜, 쓸데없는 소비로서 간주하고 있다. 이와같이 인류역사의 문제의 핵심이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경제 적 생산유통으로 이행하였을때, 이 글의 앞에서 말한 "경제적 성공"이 라는 물음이 현실성을 지니는 것으로 상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같이 권력장치의 중요성이 절하되고 그 아래있던 제부 분들이 움직여 부상하기 시작했을때, 생겨나는 문제들은 반드시 축복스 러운 일들만은 아니다. 상위의 권력에 의한 제약이 벗겨져 버리면, 그 시스템이 지니고 있었던 안정이 상실되고, 아나키적인 무질서상태가 생겨난다. 판도라상자를 열면, 작고 더 질나쁜 악마들이 수없이 튀쳐 나온다. 냉전구조의 붕괴는, 동구의 벽을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지역과 민족을 둘러싼 정당하면서 또 비참한 문제들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페만전쟁이 일어나 수만인의 죄없는 인간이 죽고 파괴가 자행되어야만 했던 것도 실은 미국과 소련의 위신의 저하에 의한 아나키상태와 무관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저명한 사회인류학자 바하오펜(1815-1877)은 백 년전이나 앞서, 민족주의(내셔날리즘)와 민주화에 반대하여, "그것은 우리를 야만으로 역전시킬 것이며,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그 것이 나는 걱정스럽다"라고 회술하고 있다.(자서전에서,,). 현재 중국은, 남미의 게릴라를 빼놓고는 세계 어느나라 사람도 신봉하 지 않을 맑스주의를 여전히 목소리 드높은 도덕적 간판으로 내걸고, 거 대한 권력구조를 집중시켜놓고 있는 채, 개방정책을 취하려하고 있다. 확실히 경기는 소련만큼은 나쁘지 않지만, 그 실내용이란, 구래의 도 덕이 이미 붕괴해버린 상태며, 사회는 이미 "이기적 환락의 거리" 일 뿐이라고 중국인 친구들은 말한다. 새로운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을 경우, 아마 중국인민들은 더 고통스럽게 될지도 모른다. 권력의 독점 은 결국 폐지되겠지만, 새로운 협조체제란 발견되지 않는다. 혼란속에 서 모두가 같이 쓰러지고 말 비참한 상황도 생각해봄직하다. 인간의 다양한 삶이 진정 서로 충실하게 운영되는 참다운 사회적 통합을 뿌리 내리게 하는 일은 "새로운 세계"의 가장 곤란한 과제인 것이다.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국내적으로 "한심스러운" 혼 란에 떨고 있다고 진단들하지만, 그 현황은 분명 중국이나 러시아, 동 구와는 전혀 틀리다. 나의 눈에는 있어야만 할 변화가 어김없이 힘차 게 일어나가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본고가 게재될 즈음, 남북은 유엔에 가입할 것이다. 아무리 비판적눈 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서울의 거리한구석에서 지나간 역사를 회고해 보면서,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자신에 넘친 표정을 만나게 될때, 반드시 강렬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다. 그 알찬 에네르기의 구석에 있는 것이야말로, 지금 한국에 드러나 고있는 차이트가이스트(時代精神)이다. 그러한 시대정신이야말로 조선 의 사람들을, 주변의 중국, 러시아, 일본의 사람들과 함께 묶어나갈 수 있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현재와 장래를 말하기 전에, 일본의 문제를 말 해보자. 일본문제를 좀 생각해보는 것은 한국문제를 생각할 때 좋은 대비가 될 것이며, 또한 일본과 한국의 장래가 따로따로 노는 것이 결 코 아니기 때문이다. ------------------------------------------------------------------ ?日本社會의 構造 ?일본인의 빈곤 현재의 일본이 기술과 자본의 형성, 경제와 사회의 운영에 있어서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 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일본인의 생활이 의외로 "빈곤하다"는 사실에 눈 을 뜨게된다. 화려한 길거리를 걸으며 쇼윈도우를 보게되면 벌로 그렇 지도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번 그들이 사는 집을 방문해보면, 그 스페이스의 협애함과 구질구질한 세간집기랑, 물품들의 더럽고 째째 한 형편에 놀래자빠질 것이다. 거대한 기업의 간부집이나 고급관리의 집을 가봐도 대강 그러할 뿐이다. 국립대학교수의 월급은 말도안되는 수준이며, 자동차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교수가 아마도 대부분일 것이 다. 사실의 중소기업의 사장층이나 투기업종의 사업자들이야말로 일본 에서는 알짜배기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대강 "벼락부 자"라는 딱지때문에 경멸시되고 있다. 존경받는 안정된 사회조직속에 서 사는 중,상층의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개인생활이란, 좀 생각키어 려울 정도로 質素하며 어떤때는 좀 애처로운 상태에서 개선없이 지낸다. 이러한 생활의 빈곤때문에 일본인은 개인생활을 엔죠이하는 사람의 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외국인들로부터 "사람을 대접할 줄 모르는 놈 " 들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때로는 일본의 희비극으로 조롱되기도 한다 . 본고의 앞머리에서 나는 "일본인의 경제적 성공"이라는 말에 매우 당혹감을 느꼈다고 말했으나, 그것은 경제적 성공이라는 실감이 개인적 삶속에서는 거의 발견될 수가 없기 때문에, 사회전체의 모습이 개인의 자기인식과 연결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 몇년 사이로, "돈이 있 는 곳에는 정말 돈이 있구나"라는 사회적 사실이 확실히 인식되는 사건 들이 터지면서, 그러한 인식과 비례하여 빈약한 개인의 입장에서 점차 불만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부자나라다"라고 하는 일 반의식과 개인의 실감사이에는 여전히 거대한 ?이 있다. 그렇다면 "있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그것 은 "기업=회사"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은 부를 자기자신이 소유 하거나 소비하거나 하지않고, 소속하는 "전체"에 축적하는 것이다. 일 본인은 일반적으로 저축성향이 현저하지만, 이 경우, 축적되는 전체로 서의 대상은 "家"(이에: 일본적 의미의 "이에"는 우리의 "집"과 다르다 . 반드시 혈연공동체가 아니다. 역주)다. 현대일본사회의 회사라는 것은 사실 알고보면 과거의 "이에"가 대형화 된 것이다. 사원가족의 복리후생을 포함한 복지시설조직으로서 이에化 된 것이며, 종신고용되는 정사원이 된다는 것은, 장기의 신용과 보증을 포함한 운명공동체로 들어간다는 섭리를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현 대에 있어선, 나의 운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집보다는 회사라 는 객체인 것이다. 회사를 먼저 충실하게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 집 과 개인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전체와 개체(부분)의 상관관계(텐션)가 의식되지 않고있는 것은 아 니다. 전체가 풍요로와짐에따라 개인의 소득이 늘 것이며, 그러한 것 을 개인은 희망한다. 물론, 전체가 풍요로와짐에도 불구하고 그 부가 개인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불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종래의 많은 일본인은 "자신의 현상화에 대해 될 수 있는데로 불만을 품지말고 일할 것"이라는 금욕의 윤리를 수세기에 걸쳐 끈질 기게 배워왔고, 또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여 왔다. ? 儉約과 奉仕의 道德 일본인의 도덕이 국민적 규모로서 가르쳐지고 정착되게 된 것은 에 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였다. 그때부터 일본인은 귀에 듣기 싫을 정도로 "호오코오"(奉公), "켄야쿠"(儉約), "츄우신"(忠信)과 같은 덕 목의 말들을 들어왔다. 정치를 담당한 것은 무력적,정치적 통합력에 의하여 권력을 쥐게 된 武士(칼재비)들이었지만, 보기 드물게 태평기였 던(전쟁이 없었고 대체로 풍요) 에도시대에는, 초기를 지나면서 전투행 위와 같은 것은 다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칼재비였던 그들은 그들의 남아돌아가는 힘을 사회조직의 긴밀한 통합성을 제고시키는 일에, 먼저 치안, 그리고 생산력의 향상에 돌리게 되었다. 흥미진진한 사실 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강조한 삶의 방식이 타자에의 배려였으며, 더 상 위의 전체자에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호호코오"의 도덕이 였다(이 奉公 의 도덕은 이념적으로 천황제와 관련이 있다. 역자주) 그들이 결코 주 체적이 아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권력은 오로지 타자와 전체에의 恭順을 통하여만 실현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원래 무사의 실력주의의 토양에서 형성되어온 에도사회에는 일종의 業績主義, 生産力主義가 신성시되었다. 다이쿠(목수), 사칸(미쟁이), 이타마에(요리사)와 같이 솜씨좋은 職人이나 능력있는 게이닌(藝人: 엔게키[演劇], 라쿠고[落語], 만자이[漫才]등을 하는 사람, 역자주)이 귀하게 여겨졌다. 상인에 대한 경멸감은 비교적 적었으며, 장사를 잘 하고 있는 오래된 점포는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런 중에, 프라 이드를 지니게된 마을의 쵸오닌(町人, 상인)들은 자기행위를 도덕적으 로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사상을 품게된다. 예를들면 상인도덕을 대 변하는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1685-1744)은 검약을 통한 상업행위나 축재가 天地人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며,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천 지를 위해 봉사하느 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에도유 자들에게서 너무도 흔하게 발견되는 것이다. 萬物의 있고없음을 유통 시켜 검약한다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인간과 천지의 재를 낭비하는 것 이 아니라 증식시키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성실하게 일에 임하는 것은 하늘아래 자기에게 주어진 증식의 "分"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서고 남도 선다", 이것은 바이간의 유명한 말이다. 이러한 윤리는 자기개인행위 자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분을 전제로한 더 큰 전체들간의 分業과 協調를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그러 한 세계의 구조속에서 자기삶의 보람을 찾게되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다. 이러한 윤리를 매개로 하여 권력으로부처 분리된 에도의 상인들은 결국 경제적 실력을 증대시키고 드디어는 무사계급을 압도하는데로 나 아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부시(武士)든지 쵸오닌(町人)이든지를 막론하고, 에도시 대에 정착한 일본적 도덕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전체나 타자에 대한 分 肢로서 인식하고, 전체나 타자에 대한 "호오시" (奉仕: "봉사"란 말은 원래 조선말이나 중국말에 없었던 일본특유의 말인데 일제시대때 우리 나라로 건너온 것이다. 역자주)를 설교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商家 는 언뜻 보기에 매우 소극적인 듯이 보이는 행위윤리에 의하여 결과적 으로 사회에서 매우 큰 존재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칠수 없는 것은 메이지이후의 "코쿠민콧카"(國民國家, national stat e: 일본역사에서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는 용어임. 역자주)의 형성과 더 불어, 이러한 "分"의 "호오시"(奉仕)체계가 통합되어, 일본사회전체가 일종의 타자중심적,전체중심적 "總隨順시스템"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는 레벨의 개인(부분)에 있어서도 자기의 실현을 오로지 타자,전체를 통하여 이룩할려고 하는 것이다. "동정할 줄 알아라" , "남에게 친절하게 해라", "남에게 폐끼치지 말아라" "윗사람에게 공손해라" 라는 에도의 일반도덕은, 지금까지 우 리 중년이상의 일본인이라면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말들인 것이다. --------------------------------------------------------------------- ?隨順시스템의 기능방식 이러한 수순체계를 사회인류학자인 나카에 찌에(中根千技, 동경대 의 여자교수, 역자주)는 "타테사회"(종적사회)라고 이름지었다. 이것 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상하관계가 엄격하다는 의미로 오해를 불 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회사의 어느 부서에 전화 를 걸었다. "부장인 야마시타씨가 계십니까?" 이때 예의를 갖춘 제대로 된 회사라 면 대답은 이렇게 나온다. "야마시타는 지금 없습니다. 이쪽에서 나중 에 전화를 드리게 하겠습니다." 윗사람의 이름에서 반드시 촌칭을 빼버리며, 그 부장이 상대방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인냥 꼭 이야기를 한다. 평사원이나 茶를 따르는 아가씨도 지고한 회장의 일을 남에게 말할때는 그렇게 말한다(아마 외 국인에게는 그 뉴앙스가 금방 전달안될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기묘한 느 낌이 날 것이다.) 이것은 社外라는 타자,전체에 대하여, 그 회사가 한 개체로서 그 밖의 세계의 分肢化되어, 그것에 "호오시"한다는 자세를 취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사내의 상하관계는, 밖에 대해서는 절대 성을 지니지 못하고 상대화되며, 결코 회사의 테리토리(영역)를 벗어나 는 일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단지, 관청에 가면 좀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관리놈들은 항상 거드럭거린다"라고 반발하게 되는 원인이 될 적도 있다. 또한, 그러한 써어비즈를 위하여 한동아리가 되지 못한 회 사는, 대략 내부의 사기가 낮고 분열되어 있어, 권위주의와 사보타쥬가 만연하여 일에대한 책임감이 떨어지고 지리하게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하면 앞서 말한 그런 집단은 그러한 봉사정신때문에 호감을 얻 게되고 사회적으로 열심히 봉사하는 훌륭한 회사라고 존경을 얻게되어 품위높은 社格을 보장받게 되어, 실제적으로도 일이라는 객관적 사태를 위해 일체가 되어 모든 사람의 기가 형통하게되어 레벨이 높아지게 되 는 것이다. 개인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역학이 기능한다. 일본인의 인간관 계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곧 자신의 소득을 챙기는 인간은 "호오시" 에 열심히 아니라고 해서 존경되지 않으며, 오히려, 조그만 자기의 영 역에서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순수한 실력만을 발휘하는 인간형을 존경 하는 성향이 있다. 또한 상위나 레벨이 높은 사람의 경우, 자기자신의 개인의 일보다는 항상 넓은 전체를 생각하고, "일"을 위하여 자신을 헌 신한다. 그러기때문에 그는 댓가나 보수는 차라리 받지않는다는 일종의 "노블레스 오브리지" (noblesse oblige, 고귀한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 상의 의무, 역자주)의 심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심 리를 가진 인물이 일에 열심일 뿐만 아니라 능력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 다. (일본인의 노블레스 오브리지는 상위의 사람이라고 키마이좋게 돈 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상위의 사람일수록 검약하고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보다 큰 전체를 위하여 일하며 솔선해서 봉사하며, 청빈이 나 곤욕을 과감히 감내하고 살아가는 상위자일수록 하위자로부터 존경 을 받으며, 그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따라서 전체의 사기와 통합성이 높아진다. 그러한 집단이야말로 내부가 잘 통합된다. 이와같이, 개인(부분)은 모두 노동과 축적을 향해서 삶의 방향이 결정지워지고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자신의 움직임을 자기자신을 위 한 것이라고 생각치 않고, 먼저 전체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일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의 결과도 자기자신에게 직접 수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전체로부터 받는 分與로서 소득을 향 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隨順(따라서 순종함)의 태도가 어느 구석에든 지 철저히 스며들어있다는 의미에서 일본은 "타테사회"인 것이다. 나 카네 찌에도, 자신의 도식이 종적인 전제주의나 권력주의로서 잘못 오 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변해하고 있다. 이러한 현 대일본의 총수순사회는(실제적으로 이런 사회의 모습을 이방인들은 상 상하기조차 어렵다) 그 내부에서는 행위나 타자나 일자체에의 봉사로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밖으로부터의 명령이라는 것이 확실히 인식될 수가 없기때문에, 권력,권위가 정말 어디에 있는지, 마치 정말 없는 것처럼, 모든사회는 움직인다. 좀 모순된 말투이지만, 일본사회 의 사람들은 "자주적으로 타인과 일에 대하여 합동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해서, 이러한 총순종의 행위가 단지 무전제 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본인이 옛부터 입에 잘 담는 속담 에 "정은 남주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을 위한 친 절이 결국은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다라는 의미의 속담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의 타자,전체중심주의는, 완전히 일방적인 헌신으로 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자기자신을 위해서 나쁘지 않다, 언젠가 무엇인가 돌아온다. 라는 막연한 감각을 배후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그 배후에는 자신의 주변세계에 대한 막연한 신뢰감, 일체성의 감각이 있다. 무의식적인 신뢰감,기대감, 안심감이 항상 있어, 없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 한 행위는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위가 역으로 또한 사 회적 신뢰감,일체감을 증식시킨다. 이러한 상승작용에 의하여 사회가 통합의 도를 높여간 것이 바로 일본사회의 시스템이다. 일본인이 행한 전체에의 축재는 그러한 신뢰감,일체감의 담보며, 축적된 이데올로기 의 자본인 것이다. 그러한 자본을 모두가 서로 증식시키는 과정을 통 해, 일본사회는 분열과 혼돈을 회피하고, 사회전체의 통합성을 높이고, 일의 훈련, 연대, 효율화, 의지나 정보의 합의, 부의 분배등의 도수를 높여갈 수 있었던 것이다. ---------------------------------------------------------------------- ?日本社會의 문제점 이러한 신뢰성 즉 행위의 상호적 기대치를 암암리에 높여 두텁게 일반화시키는 사회는, 전술한 바와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 일견해보면 확실히 드러나는 권력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볼프렌은 [日本권력 구조의 수수께끼](Karel van Waolferen, The Enigma of Japanese Power : people and politics in a stateless nation, Papermac, 1990)라는 최근의 저서에서 이러한 사회를 "시스템"이라고 부르고, 그러한 아메바 적 구조, 그 자체가 내부 및 외부에 대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매우 강 력한 권력구조로서 작동하고 있다고 논지를 세우고 있다. 그 立論은 퍽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사정이 일본인 자 신에게는 자각되지않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와 일에 恭順하는 윤리에 몸을 던져, 그 "시스템"에 있어서의 자기의 "分"(몫)속에 완전히 빠져 들어가 있는 개개의 일본인은, 전체구조와의 사이에 언제나 거대한 존 재론적,인식론적 갭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소여된 현재, 즉 주어진 자기의 일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없이 무심 無私하게 몰두하 는 일본인은 자기가 섬기는 전체성 그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는 오로지 자기가 소속해 있는 집단보다 더 큰 외부의 전체에 대하여 종속되고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균질적으로 분포되어있는 클론(유전공학에서 말하는 개념, 하나의 개체에서 여러 동일개체를 無性적으로 만들어 낸다, 역자주)과도 같은 일본인 일반이 라는 전체상까지는 미친다. 그러나 상상력은 바로 여기서 스톱한다. 그에게는 일본이라고하는 전체 그 자체의 상을 보는 것은 너무도 어렵 다. 그렇다면, 근대일본이라고하는 "시스템"은 내부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여 지극히 긴밀한 사회통합을 실현했지만, 그 일본인의 고밀도시 스템 그자체는 실은, 서구근대라고 하는 先立한 세계가 부여해주는 설 정에 완전히 의존하여, 자기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해왔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고도로 주체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완전히 타율적 존재 인 것이다. 戰前,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의 대오에 낄려고 했으며, 그 후 전후에는 아메리카의 우산속에 안주하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 한 실태는 전혀 의식에 부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 수십년래로 , 미국이 "아버님"으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없게되자, 그러한 외적 콤 플렉스가 없어진 곳에서 일본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볼려고 하니깐, 그러 한 문제가 점점 확실하게 되었다. 일본인은 개인적으로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전체라고하는 힘 에 의존하는 分肢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자기입장을 취하지만, 그러 한 때묻지 않은 외관은 때로 매우 중대한 문제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들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도, 그들은 시스템의 노예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억제하고 사양하는 봉사의 태도를 취하여 일체성을 고양시키려고 하고 있는 사회? 성장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을 수 있지만, 인간학의 여러측면에서 그것은 기대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튀쳐 나는 못은 두드려박아라"(일본속담)라는 속담이 있듯이 개개의 독립적 성장을 모두가 서로 견제하고, 일체화를 위하여 발을 묶어버려 인간의 성장이 퇴화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은 없는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汎化되어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쌩션(금기) 으로 삶에 침투하여 있는 세계에 그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노벨화학 상을 받은 토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는 "일본사회에 있으면 주변에 오 목조목 신경쓰고있는 사이에 성장이 멈추고, 발상이 위축되고 만다. 일본이라는 공간은 공동연구나 팀떻에는 적합한 곳이지만 개인적 독창 성은 거기서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설파한다. 지금 일본에서도 흔히 논의는 되고 있지만 일본과 같은 사이비균질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얼마 나 자립하여 자기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정말 중대한 문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대한 문제는 윤리적인데 있다. 전체 혹은 타자의 분 지로서만 존립하는 타율적 인간은 윤리적으로 부족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 얘기지만, 상위의 전체로부터 살인을 명령받았다고 하 자! "완전히 사튼 마음없이 헌신적으로 행위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 람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명령을 비판하거나 반성할 생각을 할 수가 없 다. 그의 행위는 그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아니라 요청된 것에 대한 순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행위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는 그 의 관심이 될 수가 없음으로, 그는 자기자신의 행위가 무엇인가하는 행 위像은 물론 자기가 그것을 한다고 하는 책임관념도, 상관과의 관계에 서만 규정할 뿐이다. 그는 보다 보편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도덕적으 로 정당치못한 것을 순수하게 때묻지않은 청정한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 해내는 것이다. 그는 책임이나 자각을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전체에 위 임해버렸기 때문에, 그 자신은 완전히 무책임하며, 자기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자각적일 수 있는 것이다. 집단에만 소속되어 있는 일본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 상상력을 결핍하고 있는 것이다. ---------------------------------------------------------------------- ? 朝鮮文明과 日本文明 ?普遍的 차원으로의 길 이제 한국문제로 눈길을 돌려보자. 앞서 말한대로, 일찌기 한국사회는 권위주의적 관계로 조립된 세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양상은 지금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는 그 모 습이 보이질 않는다. 한국사회의 권력의 싸움은 지금 사회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에네르기를 과시 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그러한 격렬한 대립과 투쟁의 장기화는 한국사회 를 괴롭히고 있다. 그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내가 해결방안을 다 제시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절실하게 와닿는 하나의 처방 은 네포티즘 즉 족벌도덕의 편파성을 극복하는 문제다! 특정의 綠者를 역성드는 것은, 정보나 부를 축적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 자체가 나쁜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것은 세계에 대한 반감이나 자포 자기가 아닌 신뢰의 형태며, 오히려 도덕의 출발점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어떤 세계든지 학벌, 문벌, 지벌의 연고가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상호부 조, 호조써클로서 기능한다. 문제는 그것이 불합리한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 다는데 있다. 연을 뛰어넘은 사회적 보편공간에 대하여 단지 연을 가진자 사이의 관계가 배타적으로만 작용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 되고만다. 그리하여 권위주의나 특권주의의 부화기, 양성기가 되어 사회적대립을 격화시킨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다 진실한 문제는, 특정한 결합이 절대화하 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자가 의식되고 있는가, 일반 성, 공공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민주화란 정보 나 이익을 넓게 일반에게 공개하여 분배나 참가를 보증하는 시스템을 형성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회조직의 통일, 통합도, 그렇게 문화적 또 는 물질적으로 긴밀하게 일반화된 시스템이 성립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족벌주의적 도덕이나 지방색, 권위주의를 급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민주도 통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인은 자기의 좁은 세계의 연자 나 이익그룹을 절대화하지를 말고, 보다 넓은 공공성의 관념을 배양해야된 다는 것을 더욱 더 절실한 문제로서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 한다. 어느 세계에서든지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관리나 교사와 같은 사람 , 정말 공복(civil servant)으로서 청렴해야할 사람이 뇌물을 당연한 것처 럼 요구하고 그러한 불결한 풍조가 횡행한다는 한국의 예를 나는 몇번이고 들었다. 나의 정상적 감각에서 생각컨대 정말 이해키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은 훌륭한 선비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서생인 나에게는 백자로 생활하고 있는 조선조 양반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유학의 연구가 전공 인 나에게 이것은 결코 감상적인 낭만은 아니다. 그들의 엄격한 도덕규범 과 실천을 나는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에 가서 만나는 양반의 후손들(꼭 족보상의 의미를 떠나서), 나는 그들로부터 한국의 미래가 태어 나리라고 믿고있다. 일본인의 경우, 보편성, 공공성의 의식은 일종의 소극적인 "호오시"(奉 仕)의 도덕을 매개로하여 온다. 허나 한국인의 경우는 다르다. 자기자신 의 실존적 판단에 기초한 "度量"을 확대하는 고귀한 도덕을 매개로하여 와 야되는 것이다. 도달한 곳은 같을지 모르지만 그 길(道)이 다르다. 그러 한 고귀하고 관대한 길을 한국인은 내걸고 가야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 ?朝日思想의 對比 한국인이 일본인과 달라 고귀하고 관대한 길을 걸어야 한다고 한것은, 한국과 일본의 배후에 전통으로서 흐르고 있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근세기에 사상적 식량으로서 신유학(朱子學)을 수용했다는 공통된 역사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양자는 퍽 다르다. 일본의 경우, 조선과는 달리, 과거제도 (Examination System)와 유교적 관료제(Confucian Bureaucracy)를 지니지 않았으며 또 유교적제사(Confuc ian Ritualism)도 거의 정착되질 못했다 (일본인에게 한국식 조상제사는 없다. 그리고 과거제도가 일본에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사회전통의 차이를 형성하는가를 상상해볼 것이다. 역자주). 다시말해서 일본의 유교 란 그 사상의 사회적,정신적 핵심을 결여한 겉틀만을 수용한 것이다. 일 본유교라는 것은 朱子學의 원리주의(主理論적 경향)를 혐오하고, 아주 비 근한 실용주의로 달려갔으며, 그 지식은 주로 귀납주의적 경험지,기술지로 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주자학과 다른, 연역적 이론체계 인 서양의 학문을 접했을 때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이에 비하면 조선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조선유교는, 사회제도적으로, 또 종교제사 적으로, 유교정신을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구현한 케이스에 속한다. 조선 유교는 지극히 원리주의적이며, 그것은 지적으로는 연역주의로, 실천적으 로는 강렬한 도의를 부르짖는 이상주의(moral rigorism)로 달려가는 성향 이 있다. 이러한 본질적 성격때문에, 서양의 사상체계와의 사이에는, 오 히려 강한 반발심리가 작용하여, 일본처럼 서양문화가 수월하게 침투되는 것이 불가능 했다. 일본적 사상형은, 이른바 비근한 현실에 섬세한 관심을 쏟는 생활실용 적, 기술적 타입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상을 수용하는 방식에 갈등구 조가 없으며, 유연하고 신속하지만, 타면으로는 원리적인 것에 대한 심각 한 질문을 결여하게 된다. 윤리적으로는 그것은 비근한 생활윤리, 실용도 덕은 말하면서도, 보다 거대한 도의성은 결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침략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에 도의적으로 무감각한 일본인의 태도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럼 세계 대국이 되어버린 현재의 일본으로부터 누가 정말, 거대한 정의나 사랑의 예언을 외칠 것인가? 그들은 설정된 마케팅이라는 목적을 위한 계산은 매 우 정밀하고 신속하게 해내지만, 어떠한 원리와 목적을 위하여 일본이 살 아야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조선적 사상형은, 고매하고 원대한 사태에 대하여 다이나믹한 관심을 쏟는 원리적 타입이다. 그것은 "理"에의 추구가 깊은만큼 오히려 갈등도 많다. 때로는 관념이나 이념에 사로잡혀 비근한 현실을 은폐해버리고, 관 념과 현실의 분열에 찢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갈등은, 보 다 큰 종합의 가능성을 지니는 것이다. 조선인은, 그 도의성이나 이상주 의를 정말 거대한 보편성에의 지향으로 결합시킬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될 때는, 조선인은 그들의 고뇌를 지양한 지고한 도를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일본과 조선의 사상은, 동일한 루트를 경유한 것같이 보이 지만 兩極이나 되는 것만큼 판이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판이성 자체가 이 두 사상의 상보성을 역설해주는 것이다. 이 양자가 서로 음과 양처럼 補 合할 때, 정말 새로운 차원의 문명이 탄생되는 것이다. 불과 몇십년전까 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은 서로를 전혀 모르고, 관념이나 서적으로만 존재 하는 격절의 비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선과 일본은 泰卦( 그림설명 : 여섯개의 효가 포개져 있는데, 위로 세개가 음효이고, 밑으로 세개가 양 효인 모습. 김태하씀.) 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으로 신체적 교섭을 대량으로 증대시키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진정한 인간으로서 일본인친구를 둔 한국인, 한국인친구 를 가진 일본인이 이제는 적지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운명 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자신 개인의 체험을 말해보자! 나는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온 사람, 그리고 내가 한국에 가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민족적 감정을 떠나 참다운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친구"를 발견하였다. 한국인친구도 나에게대해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좀 과장된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혼의 필연적 여정을 통하여, 운 명적 발길에 의하여 조선의 유학자들, 그리고 살아있는 한국의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어느 힌두교도가 나의 혼의 과거를 들여 다 본다면 이렇게 외칠 것이다: "너 일본인과 한국인은 전생에서 형제였노 라! 자매였노라!" 이렇게 조선인이라는 심상은 나의 영혼의 내부에서 깊게 메아리치는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 그러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 닌가? 조선인과의 인간적 만남은 나에게 한 인간으로서 깊은 가치체험과 인식체험을 안겨주었다. 나는 한국문명! 그 존재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 한다. 이후로도 나는 그렇게 조선과 더불어 살아갈 것이다. --------------------------------------------------------------------- ?문명의 관대한 통일 깊숙한 분열을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 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인의 문명사 적 사명이다. 그것은 소위 남북통일이라는 사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내부의 사회에 있어서도 문제는 곧 "통일"이다. 대저 조선인의 사 상과 문화 그자체가 분열을 통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매우 거대하고 근원적 인 드라마다! 문화나 문명의 통일체는, 무엇인가 정신적,물질적 가치정보를 어느정도 일반화하는 긴밀한 조직이 성립하면서 드러난다. 조선인은 그러한 통일 문명을 여태까지는 국민국가=민족국가(nation state) 를 희구하면서 추구 하였다. 예를 들면, 한글전용의 사상, 일본문화의 배제책등은 그러한 민 족문화의 통일을 잘 실현해보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 을 지향하는 길(道)이 어떤 때는 클로우즈방식이 좋을 수 있는가하면 어떤 때는 오픈방식이 좋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후자의 시기에 들 어가 있질 않은가? 여러가지 다양한 문화요소를 배제함으로써 하나로 하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요소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 그러한 통일 의 시기가 오질 않았는가? 바로 여기에 "고귀하고 관대한 길"이 열리는 것 이 아닌가? 나는 동아시아사상을 연구하는 학인이지만 내 주변에서 최근 잘 눈에 띄는 것은 조선인의 사상문화적 가능성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東京大學의 中國哲學科에는 현재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유학생이 모여들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학문적 잠재능력이 특별히 높은자들은 한국인과 중국의 조선족유학생이다. 그들의 연구태도가 진지하다는 것만을 얘기하 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말은 물론 중국어, 한자가 달통하고, 일본 어, 영어를 확실히 알고 있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한 중요한 온갖 언어 정보가 그들 속에 이미 "통일"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도 일본인도 미국 인도 도처히 체험할 수 없는 오픈한 "통일력"이 조선인에게는 체현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정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내부에 있다고 해도, 한국인은 조선어 , 漢語, 日本語등의 諸어, 제문화정보에 잠재적으 로 열려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포함한 가능성은 앞으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거대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그러기 때문에도 더욱, 나 는 지금부터 한국이 한글전용책을 수정하여 한자정보처리력을 좀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일본인의 편리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현재,미래의 동아시아문명을 위해서, 그리고 한자 로 쓰여진 조선인자신의 그리고 동아시아의 과거의 문화유산을 되살리기 위하여 간곡히 말하는 것이다.) 많은 문화에 열려진 조선인은 지금 지구상 매우 다양한 지역에 거주하 고 있다. 조선계 중국인, 조선계 러시아인, 중앙아시아인, 재일 조선인, 구미, 중동, 아프리카에 이주한 조선인....., 그런데 나는 이런 기상천외 의 소문을 듣는다. 재일조선인동포의 자제들이 한국에 입국할 때, 한국말 을 할 줄 모른다고 세관의 관리부터 시작해서, 한국사람들이 그들을 "쪽발 이새끼"들이라고 구박하며 못살게 군다는 것이다. 어린애들끼리 그런다면 또 모르겠는데 어른이나 관리들이 그렇게 대한다니, 도대체 그렇게도 편 협한 나라가 어디있을까? 정말 너무도 바보스러운 짓들이래서 나도 울고 싶어진다. 생각해봐라! 재일조선동포의 경험은 한국의 입장에선 차라리 거져얻는 보물이 아닌가? 역사적으로 그럴 뿐만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민족적체험의 보물은 중국교포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교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조선인 들은 지구촌의 다양한 장소에서 거대한 분열을 그들 한사람 인간의 몸속에 구현해왔으며, 또 그 과정에서 살아있는 통일과 결합을 실현한 사람들이 기 때문에, 문화적 재산이며, 고귀한 보물인 것이다. 그 고귀한 운명은 진실로 조선반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와 미래와 상응하는 것이다. 조선반도에 있어서의 남과 북! 그 역사적 구조의 문제는 지금 건드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현재의 체제와 사상문화의 차이를 심각히 생각해 본다 면, 그 분열의 내용은 기실 아찔해지는 위기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조차 깊고 넓게 포용하여 걸어간다면 그것은 진실로 인류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조선인은 진실로 위대한 인간들로서 거기에 우뚝 솟을 것이다. "통일"을 성취하여 갈 때, 조선인은 반드시 이때까지의 좁은 의미에서 의 민족국가(국민국가)라고 하는 조직형태를 뛰어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동아시아의 운명과 함께, 그리고 순수한 인간으로서 고귀한 보물일 것이다. 이때 "조선"이라고 하는 향기로운 여운은 단지 민족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는 문명의 이름이 될 것이다. 그러한 통일문명이 조선인에 의하여 열려가리라는 것을 나는 믿 어 의심치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