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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28.tnt4.se> 
날 짜 (Date): 2000년 12월  6일 수요일 오후 10시 23분 09초
제 목(Title): 박노자/ 민족은 '핏줄' 만이 아니다 


[박노자의북유럽탐험] 민족은 ‘핏줄’만이 아니다

노르웨이에선 생명경외보다 하위개념… 왜 한국에선 이순신이 영웅의 표본이 되는가 


 
(사진/산과 뜰에서 산다는 귀신(troee)은 노르웨이 농민들의 재래신앙 대상이자 
노르웨이 민족의 상징이다.)


한국과 노르웨이의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민족’과 ‘민족사’, 
‘민족문화’를 상당히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노르웨이의 
역사에서도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과정은 인접 강국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어렵고 
복잡했다. 거의 600년 동안이나 덴마크와 합방돼 있던(사실상 강국이었던 덴마크의 
식민지에 불과했던) 노르웨이는, 1814년에 덴마크의 패전을 기회삼아 독립을 
선언하여 민주헌법을 채택했지만, 유럽 강대국 회의의 결정으로 곧바로 다시 
스웨덴과 합방해야만 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헌법을 존중하여 내정간섭을 
자제했지만, 노르웨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족주의자들은, 완전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하루도 쉬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1905년에 노르웨이는 전 국민 
투표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적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 


그러나 민족국가가 건설되었음에도, 약소국 노르웨이는 사방에서 위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5년 동안 독일군의 점령으로 희생을 많이 당했는가 하면, 냉전 
체제 속에서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을 계속 의식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역사와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최초의 민주헌법 기념일인 5월17일에 거의 전 
국민이 전통복식을 입고 거리에 나가 국기를 흔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의 ‘민족주의’ 개념은, 한국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첫째, 노르웨이인이 생각하는 ‘민족주의’는, 그들의 최우선 
가치인 인명존중, 생명경외에 비한다면 분명히 하위가치다. 필자가 이를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노르웨이 현대문학의 걸작인, 시구르드 횔(Sigurd Hoel, 
1890∼1960)의 <귀신의 원(圓)>(Trollringen)을 읽을 때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19세기 초의 농민 선각자 호바르드는, 오지에서 이웃들에 좀더 나은 농경방법과 
생활방식을 가르치려다가 결국, 그 이웃들의 질투와 반발로 인해 모함을 당해 
죄없이 사형언도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노르웨이가 
스웨덴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도했던 당시 군대에 징집된 호바르드가, 스웨덴 
보초와의 짧은 백병전에서 한 스웨덴 장교를 칼로 찔러 죽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를 다 칭찬했지만, 호바르드 자신은 이름도 모를 스웨덴 장교의 배에서 피와 
창자가 튀어나왔던 그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했고, 살인자가 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끝까지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결국 무고에 의한 사형을 일종의 
‘천벌’로 생각해,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줄거리를 
통해서 작가 횔이 하고자 한 말은, 비록 민족과 민주헌법을 위해서 참전한다 해도 
살인자가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횔과 같은 노르웨이 지식인에게는, 
민족과 민주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인간의 생명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위에 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민족과 민주의 탄압자인 스웨덴의 장교도 적이기 
전에 우선 하나의 인간이다. 만약 이와 같은 노르웨이 지성인의 사고방식을 
한국역사에 적용해보면, 우리는 김구나 윤봉길을 존경함과 동시에, 이들 
독립투사의 손에 죽어간 일본 침략자의 임종의 고통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동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종교들의 근본적인 진리와도 상통하지 않는가? 
그리고 무장독립투쟁이, 살인자가 되어야 하는 개인의 인격에 주는 파괴적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순혈을 주장하지 않는다 



 
(사진/오슬로국립대 학생동아리의 이 예술춤은 다인종적 민족인 새로운 노르웨이 
민족을 상징한다)


둘째, 노르웨이 ‘민족’ 개념의 중심은 분명히 혈통보다는 문화에 있다.혈통에 
대해서 노르웨이인들은, 오히려 과거에 많은 혼혈을 통해서 이루어진 그들 민족 
형성과정의 복잡성을 강조한다. 노르웨이의 두 번째 도시인 베르겐(Bergen)의 공식 
안내책자를 보면, 덴마크 지배시기에 주로 독일 계통 도시국가 연맹인 
‘한사’(Hansa)와 활발히 무역했던 베르겐의 인구 중에서, 독일·폴란드 출신 
이민자들이 20∼30%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하나의 자랑거리로 돼 있다. 즉 ‘우리 
도시’가 이미 그때 그만큼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순혈’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은 노르웨이인들은, 현재에도 
다인종사회를 과시한다. 현재 노르웨이 전 인구의 6∼7%가 이민자들이고, 그들 
중에서 아시아(주로 파키스탄과 베트남)나 옛 동구권(유고연방 등) 출신이 유난히 
많다. 만약 공식적으로 ‘이민자’로 분류되지도 않은 입양아(주로 
한국·중국·인도 출신)까지 합산한다면, 노르웨이인들의 10분의 1 정도는 
혈통적으로 북방의 이 땅과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년에 보통 
1만5천∼2만명의 새로운 이민자(주로 아시아·아프리카 출신)들이 들어오고, 
이민자들의 출생률이 토착민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50∼100년 
사이에 이 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을, 다채로운 비(非)스칸디나비아계 인종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예상된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극우 분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노르웨이인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별다른 걱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어떻게 이토록 태연할까.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이 노르웨이 민족의 주요 문화적 가치인 
평등과 비폭력, 타자에 대한 존중 등을 매우 빨리 익혀, 문화공동체의 의미인 
‘민족’에 쉽게 구성원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와 같은 ‘열린 민족’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평등·인권과 같은 노르웨이의 ‘민족적’인 가치들이 인류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셋째, 노르웨이에서는 ‘민족성’, ‘민중성’ 그리고 ‘애향심’을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개념으로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덴마크 귀족·관료의 지배를 받는 
19세기 이전의 노르웨이에서는, 토착적인 귀족집단이 형성되지 못했고 인구의 절대 
다수를 농민과 장인·상인들이 차지했다. 반(反)덴마크, 반(反)스웨덴 민족운동을 
제창한 농민·상인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노르웨이적인 것’으로, 농경을 
위시한 육체노동, 농민공동체의 평등과 상호 존중, 그리고 국토의 무수한 
산골짜기와 폭포, 협만(峽灣)의 야성적인 아름다움을 손꼽았다. 지금도 대다수 
도시민들이 시골에서 부모나 친척을 두고 있으며, 농민 출신임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선조의 마을에 가서 노동이나 등산을 즐기거나 그 마을의 독특한 
복식 양식이나 조각, 조리법 등을 계속 유지·발전시키는 것은 많은 
노르웨이인들의 소중한 취미다. 


<춘향가>가 한민족의 상징이 된다면… 



 
(사진/“꼭 군사적인 폭력을 상징하는 이들이 ‘민족의 상징’으로 설정돼야 
하는가.” 지난 7월17일 제헌절날 서울 세종로 한복판의 이순신 장군 동상)


위와 같은 비폭력, 평등, ‘가치공동체’ 중심의 ‘평민형’ 민족주의에서 무엇을 
인지할 수 있을까? 지금 평범한 서울 중·고생에게 “우리 민족의 영웅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분명히 이순신과 을지문덕, 세종대왕의 이름들이 나열될 
것이다. 하기야, 서울 한복판에서 을지로와 세종로, 충무로를 오가며, 이순신상과 
세종문화회관을 매일같이 볼 수 있는 학생이라면, 그 이름들이 뇌리에 새겨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물론 필자도,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들 국왕·무장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차원이 다른 문제는, 비록 백성을 
위해주는 권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폭력이었지만, 일단 권력과 군사적인 폭력을 
상징하는 이들을 왜 하필이면 ‘민족의 상징’으로 설정해야 하는가? 

필자 개인의 생각 같으면, 온 인류가 같이 좋아할 수 있는 자비와 동심의 상징, 
예쁘게 웃어주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만든 백제의 이름없는 장인들이나, 
<춘향가> <심청가>와 같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을 대대로 불렀던 조선조 
무명의 판소리꾼들이, 차라리 ‘가치공동체’로서의 한민족을 상징했으면 어떨까? 
광개토왕이나 김유신의 ‘영웅적’인 대형 살육·약탈을 애국애족의 상징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세뇌시키는 대신에, 그때 평민들이 서로 어울리고 명절 때 
탑돌이하며 서방 정토 왕생을 빌었던 그 아름다운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면, 
최소한 아이들이 배금·폭력 위주의 미국 대중 저질문화의 유혹에 넘어갈 확률이 
적지 않을까? 민족의 과거를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과거의 일 중에서 무엇에 가치를 두어 ‘민족’의 표본으로 삼는가에 따라, 민족의 
미래는 크게 좌우될 수 있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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