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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Rapier (크리넥스)
날 짜 (Date): 1999년 11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00분 01초
제 목(Title): 역사스페셜: 정순왕후 김씨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조선시대의 몰락의 시점은
정조승하 이후가 아닌가 생각하던 저에게
[역사스페셜]의 영조가례에 대한 내용은 단순한
왕실혼인 이상의 비참한 기분이 들게 하는 대목
이었습니다.

기록에 남지않은, 남을수도 없는 사건이지만,
영조시대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조에 의한
경종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정권내부의 저항
이었으며, 정조또한 정순왕후세력에 의한 독살
이라는 설이 파다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때
[66세의 신랑, 15세신부의 결혼]은 에피소드가
아닌, 불행의 씨앗이 아니었나 싶군요.

정조의 [문체반정]이나 기타 (이인화씨가
[영원한제국]에서 비유했듯이) 요순시대로
돌아가고자 꿈꾸었던 정책은 그 당위성을 떠나서
최소한 지향점을 갖춘 정책을 이끌고자 한
마지막 조선의 임금이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조승하후, 안동김씨의 세도가 시작되고
꼭두각시에 불과한 임금이 차례로 옹립되면서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것이죠.

산업혁명과 근대화가 도래하지 못한 시대의
국가의 흥망은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강한 군사력
만이 뒷받침될 수 있습니다. 이미,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강한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었기에 더더욱 유리한 발전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고요.

정조는 농업생산성 향상과 상공업 진흥을 위하여
나름대로의 비젼과 실천력을 가지고 추진했던
임금이며, 강한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수원으로
의 천도까지 계획했던 인물입니다. 또한, 임란때
선조임금이 몽진을할시, 왕을 호위할 군사가
불과 수십명뿐이었을때가 있었던 바에 비하여
만여명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유지했던
강한 권력의 소유자이기도 했고요.

정조의 [친위쿠데타] (정설은 아니지만,
화성천도후, 정조가 세자에게 선위를 하고
상왕으로 자리잡은후 노론과 정순왕후세력을
제거하여 절대군주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계획)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계획이
정말 영조의 [금등지사]에 의한 2대에 걸친
국정변혁계획이라는데에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 부연 :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죽인데에는 노론세력에 굴복하여 그들의
   뜻을 들어주었다는 주장입니다.
   사도세자는 매우 영특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오를때 노론세력을 제거해야만
   조선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인물
   이었죠. 그러나, 공공연한 자리에서 이를
   밝히고 다니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노론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했고, 영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여야하는 고육책
   을 쓰게 됩니다.
   경종을 독살하고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노론을
   배신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죠.
   그러나, 후에 세손에게 복수를 부탁하기 위하여
   당시 영상인 채제공에게 밀지를 내려서 정조가
   왕위에 오른후 선왕의 유지를 받들도록 계획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유인촌씨의 나레이션에서 [정순왕후 김씨]는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강한 자기주장을 폈다..
는 대목은 너무나 무성의한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그 수많은 중간과정들..
정조의 독살과, 소론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정조시대의 개혁정책에 대한 철폐, 세도정치의
시작, 천주교탄압(정조의 동생마져 천주교신자
라는 이유로 죽입니다.)등이 생략된 단순한
해설은 시대의 반역자인 정순왕후를 단순히
불쌍한 피해자로 묘사하는듯한 인상을 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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