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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luvhurtz (  송 훈)
날 짜 (Date): 2000년 4월 13일 목요일 오후 08시 25분 15초
제 목(Title): 강준만/임지현 당신의 '조선 일보'관이 '일



임지현 당신의 '조선 일보'관이 '일상적 파시즘'이다.

                                                                강준만     
 
 
 

‘박정희 신드롬’인가?

“장준하가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보다 박정희의 라이벌로서 상징성을 선명히 갖는 
것은 그 의 생애와 인품이 박정희와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민족주의의 
기만성을 부각시 키는 데에도 장준하만한 사람이 없다. 사상계가 민족주의의 
문화를 위해 기울인 노력과 대 조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왜색저질문화 만연에 
책임이 있다.” 8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장준하 선생 
정신 계승 심포지엄`-`분 단민족의 좌표와 평화통일의 길’(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 주최)에서 서중석(성균관대· 역사학) 교수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반민족적 행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 교수는 박 전대 통령의 이같은 면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불고 있는 원인으로 ▲일 제 
군국주의자의 능란한 상징 조작 ▲역사적으로 오랜 전체주의 경험 ▲금전만능주의, 
지역 주의 등 이기주의의 만연 ▲현대사 교육의 부족 ▲개발시대의 다양한 수혜층 
형성 ▲김영삼 전정권의 무능 등을 꼽았다. 한편 임지현(한양대·역사학) 교수는 
‘해방후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과 의미’란 제목의 주 제발표에서 “민족주의 
담론의 주체를 권력으로부터 민중으로 바꿈으로써 민족주의의 민주 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냉전문화극복과 평화통일 방안’(조민·통일연 
구원·정치학) 등이 발표됐다. '문화일보' 1999년 12월 10일자 21면에 <`‘장준하 
심포지엄’: “박정희 신드롬은 비뚤 어진 현대사교육 탓”`>이란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의 전문이다. 나는 이 짧은 기사를 읽다 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서중석 교수가 우리 사회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불고 있는 원인으로 백 번 
지당하신 말 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이유, 아니 가장 중요한 
이유를 빠트린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 기념관’ 문제가 거론된 
이후 언론매체엔 박정희와 관련된, 엄청난 양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나는 그 
기사들을 꼼꼼히 챙겨 읽으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찬 반 
당사자들간의 상호 비판은 없고 모두 다 허공을 향해 박정희를 비판하거나 
예찬하더라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건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찬양의 총본부라 할 '조선 일보'에 박정희와는 무관한,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양립할 수 있는 주제로 글 을 기고하더라는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의 진짜 이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내가 서 교수처럼 그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면, 나는 
우리 사회 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불고 있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로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 들의 직무유기 또는 이기주의를 꼽겠다. 서 교수가 제시한 
이유들을 내가 다시 재구성해 본 다면 어느 기자는 이렇게 보도하지 않았을까. 
“강준만 교수는 박 전대통령의 이같은 면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불고 있는 원인으로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노골적인 상징 조작 ▲ 비판적 지식인들의 전체주의 경험에 대한 타협 ▲성가신 
갈등을 피하고 나부터 이름을 날리 고 보자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이기주의 만연 
▲대중적 글쓰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비판적 지 식인들의 ‘상아탑주의’ 근성으로 
인한 현대사 교육의 부족 ▲일상적 삶의 그물망에서 비 판적 지식인들의 수구 
기득권 세력 의존 등을 꼽았다.” 이 글의 주제는 임지현 교수다. 위에 인용한 
기사만으론 알 수 없지만, 임지현 교수 역시 서 중석 교수 못지 않게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하는 지식인일 터이 다. 내가 위 기사를 
읽으면서 쓴웃음을 지은 이유는 서 교수가 심포지엄 현장에서 만났을 임 교수가 
우리 사회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불고 있는 원인 제공자 중의 한 명이라는 점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금 이 말을 듣는 순간 일부 
독자들께서는 “강 교수의 '조선일보'에 대한 문제의식은 잘 알겠지만 이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 급은 
금물이다. 임 교수가 최근 열심히 제창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아 신다면 금방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러니 일단 강준만을 믿고 임지현 교수의 
‘조선일보관(` 觀`)’이 ‘일상적 파시즘’이며, 그게 바로 박정희 신드롬의 한 
원인이라고 하는 그의 주장 을 경청해 보도록 하자. 알겠죵?

임지현의 조선일보관

임지현 교수의 ‘조선일보관’은 무엇인가? 의외로 간단하다. 파시즘과 박정희를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조선일보'에 그 주제와 무관한,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양립할 수 있는 주제로 글을 기고해 '조선일보'의 상품성을 높여줘도 
괜찮다고 보는 생각이다. 또 그런 주제로 '조선일보' 사람들을 상대로 강연을 
함으로써 '조선일보'의 상품성을 높여주기 위한 기여를 해도 괜찮다고 보는 
생각이다. 물론 나는 이 생각에 반대한다. 이게 자꾸 혼선을 빚는 것 같아 좀 
자세히 말씀 드려야겠다. 나는 그 누구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는 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언 제 극우 인사가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언제 국민(극 우도 국민이다!)을 상대해야 하는 
공직자가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언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인이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 이 있는가? 내가 
언제 연예인이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내 가 언제 
연예인과 비슷한 기능을 추구하는 문인이 '조선일보'에 글쓴다고 시비거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시비를 거는 건 자신의 안방을 벗어나 사회를 향해 파시즘과 
박정희를 비판하는 지식 인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경우이다. 이건 
'조선일보'가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의 차원을 떠나서 그 지식인의 일관성과 
언행일치, 그리고 언론에 대한 인식 수준을 문제삼는 차원에서 얼마든지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문제 제기를 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 러니 무슨 
신문에 글을 쓰건 말건 니가 왜 상관하느냐는 식으로 나를 무슨 스토커 비슷하게 
보는 망발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똘레랑스(관용)를 가장 강조해 
온 홍세 화 씨가 자주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불관용)까지 
용인하라는 게 아 닌 것이다.`2) 다시 임지현 교수의 조선일보관으로 돌아가자. 
1999년 3월에 나온 임 교수의 저서 '민족주 의는 반역이다'(소나무)는 적어도 
지식계에선 꽤 히트를 쳤다. 나도 감동받아 그의 글을 길 게 인용한 적이 있고 
그의 주장을 나의 강연에서 길게 소개한 적도 있다. 그 책이 히트를 쳤다는 건 
'시사저널'이 그 책을 사회과학 부문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는 걸로도 잘 
알 수 있다.`3)

'조선일보'에 ‘포섭’당한 임지현

무언가 히트 쳤다 하면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게 '조선일보'의 상술이다. 잘 
아시잖는 가. 임 교수께서 드디어 '조선일보' 1999년 5월 11일자 6면의 
<시론(`時`論`)>에 출연하 셨다. 물론 '조선일보'의 집요한 공작(섭외 설득)이 
있었을 게다. 칼럼 제목은 <‘탈민 족’ 민족주의>다. 임 교수의 주장은 
'월간조선' 조갑제 씨의 평소 주장에 반하는 바가 있지만, 임 교수가 그 칼럼에서 
조갑제 씨를 비판한 것도 아닌데다 오히려 정부를 비판하고 있어서 '조선일보'의 
극우 이데올로기와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장사 한두 번 
해보나. 임 교수는 그 칼럼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열린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현 정부의 민족정책이 혈통적 신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 
고 있다는 것은 이 점에서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열린 민족주의는 정치적 
선언으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민족공동체가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가치들을 지향하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출신이나 종교, 문화적 차이에 
관계없이 그 가치들을 공유할 때, 이 땅의 민족주의는 열려 있으면서도 당당한 
‘탈(`脫`)민족’ 민족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 
정도의 주장을 수용하지 못할 '조선일보'가 아니다. '조선 일보'는 자기들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이 그람시가 어떻고 하면 ‘빨갱이’로 몰려 고 
달려들지만, 지들이 장삿속으로 팔아먹을 때엔 ‘빨갱이중의 빨갱이’라 할 체 
게바라도 영웅으로 묘사한다. '조선일보' 1999년 12월 8일자 19면에 게재된 
<`“아듀! 20세기” 세 기말에 띄우는 편지 ⑧ 체 게바라에게`…`>의 필자로 다시 
임지현 교수를 차출했다. 임 교수가 쓴 이 글엔 체 게바라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편지의 전반적 인 톤은 음울하지만 마지막 결론 
부분은 이상하게 코믹하게 들린다. ‘체 게바라 : 시장 자 본주의 = 임지현 : 
'조선일본'’의 관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디 임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시장 
자본주의도 당신을 팔아먹는 데는 결코 쿠바의 권력자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일상의 키치 문화부터 나이트클럽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상품화된 당신의 초상을 
지우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자본주의는 혁명의 날카로운 발톱을 제거한 채 
이렇게 당신을 팝의 우상으로 전유했습니다. 시장이라는 놈은 얼마나 무서운지요. 
미국 CIA는 ‘저리 가라’예요. 그 기 동성과 순발력을 보면 시장이야말로 타고난 
게릴라 같아요. 질식할 것만 같아요. 시장에 대 한 혁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시장에 대한 게릴라전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저승의 혁 명에서 새로 배운 게 
있으면, 한 수 부탁드립니다. 아디오스, 아미고. 임지현은 큰 일 낼 사람 이 글이 
게재된 다음, 혹 임 교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봐, 나 할 말은 다 했다 
구. 생각해봐. '조선일보' 지면에 시장 자본주의를 저주하고 체 게바라를 이렇게 
예찬했는 데, 어떤 놈이 '조선일보'에 글썼다고 감히 시비를 걸어?”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드디어 우리의 임 교수는 '조선일보' 편집국으로까지 진출하 신다. 
그는 99년 10월 27일 ‘편집국 실무 스터디’ 연사로 초청받아 '조선일보' 기자들 
을 상대로 ‘조선일보 문화면에 대한 비평’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셨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디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인데,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겨레'에 가서 하면 적합할 말을 '조선일보' 사람들에게 했다. 무슨 말씀인지 
들어 보자. “유럽의 지성계는 앞으로 좌냐 우냐의 싸움에서 ‘열린 세력’이냐 
‘닫힌 세력’이냐의 싸움으로 양태가 바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좌파 세력들의 
주장이 이미 사회에서 널리 실 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 학계 에서 스펙트럼은 좌냐 우냐가 아니라 
‘열린 집단’이냐 ‘닫힌 집단’이냐의 대립이 될 것 이다. 현재 한국에서 좌파와 
우파의 차이는 별로 없다고 본다. 나는 집에서 조선일보와 한겨 레를 구독하고 
있는데, 두 신문은 내용상 큰 차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정치적 명분이나 표 
방하는 좌표는 다르지만 밑에 흐르는 정서는 똑같다. 두 신문 모두 보수적이다. 
민족이라든 지 전통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신문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보 수적이다.” 임 교수가 참 큰 일 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원론적으론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문제는 그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극우 헤게모니라고 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한가롭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국가보안법 문제가 걸려 있는 마당에서 
'조선일보'와 '한겨레'에 대해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아니 그건 임 교수 의 
이념이고 정치적 성향일 수도 있으니 그걸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가만이나 있지, 웬 ‘일상적 파시즘’ 타령이란 말인가?

극우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임지현

그러고 보니 아주 좋게만 생각했던 그의 ‘일상적 파시즘’론도 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걸 기존의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걸로 기대했는 데, 임 교수가 그걸 극우 헤게모니를 깨는 걸 방해하는 
일종의 총체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 참 큰 일 아닌가 말이다. 그가 힘의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열 린’이니 ‘닫힌’ 타령만 한다면, 나의 
모든 작업은 ‘닫힌 짓’이 되고 말 터이니 가만있 을 수 없잖은가. 임 교수가 
앞서 거론했던 강연에서 최장집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한 다 음과 같은 답도 
나의 우려가 기우(`杞`憂`)만은 아니라는 걸 시사해 준다. 학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와 정권에 들어간 공인으로서의 입장을 조선일보가 나누어 다루지 
않고 뭉뚱그려 다룸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 다고 
생각한다. 최 교수가 학자로서 가질 수 있는 리버럴리즘은 인정하면서 
공인으로서의 입장을 검토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다. 정치논리로 학문의 논리를 
뒤엎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가 감정적으로 격앙됐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가 
보다 열려있고 리버럴한 입장을 가 지고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다.`4) 이 양반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조선일보'가 보다 열려 있고 리버럴한 입장을 가지고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니 '조선일보'를 구독한다면서도 '조선일보'가 
도대체 어떤 신문인지 모른단 말인가? 물론 부동산이나 증권 정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 는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임 교수는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를 
주창하는, 스스로 ‘좌파’ 임을 선언하는 비판적 지식인이 아닌가? 뭐? 내가 너무 
‘닫혀’ 있다고? 그 논리대로라면 친일파들이야말로 가장 ‘열려 있는’ 
사람들이겠다. 항일 투사들은 ‘닫혀’ 있는 사람들이고.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 은 ‘열려’ 있는 사람들이고 민주화 투사들이야말로 ‘닫혀’ 
있는 사람들이겠다. 뭐? 세 상이 달라졌는데, 그런 어거지 쓰지 말라고?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국가보안법은 그대로 살아있고 '조선일보'는 그걸 폐지하기는커녕 
조금 손만 대도 나라 망한다고 아우성인데. 그냥 아우성치기만 하나. 상대방의 
사상까지 의심하면서 달라들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임 교수가 더 큰 일 내기 
전에 따끔하게 손을 봐야겠다.

‘일상적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나는 임 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의하는 정도가 
아니다. 내가 진보 진영에 대해서도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아주 정교하게 
이론적으로 잘 표현해 준 그의 혜안에 나는 감사했다. 진보 진영 내부의 그 지독한 
파시즘적 문화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 하던 나로서는 그의 출현이 너무 반가웠다. 
든든한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에 어찌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자칭 
‘좌파’ 학생들이 동료 학생에게 깍듯이 ‘학생회장님’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풍토 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마저 수평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68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군대 내무반보다 더 강한 군기를 자랑하는 연대의식에 기초하고 
있는 남한의 젊은 좌파 지 식인들에게는 또 어떻구요.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이 끔찍한 위계질서를 깨 뜨리지 못하는 한, 누가 정치권력을 
담당하든, 또 그 권력이 지향하는 이념이 무엇이든, 근 본적인 변혁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요. 이러한 질서가 전복되지 않는다면 변혁은 그저 또 다른 억압체제를 
만들뿐이지요.”`5) 임 교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그런 말씀을 해놓으시곤 
“지나치게 소시민적인 발상이 아니냐구요? 누가 뭐래도 상관없어요. 이 치열한 
자기반성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내게 도 희망은 없지요”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나를 또 한번 감동하게 만들었다.`6) 그러나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그는 말로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그 치열한 자기반성의 싸움을 소홀히 함 으로써 내게 큰 
실망을 안겨 준다. 어찌됐건, 나는 지금도 그에 대한 반가움과 감사하는 마음은 
충분하게 갖고 있다. 문제는 최 소한의 균형 감각이다. 진보 진영 내부의 파시즘적 
문화에 대한 개탄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선 임 
교수가 내린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들어 보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이제 문제는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저개발된 
권력으로서의 군부 파시즘이 아니 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재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 재발한다 해도 새삼 그 폐해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가시적이며, 따라서 타격 지점도 명백하 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정신과 일상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 치로서의 파시즘이다. 나는 그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 부르겠다. 
일상적 파시즘은 전체 주의 체제로서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그것은 사람들 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 든 본능과 충돌들 속에 
천연덕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테러’인 것 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그러므로 잡식성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제정이 든 
무엇과도 손쉽게 짝을 이룬다. 그것은 남과 북의 동질성을 확보해 주는 연결 
고리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한반도의 속살이다.`7)

‘장기’를 위해 ‘단기’를 희생해선 안 된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내가 임 교수의 그런 주장에 대해 엄청난 반가움을 느낀 건 
내가 이상 하게도 체질적으로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임 교수가 ‘일상적 파시즘’의 사례로 든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내 이야기를 좀 해 보겠다. “윤도현 밴드에 이어 김진표라는 랩송 
가수 등장 …`… 그 랩퍼는 자기는 어른들이 싫다 며, 기성 세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김진표가 ‘외쳐봐’ 하고 절규하면, 청중들은 일제 히 ‘닥쳐 봐’라고 
응답한다. …`… 그러나 정작 씁쓸한 것은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소개 하는 그 
가수의 태도이다. 어른들에게 ‘닥쳐 봐’ 하던 기세는 온 데 간 데 없고, ‘형님 
들’을 소개하고 대하는 그의 태도는 ‘조직의 쓴맛’을 본 사람처럼 정중하기 
짝이 없다. 어느 쪽이 그의 진짜인지 판단할 길이 없다. ‘닥쳐 봐’는 상업적 
전략이고, ‘형님들’이 그의 진짜라는 혐의를 쉽게 지울 수 없다. 이 랩퍼의 몸에 
밴 규율 권력은 어디서부터 유래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아직 ‘닥쳐 봐’를 
되뇌는 딸애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밤길 내 내 마음이 무거웠다.”`8)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 내 마음도 무겁다. 나는 ‘형님’이라는 단어에 대해 참 할 말이 많 
다.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걸 거부해 왔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당한 손해 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하게 ‘형님’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엄격한 상 명하복 체제를 자랑하는 ‘패거리’가 싫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살다 보면 꼭 ‘형 님’으로 부르고 싶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고 그 
호칭을 거부하면 ‘사람을 우습게 보 는 놈’ ‘오만한 놈’ ‘인정머리 없는 놈’ 
‘자기밖에 모르는 놈’ 등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어, 그게 아닌데!” 아무리 
억울하다고 발버둥쳐도 내 깊은 뜻을 알아듣는 사람조차 만나기 어렵다. 다시 임 
교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앞서 인용한 임 교수의 글에서 임 교수가 어떤 결론을 내 
렸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리 내 생각을 말씀 드린다면, 나는 체질적으로 임 
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임 교수가 사회 개혁과 
관련하여 그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임 
교수의 말을 인용한다. 기존의 정치 경제 구조는 결코 힘에 의해서만 유지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미 결 정된 생활 방식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안정된 재생산 구조를 유지한다. 정치의 영역 을 국가에서 일상 생활로 
이동시키고자 했던 (프랑스의) 1968년의 시도가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변혁운동이 지배적인 담론 구조와 코드를 공유하는 한, 변혁은 
없다. 권력을 향유하는 집단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혹은 전통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아니면 민중의 이름으 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일상적 
파시즘을 고사시키지 않는 한, 진정한 변 혁은 불가능하다.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싸움에 그친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수직적인 ‘지배’의 아비투스`9)를 
수평적인 ‘우애’의 아비투스로 대체하는 것, 그것이 혁명이다. 말년의 엥겔스가 
혁명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점령했던 방식대로 일어나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흉중에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10) 나는 앞서 임 교수가 
사회 개혁과 관련하여 ‘일상적 파시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프로젝트의 차원을 구분하 지 
않았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임 교수는 지금 ‘매우 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선 좋다. 엥겔스를 능가하는 그의 혜안이 
발휘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내가 불만인 것은 그가 그 ‘매우 큰 이야기’를 
당장 한국의 현실에 적용시키려 든다는 점이다. 나는 그의 조선일보관도 그런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다. 그는 일상적 파시즘을 고사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보기 때문에 '조선일보'에 대해 너그럽다. 그는 “'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도 
“권력을 향유하는 집단의 변화만”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 보다는 '조선일보'나 
'한겨레'를 차별하지 말고 둘 다 공유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 고 사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잘못된 생각이다. 일상적 파시즘의 고사는 
임 교수가 죽을 때까지 완 성될 수 없는 거대하고 장기적인 프로젝트이다. 반면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는 임 교수의 딸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도 얼마든지 
완성할 수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한 변화는 매 우 크다. 물론 ‘변혁’을 외치는 임 
교수에겐 그건 너무 사소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큰 ‘변혁’이라도 
사소한 변화에 타격을 입히지 않는 걸 전제로 해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사소한 
변화마저 일어나지 않게끔 억누르는 쪽으로 행동하면서 떠드는 ‘큰 변 혁’은 
일종의 기만 행위가 아닐까? 이거야말로 임 교수가 규탄해 마지않는 ‘최대주의’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의 폐해는 아닐까?`11) 임 교수가 아예 전략적 사고를 하지 
않는 지식인이라면 내 이런 말도 않는다. 그는 어느 강 연회에서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고종석 씨에 대비시켜 나온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많은 부분 고종석에게 동의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끝내 민족주의를 버릴 
수 없었습 니다. 전략적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폐기처분 했다가는 
민족주의의 헤게모니 를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꼴이 될 뿐입니다.”`12)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전적으로 통탄해 마지않는 것은 그렇게 보수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장악을 염려하는 임 교수가 어쩌자고 보수주의자도 아닌 극우 세력의 
총본산이라 할 '조선 일보'의 헤게모니에 대해선 그토록 무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임지현은 ‘68 정신’을 지켜라

어찌됐건, 더욱 중요한 건 '조선일보'에 대해 너그러운 임 교수의 태도 자체가 
‘일상적 파시즘’의 결과라고 하는 점이다. 임 교수는 자신의 글에 <코드 
읽기>라는 제목을 붙였음 에도 불구하고 왜 그 코드는 읽어내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임 교수가 정열적으로 규탄해 마 지않는 일상적 파시즘의 이모저모는 
거의 대부분 '조선일보'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부추 겨지는 것들이다. 일상적 
파시즘의 반대말이 ‘체제적 파시즘’인지 ‘진짜 파시즘’인지는 모르겠으나, 임 
교수가 후자(`後`者`)의 파시즘이 전자(`前`者`)의 파시즘에 미치는 영향은 외면한 
채 오히려 후자의 파시즘을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하면서 전자의 파시즘을 
규탄하는 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증거임을 임 교수는 역설하고 있다. 예컨대, 임 교수는 
“존경받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생을 정리할 나이에 족보에 집착하는 등 의 
현상”을 지적했다. 그는 이와 같은 사례를 무수히 많이 들고 있다. 물론 내가 
말하는 ‘코드’는 그건 아니다. 임 교수는 일상적 파시즘은 “사람들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든 
본능과 충돌들 속에 천연덕스럽게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일상적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학교에서의 언로(`言`路`) 구조를 문제삼았다. 왜 
사회의 언로(`言`路`) 구조 는 문제삼지 않는가. 사회를 학교로 가정해 보시라. 임 
교수의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비판은 부메랑이 되어 임 교수에게 그대로 날아간다. 
임 교수가 큰 의미를 부여했던 ‘68 정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기존 
언로(`言` 路`) 구조에 대한 거부요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 교수는 
그 정신은 강조하면 서도 실천은 외면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전통’으로 
내려온 ‘지식인과 언론의 관계’ 라고 하는 문화적 타성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물론 그 관계는 지식인은 언론에 기생(`寄` 生`)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타성을 
말하는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무슨 얼어죽을 ‘코드’란 말인가? 임 교수는 
같이 공부했던 폴란드나 영국의 동료들에게 “나 요즘 일상적 파시즘을 깨기 위해 
바뻐. 한국의 대표적인 극우 신문 에도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저기서 어찌나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은지 정신 없어. 나 이제 그 힘으로 일상적 파시즘을 깨려고 
해. 안녕”이라고 안부를 전해 보시기 바란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지식인은 무슨 주장을 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그 주장을 실천에 옮기 고 있는지 
그걸 먼저 따져봐야 한다고 믿는다. 임 교수는 “역사 현상으로서의 현실 
사회주의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이념적 당위의 차 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현실의 차원에서 분석되어야 한다”고 했다.`13) 나는 임 교수께 서 이 말씀을 
다시 음미하시면서 일상적 파시즘을 깨는 것 역시 구체적인 역사 현실의 차원 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아시면 좋겠다. 이 글에서 드러난 나의 무례함은 너무 
답답해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여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다. 이 글을 
일상적 파시즘을 깨기 위해 임 교수 못지 않은 투쟁 의욕에 불타는,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목소리 한번 들은 적 없지만,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는, 한 동지의 우 
정어린 고언으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란다면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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