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parkeb () 날 짜 (Date): 1999년 8월 15일 일요일 오후 11시 48분 31초 제 목(Title): [re] 혹시 역사 스페셜 보신 분.. 본 것은 아니고.. 다음과 같은 글들에 기초해서 만든 다큐라고 생각되는 군요. 일단 하이텔에서 퍼와봤습니다. :) ---- [기사] 일제식민사관, 훈요십조 왜곡 한겨레신문 날짜 : 98/03/18 09:51:49 제목 : [역사] 일제식민사관, 훈요십조 왜곡-`호남차별 근거' 제공 흔히 호남차별의 근거가 돼왔던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훈 요10조)가 사실은 민족분열을 염두에 둔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 해 교묘히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연세대부설 국학연구원 설성경교수,양권승연구원은 오는 20일 이 연구원 주최로열리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할 `영호남 지역갈등 의 원천을 해체한다'는 논문에서 왕건이 후세 왕들에게 남긴 훈요 10조 가운데 제8조를 이마니시 료(금서룡)와 고 이병도박사 등 조 선사편수회 소속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호남차별로 잘못 해석했다 고 주장했다. 왕건의 정치사상이면서 고려의 정치이념이기도 한 훈요 10조 가 운데 문제의 제8조는 “차현(차현=차령) 남쪽, 공주강(공주강=금 강) 바깥(현이남 공주강외)은 배역(배역)의 땅이므로 그곳 사람 들을 관직에 등용치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구팀은 식민사학자들이 우리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해 고려사를 비롯한 정사(정사)에 기록된 제8조의 `금강 바깥(외)'이라는 구절 을 의도적으로 `금강 남쪽'으로잘못 해석해 왔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구절은 `차령산맥 남쪽과 금강의 바깥쪽, 즉 금강 북쪽 과의 사이 지역'으로, 왕건이 지적한 `배반의 땅'은 금강 남쪽의 전라도가 아니라 차령산맥 남쪽과금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연구팀은 ▲신숭겸 등 고려 개국공신 상당수가 전라도 출신이고 ▲왕건 즉위를 즈음해 반란이 잇따랐던 곳은 전라도가 아니라 차 령 남쪽과 금강 북쪽 사이의 지방이었다는 점 등을 미뤄볼 때 전 라도가 배역의 땅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그러나 고려왕조는 배역의 땅으로 지목된 일부지역 에 대한 지역차별을 이내 철폐하고 이 지역 출신들을 관리로 등 용하는 등 민족화합 정책에 힘썼다”고 덧붙였다. 설교수는 “선거때마다 무슨 악령처럼 등장하는 지역감정의 출 발은 잘못된 역사해석에서 유래됐다”면서 “왕건의 통일정책이 민족의 평화와 화합을 기본원칙으로 하였음을 상기할 때 훈요 제8 조의 해석은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의견] 훈요십조에 대한 이견... 아래 글들을 보니 훈요십조의 제8조가 식민사관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오역(일부)이라는 것 같은데요... 사실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일찌기 일인학자인 금서룡이 위작 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구요... 이에 이병도가 반론을 했죠.. 그래서 지금은 이병도설이 거의 학계의 통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훈요십조가 고려태조가 박술희를 내전으로 불러 지었다는. 즉 태조가 훈요십조를 지였다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습니다. 문경현 선생은 이 훈요십조가 고려 중기 문종대에 지어졌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즉 거란의 침입후 고려중기 문종성세에 해이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국가 중흥을 도모하고, 왕실의 존엄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시기에 국정을 쇄신하고 개국창업의 이념과 사상으로 복위하려고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죠.. 또 훈요십조의 조작자는 신라출신으로 당시 고려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신라파에 의해서라는 군요... 당시 대두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백제파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말이죠... 또 훈요십조의 제8조 "차현 이남..." 이 조항만 보더라더 도저히 태조의 일통삼한 이념과 통치경륜과는 부합되지 않는다고도 하고 있습니다. 즉 태조는 민족융화책을 평생의 정책으로 했다는 점과 나주는 태자의 외가향이고 장화왕후 오씨의 내향이었으며.. 도선이 입적한 곳이고, 신숭겸의 출생지이며, 승주는 박영규부처의 고향이었으므로, 태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이지역을 승격시켰으면 시켰지 폄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나 조선시대에 왕후 등이 출생한 곳의 지역을 승격시키 기도 했으며,, 특히 원지배기 원으로 팔려가 환관이 된 자들이 조정에 압력을 넣어 자신의 고향을 승격시켰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 참고로 신숭겸은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죽음으로 왕건을 구출한 궁예 휘하에서 만난 용장입니다. 아마도.. 일요일의 다큐멘터리는 위의 문경현선생님의 주장에 바탕을 두고 만든 프로그램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