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10일 화요일 오전 02시 30분 06초 제 목(Title): 장석주/ 오윤 [0011]80년대 민중미술 선구에 선 오윤 세계일보 990329 15면 20판 (문화) 뉴스 ------------------------------------------------------------------------------- - 내가 진정으로 꿈꾸었던 삶은 「대지의 인간」으로서의 삶이었다. 「 태양 밑에서 땀을 흘리고,대지를 갈고,바람 속에서 머리를 숙인 채 걸어가는」 삶. 수렵과 농사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조달하고,삶의 터전을 대지 위에 세우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런 사람의 시선,몸 짓,그리고 걸음의 느린 움직임과 어깨의 파동 속에서 「마술적 힘」 을 느낀다고 말한 것은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이다. 왜냐하면 그들 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극히 단순하게 정상의 삶을,그와 우리가 그 것을 위해 태어난 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대한 천성은 자연이 그들에게 베푸는 가르침에 의해 길러진다. 「어떤 어두운 힘이 대지로부터 일어나서 이런 사람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가르친다. 하늘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에 균형 있게 내려앉는다. 비와 바람과 폭풍이 그들의 귓속에 신성한 가르침을 노래해준다」. 우리는 그 궁극의 삶으로부터,그 신성이 깃든 正品(정품)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도록 운명지어졌는가. 도시란 애초부터 대지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된 공간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대지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회경제적 맥락 위에 세워진 공간이다. 따라서 그곳에는 「대지의 인? !뮌? 양육할 어떤 조건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전형적인 몽골리안의 골격을 가진 한 사내와 그의 아들을 그린 목 판화 한 점. 대지 위에 서 있는 사내는 아마도 노동판이나 농업에 서 단련된 단단한 몸을 갖고 있다. 튀어나온 광대뼈,강인해 보이는 턱,굵고 선명한 목의 근육,단단하며 넓은 품,그리고 아들의 어깨 에 얹힌 크고 투박한 손. 그들의 시선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세 월이 뒤숭숭하던 80년대 초반 어느날,나는 한 점의 판화 앞에서 전율을 느낀다. 그것은 吳潤(오윤)의 「애비」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이 내 폐부를 뒤흔든 것은 그 화면을 채우고 있는 어떤 원시 적 힘이,始原(시원)적인 그 무엇이,다름아닌 「대지의 인간」에 대 한 나의 유서 깊은 그리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오윤 과 만났다. 오윤을 말할 때 80년대를 빼놓을 수가 없다. 官學派(관학파)적 보수주의자들과 서구 인상주의 화풍을 고답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화가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당대 화단에 오윤이 틈입해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당대 미술의 통상적 유통경로와 는 다른 경로,즉 민족문학 진영에 속하는 시인이나 작가들의 작품집 표지나 삽화,각종 집회의 걸개그림,공연포스터,무대미술 등을 통해 대중과 접속한다. 그런 점에서 그에 대한 명성이 「화단적 명성」 이 아니라 「문화운동적 명성」이라고 파악한 고종석의 이해는 정당한 것이다. 오윤은 194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갯마 을」 「머루」 「은내골 이야기」 등을 쓴 유명한 소설가 吳永壽(오 영수)이다. 부산 수정동의 수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서울 로 올라와 서울사대부속 중-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미대 조소 과에 입학한다. 1969년에는 임세택,오경환 등과 함께 「현실동인 전」을 계획한다. 그 계획은 교수들과 당국의 제재로 무산되지만 그 때 내놓은 「참된 예술은 생동하는 현실의 구체적인 반영태로 결실되 고 모순에 찬 현실의 도전을 맞받아 대결하는 탄력성 있는 응전능력 에 의해서만 수확되는 열매」라는 주장을 담은 「현실동인 제1선언」 은 그의 그림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아마도 그의 예인 기질은 타고난 천품이었던 듯하다. 때때로 그는 갑자기 사라 지곤 했는데,그것은 방랑벽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목판 화와 테라코타 작업에 열중한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단층 양 옥이 전 재산이었던 그는 오래도록 고정수입원을 갖지 않은 채 버티 어냈다. 그랬으니 가난은 그의 오랜 벗이자 식구일 수밖에 없었다. 간간이 들어오는 민중문학 계열의 단행본이나 잡지의 표지화,연재소 설의 삽화가 그의 주요 수입 원이었다. 김지하의 「황토」,송기숙의 「암태도」,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등의 표지가 그의 판화로 장 식되었다. 그러나,그런 일도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살림은 항상 빠 듯했다. 『정경문화에 송茱態? 소설이 연재되는데 그 소설 삽화를 그리게 됐어요. 삽화료가 얼마 안되지만 잡지사 편집부장인 윤무한씨의 배려 가 고맙습디다』라고 지인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털어놓을 정도로 그는 물욕이 없었다. 어쩌면 그는 대책 없는 지아비였는지도 모른다. 『시아버님이 현대문학 편집장 재직 시절 화가들이 표지화를 그려주 었지요. 그 그림을 죽 모아두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니 꽤 값이 나가더라구요. 그래서 돈이 아쉬울 땐 한점 두점 인사동 화랑가에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그 그림마저 떨어졌으니 걱정이네 요』 어려운 그 시절을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아내의 말이다. 오윤은 국繇르갸아섰謙沽? 이르는 큰 키,바짝 마른 몸을 하고,한 때 서대문 미술학원 등지에서 미대 입시준비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것은 순전히 가장으로서 가족 부양의무를 다하기 위한 「부역」이 었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주겠다는 개인교습의 유혹은 단호하게 뿌리치고,미술교사직이라는 안정된 직장 제의도 학교재단이 종교단체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는 가난 때문에 제 뜻을 굽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 동료 화가 김정헌의 증언대로 그는 「조직諍오? 체질적으로 안맞는 개인적 기질의 작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자신의 개인적 기질을 헌납하고 「역사의 당위」였던 80년대의 조직운동 속에 자신의 작업을 편입시킨다. 그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당국에 의해 「문제작가」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가 창립멤버로 참여한 「현 실과 발언」 동인의 첫 전시회가 뚜렷한 이유 없이 문예진흥원 미술 회관측의 전시 당일 대관 취소로 무산되었던 것도 그의 예술에 내장 된 시대에 대한 불온성 때문이다. 모든 진정한 예술의 전위들이 그 러하듯이 그의 판화들도 「시대와의 불화」를 불가피한 내면적 기질로 정착시키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노출된 그의 화가로서의 공식적 활 동이 다른 화가들보다 소극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그가 당대의 통상적 유통경로를 벗어난 데 있다. 그는 「도시와 시각」「행복의 모습」 「6.25」 「삶의 미술」 「시대정신」 「해방40년 역사전」 등 의 이름이 붙은 동인 그룹전,기획전,혹은 몇 차례의 초대전에 겨우 몇 점씩을 출품하는 데 그친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80년대초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된 교수,작가,화가,재야인사들은 물론이고 여공원,중국집 배달원 등도 수시로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는 거의 매일 소주 한병씩을 비워냈다. 그가 즐겨먹은 안주는 통조림으로 만들어진 번데 기였는데,그것은 그의 건강을 염려한 지혜로운 아내의 배려였다. 『날마다 고기 안주 해드릴 형편이 못되고 할수없이 단백질 공급원 으로 번데기를 애용하게 됐어요』 그는 유난히 추위를 탔다. 그래서 초가을만 되어도 그는 두터운 털 스웨터를 걸치고 아랫목에서 깡마른 손으로 끌을 쥐고 목판화 작 업을 밤늦도록 했다. 담배개비를 쥘 힘조차 없이 기진해 보였던 그 였지만 작업에 열중할 때는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의 손은 재빠르 게 움직였고,그의 안광에서는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즐겨 그린 것은 가난한 민중들의 생활 그 자체였다. 그의 강직한 신념이 배어 있는 끌질은 고통과 분노에 찬 민중들의 생활을 적절하게 표현해냈다. 그러나,그는 민중의 어둡고 고단한 삶만을 그려내지는 않았다. 파란과 격동의 역사 속에서 곤핍한 살림을 유지 하며 시달려온 가운데서도 잃지 않은 민중들의 기쁨과 신명,질긴 생 명력을 목판화의 후덕한 화면에 담는다. 농악,도깨비,농투성이,천렵 ,김장,원귀,애비,여공,귀향…… 등 민중생활과 민중과 친근한 설화 등에서 소재를 구하는 한편,불교 탱화나 전통 민화를 연구하며 민 족적 형식을 창출해내고자 애를 쓴다. 거칠게 요약하면,그의 힘과 단순성에 바탕을 둔 판화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풍자와 연민이다. 그의 풍자가 민중생활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지배계급의 목덜미를 향한 칼날이라면,그의 연민은 민중생활에 배어 있는 가락과 리듬을 낳는 근원정서이다. 가난,지속적 음주,과도한 작업량 때문에 그의 몸은 서서히 무너지 고 있었다. 그가 간경화증으로 고려병원에 입원한 것은 1983년이 다. 「과학주의는 예술의 상상력마저 절단해 버린다」는 신념이 강했 던 그는,다시 과로하면 1년을 넘기기 힘든다고 선고한 담당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그는 洋方(양방)치료 를 거부하고 韓方(한방)치료에 매달린다. 그가 1986년 7월6일 ,만40세의 이른 나이에 돌연 세상을 버리는 순간,그의 이름은 8 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한 상징으로 각인되며,「역사」가 되었다. 그 「역사」는 세월의 오랜 비바람을 견디고 나면 「신화」로 탈바꿈하 리라. 글 장석주 작가 Copyright (c)1997, 세계일보 All rights r eserved. Contact towebmaster@segyetimes.co.kr for more information http:/www.angelfire.com/me/TaehaKim artistry70@yaho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