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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73.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9월 29일 금요일 오전 06시 14분 32초
제 목(Title): 권혁범/ 국가 혹은 기계 


논단] 국가 혹은 기계


 

사람들이 올림픽에 그토록 열광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국가대표를 통해 
이루어지는 국가간 대항 경기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적 정체성은 올림픽에 이르면 
활화산처럼 터져나온다. 메달 순위에 따라 국적별로 희비가 엇갈리고 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이나 응원단 모두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자랑스러운 조국’의 국기 
앞에서 눈물을 글썽인다. 우월감을 계속 확인하고 싶어하는 패권국이나 그들을 
스포츠에서만이라도 꺾고 싶어하는 제3세계 모두한테 스포츠는 부국강병의 
상징이다. 과거 동구의 일부 나라들이 약물주사와 병영적 훈련을 통해 메달 사냥을 
집요하게 추구했던 것은 스포츠에 각인된 ‘국가’의 이미지 때문이다(물론 선진 
자본국의 스포츠에는 그 대신 ‘아디다스’나 ‘나이키’가 찍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독히 상업화된 NBA의 프로선수들조차 올림픽의 금메달을 열망하는 
것은 바로 국가 권위에 대한 숭배 문화의 반영이기도 하다. 


국가주의의 근본적 위험성 


국가는 특히 우리 사회에선 최고의 권위이며 최종적 심판자다. 병영적 훈련, 
임전무퇴의 정신력, ‘국가대표’로서의 사명감이 내면화된 한국 선수들이 
국제경기에서 게임을 즐길 줄 모르는 ‘로보트’로 오인되는 것도 바로 국가주의적 
스포츠 문화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일부 프로야구선수들이 경기에 패한 날 
카지노에서 논 게 무슨 큰 죄일까? 애국심 부족 죄?). 그러니까 장관이 무슨 
전방시찰하듯 선수촌을 돌아보고 선수들은 황급히 머리 숙여 죄인처럼 그와 악수를 
나누지 않는가? 

문화관광부 장관은 민간단체인 대한체육회장의 ‘보스’이고 선수들은 그 휘하의 
‘전투병’이다. 교육부장관은 총장의 상관이고 교수들은 교육부 ‘직원’이다. 
방송도 문화도 스포츠도 심지어 과학도 모두 국가의 관리하에 놓여 있다. 
‘국전’에서 보여지듯 뭐든지 최고 대회는 ‘국’ 아니면 대통령배 쟁탈이고 
최고의 상은 대통령상이다. ‘국장’은 최고의 장례 형식이고 가장 영예로운 곳은 
‘국립’묘지이다. 초·중·고에서는 ‘애국조회’가 여전히 난공불락이고 
대한민국 모든 의례에서는 위선적인 ‘국기에 대한 맹세’가 되풀이된다. 지난 
세월 ‘각하’의 명령 한마디에 입 다물던 지식인들도, 아니 심지어 노동조합조차 
요즘 무슨 일만 생기면 ‘대통령님께’ 상소문을 올린다. 심정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어떤 시인이 뼈아프게 지적했듯이, 민주화유공자 묘지를 ‘국립’화하려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국가 신화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고 황순원 선생에 대한 
국가훈장의 추서는 좀 황당하게 느껴진다. 생전에 그것을 거부한 작가에게 한 등급 
올린 훈장을 국가가 수여하는 것이야말로 그분에 대한 모독이다). 

나라없이 살아본 뼈아픈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국가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총독부 명령 체제와 개발독재적 분단체제의 연속선상에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우리 가슴속에 최고의 권위와 ‘마법의 해결사’로 각인돼 왔다. 
‘약육강식’의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식민지의 ‘백성’들에게는 국가권력은 
외세로부터의 자기보호 장벽이며 혼란을 정리하는 구심점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도덕적, 정치적 정당성의 최종적 근거로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다. 
때문에 심지어 국가권력의 폭력적 피해자조차 자신의 정당성을 국가의 ‘도장’을 
통해 확인받기 위해서 그렇게 기를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법적 제도적 일관성을 위해 ‘국민’을 
하나의 획일적 기준에 정열시키고 잠재력 폭력의 위협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에게 
일정한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별만큼이나 다채로운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다. 민주화만으로 국가의 본질적인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 국가는 개인에게 
억압적이다. 나는 아나키스트나 낭만주의자도 아니지만, 걸핏하면 그것을 동원하고 
요청하는 우리 몸 안의 국가주의적 문화, 밖의 국가주의적 제도의 근본적 위험성에 
몸서리친다. 


반국가 고무 찬양죄? 


하지만 진정으로 개체의 행복과 공동체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우리 삶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한의 수준으로 제어되고, 장기적으로 나머지는 시민사회와 
개인의 자율성에 토대한 문화적 통합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특히 인간이 원래 
자연적 영적 개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우리의 몸과 깊은 마음의 영역에, 즉 
영화관과 책방에, 경기장과 개인의 밀실에 더이상 ‘국가’라는 ‘초대받지 않은 
기계’가 침입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집단과 국가의 이름으로 양심과 사상 및 
사생활을 통제하고 개인의 성취에 국가적 갑옷을 덧입히려 하는 강박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국가’로부터 해방된 개인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이 글을 쓴 나는 혹시 ‘반국가’ 고무 찬양 죄?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kwonhb@dragon.taej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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