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7일 토요일 오전 12시 05분 50초 제 목(Title): 월간중앙/이덕일 역사속의 명군,명재상 역사 속의 名君과 名宰相(上) 제 284호 1999.7.1 ------------------------------------------------------------------------------- - 위기돌파의 제일책은 인재등용 이덕일 역사평론가 ------------------------------------------------------------------------------- - ‘인사가 萬事’라고 말했던 어느 전직 대통령은 바로 그 ‘인사가 亡事’가 되어 나라와 국민을 IMF라는 고통에 빠뜨렸을 정도로 지도자에게 인사는 중요하다. 인사는 지도자에게 보약이 될 수도 있고 독약이 될 수도 있다. 金大中 대통령은 인사권을 보약으로 활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독약이 되는 것일까. 대통령 자신의 문제보다 대통령이 임명했거나 대통령의 공천을 받아 공직에 나선 사람들 때문에 국민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는 사실은 김대통령이 인사권을 보약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한 도지사 부인의 대학원 수업을 위해 道費를 들여 임대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빌라에서 발생한 요상한 절도사건으로 국민들이 받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장관 부인들과 재벌 부인들의 희한한 밍크옷 사건이 발생하더니, 이번에는 검찰 공안책임자의 노조 파괴공작 발언이 전해지면서 국민은 국민의 정부에 대한 배신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진상은 서로의 주장이 달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통령이 아랫사람들을 잘못 뽑았거나 잘못 다스리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의 고금이나 洋의 동서를 떠나 아랫사람을 잘못 부리고 성공한 통치자는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을 잘 쓰고 실패한 지도자도 거의 없다. 大儒 董仲舒를 등용해 유교정치의 기틀을 잡았던 중국 고대 漢의 武帝가 그랬고, 콜베르(Colbert)를 등용해 국가경제를 안정시켰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그랬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아랫사람을 잘 등용해 성공한 군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군주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다시는 ‘인사가 망사’가 되어 온 국민이 고통에 빠지는 비극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데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통치권 漏水 인사로 막은 善德女王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은 신라 26대 진평왕의 장녀로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은 “삼국사기”에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長大)’했다고 기록된 인물이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는데, 화백회의에서 덕만을 추대해 임금으로 삼았다. 여성의 몸으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의 독특한 골품제(骨品制) 덕택으로, 성골(聖骨) 남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국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성골이라 해도 고대 사회에서 여성인 그가 임금이 되자 반발하는 진골 남성들이 많았다. 당시 신라는 백제·고구려와 항시적인 전쟁상태여서 임금이 직접 말을 타고 전쟁에 나서야 했는데 여자인 그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라가 상국(上國)으로 삼고 있던 당(唐) 태종(太宗)이 신라의 사신에게 “그대 나라는 부인(婦人)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며 쫓아낼 것을 권유해 신라 정가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80년대 초 신군부측의 한 장성이 전두환 제거시 그 지지 여부를 미국 대사에게 타진했었다는 최근의 보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신라의 상국인 당 태종의 이런 태도는 그를 쫓아내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선덕여왕이 내외에서 몰아닥치는 이런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는 비책으로 삼은 것이 바로 명 재상들의 보필을 받는 것이었다. 스스로 갑옷을 입고 싸움터로 나갈 수 없었던 선덕여왕은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진골 출신 장수들을 측근으로 삼아 싸우게 하였다. 이중 김유신은 경주 출신이 아닌 가야의 왕족 출신으로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존재였으나 진평왕과 선덕여왕은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김유신을 요직에 등용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왕을 갈아치우라는 당 태종의 부추김에 힘입은 상대등 비담과 염종(炎腫) 등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를 진압한 인물들은 그가 중용한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여성이라는 자신의 핸디캡을 우수한 인재들의 중용으로 맞섰고, 이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그가 중용한 두 인물은 나중에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비판에 귀기울인 高麗 成宗 고려 제6대 성종(成宗:981∼997) 즉위 초는 혼란기였다. 고려는 호족들의 연합정권으로 출발한 국가여서 왕권이 호족세력보다 약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제4대 광종(光宗:949∼975)이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은 이처럼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광종은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 개국공신 계열의 호족들을 모역죄로 몰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광종은 호족들에게는 저주의 대상이었으나, 양인이었다가 호족들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양인들을 다시 환속시키는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해 관료정치의 기틀을 잡으려 했다.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거두어 광종은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부를 정도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광종의 이런 조치들은 무력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지, 사상이나 제도적인 구조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었다. 즉, 사상이나 법, 제도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무력에 의한 통치였던 것이다. 광종의 뒤를 이어 경종(景宗:975∼981)이 즉위하자 개국공신 계열의 호족들이 다시 등장하고 광종 때 진출한 신진 인사들이 살해되는 등 혼란이 잇따른 것은 인치(人治)의 한계였다. 이런 혼란을 중지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업적을 남긴 인물이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이다. 그 성종의 배경에는 최승로(崔承老)라는 유학자적 정치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냥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경관(京官) 5품 이상은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라”는 명을 내려 정치에 대한 내외의 광범위한 의견을 구했는데, 그 결과 나온 것이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책’(時務策)이었고, 이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 고려 정치의 사상적·제도적 기틀을 잡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최승로가 신라의 육두품 출신이라는 점이다. ‘신은 초야에서 생장하여 성품이 우매하고 또 학술이 없사오나 다행히 밝은 때를 만나…’라는 그의 상소문의 첫 구절은 의례적인 겸손일 수 있지만 그리 보잘것없었던 집안 배경을 솔직히 토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그의 상소문 내용은 그리 겸손하지 않았으며 부드럽지도 않았다. 상소문의 앞 부분인 ‘오조치적평’(五朝治績評)에서 그는 태조 왕건 이래 다섯 임금을 평가하면서 태조 외에는 비판으로 일관했다. 예를 들면 ‘혜종은 만년에 조신(朝臣)과 현사(賢師)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신변에 항상 향리소인(鄕里小人)들만 거처하게 한 것이 큰 실덕’이라는 식이었다. 광종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혹해서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를 시행한 것은 귀족정치에서 관료정치로 나가는 발전적인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쌍기의 등용 이후 “군신 사이에 정사에 대한 논의가 날로 막혀 시정의 득실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라고 격렬히 비난했던 것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일단 반개혁세력의 저항으로 몰아붙이려는 조짐을 보였던 과거의 문민정부나 현재의 국민의 정부 같았으면 최승로의 시무책은 왕권강화를 가로막는 호족세력의 저항으로 몰렸을 것이다. 국왕으로서 일견 타당하지 않은 최승로의 이런 비판은 물론 듣기 싫은 것이었으나 성종은 이런 지엽적인 비판에 분노하기보다 유교정치 체제를 수립하라는 시무책의 요지를 흔쾌히 받아들임으로써 정상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교(釋敎·불교)를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본(本)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원…. 수신은 내생(來生)의 자(資)요, 치국은 금일의 요무(要務)로서, 금일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인데도 가까움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함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라면서, 유교정치 체제를 구축하라는 최승로의 시무책을 받아들인 성종은 이른바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작은 비판에 집착해 큰 것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넓은 시야와 열린 가슴으로 한 신하의 건의안을 받아들였기에 성종은 유교정치체제 구축이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이래 우리 정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방된 언로(言路)였다. 일개 유생에 지나지 않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가 국왕의 위에 자리했던 대원군을 퇴진시킬 수 있었던 나라가 우리나라였다. 그러나 지금 수많은 언론매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언로가 막혔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것은 집권층의 여론수렴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자주 올라온다 하여 ‘열린마당’이란 행정자치부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실명화하겠다는 속좁은 대응이나 하고 있으니 언로가 막히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반대 목소리는 들으려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법이다. 鄭道傳의 머리 빌린 태조 李成桂 대부분의 ‘창업자’ 곁에는 명 보좌관이 있게 마련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는 정도전이 있었다. 만약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변방의 무장이나 중앙의 실력자 정도로 끝났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는 인신(人臣)으로서 군왕(郡王)이 되겠다는 무엄한(?) 꿈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성계가 당시 별다른 인물이 아니었던 정도전을 자신의 오른편에 앉힐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은 그 정도전을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 태조께서 임금 자리에 뜻이 없었는데 정도전이 먼저 추대할 꾀를 내었다.…정도전은 왕씨에게는 충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도전도 자신을 왕씨, 즉 고려의 충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비판은 번지수가 틀린 것이었다. 그리고 정도전에게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할 꾀가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가 그를 오른팔로 삼은 것이란 점에서 이 비판은 이성계의 의중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원나라에 반대하다 권문세족들의 미움을 사 천민들이 사는 회진현 거평부곡에 유배되기도 했던 정도전이 함주(咸州)로 이성계를 찾아와 “이 군사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란 유명한 말을 했던 우왕 9년(1383), 정도전은 그야말로 끈 떨어진 백수 신세였다. 그러나 그 백수의 가슴에는 고려왕조를 부정할 수 있는 사상과 이념이 있었고, 새 왕조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이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건설하는 것이 단순한 반역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역성혁명이란 이념과 명분을 제공했고, 이 이념과 명분이 이성계의 군사력을 혁명무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둘의 결합으로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의 태조(太祖)가 될 수 있었고,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의 설계자가 될 수 있었다. 이성계의 무한한 신임 속에서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잡는 작업을 수행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법적 기틀을 잡았으며, 그의 “경제문감”은 조선 경제의 기틀을 잡았으며, 그의 “감사요약”(監司要約)은 지방행정의 기틀을 잡았다.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은 고려 왕실의 지배 이념이었던 불교를 전면에서 부인했으며, “심기리편”(心氣理篇)은 새로운 왕조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설파했다. 실로 정도전이 없었다면 조선이란 나라의 기틀을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알아볼 만한 안목이 없었다면 정도전은 혼란기의 수많은 재사(才士)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낱 불평불만자로 인생을 마쳤을지 모른다. 이는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인재를 발탁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북방개척을 위한 世宗의 용인술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농사직설” 같은 실용서를 편찬했으며,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체 관측기구를 만들었던 문화의 임금이지만 북방을 개척해 조선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넓힌 영토확장의 임금이기도 하다. 어떤 측면에서는 세종의 북방개척이 더욱 중요한 업적일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의 북방개척은 서로 상반된 두 사람을 등용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세종이 압록강 유역의 사군(四郡)을 개척하기 위해 선택한 인물은 무장인 최윤덕(崔潤德)이었다. 최윤덕은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국경 수비에 나가 있어 천민인 양수척(楊水尺)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자 활을 쏘아 죽인 적이 있었던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다. 당시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방지역은 여진족의 영토여서 조선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세종이 재위 15년(1433) 최윤덕을 평안도절제사로 임명해 사군 개척의 임무를 맡긴 것은 당연해 보이는 인사였다. 그러나 세종이 같은 해 12월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삼은 것은 의외의 인사였다. 김종서는 태종 5년(1405)에 치러진 식년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종실록”에 따르면 김종서는 체구도 자그마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문관을 여진족과 싸우며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함길도 관찰사로 삼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실패한 인사’라는 평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세종의 ‘좌윤덕 우종서’의 북방개척조는 남들의 예상을 깨고 조선의 강역을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확정짓는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세종의 치밀한 계산 덕분이었다. 두 사람을 북방개척의 책임자로 보내기 한해 전인 1432년 세종은 좌승지 김종서에게 최윤덕에 대해 물었다. 이때 김종서는 “사람됨이 비록 학문실력은 없으나 마음가짐이 정직할 뿐 아니라 뚜렷한 잘못이 없으며, 무술은 특히 뛰어나다”고 대답한다. 세종은 이에 “전조(前朝·고려)와 국초(國初)에 간혹 무신(武臣)으로서 정승이 된 이가 있으나, 어찌 그 모두가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 그는 비록 수상(首相·영의정)이 되더라도 좋을 만한 인물이다”라고 맞장구쳤다. 이는 세종이 이미 두 사람을 북방개척의 적임자로 점찍어 놓고 서로 보조를 맞출 만한 사이인가를 점검해 본 것이다. 세종은 훗날 문관인 김종서를 북방개척의 적임자로 꼽은 이유를 그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함길도는 오랑캐 땅에 연해 있어 수비와 방어의 중요성이 다른 도와 비교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 새로 설치한 군·읍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경(김종서)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있으며, 일찍이 내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내 뜻을 자세히 알아서 중대한 임무를 맡길 만하기에 도관찰사로 삼았다가 또 도절제사로 옮겼다.” 이처럼 북방 개척은 현군 세종과 무관 최윤덕, 문관 김종서의 합작품이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반된 성향의 두 사람을 북방개척이란 하나의 목적에 종사하도록 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세종의 치밀한 용인술이었다. 개혁군주 정조와 개혁재상 채제공 조선 후기의 정조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시 집권당인 노론과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다 노론 강경파의 정치공세에 밀려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조반정(1623) 이후 정조 즉위 때(1776)까지 노론은 짧은 남인 집권기를 제외하면 무려 1백50여년을 집권한 정당으로서 그 권세가 왕권을 능가할 정도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강경파는 그의 아들(정조)이 즉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조 앞에서 ‘세손(정조) 제거’를 공개적으로 주장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자객을 정조의 침실 지붕에까지 들여보냈을 정도였다. 정조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도 인사였다. 그는 당시 조정을 노론이 장악한 현실을 감안해 노론 강경파의 김종수(金鍾秀)와 노론 중도파 윤시동을 적절히 기용해 고립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뜻은 재위 12년 우의정에 발탁한 남인 채제공(蔡濟恭)에게 있었다. 그리고 한창 성장하던 이가환·정약용 같은 남인 신진관료들에게 있었다. 만년야당이었던 남인들은 현실에 불만이 많았으므로 당연히 개혁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를 개혁의 시기라고 판단한 정조의 뜻과 같은 것이었다.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이가환·정약용은 단순한 군신관계가 아니라 개혁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동지적 관계이기도 했다. 정조와 채제공 사이의 남다른 관계는 중국 송(宋)나라의 정치가 왕안석(王安石)에 대한 평가에서도 엿보인다. 송나라의 청년 황제 신종(神宗)은 개혁적 재상 왕안석을 등용해 펼친 ‘왕안석의 신법’(新法)으로 나라의 부강을 꾀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저리의 자금을 꾸어 주고 가을에 환수함으로써 고리대금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려 한 청묘법(靑苗法), 도시의 중·소 상공인을 구제하기 위한 시역법(市易法), 병·농일치제를 지향한 보갑법(保甲法) 등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왕안석의 이런 개혁적 조치는 지주나 대상인, 관료 등 기득권층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다. 급기야 송나라 정계는 왕안석의 신법을 지지하는 신법당과 이를 반대하는 구법당(舊法黨)으로 양분되었다가, 결국 사마광(司馬光)이 이끄는 구법당이 승리하고 왕안석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자들은 급격한 개혁을 꾀했던 왕안석은 나라를 망친 소인으로 비판한 반면, 왕안석의 신법을 뒤집었던 사마광은 나라를 구한 군자로 칭송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조선 사대부들의 역사인식이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은 사마광과 왕안석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정조 15년(1791)의 한 조강(朝講)에서 정조는 사마광과 왕안석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사마광(司馬光)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한 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가. 송나라 신종의 정치 중… 병제(兵制)를 변통한 것과 같은 것은 실로 좋은 법인데 어찌 모두 폐지해 결국 융정(戎政·군정)이 떨치지 못하고 국력 더욱 약해지게 했는가. 왕안석에게 나온 것이라면 꼭 서둘러 폐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지나쳤는가. 정자(程子)가 ‘우리가 그를 격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한 말이 진실로 대현인의 공평한 말씀이며 공평한 마음이다.” 정조의 사마광 비판에 채제공이 동조하고 나섰다. “요즘 유자들의 논의는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비교할 수도 없다는 것인데 이는 정말 편협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 사마광은 신법이 백성들을 뒤흔든 뒤에 나서게 되었으므로 마치 청렴한 관리가 탐욕스러운 관리의 뒤를 이어 쉽게 청렴하다는 이름을 얻은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온 천하가 지금까지 그를 칭송하니 좋은 팔자라고 하겠습니다. 구법을 바꾸는 것은 극히 어렵지만 신법을 혁파하는 것은 극히 쉬운 법이니, 어찌 사마광의 재간이 왕안석보다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겠습니까.” 이에 정조도 동의했다. “그렇다. 유신들은 비록 송 신종이 적임자를 쓰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당시 천하의 형세가 크게 쇄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고 훌륭한 정치를 꾀하면서 굳게 마음을 먹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한 무제(漢武帝) 이후로는 오직 송 신종만이 일을 일답게 해보려는 뜻을 가졌었다고 여긴다.” 정조와 채제공은 이처럼 기득권층인 노론과 달리 당시를 크게 쇄신할 때, 즉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칠 때라는 시대인식을 가지고 보수적인 기득권층에 맞서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채제공은 노론과 결탁한 소수 대상인들이 소상인과 소상품 생산자들의 상품 판매를 막던 금난전권(禁難廛權)이란 폐쇄적인 특권을 대부분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정조 15년(1791)에 단행할 수 있었다. 신해통공은 양반 지주들과 결탁해 특권을 누리던 일부 상인들이 독점했던 폐쇄적인 유통경제구조를 직접 생산자인 일반 농민과 공인들, 그리고 소상인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개방적인 유통경제구조로 바꿈으로써 조선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기득권층의 이해와 맞서 개혁을 추진할 때는 이처럼 개혁을 자신의 역사관으로 가진 사람을 등용해 수행할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다. 그러나 개혁을 화두로 내걸었던 문민정부나 지금의 국민의 정부 안에 개혁을 역사관으로 가졌다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과거를 지닌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평생 동안 권력의 양지만을 좇았던 해바라기성 인사들에게 개혁을 주문하니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부패한 사람의 딸은 궁중에 둘 수 없다”했던 太宗 세종 3년(1421)에 평안도 관찰사였던 김점(金漸)은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김점은 태상왕 태종이 총애하던 숙공궁주(淑恭宮主) 김씨(金氏)의 친정 아버지여서 세종은 고민했다. 이에 태종은 궁주를 내보내면서 근신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김점의 범죄를 유사가 국문하는 중인데 만약 그 딸이 궁중에 그대로 있다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의 은(恩)이 두가지로 혐의될 것이다. 내가 이제 궁주를 내보내는 것은 점(漸)을 다른 여러 사람들과 같이 대하려는 뜻이니 유사(有司)도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예로 다스리라.” 태종은 김점의 아들 호군(護軍) 김유손(金宥孫)을 불러 누이를 데려가도록 명령했다. 이원이 내보내서는 안된다고 반대하자 태종은 “탐장질한 사람의 딸은 궁중에 둘 수 없는 것”이라면서 쫓아내고 말았다. 김점의 혐의가 채 밝혀지기도 전에 그의 딸을 궁중에서 내쫓은 것이었다. 이때는 김점의 혐의가 입증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마녀사냥이 아니라 고위 공직자들은 그런 혐의를 받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엄격함의 발로였다. 수신(修身)·제가(齊家)도 못한 범인들이 치국(治國)하겠다고 설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런 엄격함은 백번 강조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1999.7월호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