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3일 화요일 오전 02시 25분 14초 제 목(Title): 박노해/금강산에 울다 '금강산도 식후경' 분단 현실의 풍경이었습니다. 9. 금강산에 울다(上) 서해에서 남북이 불을 뿜던 날 나는 동해 뱃길로 금강산을 다녀왔다. 내 인생을 통째로 짓눌러온 분단, 꿈에서도 몸 떨리던 북한 땅을 조용히 가슴으로 밟아보고 싶었다. 그림 '임옥상' = '아! 상팔담(上八潭)', 캔버스에 아크릴릭 73X91cm. "지금 우리는 금강산 관광을 가는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통일로 가는 역사 위에 올라 서 있는 것입니다. " 강만길 교수님이 한 말의 울림을 느끼며 봉래호에 몸을 실었다. 배 위에는 자녀들이 효도관광을 보내줘서 왔다는 주름진 노인들이 많았다. 기왕이면 굶주린 북한 동포들에게 도움이 되는 신혼여행을 하자고 나선 젊은 쌍들,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온 성직자들, 관광선을 타고서라도 고향땅을 밟아 보겠다는 실향민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순전히 금강산 유람이 목적인 듯한 아줌아.아저씨들이 시끌벅적 들떠 있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사연과 생각으로 한 배에 오른 사람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배를 탔다" 는 말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왔다.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붉은 노을이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스쳐 지나가는 파도, 뱃전에 부서지는 하얀 물살, 갈매기가 날고 멀리 고깃배들이 평화롭게 귀항하고 있었다. 작은 연못 같은 동해 바다를 벗어나 저 광활한 북태평양을 향해 이대로 몇 날 밤이고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북분단은 대륙으로 가는 길만 끊어 놓은 것이 아니라 해양으로 가는 상상력도 막아 놓은 것이었다. 땅 위에서만이 아니라 바다에까지 경계를 긋고 철조망을 쳐 놓은 인간들. 우리는 반세기 동안 세계에서 단절되고 고립된 채 분단된 섬에 갇혀 살아온 셈이었다. 오전 3시쯤, 배는 고동조차 울리지 않고 바다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나갔다. 반세기 동안 가로막힌 시공의 두께는 그렇게 간단히 뚫어지고 마침내 북한 영해였다. 아침. 드러났다. 설마 했던 것들이. 처음 본 북한 땅. 퇴색하고 가라앉은 잿빛 항구.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곳. 태고처럼 무거운 정적. 장전항은 북한 해군의 최전진 기지라고 했다. 그때였다. 아침 바다를 가르며 50여 척의 북한 어선들이 나타났다. 낡을 대로 낡아 검게 녹슨 작은 배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멀리 갈 것 같지 않은 느릿한 행렬. 그르렁거리며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불안한 엔진소리들. 작은 어선에 너무 많이 타고 있는 남루한 옷의 어부들. 배도 사람도 옷도 온통 어두운 빛인데 색깔이라곤 뱃전에 꽂은 빛 바랜 붉은 깃발뿐. 타이타닉처럼 호화로운 초대형 관광선 갑판에서 내려다보는 원색의 사람들과 마주 쳐다보는 저 낡고 녹슨 배 위에 쭈그려 앉은 무채색의 사람들. 경제성장이 제일이라고 마구 개방해서 자기 줏대를 잃어가는 화려한 반쪽과 민족주체성을 내걸고 철저히 닫아걸어 앙상하게 퇴색해버린 반쪽. 이토록 선명한 대비가 있을까. 이토록 비극적인 상면이 있을까. 나는 굳어진 얼굴로 장전항 부두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암스트롱은 달나라에서 왼발을 먼저 내려놓았다는데 박선생님은 북한 땅에서 어느 발을 먼저 딛었어요?" 남쪽 안내원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금강산 가는 길은 철조망 길이었다. 장전항에서 온정리로 관광버스가 달리는 길을 따라 양편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여기까지도 분단이었다. 현대자본은 이 폐쇄된 땅을 뚫고 철조망 사이로 이른바 '현대회랑 (回廊)' 을 구축하고 있었다. 50년 걸려서야 휴전선은 여기까지 후퇴한 셈인가. 나는 사회주의 북한 땅에 와서 자본의 위력을 전율하며 실감했다. 도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북한 병사들이 권총을 찬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굽이굽이마다 불쑥불쑥 나무토막처럼 굳은 표정으로 버스만 응시하고 서 있는 군인들.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무표정한 저 모습. 차라리 적개심이나 냉소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저 무표정한 얼굴. 인간의 표정이란 그가 사는 공동체의 분위기를 집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체험과 감성과 지성이 삶 속에서 무르익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 앳된 군인들의 굳고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나는 그 무표정 앞에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철조망 너머로 온정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을 에워싼 산들은 민둥산이었다. 쓸 만한 나무를 다 패버리고 다락밭을 만들어 놓은 게 눈에 들어왔다. 논이건 밭이건 땅은 푸실푸실 힘이 없어 보였다. 땅에서 자라는 작물도 그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느릿느릿 힘이 없어 보였다. 힘있는 건 오직 무기와 군인들과 구호뿐이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자력갱생" "강성대국"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 .그러나 그 힘 있어 보이는 것들조차 가만히 들여다보면 속이 허한 슬픔이었다. "이곳은 관광특구라 형편이 나은 셈이지요. " 연변 조선족 출신 운전기사가 귀띔했다. 밭을 매는 아낙네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가는 사람들, 들것으로 돌을 나르는 사람들, 모두가 생기가 없었다. 학교 다닐 나이의 아이들은 무얼 찾는지 보퉁이 하나씩을 들고 헐벗은 동산과 개천과 들을 헤매고 있었다. 빛 바랜 사진첩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모습들. 새 천년을 앞둔 '같은 시간' 에 이렇게 '다른 시간' 을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암울한 회색 공간을 가로지르며 산뜻하고 세련된 빛깔의 최신식 현대관광버스 50대가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회색의 북한 주민들과 원색의 남한 관광객들이 서로 동물원 구경하듯 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생물종을 대하는 듯 낯섦과 호기심과 묘한 경계심이 뒤얽힌 시선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사파리 관광' 이었다. 마침내 금강산에 올랐다. 금강산은 금강산, 감히 상상조차 허락하지 않은 산이었다. 나는 만물상.옥류동.구룡폭포 가는 길을 두발로 걸어서가 아니라 오체투지 (五體投地) 로 절하며 가고 싶었다. 옛 사람들이 "제 아무리 악한 사람도 금강산엘 다녀오면 착한 본성이 찾아든다" 고 했다더니, 과연 금강산은 절경이었고 민족의 영산이었다. 가파른 바위 계단을 숨차게 오르고 올라 마침내 상팔담에 섰다. 상팔담 전망대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 내려다보았다. 아득한 낭떠러지 아래 거대하게 누워 있는 하얀 암반, 그 사이 사이 눈이 시리게 푸른 연못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선녀와 나무꾼의 설화가 나온 곳이라 했다. 팔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여덟개의 푸른 연못이 줄지어 흐르다 구룡폭포로 쏜살같이 떨어져 내렸다.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하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것일까. 문득 그 황홀한 연못을 향해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저 아득한 낭떠러지로 내 몸을 던지면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만 어깨에 날개가 돋아 훨훨 선계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홀려버린 정신을 가다듬어 고개를 들어 보니, 아 거기 또 한 세계.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이 장엄하게 흰 이마를 빛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월출봉, 일출봉, 멀리 만물상이 첩첩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이 깊고 깊은 산. 더는 깊어질 수 없어 온 세상을 다 품에 안아버릴 듯한 우리들 마음의 산. 기나긴 분단의 시간, 완강한 인간의 제도를 뚫고 뚫어서 기필코 열어가야 할 우리의 미래상이 아닌가. 상팔담에 앉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어버렸다. 사무치는 아름다움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이 솟아 흘렀다. 환희심의 눈물, 맑고 뜨거운 슬픔의 눈물. 나는 다시 가파른 현실로 내려와야 했다. 상팔담 건너 동산만한 흰 바위에 "금강산은 조선의 기상입니다" 라고 엄청나게 크고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순결한 금강산의 가슴팍에 꽝꽝 글씨를 못박는 저 담대함. 비바람이 지운다면 아마도 천년 만년은 걸리리라. 불멸의 새김, 불멸의 욕망. 갑자기 내 가슴팍에 쇠정을 꽝꽝 박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적.막.강.산! 아, 다시 보니 금강산은 죽은 산이었다. 금강산에는 사람이 없었다.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있고 추억이 있어 명산이 아닌가. 금강산을 전세내 버린 울긋불긋한 차림의 남쪽 관광객들만 오르내릴 뿐, 이 좋은 산천에 놀러온 북한 주민은 단 한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이 몸서리치게 다가왔다. 굶주린 산천에 앉아 현대에서 나눠준 보온 도시락을 열었다. 눈물은 아래로 흘러도 밥숟갈은 위로 올라간다더니. 그날 저녁 배로 돌아와서 난생 처음으로 폭탄주라는 걸 마셔보았다. 취하고 싶었다. 마구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검은 수평선이 밝아올 때까지 나는 바람 찬 갑판을 걸어다니며 울었다. (다음 주에 下편이 이어집니다) 글·시인 박노해 ------------------------------------------------------------------------------- - Copyright 1999 중앙일보,중앙일보뉴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Contact the webmaster for more information "형님, 이 동생 잊지 마시라요" 10. 금강산에 울다(下) 금강산 계곡에 흐르는 물빛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초록에 가까운 옥색, 그 위에 햇살이 어리고 산바람이 물살을 흔들어 오묘한 무늬와 색감을 자아낸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속세의 때를 벗고 선기 (仙氣)가 푸르게 차 오르는 듯하다. 그림 '임옥상' = '만월'. 흙 위에 아크릴릭. 100X63cm. br> 투명한 물빛에 젖어서일까. 유난히 표정이 환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반갑게 와 닿았다.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던지 먼저 말을 건넸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으면 안될까요?" 북쪽 안내원의 허락없이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벌금을 물린다고 해 조심스레 동의를 구한 것이었다. 그러자 남성 안내원이 "근무 중입네다" 라고 미안한 듯 웃으며 거절하는데, 그 느낌이 의외로 부드러웠다. "금강산은 정말 아름답네요.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찹니다" 하고 말문을 열었더니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은 겨우 두 길만 본 거이지요. 금강산 오르는 길은 스물 세 개 큰길에 수백 갈래 길이 있고 철마다 날씨마다 각양각색입네다. " 그러면서 그는 내 목에 걸린 관광신분증을 슬쩍 보더니 목소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 직업이 시인입네까? 저도 시를 쓰고 싶어서 금강산 근무를 지원했는데…금강산을 그려낼 좋은 시상을 찾으셨습네까?" 마침 일행 중 한 사람이 대화를 거들어 "박노해 시인 모르세요? '노동의 새벽' 이란 시집을 내고 오랜 세월 감옥살이 하다가 얼마 전에 석방됐는데" 하고 나를 소개했다. 그 안내원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훌륭한 애국자 시인을 만나 너무 반갑다며, 어떻게 석방돼 금강산까지 올 수 있었느냐, 임수경 학생이 가정을 가졌다는데 소식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오민욱이라는 이름의 그 젊은이는 스물 세 살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9층 살림집 (아파트)에서 산다는 얘기도 했다. 민욱이의 꾸밈없는 솔직성에 이끌려 나도 내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금세 친해져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민욱이는 오랫동안 품어온 듯한 물음들을 쏟아놓았고 북쪽 젊은이의 그 진지함과 순정한 열정에 나도 성심껏 답을 했다. "금강산 관광 오는 사람들은 계급성분이 어찌 되는가요? 대부분 잘 사는 상층계급이디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중산층이나 서민층, 농사짓는 분들이 많고 효도관광이나 신혼여행 온 부부들이 많지. 부유층은 오히려 적은 것 같던데. "지금 남조선에서는 굶어 쓰러진 노숙자들이 서울 시내에 가득하고 실직노동자들이 항쟁에 나서며 피 흘리고 있지 않습네까?" 국제통화기금 (IMF) 실직으로 노동자 서민층이 살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야. 빈부 차이도 더 벌어지고 있어. 그래서 분노한 민심이 개혁을 제대로 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지. 하지만 노동자나 실직자가 굶어 죽거나 맞아 죽는 정도는 아니야. "정권이 바뀌었다는데 무슨 의미입네까? 통일전망이 더 밝아진 것으로 봐도 되는 겁네까?" 글쎄, 김대중 정부는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 정권교체 해봤자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민욱이와 내가 이렇게 금강산에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김대중 정부와 미국이 기회만 잡히면 북조선을 무력 침공하려는 것 아닙네까?" 전쟁을 걱정하는 민욱이 마음을 나도 충분히 이해해. 코소보의 끔찍한 살육과 참상을 민욱이도 알겠지. 저게 바다 건너 남의 일만이 아니야. 미국이 전쟁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충돌이 얼마든지 전쟁사태로 치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다시 전쟁이 터지면 우리 겨레에겐 정말 미래가 없어. 그러니 남과 북의 작은 무력충돌조차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남조선이 돈 많다고 흡수통일할 것 아닙니까? 우리 공화국의 좋은 땅과 잘 생긴 여자들을 돈으로 다 차지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 되면 정신 똑바로 박힌 우리 공화국 젊은이들은 모두 장백산에 들어가 유격전을 벌일 것입네다. " 그래, 그렇게 되면 안되겠지.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이나 어느 한 쪽이 한 쪽을 통째로 먹으려 든다면 새로운 전쟁과 갈등을 초래하겠지.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의 장점을 살려가고 합해 나가는 통일이 돼야겠지. 지금 이 금강산 관광은 현대 정주영 회장의 힘이 큰 역할을 한 거야. 그럼에도 재벌이 주도하는 통일, 돈이 지배하는 통일조국의 미래는 전혀 바람직스럽지 않아. 그렇게 되면 북한은 내부 식민지 꼴이 되고 우리는 또다시 내전의 불씨를 안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적화통일이 된다면 민주화 투쟁을 해 온 남쪽 사람들은 다시 6월항쟁처럼 들고 일어날 거야. "그렇다면 형님은 통일의 방도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민족자주성에 입각해야 한다, 평화통일해야 한다, 민족대단결에 기초해야 된다고 수령님이 천명하신 민족통일의 3대원칙이 우리의 방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네까?" 그래, 남북합의서 정신도 김대중 정부의 통일방안도 김주석 말씀과 다르지 않아. 문제는 우리가 서로 오가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좋은 것을 서로 배워가는 실천이라고 생각해. "형님, 그런데 지금 이런 말씀 남조선에서 하면 반동으로 몰려 감옥사는 거 아닙네까? 저 같은 사람과 친밀하게 대화한다고 주시받는 건 아닙니까? 돌아가서 또 박해받으면 어쩌지요?" 물론 거부감을 나타내는 세력도 있겠지. 그러나 이런 얘기가 뭐가 잘못이지? 남쪽 국민 대다수는 나와 같은 생각일 거야. 내가 얼마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통일강연을 했어. 그 자리엔 이북5도민회.자유민주총연맹.보수언론.국가정보원.검찰관계자부터 재야단체와 한총련학생들, 그리고 중.고생들까지 가득 찼는데 지금 말한 내용 그대로 소신껏 얘기했어. 남과 북, 좌와 우의 두 날개를 아우르는 '건강한 몸통' 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선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로 공감했지. 민욱이 와 나의 열띤 토론을 불안스레 지켜보던 아내가 곁에 있던 여성 안내원을 쳐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요즘 북쪽에선 어떤 노래가 인기인가요?" 그러자 정순복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여성은 "전혜영의 '휘파람' 이 최고 인기지요. 남조선 노래도 부르는데 최진희 가수의 '사랑의 미로' 가 인기지요. 저는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 이란 노래를 좋아합니다." 나는 순복이를 돌아보며 "처녀 아가씨가 휘파람불고 바람 좋아하다가 진짜 바람나면 어쩌지요?" 우스개를 던졌다. 순복이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고운 눈매로 나를 흘기며 "제가 사람 잘못 봤구만요. 애국시인인 줄 알았더니 바람시인이구만요" 했다. 우리는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어느덧 금강산 계곡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작별이 아쉬워 초조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얼마전 유럽 다녀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벨기에로 프랑스로 검문소도 없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오가는 유럽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인생을 넓게 사는가. 우리 남북한의 젊은이들도 서로 자유롭게 다니고 어울려 놀면서 넓은 세상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일본에서 해저터널로 서울까지,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만주벌판과 유라시아 초원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자유롭게 오가면서 우리 삶의 공간을 넓힌다면 좁은 반도에 갇혀 아옹다옹 싸우는 현실이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아아, 우리가 이렇게 가슴을 열면 서로 통할 수 있는데 불신과 적대감만 쌓아가다니…. 민욱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꽉 잡았다. "형님, 이 동생 잊지 마시라요. 통일되면 꼭 다시 만나자요. " 어느새 내 눈도 젖어들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걷다가 돌아보고 또 뒤돌아 보고…. 민욱이는 멀리서 손 흔들고 절하고 또 손을 흔들고…. 금강산을 두고 떠나는 길에, 철조망 너머 아이들이 손을 흔든다. 주민들도 일손을 멈추고 손을 흔든다. 버스에 탄 관광객들도 손을 흔든다. 부동자세로 무표정한 군인들에게도 손을 흔든다. 저 완강한 무표정은 어쩌면 얇은 얼음 한 장이다. 머지 않아 때가 오면 우리 민욱이의 얼굴처럼 풍부한 호기심과 열정 어린 눈빛으로 싱싱하게 피어날 것이다. 언 땅이 녹아내리면 다시 푸르게 살아나는 대지의 얼굴처럼. 그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손을 흔들어야 한다. 비록 서해에서는 남북이 대치하더라도 동해에서는 금강산 뱃길이 열려야 한다. 가시덤불도 자꾸만 오가면 길이 된다지 않는가. 나는 금강산에서 세 번 울었다. 금강산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장엄한 기상 앞에서, 북녘의 힘없는 동포들과 앳된 군인들의 굳은 무표정 앞에서, 그리고 한 핏줄의 끌어당김으로 애타게 흔드는 저 손들을 보면서. 그렇다. 금강산은 되살아나는 희망이다. 금강산의 힘, 아름다움의 힘이 저 강고한 인간의 이념과 제도를 넘어 서로 오가고 서로 손을 맞잡게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금강산을 '통일의 영산' 으로, 용서와 화해를 상징하는 세계인의 순례지로 길이길이 빛낼 수 있다면. 글·시인 박노해 ------------------------------------------------------------------------------- - Copyright 1999 중앙일보,중앙일보뉴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Contact the webmaster for more information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