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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1999년 10월  8일 금요일 오후 09시 46분 37초
제 목(Title): [캡처] 퍼온글/ 한단고기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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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태하)  
날 짜 (Date): 1999년 10월  8일 금요일 오후 02시 28분 15초
제 목(Title): 퍼온글/ 한단고기 고고학 


한단고기 고고학1. 예맥  

    단군 역사 유물 지도

     (檀君 歷史 遺物 地圖)
    

 
1장. 예맥문화(穢貊文化)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


1절. 흥륭와(興隆窪), 사해(査海) 예맥문화(穢貊文化)
     
 
 오한기(敖漢旗) 흥륭와 문화지는 대릉하(大凌河)의 가지인 망우하( 牛河)와,
서요하(西遼河)의 가지인 교래하(敎來河)가 만나는 곳에 있으니, 두 강을 한꺼번에
장악한 고대 부족국가의 유적이며, 부신시(阜新市) 사해 문화지는 그 동남방에
있는데 역시 대릉하의 가지인 서하(西河, 淸河) 변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0년전부터 6000년전까지 모계 씨족사회의 신석기인들은 당시
육지였던 황해 대륙 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씨족 사회로서 그들의 근원인 모계 수장인 할머니를 수장으로
삼았다. 여자들은 농사도 짓고 곡식을 저장하고 또 익혀 먹기 위해 질그릇을
만들었는데 주로 지자문(之字文) 문양의 빗살무늬(櫛文,  文, 蛇文)를 새겨넣었다. 
 지자문 토기는 기원전 6000년전에 시작되었다. 지자문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bc 5000 -3000년)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
심양의 신락문화(bc 5500년), 길림시 서단산문화와 장춘시 좌가산문화, 그리고
서요하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 bc 5500년)까지 고루 발견되는데
당시까지 육지였던 황해를 둘러싸고 예맥문화가 퍼져나간 흔적이다.
 그중 중심이 되는 기원전 5000년의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와
흥릉와문화(興隆窪文化)는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보다 500년 정도 이르고, 또한
적봉(赤峰)의 홍산 문화(紅山文化)보다도 1000년 정도 이르므로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고도 한다.

 그들은 반지하식 수혈 움막에 살았고 죽어서는 수혈식 토갱에 묻혔다. 
 이들은 여성을 수장으로 신봉하였는데 흥륭와문화에서 나온 돌조각 여인상은 60cm
높이도 있다.
 또한 이들의 주요한 토템은 뱀과 두꺼비였다. 용의 비늘 모양 몸체가 그릇을
감싸듯이 부조된 두 건의 질그릇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용 토템이다. 또한 두꺼비
조각 그릇도 같이 나왔다. 두꺼비, 뱀은 곡식을 저장하는 그릇을 쥐로부터 보호하는
것인데 간단하게 뱀의 비늘 모양을 그릇에 새긴 것이 지자문 빗살무늬 토기인
것이다.
 남자들은 사냥을 업으로 하고 때로는 가축을 길들이기 시작했고 주로 개와 약간의
돼지를 길렀다. 사냥은 돌화살로 하였다. 
  
 부신시(阜新市)는 사해문화가 중국의 문명발단지라 하여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
화하제일룡(華夏第一龍)이라 명명하였는데 주변 황해 연안의 신석기 문화지의
중심도 되고 또한 최고의 권력 중심지도 된다. 
 용은 농사짓는데 필요한 비를 내려주고, 또한 뱀이나 두꺼비는 풍년을의미하며
동시에 곳간의 수호신으로 숭상되었다.

 더불어서 사해문화지에서 출토된 찬란한 옥부(玉斧)와 옥비(玉匕), 옥결 등,
옥기제품 20여점도 중국 최초의 옥기(玉器)다.  
 옥도끼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새로운 옥병(玉兵)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의 어떤 무기보다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월절서(越絶書)에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 2700년)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 bc 2100년)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후에
철병(鐵兵)을 썼다고 하는데 사해 배달문화에서 옥병의 출현은 중원보다 빠른
기원전 6000년이다. 
 중원의 옥기문화는 사해문화로부터 대문구문화를 거쳐 태호의 양저문화에서 가장
꽃피는데 기원전 3000년 이후다. 

 부신시 사해와 오한기 흥륭와를 중심으로 선거주하여 옥기 왕국을 이룬
신석기인들의 선홍산문화를 환웅의 도래 이전에 존재하던 예맥 문화(穢貊文化)라고
불러야 한다. 
 [선비전]에서 선비의 동쪽은 요수(遼水)로서 동쪽에 부여와 예맥이 있다 하였다.
당시 서요하의 동북쪽에부여가 있었고, 서요하의 동남쪽에 예맥의 터전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예맥은 공손씨 요동국의 동쪽이기도 하다.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그들 예맥인들은 모계 농경 민족이었으며, 이미
가축을 길렀고 흙과 함께 살고 죽었다. [위지동이전]에서 예인들의 주요한 토템은
호랑이다. 산군(山君)을 섬기는 한반도의 풍속은 예인들의 고유한 것이다. 
 이 예맥문화는 황해 주변의 모든 신석기 문화지에 펼쳐져 나갔다. 동쪽은 길림성
집안까지이고 북쪽은 시라무렌강(서요하) 남쪽은 양자강 아래 광동성까지
퍼져나갔다.  



 
한단고기 고고학2. 청구 천평  
2장. 환웅 문화(桓雄文化)

                    홍산문화(先紅山文化)

1절. 나사대(那斯臺) 청구 환웅문화(靑邱 桓雄文化)

 내몽고 서요하 상류 파린우기에 나사대 문화지가 있다. 
 옥도끼와 더불어서 마노(瑪瑙)로 만든 석도도 등장한다.
 이 곳에는 옥기 조각이 매우 다양화 되며 각종의 옥패식이 등장한다. 구름형옥대,
옥구, 물고기형 옥패식, 용형 옥결, 부엉이형 옥패식, 옥관 등이다.
 도기는 빗살무늬 토기가 다양해지면서 뱀무늬의 채도문도 등장한다. 이러한 다양한
토템은 부여형 오가제(五加制)의 전신이다.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양쪽 머리를 깍아
밀고 가운데만 머리가 남아있고 의자에 걸터 앉아 있으며 두 손은 떨어져나갔는데
나체다. 여자는 높이 19cm에 안면을 머리칼로 팔자형태로 가리고 머리칼을 두정부에
삼층으로 돌려 얹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는데 역시 나체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은 높이 9cm, 남은 길이 14cm의 작은 곰의 형상이다.  
 이는 단군 신화에서 환웅과 웅씨 처녀의 만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모계
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의 이동을 상징한다.

 안함로의 <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웅씨는 천신의 부름을 받들어 백산흑수지간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여정을 뚫고
청구 땅에 궁지를 구획하였다. 桓雄氏 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於靑邱." 

 서요하 중에서 파린우기를 지나는 가지만 흑하(黑河)라고[거란지리도]에 표기되어
있다. [거란지리도]에서는 동서로 흐르는 아랫가지 본류에 요주(饒州)를 표기하여
흑하 아랫가지 본류가 식요락수(飾饒樂水)인 것을 알려준다. 
 그런데 2세 단군 부루가 이곳 장당경(藏唐京)에 들어와 청구문화의 풍습을 살려서
푸른 옷(靑依)을 입게 하였는데, 부루 단군을 부여족의 시조라고도 하는 바, 3세
단군이 이를 이어서 장당경에 천도하였고, 훗날 44세단군 구물 때에 장당경에서
대부여라는 국호가 생겨나고 장당경은 장당평(藏唐坪)이라고도 했으므로 최초의
청구 천평(天坪) 수도는 장당경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채도문(彩陶文)의 발생은
청의의 발생에 따른 것이 된다. 
 환웅씨는 다양한 토템을 가져오는데 환웅씨와 웅씨의 결합이 의미가 있는 바,
웅씨는 바로 부여인이다. 
 현재 부여씨의 잔류 민족으로 고려되는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야쿠트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전쟁신 치우기(蚩尤旗; 彗星)를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다. (The herdsmen worship the god‘Jiyachi’, while the hunters
venerate the gods of the mountains and of fire. The bear is held in awe as a
totem and a creature around which various taboos have grown by long
custom....through fishing, reindeer raising and hunting.) 
 이들의 야쿠트 지방에서 기르는 말은 바로 사서에 기록된 과하마다. 

 한편 [후한서]<부여전>에서 고주몽은 북이 색리국왕(北夷 索離國王)의 시비가
천상의 기운을 받아 낳은 아들로서 도망쳐서 부여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 건국신화, 선비족 단석괴 탄생신화와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색리국이
색륜을 거쳐 실위족, 퉁구스족, 에벤키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 곰 토템은 거의 없다. 이는 환웅씨가 남하하면서 퉁구스족
웅녀족과 결합하여 예맥을 억압했기 때문이며 이때 예맥은 서쪽으로 악이다사고원,
동쪽으로 한반도, 남쪽으로 산동반도 등으로 옮겨가서 호랑이를 숭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맥의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환웅씨에게 복종하였고 웅녀족은
왕비를 내는 귀족이 되는 것이다.

 웅씨족의 후예 중에 바로 황제 헌원이 있다. 황제는 유웅씨(有熊氏)라고 했으니
본래 곰씨이고, 또한 공손(公孫) 헌원이라고도 했으니 역시 곰(公)의 손자인
것이다. 웅씨족 출신 황제와 환웅족 치우 환웅이 동서에서 쟁패한 것이 황제와
치우의 싸움이다. 

 정리하면 예맥국 땅에 북쪽의 바이칼 호수 주변으로부터 불의 신을 섬기는 다양한
토템을 퉁구스인 환웅씨가 남하하여,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를
환웅씨의 청구문화라고한다. 현재 홍산문화로 분류되고 있다.



 
한단고기고고학3 배달 신시문화  
2절. 적봉(赤峰) 신시 배달문화(神市 倍達文化)


 적봉시 홍산(紅山) 문화지와 하가점(夏家店) 문화지는 서요하의 남쪽 상류인
노합하(老哈河)의 남쪽 중류다. 내몽고 적봉시의 동북 쪽에 홍산(紅山; 665m)이
있다. 이것이 이 일대 신석기 문화를 홍산문화로 이름부친 까닭이다.
 문화적 특징은 석관묘의 발생과 채도문 토기의 중흥을 볼수 있다. 복골(卜骨)의
발현은 왕도로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부장품에 도기를 이용한 새 조형물은
있으나 옥기가 없다.
 석관묘의 발생은 강력한 왕권 국가 형태가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옥기가 없는 것은 신시 천도 직후에 치우가 등장하여 곧바로 용산문화로
옮겨가므로서 신시의 초기 홍산문화는 치우 영역권에 예속되어서 옥기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기원전 3000년에 범세계적인 대홍수가 기록되었는데 이는 빙산의 해빙으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한 것과 관련된다. 해수면의 상승은 발해 대륙을 발해 바다로
만들었고 대륙의 기후를 차갑게 냉각시켰다. 
 이를테면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서요하 유역은 온대 식물이 자랐고 삼림을
이루었으나 급작한 기후 변화로 추운 초원지대로 변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농경
문화가 유목 문화로 전이 되어가기도 한다.
 따라서 기원전 3000년이 지나서 기후 변화에 의해 환웅씨 청국국으로부터 신시
천도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한세가>에서 단군 왕검은 13세 환웅인 시와라 환웅의 460년 뒤 후손이다. 이
13세 시와라 환웅이 청구국 천평으로부터 신시씨배달국으로 천도하고 또 동방
정책을 통해 왕검을 만들어 동쪽으로 보냈다. 그러나 뒤를 이은 14세 자오지환웅,
즉 치우천왕은 중국 황하 남쪽으로 내려가 고대의 제하(齊河)를 중심으로 하여
용산문화를 만들고 청구국이라 하였다.  
 외롭게 남은 동북방의 배달국은 400여년이 지나서야 단군 시대를 맞아 부흥하는
것이다.

 홍산문화는 적봉시(赤峰市)의 노하하(老哈河)와 조양시(朝陽市)의 대릉하를 따라서
형성되었으며 노하하의 지주산(蜘蛛山=거미산, 즉 곰산, 임금산)유적지,
오한기(傲漢旗)의 소하연(小河沿= 후홍산문화라고도 한다.) 문화 유적지, 대릉하의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능원(凌源), 부신(阜新) 유적지, 내몽고의 부하(富河)
문화의 중심 기원이며, 서쪽으로는 북경시 서쪽의 장가구(張家口), 동쪽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요동반도까지 상통한다.
 적봉 동남쪽의 노합하 상류에는 흑수(黑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적봉(赤峯),
홍산(紅山)은 둘 다 우리말의 밝산이 뜻으로 변한 것으로서 그 의미는 백산(白山)을
가리키므로 또하나의 흑수(黑水), 백산(白山)이 되는 것이다. 현재 부근 지명중
객라심기, 객라심좌익, 객라심우익의 객라(喀羅)는흑(黑)을 의미한다.
 홍산문화는 B.C.3500년에서 B.C.2200년까지로 여겨지고 있고, 한웅시대가
B.C.3898년에서 B.C. 2333년까지이므로 서로 일치한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정교한
옥기(玉器)의 사용, 석묘(石墓) 계통의 돌을 사용한 무덤, 그외에도 진흙
여신상(女神像)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원동중의 <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의 말기에 안파견(安巴堅)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 3종을 주어, 환웅은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神市)이라고
불렀다."

 <신불역대기(神市歷代記)>는 <삼성기>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배달은 환웅(桓雄)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神市)이다. 뒤에 청구국으로
수도를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18세를 전하여 환웅 시대가 있었다. 1세 배달 환웅은 거발환(居發桓)
 2세는 거불리(居佛理), 3세는 우야고(右耶古), 4세는 모사라(慕士羅)
 5세는 태우의(太虞儀), 6세는 다의발(多儀發), 7세는 거련(居連),
 8세는 안부련(安夫連), 9세는 양운(養雲),
 10세는 갈고(曷古), 또는 독로한(獨盧韓), 11세는 거야발(居耶發)
 12세는 주무신(州武愼), 13세는 사와라(斯瓦羅)
 14세는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 15세는 치액특(蚩額特)
 16세는 축다세(祝多世), 17세는 혁다세(赫多世), 18세는 거불단(居弗檀)  
    14세 치우환웅은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볼 수 있으며, 서라벌(서불의 사투리), 즉 서울의
어원이다. 

 
한단고기 고고학 4 치우의 용산문화  
3절. 용산(龍山) 치우문화(蚩尤文化)


 치우(蚩尤) 천왕의 새로운 청구국(靑丘國)은 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였다.
[대변경(大辯經)]에 14세 자오지(慈烏支) 환웅, 즉 치우 환웅에 대한 기록이 있다.
"치우(蚩尤) 천왕은 천하를 평정하고 회대(淮岱)를 점령한 바 있는데 그의 능이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있다."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서도 동평국(東平國) 수장현(壽張縣)에
치우사(蚩尤祠)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치우능이 있다고 하는 동평군 수장현은
오늘날 산동성의 황하 남쪽 운성( 城) 수장집(壽張集)이라는 고장이다.    한편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蚩尤) 환웅이 공상(空桑)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공상은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이다.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진류(陳留)라는 곳이 치우가 즉위한 공상(空桑)의 정확한 위치다. 
 [신시본기]에서 치우는 갈로산의 쇠를 캐어서 도개, 모극, 대궁, 호시 등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사기]에는 탁록( 鹿)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의 투구 무장을 하고 웅씨의 후예
황제 헌원(公孫 軒轅)과 싸웠다.
 14세 치우 환웅 이래 청구국 영역은 황하 남쪽 하남성으로부터 산동반도 일대,
양자강 북쪽의 회-대(淮-代) 등지로 추정되는데, 부신의 배달국에서 중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청구국의 중심은 하남성 개봉시 진류(陳留)에서 시작하여 산동성 제하(濟河),
치하(淄河) 유역의 임제(臨濟: 치우사당터. 진서지리지), 임치(臨淄), 임구(臨丘),
청구(靑丘), 안구(安丘) 등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 환웅은 기원전 2700년에 산동반도의 배달문화인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에 옮겨 들어가서 용산문화(龍山文化)를 일으킨다, 
 대문구문화 말기인 태산 동남쪽 거현 유적에서는 원시 한자(漢字)가 질그릇에
새겨져 출현한다. 조(早, 朝)의 원형이 되는 상형 글자이다. 
 용산문화의 옥기는 옥면에 짐승이나 매(독수리?)의 그림을 새기고
삼태극(三太極)형 옥환이 나타난다. 수면문(獸面文)은 바로 치우를 상징한다. 
 
 치우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상의 청동기 문화 도입이다. 치우는
동두철액하였으니 이미 청동기 시대에 돌입하여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종래에는 기원전 2100년에 세워진 하(夏)나라 조기에 청동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언사(偃師) 이리두 문화가 바로 그 하나라 청동문화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리두문화보다 이른 앙소문화(bc5000- 3000년)에 속하는
서안(西安) 반파유적지에서 황동편(黃銅片)이 발견되고, 황하 상류
마가요문화(馬家窯文化)에 속하는 감숙성에서 청동도(靑銅刀)가 나오고, 청해성에서
동경(銅鏡)이 나왔다.
 또한 용산문화(龍山文化)에 이르러서는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와
공작석(孔雀石; 구리와 탄소 결합 보석) 등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등 다양한 청동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나타나서 이제는
용산문화를 하나라에 앞선 중국 청동기문화의 서막으로 보게 되었다.
(중국청동기전집 p42, 楊育彬) 

 용산문화는 bc2800-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에 근거했다.
반월형석도가 출현했으며, 돌삽, 돌낫 등의 출현으로 농업이 혁신되었다. 
 가축 사육에서 앙소문화보다 수량도 많지만 개나 돼지 외에, 소와 양이 추가되었고
닭과 말도 사육되었다. 
 질그릇에서 채도는 줄고 회색, 흑색 토기가 주로 되며 손잡이 달린 세발 솥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여기에 최근에 발굴되는 청동기를 추가해야하는 것이다. 즉 치우의
용산문화가 중국에 청동기를 전파한 것인데 이 청동기가 발굴되는 용산문화유적지의
분포는 산동성의 교현, 유하현, 장도현, 일조현 등과 하남성의 정주, 임여현,
등봉현 등, 산서성의 양분현 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청동도검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bc. 13세기경의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그런데 이미 형식에서 자루 장식에 고리를
만들거나(環首刀) 방울을 넣거나(鈴首刀), 혹은 사슴 머리를 새겨넣었고(鹿首刀)
스키타이 양식의 원조형(元祖形)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기원전 28세기의 청동도검은
그에 비해 단순했는지, 나무에 착검하였는지, 아니면 전투에는 철검을 위주로 하여
다 녹슬어 버리고, 후대에 부장품용으로만 청동검을 제작했는지도 알 수 없다.
 [사기]에 기록된 동두철액(銅頭鐵額)하는 수준이면 그 주조 기술도 상당하고, 또
야철 기술도 있어야 하고 물증적으로는 하나라 때의 청동 제기들을 보면 청동검의
조각 기술 수준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청동 제기는 홍산 문화에서도
발굴되는데 조기 홍산문화가 아니라 하나라에 상응하는 단군 시대의 것이다.  

 [중국전사(中國全史)]에서는 하남, 하북, 산동, 산서에는 치우 환웅,
섬서성(장안)은 황제가 있었고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산서성의
용산문화는 치우와 동시대의 황제에 의한 것이다. 
 청동기문화에서 기원전 2100년의 하나라 언사 이리두문화는 완벽한 주형틀을
갖추어 대형 솥을 주조하는 시대인데 비하여, 기원전 2800년의 치우 용산문화는
겨우 녹여낸 구리 덩어리를 단조식으로 두드려 펴던 시대로 고려되는데 치우의
도개나 모극, 살촉 등은 그렇게 만들어질 수가 있다. 
  
 명나라는 북경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
환웅이 모셔져 있다.
 여기서 풍백, 우사, 운사 등은 단군의 부하인 삼신과도 동일한 것이다. 즉 하북의
백성들이 모두 치우 환웅의 신전을 모시고 치우 환웅이 3신을 데리고 북경으로 와서
탁록의 벌판에서 황제 헌원을 물리친 전설을 기린 것이다.

 슈메르에서는 기원전 4000년에 청동기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3100년에 슈메르에서
만들어진 사자 머리 독수리와 사슴이 새겨진 동패식(銅牌飾)은 고구려, 발해의 동물
문양 동패식과 형식적으로 비슷한데 그 출현이 치우 시대보다 무려 4-500년 앞선다. 
 따라서 치우의 청동기는 슈메르에서 전파된 것인지 동북지방에서 독자 개발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기원전 3000년의 지구 대홍수, 즉 온도와 해수면 상승은
슈메르인들의 일부를 동방으로 떠내려보냈던 것일까? 짐승 얼굴을 한 치우는 또한
처용과 같은 아랍계 외래인인가? 슈메르의 언어는 왜 한국어와 비슷한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종의 섬과 같은 민족인 슈메르인의 상투는 또 무엇인가?
앙소문화에서부터 상투의 흔적이 보인다. 슈메르인들이 상투를 배워 아랍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인가? 그러나 슈메르인이 왔으면 응당 따라와야 하는 점토판 문자가
동방에 없다. 待考後聖. 


한단고기 실증1. 요서군,요동군,현도군,

중국 전한(前漢) 시대 요서군(遼西郡)은 만리장성 부근에서 흥성시(興城市) 사이에
있었고 요동군(遼東郡)은 흥성시(興城市)에서 수수하(秀水河) 사이에 있었다. 
 기존의 지리사적 이론은 요서군이 노룡(盧龍)으로부터 의무려산(醫巫閭山)까지
영역을 가졌고 요동군은 의무려산부터 압록강까지라는 어마어마한 영역을
가졌었는데 그 허구를 밝혀서 조선 단군 영역과 고구려, 발해 영역을 바로 잡는다. 
 기존 이론의 실패는 당나라 동북방의 거리 기산점인 영주(營州) 비정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요서군의 유성, 도하, 청산, 극성 등 모두가 영주를 기점으로 기록했는데
이 영주(營州)를 조양시(朝陽市)로 보아온 기존 해석에 대착각이 있었다.
 조양시에 영주가 한때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나라 거리 기산점인
영주는 그 조양시에서 멀리 후퇴한 영주였던 까닭이다. 

1. 요서군고(遼西郡考)
 요서군은 [수서지리지]에서 유수(兪水)와 백랑수(白浪水)가 있다.
 백랑수는 [수경주]에서 대요수(大遼水)의 합치는 바, 현재 대릉하(大凌河)의
상류이며 고대에는 고릉하(古凌河)를 통해 대요수와 합쳤다. 유수는 백랑(白浪)
동쪽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입해하는데 오늘날의 육고하(六股河)다.
 따라서 유수(兪水)를 대릉하의 상류로 비정했고 또한 도하(徒河)를 흐르던
당취수(唐就水)를 소릉하(小凌河)로 비정해온 것도 수정해야 한다.

 전한시대 요서군 서부도위 유성현(柳城縣)에 대해서도 기존의 고정불변이론인
유성(柳城)= 조양시(朝陽市) 이론이 수정되어야 한다.
 조양시에서 발굴된 유성의 여러가지 유물로 해서 조양시가 한때 모용황의 전연국
수도이자 유성이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요서군의 전한시대 유성은
삼류수(參柳水)가 흐르던 곳이고 모용황의 전연국 유성은 다른말로 화룡성이며
백랑수가 흐르던 곳으로서 서로 다른 곳이다. 
 
2. 유성현(柳城縣)과 대류성(大柳城)

 유성현(柳城縣)은 전한시대 요서군 서부도위치소였고 삼류수(參柳水)가 북으로
흘러 입해했다. 단 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물이 주변에 없으므로 남으로
흘러의 오기로 해석한다.
 임유현(臨兪縣)이 갈석산(碣石山)을 남쪽에 두었고, 동시에 [신당서]의 당나라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이 갈석산을 동쪽에 두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80년대에 갈석산, 갈석궁 유지라고 중국에서 발굴하고 발표한 것은 산해관
동쪽 30리 남짓한 만가진(萬家鎭) 강녀분(姜女墳)이다. 
 그러면 당나라 후기 유성은 모용황 전연국의 수도 화룡성 조양시로부터 남천해
들어왔었던 것이 된다. 당나라 기록에 영주를 옛 유성현으로 되돌렸는데, 이는
전후한(前後漢)의 유성현이 되며 모용황의 유성현이 아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 기록은 [구당서]의 사주(師州) 양사현(陽師縣)인데,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의 동북에 있었다. 
 [북제서(北齊書)]의 553년 거란 정벌에서 10월 정유일에 하북성 노룡현
평주(平州)에 이르고 그로부터 청산(靑山)을 지나 4일 뒤 신축일에 백랑성에
이르렀는데, 다음날 임인일에 창려(昌黎)에 이른다. 
 그 다음날 계묘일에 양사수(陽師水)에 이르고 다음날 갑진일에 황제가
산령(山嶺)에 올라 승리를 확인하고 종전하였다.
 3일 뒤 정미일에 영주(화룡성 조양시)에 이르고 10일 뒤 정사일에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를 본다. 2일뒤 기미일에 평주를 떠나 수도로 돌아간다.
 이 창려는 모용황이 을련(乙連) 동쪽에 신축한 창려성으로서 객좌현성(喀左縣城)인
대성자(大城子)이고 요나라 때에는 리주(利州)를 두었던 곳으로 고증되었다.
 백랑성은 객좌현성 남쪽의 평방자향(平房子鄕) 황도영자고성(黃道營子古城)이며,
청산은 그 서남쪽 수중현(綬中縣) 왕가점(王家店) 북쪽의 대청산(大靑山, 1224m)이
된다.
 여기서 갈석산은 노룡현(盧龍縣) 평주에서 2일 거리로서 산해관 동쪽
만가진(萬家鎭) 갈석궁(碣石宮)이 가당하고, 영주는 갈석산에서 10일 거리인데 이
북제의 영주는 북위 이래로 조양시였다. 
 양사수는 객좌현성 동북의 양각구(羊角溝)로 한보흥(韓寶興, 요해문물 1992.2)이
비정하고 있다. 당시 하루 행군은 80리로 본다. 그러면 하루 걸린 백랑-창려는 약
80리, 창려 - 영주는 5일 걸렸으니 근 380리다. 
 그런데 이 양사수에 있어야할 양사현이 [구당서]에서 바로 당나라 영주(營州)의
유성현 동북방으로 기록되었으니, 당나라 영주가 전연국의 조양시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후퇴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관사림(文館飼林)]이나 [책부원귀]에서 수나라 대업 8년에 임유관(臨兪關),
유성(柳城), 로하(瀘河), 회원진(懷遠鎭), 통정진(通定鎭), 요서진(遼西鎭)이
차례로 있다.
 요서진(遼西鎭)은 대릉하 동쪽 의현(義縣)과 견마령(牽馬嶺) 사이에 있었다.
요서진은 [책부원귀]에서 요진(遼鎭)이라고도 하였는데 [요동지]에는
요진(遼鎭)으로 그림이 그려져 표기되어 있고, [거란지리도]에는 그곳이
요주(遼州)로 기록되었다. 이는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에 설치되었던 마지막
안동도호부 위치가 된다.

 당나라 두우의 [통전]에서 옛 도하(徒河) 현성이 영주 유성현내에 있다고 했다. 즉
본래 유성은 옛 도하현과 가깝다. 이것도 [구당서]의 영주를 기점으로 보아야 한다.
기존에는 영주-조양 등식으로 보아서 대릉하 중류로 도하현을 보았으나 대착각이다.

 한편 도하(徒河)현이 영주 유성군성 동남 170리라고 했으니 거꾸로 당나라 영주를
추적할 수 있다. 
 당취수(唐就水)가 도하현을 통해 바다로 들어갔는데 [태평환우기]에서 도하는
도하(圖河)라고도 했고 팽로수(彭虜水), 로하수(瀘河水) 등으로 불리었다고 하는바,
영주 유성군에 당나라가 설치했던 평로군(平盧軍)과 이름이 같은 평로수(平瀘水)가
바로 팽로수였던 것이다.
 또한 [통전]에서 영주 동북 90리에 도하 청산(徒河 靑山)이 있다고 하였다. 
 [북제기]의 청산(靑山)이 바로 도하 청산(徒河 靑山)이며 현재의 왕가점향
대청산(大靑山, 1224m)이 된다. 
 그 서남 90리에 당나라 영주 유성현이 있었으니 지금의 수중현(綬中縣)
왕가점향(王家店鄕) 상방자촌(上房子村) 부근이다. 당나라 때에 영주
상도독부(上都督府)라고도 했었다. 
 이 길의 서남쪽, 평주 노룡현으로 향하는 길목에 조조(曹操)가 머물렀던
주조영(駐操營)도 존재하니 고래로 주요한 길목이다. 
 즉
노룡-유관-해양진-석령-주조영-왕가점-청산-백랑-조양(盧龍-兪關-海陽鎭-石嶺-駐操營
-
王家店-靑山-白浪-朝陽)의 길목으로서 조조와 북제의 고양(高洋) 황제가 지난
길이다.
 또한 왕가점 아래를 지나는 물이름이 평하(平河), 또는 평천(平川)인데 바로
평로수(平盧水), 팽로수(彭盧水), 유성 평로군(平盧軍)의 흔적이고 옛
도하현(徒河縣)의 당취수(唐就水)이다.
 따라서 당나라 영주 유성현은 왕가점향(王家店鄕) 상방자촌(上房子村)으로
비정되고, 전한시대 유성현은 당취수가 아닌 삼류수(參柳水)에 있었으니 그 왕가점
바로 아래 남쪽 작은 물에 연한 가비암향(加碑巖鄕)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래서
유성은 영주 남쪽이었다고 전하는 것이다.

 조조(曹操)는 [북제기]와 다르게 평강성(平剛城)으로부터 백랑성에 와서 200리
거리 동쪽의 유성을 바라보고 돌아왔다. [위지(魏志)]<전주전(田疇傳)>에도 실려
있다. 평강현은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치소로서, 또 전연국의 기양군의 치소로서
[수경주(水經注)]에서 조양시 황룡성으로부터 500리 거리였다고 전한다. 그동안
평강(平剛)은 평천(平泉)-능원(凌源) 지간으로 해석해왔다. 대략 능원시 서남쪽
삼십가자진(三十家子鎭) 부근이 된다. 
 최근에 평강성은 영성현(寧城縣) 흑성자(黑城子)로 비정하는 경향이 높은데
어양태수장 등 여러 봉니의 발견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평강성을
확정짓는데는 무리가 있으니 그간의 고서에서 보이는 지리적 환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백랑 동쪽 200리 유성은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오환족이 살던
대류성(大柳城)으로서 당시는 새외이고, 후에 선비족 모용황이 정도한 곳이 되며
[북위서]에서도 대류성(大柳城)이라고 부른 곳이다. 
 조조는 유성을 바라보고 돌아오는 길에 주조영을 지났고 이는 요서군 유성이었던
왕가점을 지나서 돌아온 것이 된다. 따라서 백랑에서 동쪽으로 바라만 보고 돌아온
유성은 요서군 유성이 아니라 선비의 대류성, 즉 조양시 화룡성 서남쪽
100리성이다.
 
 전연국 모용황은 유성지북(柳城之北) 용산지남(龍山之南)에 새도읍 용성(龍城)
화룡궁을 지어서 천도하였다.
 모용황의 용성은 본래 유성(柳城)을 용성(龍城)으로 개칭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조양시(朝陽市)다. 이 조양시는 전후한시대에는 새외이며 백랑수(白浪水)가
지났는데, 백랑수는 지금의 대릉하(大凌河)다.
 그래서 [북위서]에서는 조양시에 영주를 설치하고 대류성(大柳城)으로 적어
놓았는데 이것이 모용황이 수도로 삼았던 새외의 유성(柳城)이며 전후한시대
삼류수(參柳水)의 요서군 유성(柳城)과는 별개이다. 
 모용황의 수도 용성, 즉 새외 유성은 전연국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
용성현(龍城縣)이었지만 후한의 요서군 유성은 모용황의 전연국 기양군(冀陽郡)
유성(柳城)이 되며 기양군은 평강현(平剛縣)과 유성현 단 둘 뿐인데, 이 유성은
평강과 가깝고 우북평과의 경계다.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국 부견은 조양시를 평주(平州) 유성현으로 개칭하게 되고
모용수의 후연은 다시 평주 창려군 용성현으로 바꾼다.
 북위시대에 조양시는 평주가 아니라 영주(營州)라고 고치고, 대신에 평주(平州)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으로 옮겨진다. 
 북제시대 영주(營州)에는 기양군(평강현과 유성현)과 건덕군만 남는데 수나라
시대에는 영주(營州)가 더 후퇴하여 유수(兪水)와 백랑수(白浪水)를 가진
요서군(遼西郡)의 유일한 유성현이 된다. 이것이 본래 전한의 요서군 유성현으로서
왕가점(王家店)이다.
 이후 수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서 다시 조양시를 찾아 영주 유성현이라고도
하다가 영주를 다시 옛 유성으로 후퇴하여 조양시에는 대신에 임천술(臨川戌)을
두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 북연의 요청으로 북연천왕 풍홍을 구원하러 고구려장수가
찾아간 곳에 임천이 기록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망하게 하고 당나라 중반까지 조양시에 영주 유성을 다시
두었는데 유성군이라고 적은 당나라 묘지로 증거된다. 
 그러나 698년 거란의 반란으로 당나라는 영주 조양시를 뺏기고, 그후 조양시는
돌궐의 소유가 되었으며, 717년 조양시를 지키던 돌궐국 고구려 장수 고임무의
당나라 투항으로 어렵게 당나라가 조양시를 소유하게 되어서 다시 영주 유성을
조양시에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720년대 초반까지 당나라 유성현 사람의 묘지가
조양시에 나타난다. 
 그러나 732년 유관 도산(兪關 都山) 전투와 발당(渤唐) 전쟁 후에 당나라는 다시
옛 유성현 위치로 영주(營州)를 옮겨 두었다. 이 영주에는 유성군 또는 유성현이
유일하였다. 
 새로운 영주 유성현은 환치(還治)라고도 했으니 옛 유성현 터인 바 전후한시대
요서군 유성현 터인 것이다.

 청나라 전점(錢 )이 지은 [신각주지리지집석(新 注地里志集釋)]에서도 유성현은
금주부 영원주(=흥성시) 서남 평산영성(平山營城)이라고 했다. 지금의
평천영(平川營)이다. 이는 필자와 거의 같은 견해다. 다만 갈석산보다 동쪽이라서
갈석산 서쪽에 있던 당나라 때 유성 위치로 볼 수 없고 또 전후한시대 삼류수
유성현과도 다르니 필자는 이보다 몇십리 서북에서 옛 유성현이자 당나라 영주를
비정하게 된 것이다.  
 갈석산은 바닷물의 침입으로 가라앉은 지향이며 갈석이 길게 늘어져서 서
있었으므로 천주(天柱), 천교(天橋)라고도 불렀으니, 난하 남쪽의 갈석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 발굴된 수중현(綬中縣) 만가진(萬家鎭)의
강녀분(姜女墳)을 가리킨다.  


 3. 양락현(陽樂縣)과 창료현(昌遼縣) 

 후한 당시 요서군(遼西郡) 치소는 양락현(陽樂縣)이라고 동한 사람인 응소(應邵)가
말했는데 [후한서]<조포전(趙苞傳)>에서는 요서군 서부도위치소인 유성현의 동쪽
100리가 요서군 치소였던 양락현이다. 
 [자치통감]에서 모용외 시대에 모용한과 단씨가 양락성(陽樂城)과
도하신성(徒河新城)에서 대치한다. 즉 양락은 유성과 도하의 사이에 있었다.
 후한말에 후한의 양락현은 난하 부근으로, 임유현은 현재의 임유관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는데 본래 자리에는 선비족들이 쟁탈하였던 것이다.  
 난하로 쫓겨가기 전의 후한 양락성은 북경까지 1300리고, 후한 창료현은 북경까지
1260리다. 따라서 후한시대 유성은 1200리 거리였을 것이다. 
 양락현은 수중현(綬中縣) 전소진(前所鎭) 양가둔(楊家屯) 부근으로 추정된다. 
 유주로부터 1260리였던 요동속국도위 창료현(昌遼縣)은 명수향(明水鄕) 부근으로
추정된다. 창료현은 본래 요서군 부려현(夫黎縣)이었고 선비족이 들어와 살면서
천료현(天遼縣)이라고 했었다. 
 후한시대 요동속국체제에서 6국은 창료, 빈도, 도하, 무려, 험독, 방 등 6국이다.
이중 무려, 험독, 방은 본래 요동군에 속했었는데 후한말 요서군치소 양락현이
난하로 후퇴되어 옮겨질 때에 요서군 치소가 있던 곳이 요동속국체제로 변한
것이다. 

4. 회원(懷遠), 여라(女羅), 연군(燕郡)과 대극성(大棘城), 도하현(徒河縣)

 [신당서]에 영주에는 유성 평로군과 연군성(燕郡城) 진안군(鎭安軍)이 있었고, 또
후에는 영주에 4수착(守捉)이 있었으며 여라, 회원, 무려, 양평수착이 있었다.
[도리기]에서는 연군성이 영주 동쪽 180리며 여라수착 서쪽이다. 

 [구당서]에서 유관수착으로부터 연군수착까지 480리라고 했다. 유관수착은
임유관이 아니다. 유관수착 위치는 유주(兪州)로 발굴된 능원시(凌源市)
능하향(凌河鄕)일 수 있다. 

 회원성(懷遠城)은 래원성(來遠城)을 거쳐 영원위(寧遠衛)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흥성시(興城市)다. 
 [영원주지]에서 흥성시 영원주내 4가방(4街坊)에 회원방(懷遠坊) 이름이 남아있다.

 여라수착(女羅守捉)은 [수경주(水經注)]에서 유수(兪水) 서안이라 하였는데,
순서적으로 보아서도 회원성 서쪽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유수는 대릉하가 아니라
육고하(六股河)였슴이 다시 확인된다.
 여라수착(女羅守捉)은 수중현(綬中縣) 대대산진(大臺山鎭)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요서군 도하현(徒河縣) 위치다. 
 [통전]에서 요서군 도하현은 당나라 유성군성 동남 170리이고, 당취수, 즉
평천(平川)의 하류 방향으로 추적하면 사하점향(沙河店鄕) 북쪽
대대산진(大臺山鎭)이 된다. 
 또한 양락성과 도하신성(徒河新城)은 [모용황전]에서 서로 대치하는 곳이다.
따라서 도하신성은 수중현 평천영(平川營) 부근으로 추정된다. 

 연군성(燕郡城)은 수나라 연주(燕州)였는데, 연나라 모용외 수도였던 대극성으로서
수중현(綬中縣) 고대보(高臺堡)가 된다.
 모용외의 수도 대극성(大棘城)은 도하 청산(徒河 靑山)에 있었고 청산은 유성의
동북에 있다.
 영주를 조양시로 기산하여서 연군성을 의현 부근으로 추정한 기존 이론이 다 틀린
것이다. 구당서의 영주는 왕가점향 상방자다.
 [한단고기]에서 [통지씨족략]을 들어서 치우씨(蚩尤氏)의 고향이 대극성이라고
하였다. 바로 대청산 동남쪽 추자구(秋子溝)를 가리킨다. 추의 발음인 qiu가
치우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치통감]에서 대극성은 제전욱(帝 頊)의 터라고 하였는데 제전욱은 황제헌원의
손자 황제이다. 
 요나라는 한나라도하현으로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신수현(神水縣)을 삼았다.
추자구 동쪽 명수향(明水鄕)이 된다. 

 한편 요나라 택주(澤州) 신산현(神山縣)이 그 서북 방이었다. 택주는 지금의
하북성 평천주(平泉州) 북방으로 추정해왔는데 적봉시 영성현 전자진 남산근
유적지가 된다.
 택주에는 신산현과 난하현을 두었었고 신산현은 신산을 서남에 끼고 있었다.
신산은 광두산(光頭山)이 되는데 청룡하를 비롯한 난하의 상류 여러 가지와 동시에
서요하 가지인 노합하가 발원한다.  
 
 이제까지 모용황의 새 수도 조양시 황룡성은 대극성에서 서진한 것으로
착각해왔는데 실상은 모용황이 고구려를 치고 고구려 쪽으로 동진하여 조양시에
수도를 정했던 것이다.
 모용외가 부여의 자몽지야를 빼앗고 대극성에 천도했다. [신당서]에서 하북성
노룡현에 두었던 평주의 12술(戌)에 자몽술이 들어있다. 우북평 12술 마지막 순서가
자몽, 백랑, 창려, 요서다. 즉 백랑성 부근에 자몽성이 있었다. 또한 발해 자몽현이
있었다. 자몽의 위치는 객좌현 서남쪽 천성호향(天盛號鄕)이 된다.   

 
5. 교려현과 창려

 교려현(交黎縣)은 요서군 동부도위로서 유수가 바다로 들어가던 곳이다. 지금의
흥성시(興城市) 동신장진(東新庄鎭)으로 비정된다.
 동한의 응소가 창려(昌黎)를 옛 교려현이라 했다. 뒤에 요동왕 공손연이 멸망하고
그 후예가 봉토받아서 살기도 했던 곳이 또한 창려(昌黎)다. 
 모용황은 요동의 양평을 정벌하고 화양(和陽), 무차(武次), 서락(西樂) 등 3성을
요동에 새로 설치하고 귀환했는데, 이때 요동의 많은 인구를 끌어다가 극성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평곽을 마저 정벌한 뒤에 창려를 을련(乙連) 동쪽으로 옮겨 배치하여
서진(西進)을 꾀하였다. 옮겨간 창려현은 대릉하가 흐르는 객좌현성 대성자로서
요나라 리주(利州)였다.  
 
6. 험독, 평곽. 후한 양평

 전연국 모용황은 즉위초에 창려현(昌黎縣)에서 바닷길을 따라 진군하여 평곽을
정벌하였다. 창려와 평곽 사이에는 험독현(險瀆縣)과 험독현의 황수(黃水)가
있었다. 
 후한의 양평도 그 사리에 있었으니 유주로부터 양락은 1300리고 양평은
1600리였다. 즉 양락성에서 고작 300리 동쪽에 후한의 양평성이 있었다. 
 산해관 진황도시(秦皇島市)에서 영원위 흥성시가 명나라 때 280리인데, 청나라로
치면 420리 정도 거리가 된다. 명나라 때와 청나라 때 기록은 북경-노룡이 각각
550리와 830리로서 약 1.5배의 차이가 난다. 
 [구당서]에서 유주-영주가 1300리인 것은 노룡을 경유할 때에 청나라 거리 기록에
가깝다. 한편 당나라와 후한의 거리비는 약 4:5였다.
 [후한서]에서 낙양-서안이 950리이나 [구당서]에서는 800리다. [후한서]에서
낙양-북경이 2000리이나 [구당서]에서는 1600리이다. 
 따라서 후한식으로 보면 진황도시 - 흥성시 거리가 500리 정도 된다. 
 
 따라서 후한식으로 양락성으로부터 300리를 보아서 지금의 흥성시(興城市) 위치가
후한의 양평현 위치가 된다. 당나라가 회원수착을두었던 곳이다.

 동진의 서광(徐廣)은 의희(義熙; 405년) 연간에 역사책을 썼고 창려(군)에
험독성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창려는 모용황의 창려군인 조양시다.  
 [당회요]<고구려>에서 647년 이세적이 남소성(南蘇城)을 다시 쳐부수는데,
파리성(坡利城)에 이르러 백랑수와 엄황이수(嚴黃二水)를 건넜다. 엄황이수는
남쪽에서 합친다고 했다. 건창현 동쪽의 파시한고성 옛이름이
파리한성(巴里罕城)이었다. 백랑수는 대릉하(大凌河)다. 그러면 남쪽에서 합치는
엄황이수(嚴黃二水)는 소릉하(小凌河)와 여아하(女兒河)가 된다.
 여기서 고구려 남소성이 건창현성(建昌縣城)내의 망우영자( 牛營子= 황소라는
뜻)이나 그 아래 소주영자(素珠營子)가 된다. 최초 현도군 남소수 위치와 다르지만
모용황에 의해 끌려와서 옮겨놓여진 것이다.

 험독성의 황수는 여아하이고, 험독현은 금주시 대집둔진(臺集屯鎭)으로 비정된다.
주위 황토감향(黃土坎鄕), 황갑둔(黃甲屯)이 모두 황수의 흔적이다.
 모용황은 이 황수, 즉 여아하를 따라 평곽으로 진군하지 않고 요녕성 해변으로
진군하여서 평곽을 기습할 수 있었다. 
 평곽은 창려로부터 300여리였다. 창려를 흥성시 동신장진(東新庄鎭)으로 삼아서,
후한의 거리 계산으로 대략 금현(錦縣)의 건업향(建業鄕) 부근이다.  평곽현은
고구려 건안성(建安城)이 되었다. 즉 고구려 건안성은 대릉하 하류에 위치하여
있었다.

7. 요서고군성 안동도호, 고구려 요동성

 [구당서]의 안동도호부는 유주로부터 2200리였고, 영주로부터는 900리다.
[신당서]에서는 영주로부터 680리에 안동도호부가 있었다. 
 그러면 두 개의 안동도호부 위치가 생겨나는데, 연군성으로부터 500리 동쪽과
720리 동쪽에 안동도호부가 각각 있었으니 하나는 요서고군성(遼西故郡城)이요,
하나는 요동신성(遼東新城) 안동도호부이다.
 [구당서]에서는 안동도호부의 천보때 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천보 2년에
안동도호부가 요서고군성으로 옮겨졌다. 
 요서고군성은 [요동지]에서 대릉하 하류의 요서진(遼西鎭) 혹은 요진(遼鎭)이라
부르던 곳이다. [무경총요]와 [거란지리도]에서 요주(遼州)라고 기록했다. 또한
[문관사림(文館飼林)]이나 [책부원귀]에서 수나라 대업 8년에 임유관(臨兪關),
유성(柳城), 로하(瀘河), 회원진(懷遠鎭), 통정진(通定鎭), 요서진(遼西鎭)이
차례로 있다. [책부원귀]에서는 요진(遼鎭), [문관사림]에서는
요서진(遼西鎭)이라고 했다. 
 [도리기]에서의 그 위치는 요수를 건너 있었으므로, 요수이던 대릉하 건너
의현(義縣) 동쪽, 견마령(牽馬嶺) 서쪽의 대유수보진(大楡樹堡鎭)으로 규정된다.
[도리기]에서 안동도호부를 양평현지라고 했는데 수나라가 살수대첩 때에
공략하다가 실패한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으로 추정된다. 
 수양제는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했는데 수나라가 새로
설치한 요동군은 금주시 대집둔(臺集屯)이 되고, 통정진은 금주시(錦州市)가 된다.
이때 대업 8년의 유성(수중현 왕가점)-로하(여라수착,
수중현)-회원진(흥성시)-통정진(금주시)-요서진(대유수보진)은 서로 일정한 거리가
된다.
 한편 고구려 요동성이 있던 이곳을 당나라에서 요서고군이라 이름한 것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빼앗은 후가 된다. 요서고군성 안동도호부를 [도리기]에서 양평현지라고
했는데 [삼국사기]도 고구려 요동성을 양평현이라 하였다. 
 또한 [신당서] 영주에는 유성 평로군과 연군성(燕郡城) 진안군(鎭安軍)이 있었고,
또 후에는 영주에 4수착이 있었으며 여라, 회원, 무려, 양평수착이 있었으니
무려수착은 금주시(錦州市)고, 의현은 양평수착 위치다. 이 때는 안동도호부가
폐지된 다음이다.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 수나라는 요동군과 통정진을 세웠기
때문이다.
 의현의 양평은 북위 효명제 정광(520-525) 때, 청산(靑山)에 설치했던
고도성(固都城)의 요동군 양평으로 고려된다. 당시 영주에 속했는데 영주 창려군은
조양시에 설치했고 건덕군은 객좌현에 설치했고, 기양군은 평강과 유성현을
가졌으니 육고하 서변이고, 육고하 동변에 영구군이 설치되었고, 낙랑군도
련성(連城)에 설치했는 바, 영락현과 대방현이 있었는데 의현 북쪽으로 고려된다.
의현 만불산 석각에서 []方之右, 沃黎之西 라고 했는데 대방(帶方) 남쪽으로
해석된다. 옥려는 무려산(巫黎山)이다. 
 한편 이 고구려 요동성 서남에도 마수산이 있고 공손탁의 요동성 서남에도
마수산이 있다. 따라서 공손탁의 양평성 위치가 고도성이던 대유수보진으로
고려된다. 고도성이 전음되어 귀덕성, 즉 요나라 귀덕주(歸德州)의 초기 위치가
된다.

 [도리기]에서 안동도호부로부터 동남 800리 고구려 평양성은 요양시가 되고, 서쪽
건안성 300리는 건업향이 된다. 남쪽 압록강은 요양시 태자하로서 700리다. 
 [요동지]에는 의현에서 요양시까지가 540리 거리였다. 명나라 거리와 당나라
거리는 약 2;3의 비율로 보아서 당나라 당시 800리로 추산할 수 있다.
  

 8. 요동신성 안동도호, 전한 양평, 요대, 방, 서안평, 망평, 안시, 요양.  

 전한의 양평성을 배경의 물로서 추적한다.
 대요수(大遼水)와 소요수(小遼水)가 양평현(襄平縣)을 지나고 아래인
요대현(遼隊縣)에서 소요수가 대요수로 합쳐졌다. 요대현 아래 방현(房縣)에서는
백랑수(白浪水)가 고릉하(古凌河)를 통해 대요수로 들어간다. 
 한편 대요수는 망평현(望平縣)에서 내려오고, 소요수는 고구려현(高句麗縣)에서
발원하여 요양현을 지나 오는데, 요양현에서 대량수(大梁水)가 꺾어져서 소요수로
들어간다. 실위수(室位水)가 양평을 지나 양수(梁水)로 들어가는데 대량수가 이미
요양에서 소요수와 합쳐서 양평을 지나므로 양수와 대량수가 따로 있다.
 또한 현도군 서개마(西蓋馬)에서 온 마자수(馬 水)는 서안평(西安平)을 통해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주]에서 백랑수(白浪水)가 요동군 방현(房縣)에서 요수(遼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대릉하 하류 중의 고릉하(古凌河)와 대요수가 만나던 방현(房縣)은
반산(盤山) 경내인데 동곽진(東郭鎭) 동쪽이 된다. 
 대요수가 바다로 들어가던 곳이 안시현(安市縣)이므로 금현(錦縣) 우위진(右衛鎭)
안둔(安屯)이 안시성터가 된다. 거기서 지금의 대릉하를 서남쪽으로 건너면
건업향(建業鄕)의 평곽성(平郭城)이 있으니 고구려 건안성(建安城)이다. 
 대요수는 오늘날의 요양하(繞陽河)다. 망평현(望平縣)이던 태안현(台安縣)으로
내려와서 반산현(盤山縣)으로 들어온다.
 소요수는 무량전수(無梁殿水)다. 방산진수(芳山鎭水)와 먼저 만나는데 방산진수는
양장하(羊腸河)로도 불렸다. 대호산진(大虎山鎭) 서남에서 대량수(大梁水)인
팔도호수(八道壕水)와 만나게 된다. 팔도호수는 주자하(珠子河)라고도 했다.  
 따라서 요양현(遼陽縣)은 대호산진(大虎山鎭)이다.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발원하는 현도군(玄 郡) 고구려현(高句麗縣)은
부신시(阜新市)가 된다. 후한시대 현도군은 공손탁의 양평성으로부터 200리
북쪽으로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양수(梁水)는 북진시(北鎭市) 동쪽 대시수(大市水)다. 마시수(馬市水)라고
불렸는데 청퇴자진(靑堆子鎭) 서남쪽에서 소요수이던 양장하(羊腸河)와 만난다. 
 실위수(室位水)는 북진시 서쪽 라라보수(羅羅堡水)다. 양랑하(楊郞河)라고 불렸다.
 [자치통감]에서 요수(遼水) 위에 있던 양평(襄平)은 북진시 청퇴자진(靑堆子鎭)이
된다.  
 대요수와 소요수가 만나던 곳은 반산현(盤山縣) 서쪽이다. 요대현(遼隊縣)은
반산현 서쪽 륙가향(陸家鄕)이 된다.
 한편 마자수는 신민시(新民市) 유하(柳河)가 되고, 서안평현(西安平縣)
소수(小水)는 신민시 양식목하(楊植木河)가 된다. 두 물이 모두 서안평(西安平)에서
바다로 들어갔는데 당시 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서안평은 [안평]이라고 새겨진 철제 쟁기날이 발굴된 신민시
대홍기진(大紅旗鎭)이다.
 전당보(前當堡)-요중현(遼中縣)-황사타(黃沙陀)-사령(沙嶺)-반금시(盤錦市)는
고대에 바다(海)거나, 바다의 섬(島)이었다.
 
  요서고군성 안동도호부로부터 220리를 더 간 요동 신성의 안동도호부 위치는
흑산현(黑山縣) 단가향(段家鄕) 사산자고성(蛇山子古城)이다. 그 이전 요동군
고성에 1년간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는 전한의 양평현이었던 청퇴자진(靑堆子鎭)에
두었을 것이다. 
 후한의 양평성은 후한의 요서군성인 양락성으로부터 300리로서 회원성이던
흥성시였는데, 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은 이로부터 400리 거리다. 따라서 후한
고구려현은 의현(義縣) 남쪽의 전성자(塼城子) 부근이 된다. 


 9. 무차현(武次縣), 무려현(巫閭縣), 후성현(侯城縣)

 요동군 서부도위 무려현(巫閭縣)은 금주시(錦州市)다.
 [요사지리지]에서 금주시와 북진이 각각 무려로 기록되었는데 하나는 요나라가
금주시 한인들을 동쪽 북진시로 옮겨놓은 곳이다. 
 반면에 요동군 동부도위 무차현(武次縣)은 모용황에 의해 옮겨진 곳이
마시(馬市)로서 지금의 대시(大市)향이다.
 전한의 무차현은 양산진(梁山鎭)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무차현의 물이 바로
마자수(馬 水)였을 것이기 때문인데 마자수는 류하(柳河)였다.
 요동군 중부도위 후성현(侯城縣)은 [요사지리지]에서 함주 남쪽이라 했는데 함주는
안동도호부가 있던 양평현이었다. 청퇴자진 남쪽 호가진(胡家鎭)으로 추정된다. 

 10. 현도군 고구려, 서개마, 상은대, 

 소요수(小遼水)가 무량전수(無梁殿水)로, 대요수(大遼水)가 요양하(繞陽河)로 각각
규정되므로 전한시대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은 부신시(阜新市) 부근이다.
부신시 북쪽 거리구(巨力克), 석금고륵(石金高勒), 소등고륵(少等高勒),
소목고륵(蘇木高勒)이 고구려 성을 이르던 우리말인 구루(溝婁)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부신시(阜新市)다. 
 서개마(西蓋馬)는 마자수(馬 水)가 발원하여 서안평(西安平)으로 입해하는데
마자수는 유하(柳河)다. 마자수압록강이란 말은 훨씬 후대에 이르러서 찢어졌던
요해 바다가 메워지며 강이 그만큼 길어지고, 압록강이던 오늘날의 요하(遼河)와
유하(柳河)이던 마자수가 합쳐지고 난 다음 시대의 이름으로서 마자수압록강이
된다.
 전한의 마자수는 염난수(鹽難水)와 합쳤는데 유하의 남쪽 상류인 신개하(新開河)가
합쳐지던 북쪽 가지가 염난수다. 
 서개마(西蓋馬)는 부신시 구묘향(舊墓鄕)으로 비정된다.
 상은대(上銀臺)는 부신시 홍모자향(紅帽子鄕)으로 고려된다. 
 현토군 남소수(南蘇水)는 새외로 나갔는데 교래하(交來河)로 추정된다. 고구려
남소성은 [한원]에서 신성(新城) 서북 70리 거리라고 하였는데 남소성은
소목고륵(蘇木高勒)으로 고려되고 신성(新城)은 부신시로 고려된다. 
 고구려 신성이 전한의 현도군성이었다. 
 후한의 현도군 고구려현성은 거리상으로 의현(義縣) 서남 전성자(塼城子)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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