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4일 수요일 오후 02시 20분 22초 제 목(Title): 김세균/서평 홍근수,기독교는 민족의.... 서평: 홍근수, [기독교는 민족의 희망인가], 도서출판 세훈, 1997 서평을 쓰게 된 필자는 때때로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비종교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종교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러나 내세에 대해서가 아니라, 종교가 현세에서 행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이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서는 먼저 '개인 구원'이 문제된다. 개인 구원의 문제는 대체로 다음의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삼을 수 있을 것같다. 그 첫째는 이 지상에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의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는 것인데, 이런 류의 행위는 종교를, 완곡하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로 떨어뜨린다. 이 경우 종교가 행하는 사회적 역할이란 한마디로 반동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핍박과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것인데, 이 경우 종교는 최소한 주관적으로는 자신이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일이 아무리 절실하고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 위로가 현세의 잘못된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그 행위는 설령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종교를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로서 기능토록 만든다. '내세에서의 구원론'을 내세우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탈현세적 구원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의 문제에 눈을 감도록 함으로써 역으로 그들이 현세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이 경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비난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개인 구원'이 아니라, '사회 구원'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 구원'의 이름으로 현실세계의 지배-피지배관계 및 착취-피착취관계를 정당화하는 데에 앞장서거나, 지배-피지배 및 착취-피착취의 관계의 페기에 대해 말함이 없이 지배자와 피지배자, 착취자와 피착취자들의 화해 등에 대해 설교한다면, 그것은 사회구원의 이름으로 사회구원을 가로막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런 행위는 개인 구원을 위해 그들의 영혼이라도 달래는 것 보다 실제로는 사회적으로 더 많은 해악을 키치게 된다. 이 점에서 그 이름에 합당한 사회구원의 종교란 기득권층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고통받는 다중을 위한 종교가 되어야 것이며, 다중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들을 고통받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의 변혁에 적극 기여하는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홍근수목사가 주로, 1991년 2월에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1년 6개월 간의 징역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한 이후에 쓴 글과 강연문들을 모은 이 책은 다중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다중을 고통받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의 변혁에 기여하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보기드문 사회구원의 복음서이다. 그는 기독교가 '세상을 섬기는 종교'이며( 145-155쪽에 실린 "기독교는 세상을 섬기는 종교이다" 참조), '개인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사회 구원의 종교'임을 힘주어 강조한다.(무엇보다 156-168쪽에 실린 "개인적 구원인가? 사회적 구원인가?" 참조) 그런데 사회 구원의 참 내용은 '인간의 삶과 세상-사회에 하느님의 나라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 해방과 자주, 정의와 평등, 화해와 일치(통일), 사랑과 평화가 구체적인 현실로 구현되는 인간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167쪽 이하) 다시 말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해방과 자유의 복음, 평등과 정의의 복음, 평화와 통일의 복음이라는' 점에 있으며, '기독교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머리말) 이와 관련하여, 그는 '사회정의와 평등에 토대하지 않는 평화란 가짜 평화이다'라고 말한다 (222쪽). 이와 같이 그는, 해방과 자유, 평등과 정의에 대해 말함이 없이 단지 화해와 일치, 사랑과 평화에 대해서만 말하는 '사이비 사회구원론자'들과는 달리, 화해와 일치, 사랑과 평화란 오직 해방과 자유, 평등과 정의가 구현되는 토대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서도 실현시킬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복음이란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가로막는 제반 질곡들을 타파하기 위해 나설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복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사회구원을 말하면서 사회구원을 가로막는 질곡을 타파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을 무시하는 '탈정치적 사회구원론자'들과도 자신을 명백히 구분지우고 있다. 해방과 자유, 평등과 정의 및 평화와 통일의 기독교를 주창하는 그는 당연하게도 우리 사회와 우리 민족의 문제로 그의 관심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말하고 있는 모든 주장들의 내용들은 최종적으로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문제로 집약되고 있다. 이때 그가 말하는 민주화란 고통받는 노동자와 농민들, 정치적 박해를 받는 양심수들이 사라진 사회, 반공주의, 군사주의,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제반 사회적 모순들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관계들이 극복됨으로써 자유와 창의력이 제한없이 발현되고 인간들 간에 관심과 사랑, 존중과 인정이 넘치는 진정한 민주적 공동체로의 이행을 뜻한다. 이 점에서 그가 말하는 민주화란 '문민정부'의 수립 정도로 민주화의 과제가 거의 다 종결된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이비 민주화론자들이 말하는 민주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한 그는 남과 북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수렴하는 통일, 새로운 가치와 문화, 새로운 사회구조와 공동체를 창조하는 통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가 대변하는 민족통일은 북한을 단지 새로운 선교대상 지역으로 여기거나 북한의 붕괴를 유도해 북한을 남한에 병합하려 하는, '통일'의 참 뜻을 훼손하는 '반통일적 흡수통일론자'들이 말하는 민족통일과도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다. 홍근수 목사가 대변하는 신학적 입장은 '사회구원의 신학', '정치 신학', '해방과 자유, 평등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와 통일의 신학'이다. 그는 그러한 신학만이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시키고,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 전체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참다운 '희망의 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보수적 기독교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 비추어 '과연 기독교는 이 민족을 위하여 유익을 끼쳐왔는가, 아니면 이 민족을 망치고 있는가?"(90쪽)라고 질문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쿼 바디스 도미네?'를 질문하면서 '네가 버리고 가는 로마로 가고 있다.'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91-94쪽에 실린 "쿼 바디스 도미네" 참조) 그는 박해받고 있는 이들의 곁에 있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길로 나서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길은 동시에 기독교 자체를 구원하는 길,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가는 길은 종교적 소속을 넘어서, 그리고 종교인인가 비종교인인가를 떠나서 해방과 자유, 평등과 정의, 평화와 통일의 세계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협력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연대와 협력만이 사회구원을 가능케 하는 길이며, 우리 모두가 자신의 종교적, 인종적, 성적 차이 등을 넘어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적 공동체, 인류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1997년 5월 5일 작성)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