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YMH (마린보이) 날 짜 (Date): 1999년 11월 11일 목요일 오전 11시 15분 10초 제 목(Title): Re: [re] Re: [re] Re: [re] 출사표 저도 Cloud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촉나라는 제일 신흥국가이면서 산이 나의 지형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당시로 말하면 상업적으로나 농업적으로도 나라 경제를 위나라나 오나라만큼 일으키기가 아주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의 북벌 전략에서도 소전속결에 그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전쟁이 오래되면 촉나라의 상황으론 아무리 제갈량이라도 그 뒷감당이 힘들기 때문이지요. 무론 이런 면에선 공명이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손색없이 드러냈다고 봅니다. 하지만 공병도 한탄했듯이 하늘이 기회를 안주었는지 여러 실질적 상황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엔 촉나라는 너무도 작은 (?) 나라였습니다. 위나라는 이미 조조가 황제를 등에 업고 그 기반이 탄탄한 나라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나라나 촉나라는 지형을 이용한 방어에 급급한 신흥국가였죠. 오나라에 주유나 제갈근 노숙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어도 제갈량같이 북벌을 시도할 엄두도 못 낸것을 본다면 제갈량의 능력과 추진력, 그리고 카리스마까지도 어느 누구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마치 여포가 조조의 8명의 명장들(허저, 악진, 우금, 등등등...)과 싸워서 대등했던 장면을 상상한다면... 제갈량은 같은 위치에선 사마의, 주유, 노숙 같은 모든 모사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제갈량을 띠워줬나요?히히) 위에서 관우와 제갈량의 관계에 대해서 잠시 얘기가 나와서 그것도 거론해 볼까 합니다. 삼고초려 이후에 제갈량은 유비에게 가장 결정적인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군사의 전 통솔권을 자기에게 넘기라는 식의 얘기죠... 그리고 군법을 더 강하게 하고 그대로 실천하며 군기강을 바로 잡기위한 개혁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 당시 관우는 이미 유비의 측근에서 2인자의 위치를 바로 잡아가고 있을땐데 웬 시골 촌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위에서 놀아나는게 관우 입장에서 별로 달갑지 안앗던게 당연하죠. 그리고 결국 나중에 그 군법의 첫 희생자가 관우가 됩니다. 적벽대전 때 관우가 조조를 놓아준 사실을 가지고 제갈공명은 관우를 사형하려고 하죠. 그때 우리의 찔찔이 유비가 콧물 눈물을 흘려가며 통 사정을 해서 관우는 사형을 모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동안의 2인자 역을 하던 관우의 기세는 꺽기게 되지요. 이 이야기는 제갈량이 진짜로 관우를 사형하려고 했건 안그랬건, 고도의 정치 기술입니다. 이건 곧 카리스마와도 연결이 되지요...... 와 삼국지 얘기 참 재미있네요... 좀 더 시간이 있으면 더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인생이 한편의 영화라면 난 여지껏 몇장의 필름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대본은 어떤가? 과연 언제쯤 편집이 가능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