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1999년 10월 7일 목요일 오후 11시 36분 31초 제 목(Title): 한단 고기를 읽고서 한단고기를 직접 읽어보고 나니 한마디로 우리의 상고사를 그리 과장한 것도 날조한 것도 별로 없다고 봅니다. 우리 영역의 크기에 있어서 기존 역사에서 배운 고구려의 전성기 수준에 비해 조금 더 큰 영역을 갖고 있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로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정도입니다. 한단 고기가 구한말에 우리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 하긴 했겠지만, 역사를 날조하거나 과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단군 조선 시대 말기 이후 한민족의 영토와 세력이 한반도 안으로 팍 찌그러들었다는 기록(삼한이 모두 '한수' 이남으로 이동)에 와서는 애처로움이 더 들더군요. 한단 고기의 내용은 가능한 역사로서 충분히 검토해봐야 할 만하다고 봅니다. 한단고기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한국시대(한인) 3301년 또는-배달국 시대(한웅) 1565년-조선 시대(단군) 2096년-북부여 시대- 삼국 시대- 고려 시대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각 시대별로 제 의견을 얘기하자면 1. 한국 시대(기원전 7199년 ~ 기원전 3898년) 이 시대는 아시아 여러 몽고족들의 공통 조상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몽고족에 해당하는 아시아의 모든 민족의 공통적인 역사라 우리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역대 한인의 이름과 연대도 안 나와서 역사라기 보다는 창조 신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대는 바로 석기 시대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단 고기의 '삼성기 하편'에서 이 기간을 3301년이라고도 하고 63, 183년이라고도 하는 데, 둘 다 가능한 것으로 봅니다. 전자라면 신석기 시대를 얘기하고 후자라면 구석기 시대까지 포함해서 얘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도 현대인 못 지 않게 지능은 좋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워낙 오래된 것에 대한 기록이라서인 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의 크기와 위치에 관한 것인데, 파내류산 아래, 바이칼호 옆에 있는 파내류국으로도 불리는 한국의 크기는 동서가 2만리, 남북이 5만리라고 돼어 있습니다. 현재의 1 리는 0.4 km이므로 5만리면 2만 km로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것을 기존 사학계의 비판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 시대 당시는 도량형은 당연히 통일돼기는 커녕 정해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니 당시의 크기에 관한 기록을 그대로 지금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겁니다. 아마 부족의 영역이 컸으면 하늘만큼 컸다고 했겠죠. 당근 석기 시대 사람들의 표현 정확성의 한계도 고려해야 합니다. 석기 시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돼겠죠. ^^ 그리고 이 영역은 우리 민족의 영역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분화되지 않은 몽고족의 모든 나라가 퍼져 있던 영역의 크기이기 때문에 남북 5 만리라는 길이를 반 정도로 줄여서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석기 시대인의 표현이지만 오더 상으로는 맞는군요. 어떤 사람들은 파내류 산을 파미르 고원으로 보는 데 이 것은 단지 발음만 비슷할 뿐, 문맥 상으로는 그 쪽이 아니고 몽고 고원 근처의 높은 산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속한 12 나라 중에 '수밀이국'이란 것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로 보는 데 이 것도 단지 발음만 비슷한 전혀 다른 나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역대 한인 천왕은 7대에 이어졌다는 데 만일 3301년을 그 기간으로 보면 1명의 한인이 약 500년을 살았다는 것인 데, 이 것은 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이런 몇 가지의 지극히 석기 시대적 특유의 어쩔 수 없는 황당함을 뺴면 석기 시대의 부족 사회에 대한 역사로서 굳이 의심할 만 한 별다른 것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2. 배달국 시대(기원전 3898 년 ~ 기원전 2333년 ) 이 시대에 와서야 우리가 단군 신화로 알고있는 곰 처녀 이야기, 태백산 등이 나옵니다. 한국 시대 마지막 한인의 아들 중에 한웅이 태백산(지금의 백두산)근처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호랑이는 이 지방의 원주민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로운 이주 세력인 한웅에 의해 대표되는 웅족에 의해 쫓겨나는 호족입니다. 이 시대에 와서야 만주에 중심을 둔 동이족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야 도읍지로 신시(아사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부족 사회에서 도시 국가 시대로 전환되는 시대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세계사에서 최초의 도시 국가는 수메르로 기원전 4000년경으로 보는 데, 신시도 그 비슷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우리 역사의 유구함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역대 한웅은 18대에 이어지는 데 각 한웅의 이름과 재위 기간이 적혀 있습니다.이 중 14대 한웅인 치우 한웅은 중국의 중원까지 진출하여 중국의 시조인 황제를 크게 괴롭힙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역사서에도 '탁록의 대전'으로 자주 등장하니 엄연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도리어 중국 사서들에는 치우 한웅이 머리는 구리로, 몸은 쇠로 되고, 도술을 부리는 괴물로 말도 안되게 악의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중국보다 앞 선 청동이나 철 주조법의 개발로 치우 한웅은 갑옷과 투구로 무장했다고 설명하는 한단고기의 서술이 훨씬 더 신빙성 있는 사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맞다면 기존 세계사에서 철기의 등장을 기원전 2000년 힛타이트로 보는 것이 1000년 더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3000년의 우리 조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배달국 시대가 중국 민족과 우리 동이 족의 역사가 갈리고 중국 중원 땅의 패권을 놓고 두 민족 사이의 다툼이 시작된 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중국의 창조 신화에 나오는 '반고'라는 존재는 한단고기에서는 마지막 한인의 시대에 백두산으로 간 한웅과는 다른 길을 택해서 서쪽의 '삼위산'으로 가서 지배세력으로 등장한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3. 단군 조선 시대(기원전 2333년 ~ 기원전 237년 ) 이 시대가 바로 우리가 시조로 받드는 단군 왕검의 시대입니다. 단군은 18대 환웅과 웅씨족 왕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단군 조선은 배달국 시대의 여러 동이족들의 도시 국가들( 아홉 동이족으로 이뤄진 '구여')을 하나로 통일해서 국가의 형태를 수립한 인물로 보입니다. 이 시대를 기술한 한단 고기 안의 '단군 세기'에는 역대 47대 단군으로 나눈 역사들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삼한 체제를 처음으로 수립하는 데 중앙에 단군이 직접 통치하는 진한이 있고, 그리고 마한과 번한에 각각 비왕을 두어 연합 국가 형태를 띄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전시대 치우 한웅 시대에 중국을 지배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의 중원과는 거리가 있었던 시대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종주국으로서 최소한 명목상의 우위는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단군 조선 말기에는 국세가 크게 기울어 이 삼한이 모두 한반도 안('한수이남')에 갇히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시기에 중국은 하, 은, 주,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동북 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부상합니다. 제 13대 흘달 단군 시대인 기원전1733년의 천문 기록에서 '5성 취루'라고 하는 목성,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모이는 현상을 기록한 것이 보이는 데, 실제로 요즘에 천문학자들이 계산해보니 기원전 1734년에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있었다고 확인합니다. 이 것은 우리 고유의 역사 기록이라고 볼 수 있 수 있는 커다란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서 문제가 돼고 있는 부분은 인구에 관한 것인데, 기원전 1666년의 인구 조사에서 1억 8천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존학계에서는 이 것을 가구수로보고 한 가구당 5명으로 잡고 9억명의 인구라고 하면서 못 믿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구수로 보지않고 사람수로 보면 크게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오더 상으로는… 기원전 100년인 한나라 초기에 중국 인구는 6천만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인구가 춘추 전국 시대와 초한의 쟁패를 통한 오랜 전쟁 시대를 겪은 인구임을 고려하면 그 시대 이 전의 평화 시대에 중국 인구는 1억 명도 충분히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따라서, 단군 조선이 명목상으로나마 중국과 그 변방들을 지배했다면, 그 지배 영역인 동북 아시아 전체 인구는 1억 8천명은 충분히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4. 삼국 시대 한단 고기의 마지막 책인 '태백 일사'에서는 고구려와 발해가 단군 조선을 잇는 정통 국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 시대 역사와 다른 점은 별로 없고, 우리가 기존의 국사책에서 배운 것과 같이 신라,백제, 가야가 이 시기에 부족 국가 시대에서 국가 체제로 발전 한 것이 아니고 이미 단군 조선 시대의 국가인 진한, 마한, 변한 체제가 그 위치만 바뀌어서 그대로 유지된 것이란 거죠. 물론 고구려는 단군 조선의 옛 영역에서 단군 조선 전체를 계승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역사에서 진한, 마한, 변한의 역사가 매우 왜곡 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 장수왕 다음의 문자왕 때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제.오.월을 귀속시켰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최대 영역이 중국 동부 해안까지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중국이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로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 고구려, 백제에 가까운 이 지역을 점령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이상에서와 같이 한단 고기에서 편집된 사서들의 내용을 기존 역사에 비추어 못 받아 들일 요소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쓰인 연대들도 기존의 역사서의 연대와 크게 틀린 것도 별로 없습니다. 산업, 문화, 유행이라는 근대 용어가 '삼성기'에 불과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이 것은 손으로 필사해서 전해오는 중에 생긴 실수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큰 흠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존 학계에서 '대백일사'를 역사서가 아니라 종교 교리라고 주장하는 데, 태백 일사는 역사서로서의 형식을 분명히 갖추고 있고 중간 중간에 우리 민족의 철학, 종교, 사상, 문화에 대해 설명한 것을 가지고 꼬뚜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에도 사건이나 연대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 철학, 종교사, 사상사, 문화사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걸까요? 한국이나 배달국 시대는 중국의 사서에서도 다루지 않는 시대로 우리 밖에는 그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만이 그 시대의 역사를 밝힐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 데 이런 엄청난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황제 이전의 3황 시대(기원전 2500년 이전)는 믿을 수가 없다고 취급하지 않습니다. 믿을 수 가 없는 건 지 믿고 싶지 않은 건 지… 하여간 그 기록은 있었는 것 같지만 사마천은 외면합니다. 후대에 와서야 다른 학자에 의해 추가돼는 3황에 대한 서술이 지극히 황당합니다. 복희씨는 뱀의 몸에 인간의 머리, 신농씨는 뱀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뱀은 상서롭지 못한 동물입니다. 이 것은 중국인들이 3황을 그들의 정통 조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치우 한웅도 짐승의 몸에 쇠로 된 이마를 가진 괴물로 묘사합니다. 한단고기에서는 이 3황이 한웅의 방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서에는 은과 주의 시조들의 탄생 기원도 아주 황당합니다. 그들의 어머니의 이름은 밝히는 데 아버지는 밝히지를 못하고 새알을 먹었다느니, 거인의 발자국을 밟아 이들을 나았다니 하는 황당무계한 얘기로 횡설 수설 합니다. 이들의 어머니의 출신지는 유웅국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 동이족의 나라 출신으로 짐작됩니다. 따라서 은과 주의 시조들의 부계는 동이족인데 후대의 중국 사가들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이런 황당한 얘기들로 역사를 조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한국 시대에 해당하는 중국의 기원전 7000년~4000년은 신석기의 앙소 문화 시대로 이 시기의 유적은 중국 하북성에서 내몽고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서 발견돼는 데, 이 시대의 주거지는 몽고 유목민의 천막인 파오(?)와 아주 비슷하다더군요. 더구나 중국어의 어족 분류도 우리 민족이나 만주족 몽고족과는 전혀 다른 중국-태국 어족에 속합니다. 이 앙소 문화를 중국 문화로 볼 수 있을까요? 어느쪽 기록이 더 설득력 있는 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상고 시대에 대해서는 사마천을 비롯한 중국의 사가들이 역사 왜곡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단 고기에 있는 내용이 사실이기에 이들은 동이족의 지배하의 중국 역사는 고의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 왜곡은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중국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중국의 상고사에 대해 20세기 전반에 중국사의 대가이던 앙리 마스페로는 그의 저작 '고대 중국'에서 비슷한 의문점을 표시합니다. 그는 고대 중국의 역사가 의외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 중국의 역사가들이 제국의 기원, 초창기 제왕들, 초창기 왕조들에 대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모든 이야기는 단지 상고 시대의 종교적 전설에 대해 무비판적인 학자들이 내건 신화적이고 의사 역사적인 해설일 따름이며 따라서 그 것은 전혀 역사적 사실로서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아무래도 우리 학자나 중국 학자들에 비해 훨씬 객관적인 입장이라 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제가 한단고기를 직접 읽어보니 기존 사학계에서 이 책을 그토록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이유가 잘 이해돼지를 않는군요. 뭔가 역사학 자체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반대하는 듯한 의심까지 드네요. 식민 사학자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 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