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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7일 화요일 오전 09시 35분 28초
제 목(Title): 김영민 그는 누구인가


경향신문 [ 문화생활 ] 1999. 5. 26. 水 


「나는 선비 부스러기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없는 가문을 나와 학인의 길을 
걸어왔고, 가령 명색이 모교라는 부산대학교 철학과 근처에서 지금껏 강의는 커녕 
식은 차 한잔 얻어마신 일도 없으며 스승도 선배도 동아리도 뒤봐주는 매체 
나부랭이 하나 없이 오직 과잉한 열정에서 겪은 오해와 시기, 수모와 환멸만 
경험했다」 김교수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밝힌 자신의 이력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가 왜 「일점의 연고도 없는 전주까지 흘러들어 왔는지」 그 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학연·지연·혈연 등 각종 연고의 그물망이 촘촘히 
쳐져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얽혀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90년 미 드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열심히 연구하고 글을 썼다. 

단행본만 13권. 지금까지 5~6개 대학에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서울의 한 
대학에 지원서를 냈을 때다. 그는 지원자 20명중 평점 1,500점으로 2등의 500점과 
큰 차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교수로 채용된 사람은 2등을 한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런 일은 되풀이됐다. 

93년까지 재직했던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현재의 한일신학대학에는 대학측의 
스카우트로 가게 됐다. 그는 『앞으로 「큰 대학」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최근 한 부산지역 대학의 교수초빙 제의도 거절했다. 대학의 
변두리에서 대학중심부를 공격하기로 한 자신의 언행일치를 위해서였다. 

독신인 그는 강의하고 글쓰고 주말이면 서울 등 외부강연에 나가 「새로운 
글쓰기」를 알리는 매우 바쁘지만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김정란시인, 
조한혜정교수의 글이 자기 방식에 가장 가깝고 김용욕·강준만·진중권씨 글은 
다소 다르지만 개성적 글쓰기라는 점을 평가했다. 

지방대 출신, 작은 지방대학의 교수, 독신자라는 신분은 그가 철저한 비주류임을 
말해준다. 그는 『진정한 지식인은 틈만 나면 다른 생각에 골몰하는 비주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고백했다. 
문화반란의 기수들] (8) 변방의 철학자 김영민 



경향신문 [ 문화생활 ] 1999. 5. 26. 水 


-‘개성적 글쓰기’전도사- 『우리 지식인 사회는 탈근대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법썩을 떨기 전에 먼저 지적 식민성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서구사상과 문화의 
신민으로 전락한 「기지촌 지식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외로운 전투를 5년째 
계속하고 있는 「변두리 지식인」이 있다. 전주 한일신학대 철학과 김영민 
교수(41). 그는 자신의 저서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에서 이렇게 
따졌다. 

「우리 지식인 사회는 탈근대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법석을 떨기 전에 먼저 지적 
식민성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서구사상과 문화의 신민으로 전락한 「기지촌 
지식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외로운 전투를 5년째 계속하고 있는 「변두리 
지식인」이 있다. 전주 한일신학대 철학과 김영민교수(41·사진). 그는 자신의 
저서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에서 이렇게 따졌다. 

「우리는 남의 생각과 남의 집속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고 있다. 눈을 씻고 찾아 
보라. 책의 안팎에서, 교실의 안팎에서 우리의 것, 우리 역사의 터를 거쳐서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바람을 맞으며 키워온 것이 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는 아무런 반성없이 수입한 서구사상과 문화를 서양식 
논문양식에 꾸역 꾸역 담아온 기지촌지식인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이들로 인해 우리의 삶과 역사가 전통과 절맥되고 앎과 삶이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지식인들은 그동안 원전과 논문의 형식성, 
위협적인 이론과 낯선 외국학자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줏대없는 
베끼기와 무책임한 짜깁기를 해왔습니다』 다른 학자들처럼 그도 부산대를 졸업한 
뒤 미국유학을 가고 90년 귀국, 서울감리교 신학대학에 재직할 때까지는 서양철학 
전공자로서 충실하게 서양학문의 「종살이」를 해왔다. 그러나 3년만에 신학대에 
사표를 내고 고향 부산에 칩거하는 동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쉬는 동안 내 몸에서 올라오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논문·원전 중심의 
글쓰기는 우리 삶의 실제적인 모습과 맞지 않다는 자각이었죠』. 그는 이 때 
외국학자와 이론을 소개하는 주석들로 빽빽한 자신의 논문에 대해 처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자기반성의 결과 그는 논문·원전 중심주의폐기, 「개성적인 글쓰기」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50여편의 논문과 책을 쓰며 생각을 다듬어 갔다. 자신의 구상을 
「진리·일리·무리」라는 철학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실천하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강의·강연 및 문예지 기고 등을 통해 정력적으로 쓰고 말하며 자기의 신념을 
전파해 나갔다. 그는 특히 논문숭배현상의 심각성을 느꼈다. 여러 형태의 글쓰기중 
하나인 논문에 목이 매여 끌려다니다 일생을 마감하는 학자들이 측은해 보였다. 

『복합적인 현실을 가지치기해서 단순화해 놓은 논문은 이론적 정합성은 
챙길지언정 사태의 실상은 놓치게 됩니다. 또 글이 논문이 되는 순간 글은 일상의 
말을 잊고 생기도 잃은 채 인조의 기호로 변합니다』. 대신 「우리 삶의 무늬가 
배어있는 새로운 글」을 주장했다. 

자신의 개성과 구체적 삶의 경험을 드러내는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다. 시적 문장도 
좋고 소설도 활용한다. 영화도 글쓰기의 수단이 된다. 

그는 「소박한 무능력자들」이 지배하는 대학이 온존하는 한 식민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성 대학체제에도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지식인들을 기괴하고 현란한 고깔을 쓴 채 물위를 부유하는 
「왕관 해파리」라고 비판했다. 「주말이나 휴일엔 절대 연구실을 찾지 않으면서도 
오후 5시만 되면 어김없이 연구실을 빠져나오는 사람」도 그의 적이다. 

이런 공세에 처음 기성 학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학계가 서울대를 정점으로 
위계서열화되어 있는 현실에서 「변두리대학의 지방대 출신 젊은 교수」의 도발은 
사실 무모했다. 근대성을 지탱해온 이성과 논리가 또 하나의 권력이요, 억압이라며 
탈근대성 운운의 「시대를 앞서는 담론」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탈식민성」주장도 얼핏 낡아 보인다. 

그러나 최근 논문에 질린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음을 
그는 감지하고 있다. 논문 스타일이 혁신되고 개성있는 글로 바뀌는 것이 눈에 
띄고 있다. 그의 새로운 글쓰기를 둘러싼 논쟁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물론 그는 
『서양 담론이라도 보편성이 있으면 수용해야 한다』 『수사가 들어간 감성적 글은 
논리의 엄밀성을 깬다』는 반론에 직면해 있다. 이런 한계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그의 글쓰기가 논문을 대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그도 
안다. 그래도 그는 주류학계를 전복하기 위해 불온한 선동을 계속해 나갈 
작정이다. 인문학의 자생성과 창의성을 되살리고 섣부른 외제 탈근대성을 극복, 
현실에 맞는 근대성을 내면화시키는 일은 자신과 같은 비주류의 몫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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