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91.tnt7.tac> 날 짜 (Date): 2000년 7월 1일 토요일 오후 07시 17분 50초 제 목(Title): 진중권/ 한국의 보수여 분발하라 한국의 보수여 분발하라 후퇴와 패퇴 거듭하다 영향력도 조직도 없는 허깨비로… 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사진/진중권 /자유기고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맞으러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의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한국의 극우 반공주의의 허상은 너무나 허무하게 허물어져 내렸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은 이를 영화광인 김정일이 연출한 쇼라 부르며 이 만남의 의의를 애써 폄하하나, 설사 그것이 쇼였다고 한들, 그런 쇼가 냉전의 땅에서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극우 반공주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평양의 공항에서 헤어지던 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주적’이라는 인민군대의 사열까지 받았다. 이 즐거운 충격과 함께 우리 사회의 불행하고 잔인했던 한 시대는 뒤늦게나마 역사책 속으로 들어갔다. 건전 보수주의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어느 동물학자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의 잔인성은 짐승을 쫓는 사냥꾼의 공격본능이 아니라, 사나운 들짐승들에게 쫓겨다니는 사냥감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공포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를 잔인하게 만든다. 공포에 질린 인간에게 유일한 정의는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다. 이는 그 공포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것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공포에 질린 자의 머리 속에는 객관과 주관의 구별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종종 외부 적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들의 머리 속에 주관적 공포를 주입하려고 한다. 공포는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이성이 없는 인간은 누군가에게 판단을 내맡기고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 50년은 레드 콤플렉스라는 공포의 정치였다. 이 공포는 종종 집단 히스테리로 나타나곤 했다. 가령 70년대에 김추자의 요상한(?) 춤은 간첩에게 보내는 신호였고, 과자 봉지의 그림은 땅굴의 위치를 가르쳐주는 난수표였다. 최근의 버전은 대한민국에 고정간첩을 5만명을 심어놓았다. 재앙이 있으면 구원도 있는 법. 그리하여 이 공포의 반대편에는 안보가 있었다. 그래서 이 시절 학교 교실의 게시판에는 북괴의 만행을 담은 사진과 국군의 탱크가 행진하는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한편으로 외부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민을 끊임없이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다른 한편 그들에게 안보라는 이름의 생존보장을 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 현대사 50년을 지배해온 우상들이 제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한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보수주의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건전 보수주의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 50여년간의 한국적 보수주의 정치는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초절정 하이코미디 잡지 <한국논단>의 이도형씨의 진단이다. 그의 말대로 지난 50여년간의 한국적 보수주의 정치는 실패였다. 실제로 한국의 보수주의는 80년의 5·18사태, 87년의 6·29선언 등으로 잇따라 후퇴와 패퇴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친북·좌경세력은 체포·구금·투옥 등을 훈장처럼 달고 정계에 진출했고, 반면 6·25세대, 5·16세대 등은 나라를 건지고 나라를 세웠다고 자부하지만 이미 영향력도 조직도 없는 허깨비들에 불과하다. 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영국 묘비 ‘Sir’의 의미 (사진/자멸하고 싶지 않다면 한국의 보수는 어떤 식으로든 이념적 변모를 해야 한다.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 왜 이런 통탄할 일이 벌어졌을까? 변화를 거부하는 게으른 보수주의자들 자신의 책임이다. <딴지일보>는 한국 보수주의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한다. “콩사탕 싫어, 기득권 좋아.” 맞다. 한국의 보수는 이념이 아니라 반공이라는 식칼로 제 기득권을 지키는 일종의 처세술이었다. 반공은 부정적 표현이기에, 그 안에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이념이 긍정적으로 표시되어 있지 못하다. 제 한계를 그을 이념이 없기에 한국의 반공은 그 한계를 넘어 곧바로 극우성향으로 비약해 버렸다. 물론 사회의 이념을 긍정적 규정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다. 가령 86년에 있었던 국시(國是)논쟁.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고 헌법정신을 재확인하는 발언조차 용공으로 매도되고 말았다. 이건 광기였다. 지난 89년, 반공연맹이 자유총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만의 변화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제 이념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으니 가상한 일이었다. 물론 <한국논단> <월간조선> <헌변> 등은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자멸하고 싶지 않으면 한국의 보수는 어떤 식으로든 이념적 변모를 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독재자에 의한 헌정파괴를 우국이라 찬양하는 짓을 멈추고 헌법의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한번쯤 사상검증이 필요하다. 이들은 종종 사상의 자유라는 자유주의 원리,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용감한 발언을 하곤 한다. 정말 사상이 의심스럽다. 이제부터라도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학습 좀 해야 한다. 영국의 묘지에 가면 묘비에 죄다 “Sir”라고 써 있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 귀족 자제들이 남보다 앞장서 싸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층은 어떤가? 툭하면 안보를 선전하던 신문사 사주 가족의 병역 면제율이 일반인의 열배란다. 프랑스에는 항독 레지스탕스를 한 드골이 있어,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제거하고 민족주의의 전통을 세웠다. 하지만 우리의 보수는?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의 사상적 후손이다. 제대로 된 보수는 국가공동체나 사회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갖고 있다. 근데 우리의 보수는? 제 기득권은 죽어도 양보 못하는 분들이다. 애국주의도 없고, 민족주의도 없고, 공동체주의도 없고, 그래서 내세울 전통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 보수의 천박한 꼬라지다. 아, 우상의 황혼! ‘보수’라는 호칭은 거저 먹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보수는 이제라도 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애국주의, 민족주의, 공동체를 위한 봉사, 도덕적 청렴과 같은 가치들을 실천해 나가면서 그것을 전통으로 만들 때, 한국의 보수는 비로소 이념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얼마나 한심하면 우리가 이런 보수적 가치의 목록까지 제시해줘야 하겠는가. 한국의 보수여 분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좌익 빨갱이가 아니라 그보다 더 무서운 사상의 시장이 그대들을 도태시킬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보수주의자들의 저녁, 우상의 황혼! 하긴 그동안 보수의 낮이 너무 길었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