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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2일 목요일 오후 05시 07분 54초
제 목(Title): 이희수/이슬람 부흥운동 


이슬람부흥운동-21세기의 새로운 공포인가?
 
 

이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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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이슬람 교류사" 
"터키사" <이슬람 투르크 문화의 동아시아 전파과정과 상호문화적 영향" 등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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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소련 연방의 붕괴와 탈냉전 시대의 도래는 서방 자본주의 세계 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크게 고무시켜 이슬람 부흥운동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물론 
이슬람권 일부에서는 이러한 국제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편승하여 '이슬람 
원리주의'로 지칭되는 과격하고 급진적 형태의 무장투쟁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러한 오도된 성격의 움직임과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즉, 이슬람 부흥운동은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발전해 왔다.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총체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개혁성향의 교육받은 부흥운동가들은 서구문물의 적대적 배척으로부터 앞선 과학과 
제도를 발전적으로 수용하는 이슬람식 사고의 과감한 발상전환을 시도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최고의 지적 엘리트였던 이들 개혁론자들은 이슬람 율법에 대한 
맹목적 추종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재해석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유럽열강의 침략으로 부터 이슬람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슬람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연과학과 군사기술, 그리고 유럽의 
정치,경제 제도 및 복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구적 요소를 이슬람 
체제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한마디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식 전통과 현대화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합리적이고 조화롭게 극복할려는 지적고뇌의 표현이고,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이슬람 개혁론자들의 노력은 화려한 옛 이슬람의 부흥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각 지역별로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항상 
잠재된 욕구로 무슬림들의 가슴속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근년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이슬람권 지배력 강화와; 세속주의와 서구화에 따른 도덕적 가치관의 혼란;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화 부진; 부정부패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의 일방적 두둔자세; 보스니아와 캐시미르 같은 분쟁 
지역에서의 무슬림 대량박해에 대한 서방의 방관자적 태도 등에 의해 젊은층과 
소외계층의 공감을 얻으면서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국가, 이란, 터키, 파키스탄, 
동남아시아 등 이슬람권 전역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형태로 진행.발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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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부흥운동
  우선 이슬람세계에는 "Islamic Fundamentalism"의 우리말 번역인 이슬람 
원리주의 혹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없다.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다. 이런 
맥락에서 이슬람원리주의는 1940년대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이슬람운동에 서방세계가 갖다 부친 용어이다. 그러나 서구세계가 사용하는 
이슬람원리주의는 일반적으로 반서구 노선을 표방하거나 세속정부에 저항하는 
일련의 모든 이슬람 운동을 악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용어는 최근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이슬람 부흥운동에 적용시켜 '이슬람은 
반문명적이고 비인도적이며 위험하다'는 논리의 비약으로 발전되고 있다. 결국 
전체 무슬림들의 절대다수가 이슬람 원리주의자이고 그들의 대부분이 응징되어야 
할 위험한 존재임을 부각시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 하기 위한 
고도의 수법이라고 많은 무슬림들은 믿고 있다. 

한편, 이슬람권에서는 단지 서구의 가치체계에 대항해서 이슬람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에 이슬람부흥운동, 이슬람개혁운동, 
이슬람화운동 등의 표현을 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채 정신적 가치의 존중, 코란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철저히 
근거한 이슬람식 삶의 확립이라는 대전제하에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 그러다가 
아랍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면서, 종교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발아되었다. 그것도 중세의 찬연했던 이슬람 문화를 회상하며,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앞선 과학과 기술의 습득을 받아들이되, 이슬람 
정신의 강화와 이슬람식 사회체제의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절충적인 
개혁운동이었다. 


다만 이슬람운동권의 극히 일부가 서구의 끊임없는 경제적 착취와 이슬람 
가치체계에 대한 흠집내기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면서 과격주의와 폭력주의가 
생겨났다. 그리고 소수의 폭력적인 성향의 배경에도 다른 저항의 수단을 앗아가 
버린 서구자신의 책임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면서 한 공동체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틀을 짓밟고 자신의 것만이 지고선이라 생각하는 독선이 바로 이슬람 
급진주의의 최대 후원자인 셈이다. 이것은 이슬람 국가내에서도 이슬람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국가에서 보다도 이슬람을 철저히 박해하고 있는 곳에서 
급진적이고 과격한 이슬람 운동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걸프해에서 철저한 미국의 경찰국가로 자처했던 팔레비 샤 정권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이란에서 이슬람 정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오랜 일당 
군부독재와 프랑스의 지원이 알제리에서 FIS(국민구국당)의 집권가능성을 만들어 
주었다.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는 것도, 
무슬림국가중에서 서구화와 세속화가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터키에서 조차 최근 
이슬람을 정강으로 표방하는 복지당이 이스탄불과 앙카라등 대도시의 시장선거를 
석권하고, 세속공화국 75년만에 처음으로 집권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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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슬람 부흥운동의 국가 개념
  이슬람 부흥운동을 통해 실현해야 하는 이슬람 국가의 개념을 잘 정리한 
대표적인 학자는 마울라나 마우두디였다. 이슬람 정치체제에 대한 서구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우두디는 아주 명확하게 이슬람 국가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형태는 이슬람 성법에 기초한 완전한 
神政主義 국가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궁극적 목표애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원칙과 개념이 확립되어야 한다. 

첫째로 이슬람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은 일원적 유일신관(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고,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따라서 
국민은 신의 종복에 불과하고, 국가는 그 운용이 신법인 이슬람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둘째, 이슬람 국가의 본질과 성격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세속적인 서구 민주주의 
원칙과 부합되지 않는다. 서구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조는 주권재민에 있다. 이슬람 
국가체제는 대중 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않고, 신의 주권 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통치하는 자는 갈리프(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국가 원수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제정할 수도, 함부로 법을 폐기할 수도 없다. 대중은 그들의 
주장이 신의 규범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았다. 
신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원 합의에 의존한다. 
이런 면에서 마우두디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 체제에 
'신정민주주의(theo-democracy)'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세째, 이슬람 국가의 목적은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외적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표피적인 업무 이외에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데 있다. 


네째, 이슬람 국가의 통치목표는 보다 공동체적이다. 모든 행위는 개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염두에 둔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르기에 
기초를 둔다. 이슬람 국가내에서의 이질적인 이데올르기의 소유자는 전체 
공동체로서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 
나름의 문화와 이데올르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이슬람 국가에서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 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 종족, 신분, 직업, 출신성분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아니한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제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 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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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슬람 부흥운동의 생성과 발전
  이슬람 부흥운동은 몇가지 전제에서 오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의 적절한 
대응으로 생성.발전해 왔다. 첫째,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기 때문에, 변질된 이슬람으로부터 순수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즉, 코란에 기초를 두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현한 초기 
이슬람공동체(Ummah)을 재건하자는 것이다. 둘째,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이 아닌 정교일치의 단일 유기체이기 때문에 이슬람 부흥운동이 
정치성을 강하게 띠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문화적 총체운동으로 반외세, 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발전시키자는 근본 취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의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앞선 서구의 과학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즉 
'전통과 근대화'의 이상적인 조화를 그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양상은 국가나 
시대, 투쟁의 대상이나 목적, 방법론 등에서 매우 다양하며 이를 획일화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슬람권에서 최초로 개혁을 통한 이슬람 정통주의의 강화를 시도한 움직임은 
9세기 중엽의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었다. 그는 코란의 창조설과 같은 당시의 
비생산적적인 교리논쟁을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신학체계를 바로 잡았다. 이로 인해 
이븐 한발은 후일 완고한 이슬람 율법주의와 청교도적인 이슬람 부흥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4세기에도 이븐 타이미야라는 신학자가 '살라피(salafi)'운동을 
주도하여 신비주의, 범신론, 사변적 신학, 미신적인 요소로부터 이슬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위의 두 학자의 맥을 잇고 등장한 것이 18세기 중엽 
'와하비(Wahabi)운동'이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 와하비 운동을 이슬람 부흥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중동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성립된 후, 1200년 
동안 누적되어 온 신학적 변질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였다. 특히 
당시 이슬람 사회에 만연하던 이슬람 신비주의(Sufism)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위주의 기복신앙으로 흘러가자, 압둘 와합(Abdul Wahab, 1787 
사망)은 이를 배척하고 청교도적인 순수한 이슬람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이슬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정신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고유한 전통을 부흥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와하비 운동은 이슬람의 
요람지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하여, 사우디 아라비아를 건국하는 사상적 기둥이 
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서구열강이 중동-아랍세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이전 이슬람 사회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와하비 운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이 부흥운동은 19세기 중엽까지 이슬람 세계의 개혁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리비아에서는 사누시아(Sanusiya)운동이 일어나 
정권을 잡았고, 인도에서는 무슬림 각성운동이,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운동이 각각 변질된 이슬람의 타파와 침된 이슬람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18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유럽열강의 동진은 와하비 운동에 고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의 부흥 움직임을 더욱 축진하였다. 더욱이 나폴레온의 이집트 
원정(1798-1801)은 유럽의 근대문화가 중동에 소개되는 전환점이었고, 이로 인해 
중동의 근대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아랍 지식인들에게 외세의 통치에서 아랍을 해방시키려는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서구문명의 수용을 위해 합리주의를 채택하게 했다. 나약한 자신의 
처지와 부인할 수 없는 서구의 발전 사이에서 번민하던 사상가는 알 타흐타위였다. 
그는 이슬람권 밖에서도 행복과 풍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체제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알 타흐타위의 온건한 개혁사상은 
후일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전통적인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의 주류는 오히려 이슬람 개혁운동으로 불릴 정도로 
진취적이었으며,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가치를 통하여 
유럽침탈에 대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정치-사회적 변혁과 투쟁의 강도를 높히며 반외세를 표방했기 때문에, 와하비 
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성세력과 그 후원 세력인 유럽열강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정치-사회적 동기에서 범세계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시작된 근대적 부흥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의 운동은 종교적 순수성 
강조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변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개혁운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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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혁적 이슬람 부흥운동의 양상
  개혁적 성향을 띤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추구하는 목표와 방법론에서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서구의 도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다 직감적인 반응으로 당시 
서구의 급격한 발전 양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이슬람의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집약된다. 


두번째 단계는 서구식 방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시도였다. 그들은 
서구과학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서구식 교육으로 새롭게 습득한 방법론으로 이슬람의 서구 기독교 
이데올르기에 대한 우위를 증명해 보였다. 그들은 서구가 이슬람을 공격하는 주된 
내용인 여성의 지위, 노예제도, 비무슬림들에 대한 태도, 계시와 이성간의 상충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명료한 논리로 반박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슬림으로서의 자긍심과 이슬람문화의 위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 


세번째 단계는 반식민지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운동이 
행동화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행동철학은 서구의 도전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회피하여 과거 전통이나 영광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상대의 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도 아닌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자기 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해 나간 부류는 흔히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영광과 원래의 순수성을 재건하는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논의를 단순화시켰다. 물론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전통과 순수성을 고집한다는 
면에서 앞선 율법학자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발전 상황과 
문물의 우수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낡은 이슬람의 과거에 연연해 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서구의 지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부하였다. 자마티 이슬라미의 창시자인 파키스탄의 마울라나 
마우두디가 바로 이 부류의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20세기 이슬람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는 이란 출신의 자말루딘 아프가니(Jamal al-Din Afghani)였다. 그는 이슬람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이론적 당위성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의 대동단결을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설파하기도 
했다. 탁월한 정치선동가였던 아프가니는 외교와 설득으로 각 국가 권력층을 
계몽하고, 일반 서민과의 대중적 접촉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정점으로 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의 실천적 정치전략은 영국 치하의 인도대륙과 
프랑스 치하의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무슬림들의 부분적 자주투쟁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이론을 계승하여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이가 무함마드 압두였다. 
그러나, 압두는 아프가니와는 달리 정치적이고 개별국가 중심의 애국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배척했다. 그는 이슬람을 총체적으로 부흥시켜 유럽의 비평과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이슬람 원리와 
가치체계의 적절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더욱이 그는 이슬람의 정통교리가 확립된 
후 1000년만에 처음으로 이슬람 신학의 영역에 이성을 끌어들였다. 이슬람과 
과학을 자유롭게 접목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토대위에 방법론을 달리하는 수많은 
이슬람 개혁론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개혁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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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급진적 이슬람 부흥운동의 대두
  1차대전 이후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의 노력과 이상과는 반대로 이슬람세계의 
세속화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서구의 침탈과 정치-경제적인 예속 상태도 갈수록 
심화되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혁론자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분노한 
급진주의가 점차 세력을 얻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집트의 악명높은 
'무슬림형제단'이 태동하였다. 1928년 이집트의 청년교사 하산 알 반나는 이슬람식 
생활양식에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도덕과 윤리의 틀로 이집트인을 이슬람 정신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운동을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 운동의 핵심은 1930년에 작성된 하산 알 반나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서한에는 서구문명의 기만성을 규탄하고, 이슬람의 우월성을 온화한 
문체로 설득력있게 논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국가와 서구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나 이슬람권 내의 소수기독교도 및 유대교도에 대한 처우와 문화적 자주성에 
대해 관용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연과학은 이슬람의 
존귀함을 증명해 주는 필요한 학문으로 권장했다. 이 서한에는 또한 무슬림이 
냉혹한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사법 및 행정체제의 개혁, 모든 
세속정당의 해체, 세속법령의 개정, 관료의 이슬람화, 부패의 청산, 삶의 질 향상, 
윤리교육, 기슬연마, 군사력의 강화 등과 같은 구체적인 대응책이 명시되어 있다. 
나아가 그는 이슬람세계의 보존을 위해 군사력 증강과 같은 전략적인 방책도 
제시하였다. 그는 예배와 단식과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관습은 당시 사회적 여건 
아래서는 군사력 강화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대체로 이 운동은 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슬림들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면서 는 계몽적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고, 이듬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제국주의와 반이스라엘 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8년말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해산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 마저 암살되었다. 이제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 들면서 극단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들을 우리는 급진적원리주의자 부른다. 


이처럼 근대화를 주창했던 이슬람 부흥론자들이 한결같이 이슬람의 수호를 
부르짖었지만 그 방법론은 서로 달랐다. 종래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이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주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서구화에 치중했던 반면, 
원리주의자들은 대중을 상대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택했다. 교육기회의 
확대, 대중매체의 보급, 새로운 고용창출, 새로운 사회계층의 성장 등에 힘입어 
20세기 중반까지는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의 역할과 입지가 강화되었다. 한편 
세속적인 근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원리주의 개혁사상의 대중성은 2차대전 
이후 독립시기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즉,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도되었던 제 3세계의 근대화가 모순 덩어리로 가시화되고 난 이후였다. 즉, 
이슬람의 정통성이 회복되기는 커녕,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소위 '타락한 
서구주의'를 지향하면서 승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이란의 
레자 샤 팔레비,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낫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에 의해 추구되었던 세속화와 서구식 근대화 정책은 오히려 원리주의 
개혁론자들의 대응과 활동반경을 강화해 주었다.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은 이제 서구식 조직개념을 도입하고, 출판과 
매체의 첨단 매커니즘을 극대화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과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홍보하였다. 그들의 전략은 서구제도의 모방이 
아니라 서구로 부터의 독립과 최소한 대등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서구의 앞선 
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원했고,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는 급진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이슬람의 가치가 
상처받고, 무슬림들의 자존심이 유린당하는 시기에 이슬람 개혁론자들은 
조직적이고 분명한 태도로 이슬람의 정통성 부흥을 부르짖으며 대중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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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랍 영토의 분할과 반서구 급진주의의 성장
  석유가 자원화된 이후 중동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서구가 엮어내는 배신과 아랍 
저항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특히 1948년 아랍의 독립을 보장해 준다던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심장부에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하자 서구와 아랍의 씻을 수 없는 
반목과 불신의 씨앗은 갈수록 나쁜 열매를 맺어갔다. 2천년간 살아 온 고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저항운동 조직을 결성하여 고토회복과 
독립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처절한 생존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서방세계는 
아무도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동정적이지도 않았다. 1967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포기는 커녕 인근 
아랍영토까지를 전쟁으로 강점하자, 아랍인들은 다시 한번 좌절하였다. 유엔은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의 즉각 철수를 결의했지만, 국제사회의 결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무장되지 못하고 서방의 지지를 받지 못한 
아랍인들은 저항하였다. 그 일부는 '검은 9월단'이란 악명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 과격노선을 선택했다. 납치와 인질, 테러의 배후에는 항상 
이슬람원리주의라는 이름이 문명세계를 괴롭혔다. 1970년대 이후 이슬람화 운동은 
사상적인 투쟁에서 급진적인 이념과 정치투쟁으로 선회하면서, '과격'이란 
이미지를 강화하였다. 

이슬람의 급진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파키스탄의 뒤어난 정치 이론가 
마울라나 마우두디였고, 이를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 한 사람은 '무슬림형제단' 
소속의 사이드 쿠트브였다. 그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무지시대의 상황을 
오늘날의 세속화 현상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절대신에게 속한 고유한 권한들이 
적대적인 비이슬람적 세속정부의 수중으로 넘어 갔음을 개탄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빼앗긴 이슬람의 고유한 가치를 도로 찾는 것은 무슬림들의 신성한 
의무로 규정했다. 서구의 비호를 받는 세속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이집트, 이란, 
알제리, 튀니지, 터키 등 이슬람세계 도처에서 급진주의는 반정운동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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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급진적 이슬람 부흥운동의 현재적 상황
  1979년 중동의 가장 서구화 된 석유부국 이란에서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을 때, 서구는 경악하였다. 서민과 중산층을 껴안은 아래로부터의 
이슬람 혁명은 50년에 걸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빼앗긴 대중의 울분을 한꺼번에 
풀어주었다. 그들은 조금 덜 가졌지만, 전보다 더 행복해 했다. 주인의식과 
이슬람의 도덕성이 살아 숨쉬는 사회, 자신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바탕위에 
꽃피는 첨단과학의 낙원을 그들은 꿈꾸었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지난 18년간 
서구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무역제재에도 그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빠른 템포의 서구화보다는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가 변질되지 않는 사회를 선호하는 
이러한 민중의 뜻을 업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권의 많은 문제점과 경제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 쿠데타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만약 그런 사태로 발전하더라도 친서방적인 정권의 출현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는 중동전문가들의 지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제리에서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퉁치를 경험한 
알제리는 독립후에는 30년 가까이 군부에 의한 일당독재에 시달렸다. 자신들의 
전통과 고유한 이슬람 문화는 말살되고, 프랑스어를 쓰는 프랑스인화 되었다. 
일당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시위는 급기야 1988년 시민폭동으로 연결되었고, 
군부는 다당제의 도입과 자유로운 총선을 약속하였다. 이슬람의 회복을 갈구하는 
대중들은 1991년 12월에 실시된 1차 자유총선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신생 '이슬람구국전선(FIS)'에 표를 몰아 주었다. 이리하여 이슬람 세력은 430석중 
188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슬람 세력의 집권을 앞둔 시점에서 군부는 
돌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총선결과의 무효를 선언했다. 더구나 FIS는 
불법정당으로 해산되었다. 이슬람식 정치를 표방하는 FIS의 집권은 서방과 알제리 
군부의 이익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와 인권을 그처럼 
강조하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도 독재군부를 두둔하면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민주적 결과를 외면하였다. FIS와 그 추종자들은 분노하였고, 그 중 급진적인 
세력은 '이슬람 무장단체(GIA)'를 결성해 반독재, 반서구 무력투쟁에 나서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을 중심으로하는 급진성향의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약진은 아랍국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1978-1982년에 걸쳐 '무슬림 형제단'의 
반정 투쟁이 극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아사드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소탕당하였다. 
1981년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암살도 '형제단'의 행위로 알려져 있다. 
요르단에서도 1989년 4월의 총선에서 원리주의 세력이 의회 의석의 45%를 차지하여 
주목을 끌었다. 더욱이 수단에서는 1989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국민이슬람전선'이 집권함으로써 이란에 이어 두번째로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등장하였다. 이 외 튀니지에서도 1983년 식량폭동 이후 대량실업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한 때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인 '나흐다'를 지지하여 기세가 
등등했으나, 군부의 소탕으로 현재는 지하로 잠적해 있다. 

원리주의 성향의 이슬람부흥운동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90년대였다. 
동유럽과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함께 서구 강대국들의 
중동각국에 대한 침탈이 더욱 가속화 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무너진 사회주의의 
축을 이슬람이 대신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노골화된 서구의 침략에 대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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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론과 전망
  신원리주의 운동으로도 불리는 이슬람 부흥 운동은 양차 대전중 이슬람 세계의 
지적 그리고 사회정치적인 분야에서 태동된 근대적인 현상이며, 2차 대전후 더욱 
중요성을 띠며 발전해 왔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완전한 삶의 방식으로서 만연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비종교적인 이념에 대해 생명력 있는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오늘날의 왜곡된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수정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슬람이 담당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 개혁 운동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두 개의 상이한 측면, 정치-이념적인 그리고 
문화-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우선 정치-이념적인 면에서는 외국의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 나아가 서구의 자유주의와 구소련의 맑시즘의 문화적 영향과 이념적 
간섭에 대항하는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독특한 이슬람 
문화의 동질성 주장과 본래적인 이슬람의 믿음, 규범, 의례에 기초한 신앙심 
회복을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 부흥론자들은 이슬람의 신학적 질곡에 머무르지 않고, 뚜렷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정치투쟁에도 참여했다. 그리하여 지난 50년동안 이슬람 헌법의 
제정과 샤리아의 실시, 민주주의와 이슬람 세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중대한 정치쟁점이 있을 때마다 이슬람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정책적인 수정과 반대집단과의 정치적 제휴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개혁론자들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이슬람 국가의 수립에 매진해 
왔다. 동시에 대중을 선도하고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여, 
교육의 이슬람적 개혁, 성적으로 천박하고 외설적인 공공매체의 정화, 무신론적인 
이념서적의 금지, 남녀공학 교육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개혁적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정치-경제적 이념의 근본은 시민사회와 국가간에 
협력적이고 상호 균형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생산자는 그가 생산한 물품에 
대해 적정한 가격 이상을 부과하지 않으며, 노동자는 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과 좋은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기업가와 임금 
노동자, 지주와 소작농은 갈등과 대결관계가 아닌 협력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속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합의틀 속에서 공동번영을 누려야한다. 즉, 그들의 이념에 
따르면 상호관계는 계급투쟁을 통한 반전이 아니라 이슬람의 도덕적 가르침과 
코란의 원칙에 따라 해결점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슬람의 기본적인 
사회관계의 원칙을 평등주의에 두었던 이집트의 사상가 사이드 쿠트브나 이란의 
알리 샤리아트와는 달리 마우두디와 같은 개혁론자들은 협력과 조화를 통한 단결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대두는 흔히 탈식민지시대의 무슬림 사회에서 세속적 정치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슬람의 근대화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많은 개혁적 부흥그룹은 서구화와 근대화를 명확히 구분하면서 
근대화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근대화를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도적 혁신과 그 과정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근대적 
발전들이 종교의 소외화, 세속화,전통적 가족개념의 몰락, 성도덕의 문란과 같은 
현상을 동반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특히 신의 섭리보다 인간의 이성이 우위에 
서는 이념적 혼란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서 흔히 
현대화란 이름으로 통용되는 근대화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무슬림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슬람 복고주의 지도층은 무슬림 사회가 그들 자체의 방식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해야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외에 근대화에 대한 뚜렷한 견해을 갖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부흥주의 이론가들은 다른 이슬람 국가의 엘리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외적 발전 과정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즉, 근대화의 논쟁이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외적 측면을 벗어나 다원주의, 
민주주의,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한 관용, 사고와 양심의 자유 등과 문제로 확대되면 
그들은 매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어진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개혁성향 그룹의 절대다수는 종래와 같은 판에 박힌 듯한 이념적 해석과 
사회적 저항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리하여 근대화 과정의 여러 다양한 변화의 
요소들을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재해석하여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풍요와 
복지를 이룩하는 목표에 동참하려 했다. 새로운 사회질서의 재편과 급격한 
변화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입지를 확보할려는 노력과 요구가 어느때 보다도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이슬람의 화려한 과거를 복구하고, 이슬람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강화할려는 시도는 새로운 사회에서 무슬림으로서의 삶을 
확보할려는 다수 대중의 민의의 수렴으로서, 앞으로도 강도높게 지속될 것이다. 


다만 일부 이슬람 세력들은 급진주의적 양상을 띄면서 서구가 빚어낸 배신과 
약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렬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흔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지칭되는 이들 부류는 전체 이슬람 세게에서 본다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이런 방식의 투쟁을 바라보는 무슬림 대중들의 반응도 냉담한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의 발호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서구와 
결탁하여 지배층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는 부패한 세속정권과 복리민복이라는 
기본적인 경제정책의 실패,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이슬람 가치관의 타락에 대한 
반발이고, 힘으로 지배하는 서구강국들의 논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의식 강한 
무슬림들의 응어리의 표출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은 종교지도자나 일부 지적 엘리트들의 자기도취적 복고주의는 
아니다. 오랜 역사의 산물이며, 변화하는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그 방법과 이론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갖는 선험적인 우월감과 한 때 정치와 
문화로 세계를 호령했던 당당함이 깔려있다. 그리고 과거의 화려함에 비해 갈수록 
초라해지는 이슬람 세계의 현실에 대한 냉혹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 기조는 앞선 
유럽을 모델로 삼는 서구화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면서, 서구의 
제도나 과학, 기술을 도입하자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이다. 나아가 이슬람의 적절한 
재해석을 통해 화석화되어 가는 이슬람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자는 운동이었다. 
개혁성향의 이슬람부흥주의자들은 항상 대중을 끌어 안고 그들을 계몽했으며, 
필요한 정치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구의 간섭과 에속상태에서 국민경제를 
좀먹고, 민족의 자긍심을 훼손하는 기존 정치세력에 대해 선거혁명을 통해 이를 
뒤엎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러한 저항은 서구지향적인 세속적 정치세력과 그를 
비호하는 서구의 개입으로 번번히 실패하였다. 심지어 선거혁명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도 하루 아침에 '이슬람과 민주주의는 병행할 수 없다'는 서구의 논리에 
의해 강제로 무효화되는 아픔을 경험했다. 이러한 패배의식과 좌절은 일부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을 극단주의와 폭력주의로 내몰았다. 그러나 이슬람 부흥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1400년간 이어온 이슬람 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절대가치와 믿음을 바탕으로 21세기에도 새로운 가치틀로 더욱 성장할 것이다. 


동시에 20년간 지배하면서 착취하고, 그 자원을 배경으로 선진 공업국으로 또 
경제군사대국으로 발돋음한 가진 서구강국이 이제 좀 양보할 때가 되었다. 빼앗긴 
자들의 최소한의 권리와 억울한 응어리에 좀더 유연한 자세로 그들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공존의 기틀이 형성되는 것이고, 극단적인 저항에서 
상대적인 비판과 절충의 단계로 진전될 수 있는 모티브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들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풍토와 시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슬람 세계는 이미 12억의 인구를 가진 어마어마한 
문화덩어리이고, 이슬람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만도 55개국에 달한다. 
세계화라는 절대절명의 명제를 강조하면서 언제까지 서구언론이 자기들 구미에 
맞게 양념된 정보만을 취하면서 우리 바깥의 문제들과 때로는 우리 자신의 
문제까지도 그들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수용하고 있는 무지와 위험상태를 계속할 
것인가? 이슬람은 위험하고,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처럼 호전적인 사람들이란 
이미지 조작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적 본질에 접근하는 
자세가 아니다. 


결국 이슬람 부흥운동은 자신의 종교적 전통과 정신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귀속을 바탕으로, 템포 느린 현대화를 지향하겠다는 바람직한 국민의식 운동이며, 
가장 뚜렷한 자신의 개성을 가진 채 세계를 호흡하겠다는 21세기 '전통과 현대'의 
이상적인 조화와 11억 무슬림들의 이상으로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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