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72.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7월 27일 목요일 오전 09시 15분 17초 제 목(Title): 권혁범/사소한 것의 정치학 [논단] '사소한 것'의 정치학 (사진/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젊은 군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결국 북한 정권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사회를 대변하는 언론들이 이 땅에서 동족끼리 살상을 한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군대에 끌려가서 무덤도 없는 바다 속의 원귀가 된 북녘 젊은이들의 어머니들이 밤새도록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울고 있으리라는 것은 관심 밖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에게는 북쪽 어디에선가 어머니가 아껴서 키운 귀한 아기의 몸과 마음은 장기판 졸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북녘 병사 어머니들의 찢어지는 아픔 ‘서해교전’ 당시 한국의 어떤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던 박노자(러시아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교수의 목소리다. 며칠 전 어떤 잡지에 인용된 그의 글을 다시 접하며 당시 그 칼럼을 읽으며 느꼈던 충격과 부끄러움이 되살아났다. 지난해 그 사건이 터졌을 때 한쪽에서는 강경대응을, 다른 한쪽에서는 국지적 충돌의 불필요한 확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교전은 ‘우리’쪽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남쪽의 그 누구도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30여명 북한군과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서해교전의 정치학’에만 관심이 있었지 시퍼런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제자뻘의 젊은 목숨에 대해서까지 마음이 미치지는 못했다. 부끄러웠다. 극우반공주의자에게는 북한 인민군은 진짜 ‘빨갱이’니 전투중에 그들이 죽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을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중요했을까? 양비론에는 반대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은 모두에게 ‘구체적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빠져 있었다는 점이다. 걸핏하면 ‘한핏줄 한겨레’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한 외국인이 이국 땅에서 목격한 생명의 사라짐에 대해 느꼈던 보편적 아픔을 공유하지 못했다. 분단의식이 인민군을 우리와 똑같이 고귀한 생명으로 보는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일 수 있다. 티호노프는 제3자이기 때문에 남북한의 분단주의적 사고를 넘어서 양쪽의 군인을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자위해야 할까?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90년대를 통과하면서 ‘거대담론’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크고 추상적인 ‘대의’나 사고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조국’ ‘민족’ ‘국가’ ‘안보’ 등은 도전이 금기시되는 성역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는 암묵적 가정이 깔려 있다. ‘통일’이나 ‘진보’에 대한 생각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추상적 목적과 이념에 대한 믿음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목적 달성을 위한 ‘장기판 졸’로 수단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저마다의 개성과 이름을 가진 ‘구체적인 개인’이 아닌 ‘한 덩어리’로 묶어버리며 그 속에 ‘개인’을 함몰시키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와 이념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강한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의 사정이 쉽게 짓밟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추구는 ‘멸사봉공’의 구호나 ‘대의명분’ 앞에서 죄책감의 원천이 되며 개개인이 겪는 고통은 항상 ‘사소한 것’ ‘부차적인 일’로 폄하된다. 우리는 추상적 목적에, 그것이 선할 것일수록, 눈이 멀어 개인의 고통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며 그러한 목적이 원래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느냐는 기본적 질문조차 포기한다. 과연 감상주의로 치부할 수 있나 이번 8월15일에 예정된 이산가족 문제만 해도 그렇다. 가족 생존이 확인된 사람들 중 오로지 100명만 선발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의 생존을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100명선에 걸려서 가족간의 상봉이 좌절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당사자의 가슴을 찢어놓는 고통이 될까? 남북한이 이미 그렇게 합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바로 그런 ‘비인간적’ 방식으로 합의한 남북한 당국자들의 ‘추상적’ 사고를 문제삼는다. 그들에게 이산가족 개개인의 슬픔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있었더라면 몇명선에서 자르는 합의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남북정상회담’이나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추상적 목표만이 최대의 관심사고 나머지는 ‘사소한 것’이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내 생각이 감상주의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이성적 전체적 기획에는 불가피한 ‘일부’의 희생과 가치의 서열화가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어떤 결정도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게 정치학의 대전제다. 하지만 그러한 기획에 구체적 개인의 고통과 행복에 대한 관심이 포함된다면 그것의 과정과 결과는 사뭇 다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의 통일문제를 둘러싼 ‘큰’ 결정이나 사고에서 가장 기본적이어야 할 것은 한반도 주민 개개인의 행복과 그 존엄성에 대한 깊은 자각이다. ‘큰’정치일수록 ‘사소한 것’의 정치학이 필요하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