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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0일 토요일 오전 01시 45분 31초
제 목(Title): 퍼온글/웅계지명분포


 熊系, 고마系 地名 分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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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진한(辰韓)'에 보면 최치원(崔致遠)의 말을 
인용하여, 이주(移住)해온 진한(辰韓) 사람들은 자기들이 전에 살던 '탁수'의 
지명을 본따서 그들의 지명으로 삼았다는 기사(記事)를 볼 수 있다.(1) 이처럼 
과거 선사인(先史人)들이 거주하였던 곳에는 지명(地名)을 그들의 언어(言語)로 
이름지었는데, 그 지명의 자취를 쫓아보면 그들의 이동 경로 또한 알아낼 수 있다. 
특히 산과 강의 이름은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문화 전파의 
속도가 느린 내륙의 산간(山間) 지방의 경우, 도시나 인구 집중지역에 비하여 좀더 
과거의 명칭이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점을 토대로 남한 내에서 '곰'의 옛말에서 
파생(派生)되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지명들을 조사하여 모아 보았는데, 
뜻밖에도 일정한 짜임새와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우선 작업과정은 '곰'에서 파생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내어 
표기(標記)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곰'이 한역(漢譯)되거나 '곰'을 그대로 
사용한 웅계(熊系)와, 곰과 관련있는 어휘(語彙)가 음역(音譯)된 '고마'계(系)로 
나누었다. 웅계지명(熊系地名)은 김성호(金聖昊)의 지명분포도 (2)를 참고하였고, 
나머지는 주로 필자의 생각으로 가능하다 싶은 것을 모아 놓았다. 이중에는 전혀 
다른 기원(起源)으로 형성된 지명이 있겠지만, 분포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크게 어긋나지 않거나, 가능한 범위에서 반복되는 지명을 
포함시켰다. 특히 '구마'계열은 '구모'와 '구미'계열 등으로 세분화(細分化)되어 
각각의 의미(意味) 또한 '곰'과는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곰'이라는 
존재(存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여 같은 계열로 묶어 놓았으며, 
'금암(金岩)', '금학(金鶴)', '갈마(葛馬)', '금(金)', '검(儉)', '감(甘)'계열은 
같은 계열이라 하더라도 시기적(時期的)으로 후기(後期)라 여겨져서 대부분 
제외하였다.(3) 

지도(地圖)는 한자(漢字)가 표기되어 있는 한국도로지도 (韓國道路地圖)(4)를 
참고하였으며, 이미 10년 전에 제작된 것이라 현재 그 중에는 
행정구역(行政區域)이 변경된 것이 많이 있을 것이지만 형편상 지도 그대로 
기재(記載)하였다. 언어학(言語學)과 역사(歷史)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필자로서는 사실 역부족이지만, 나름대로 이를 통하여 불확실한 
선사시대(先史時代)를 조금이나마 알아내고자 과감히 시도(試圖)하는 것이니, 
잘못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주기 바라며, 이에 대한 아낌없는 지도(指導)와 
편달(鞭撻)을 바라고 있다. 

고대 문헌(文獻) 사료(史料)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주서(周書) 북사(北史), 위지(魏誌) 마한조(馬韓條) 등의 고전(古典)에서는 '곰'을 
음역(音譯)하여 금마(金馬), 고마(古麻), 고마(古馬), 고막(古莫), 고미(古彌), 
감물(甘勿), 곤미(昆彌), 지마(只馬), 금미(今彌), 고마(固麻), 개마(蓋馬), 
구마(久麻)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문헌(文獻)에 자주 등장하는 예맥(濊貊)은 
호맥(胡貊) 이라고도 하는데, 예맥(濊貊)의 고대 중국음이 '구모(kuai-mo)', 
'고마이(khouei-mai)'이며, 현대음은 '호마이(houei-mai)'이다. (5) 
고(古)아시아의 언어인 알타이 어(語)에서 크고 유일하다는 의미의 '하나' 또는 
'한'은 아시아의 각 지방에서 음역되어 주로 군주(君主)와 왕(王)을 뜻하는 
어휘(語彙)가 되었다. 유사(有史)이래 유일하게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몽골의 
제왕(帝王)을 '징기스칸(成吉思汗, zhinghis-khan, genghis-khan)'이라 
칭하는데에서 알 수 있듯이, 만주(滿洲)와 몽고(蒙古, mongol)에서는 군장(君長) 
또는 대인(大人)이라는 의미로 '한(汗, han)' 또는 '가한(可汗, khahan)'이라 
불렀으며,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가(加, kha)', 신라(新羅)에서는 
'간(干, khan)', '금(今, khum)', '감(邯, kham)'이라 (6) 하였다. 또한 
환웅(桓雄)이나 한국(韓國, 桓國)의 '한(桓, 韓, han)'도 위대한 '군주(君主)' 
또는 '그가 세운 나라'라는 의미이며, 이에서 비롯된 것이 현재에도 사용하는 
해(太陽, hae), 하늘(天, hanul), 하나님(하느님, 한울님, 하늘님, 神, 天帝, 
hananim), 할아버지(祖父, halaboji), 할머니(祖母, halmoni) 그리고 '한밭(大田, 
hanbat)'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이 '한(桓, 韓, 汗, han)'과 '간(干, khan)'의 
어원(語源)이 같고, '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의 전음(轉音)으로 알려져 
있으며, (7) 동시에 '고마이'를 '호마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모두 같은 언어 
체계로서 과거에는 '가(kha)'와 '하(ha)'가 같은 음(音)이었으며, '가(kha)'에서 
'하(ha)'가 분리되었거나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文化) 전파(傳播)의 속성(屬性)으로 비추어 처음 시작되었던 장소에서는 이미 
다른 문화로 변화되어도, 그 문화권(文化圈)의 변두리에서는 가장 늦게 전파된 
만큼 오히려 가장 오래 그 원래의 문화를 보유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선사시대(先史時代) 한반도(韓半島) 거주인(居住人)들이 이주(移住)하였던 
일본(日本)에서는 고대(古代)의 흔적이 우리보다 많이 남아있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일본말을 참고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신(神)을 
'가미(khami)', 군(君)과 상(上)을 '기미(khimi)', 후(后)를 '고우(khou)' 또는 
'기미(khimi)', 곰(熊)을 '구마(khuma)'라고 읽으며, 고아시아족(古亞世亞族)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일본의 아이누 족(族)은 곰을 '가무이(khamui)'라고 
부르면서 곰에 대한 신앙(信仰)을 갖고있다. 또한 고구려(高句麗)가 패망하면서 
왕족(王族)과 많은 유민들이 이주해간 관동지방(關東地方)의 팔간군(八間郡)은 그 
옛날이름이 '고마고오리(高麗郡)'이고 여기의 고려신사(高麗神社)에서는 
고려군역사(高麗郡歷史)라는 책을 발간(發刊)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고려신사(高麗神社)를 '고마진자'라고 읽으며, 고려천(高麗川)을 '고마가와'라고 
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말하는 고려(高麗)를 '고마'라고 읽는다. (8) 

우리의 전통적인 풍습에서도 아기를 출산(出産)하면 대문(大門)을 가로질러 검정 
숯과 빨간 고추, 흰 종이를 끼워놓은 새끼줄을 걸어놓는데, 이 것을 '검줄'이라고 
부르며 '신색(神索)'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제단(祭壇) 앞에 까는 노란 흙을 
신토(神土)라고 적으며, '검토'라고 읽어서 과거에는 '신(神)'을 '검'이라고 
읽었다. (9) 또한 한글에서 '까마귀'나 '거미', '그믐달' 그리고 '검은' 색(色) 등 
어두운 흑색(黑色)을 가마, 검, 그믐 등으로 말하는데, 이또한 '곰'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곰'은 곧 '흑곰(黑熊)'을 말하는 것이며, '흑곰'을 
'신(神)'으로서 추앙(推仰)한 고대(古代) 종족(種族)이 남겨논 흔적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구려 (高句麗)에서 태양(太陽)을 '세발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로 형상화하거나, 신화(神話)에서 태양을 '금오(金烏)'라고 부른 
이유도 모두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흑곰(黑熊)'과 '군주(君主)', '신(神)', '태양(太陽)' 그리고 '고려(高麗)',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이 혼합되었다고 알려진 '예맥(濊貊)' 또한 비슷한 
말로 불렀기에, 이 모든 것이 같은 어원(語源)에서 출발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만 
국한(局限)하여도 반도(半島) 내에 보여지는 비슷한 어휘(語彙)들이 모두 같은 
종족의 소산(所産)이라고 생각해도 무방(無妨)할 것이다. 이 종족을 일단 
고아시아족의 일종으로서 예맥족(濊貊族)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아직 이에 
대한 논란(論難)이 많은 상태라 이 문제 만큼은 덮어두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된다. 




熊系, 고마系 地名分布 및 고마系 移住路 (推定)
 




熊系 地名
곰과 관계있는 지명을 찾다보니 수많은 세월과 역사 속에서 '다물'의 의미처럼 
다시 원래의 한글로 바뀌어서 과거의 '웅(熊)'이 곰'으로 변경된 경우도 있으며, 
'웅(熊)'과 비슷한 발음으로 '응(鷹)'이나, 오자(誤字)인 듯한 '태(態)', 그리고 
다시 음역(音譯)되면서 달라졌으리라 생각되는 '웅(雄)'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보니, '웅(熊, 곰)'계의 지명이 남한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하지만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서 '웅(熊)'이 아닌 
'곰'으로 표기되어 있는 지명이 유난히 많아, 이중에는 근대에 이름지어진 경우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웅(熊)'의 경우, 주변에 비슷한 지명으로 
기재(記載)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역사가 오래되면서 산 이름처럼 넓게 
퍼져 근거리까지도 비슷한 지명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여 근거리에 있는 지명을 한 군데에 모아놓고, 첩첩산중(疊疊山中)에 있는 
'웅(곰)'계 지명을 추려서 다시 살펴보면, 위의 분포도(分布圖)와 같게 된다. 

웅계지명의 경우, 필자가 그려논 지도를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듯이 밀집(密集)되어 
있거나 흐름이 없이 골고루 퍼져 있으며, 간혹 서울을 비롯하여 양평(陽平), 
청주(淸州), 금산(錦山), 목포(木浦), 진주(晋州), 함안(咸安, 伽倻), 고성(固城), 
대구(大邱), 경주(慶州)와 동해안 지역에서 웅계지명이 빠져 있으며, 대신에 
'응(鷹)'이나 '옹(甕)'과 관계있는 지명이 그 지역 근처에서 두세군데 
산재(散在)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김성호(金聖昊)의 조사와는 다르게 
웅계(熊系) 또는 곰계지명으로 이동(移動) 및 이주(移住)의 흔적을 찾아내기는 
힘들며, 설혹 이주의 흔적이라 하더라도 철저한 계획에 의하여 의도적(意圖的)으로 
이동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곰'계를 제외하여 '웅'계만 보면 주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서쪽인 
충청도(忠淸道)와 지리산(智異山) 서쪽인 전라도(全羅道)에 집중(集中)되어 
있으며, 단지 부산(釜山) 인근(隣近)에서 다수의 분포밀도(分布密度)를 보이고 
있어 웅계 부족이 울산(蔚山) 웅촌(熊村)과 진해(鎭海) 웅천(熊川)을 연결하는 
지역에 집중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부산(釜山) 인근에 
웅계지명이 집중되어 있기에 여기에서 웅계가 비롯하였을 가능성도 배제(排除)할 
수 없지만 울산(蔚山) 북쪽의 동해안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기에, 부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웅계지명의 분포도에서 집단(集團) 이주(移住)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동일계(同一系) 지명의 흐름을 알아내기 보다는 
충청도, 전라도에서 각 지역 간의 거리가 너무 일정하여, 이 지역이 진해와 울산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으로서, 그 당시의 특별한 사정과 이유로 이러한 
구간(區間)이 설정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산악지역이나 거의 같은 지역에서 중복(重複)되는 경우에는 하나만 적용하고 보면, 
빨간 반점(斑點)으로 표시하여 놓은 것 그대로 의외로 지금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의 구분 처럼 각 구간(區間)의 거리가 대략 40~50Km로서, 마치 
구역을 나누어 놓은 듯이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配列)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충청남도에서는 간격이 약 20여 Km인 경우도 있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분명하고 
규칙적인 짜임새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령(保寧) 웅천리(熊川里)에서 시작하여 
익산(益山) 웅포리(熊浦里), 김제(金提) 웅교리(熊橋里), 장성(長城) 
쌍웅리(雙熊里), 화순(和順) 도웅리(道熊里), 장흥(長興) 웅점리(熊岾里)까지 
선(線)으로 연결하여 보면, 익산에서 장흥까지는 남북을 잇는 직선이 만들어진다. 
거의 경도(經度) 126°55′에 해당하며, 표고(標高)와 지형(地形)에 상관없이 
등간격(等間隔)으로 지명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先史) 시대에 
집단(集團) 이주(移住)를 하였을 경우, 분명히 하천이나 계곡 등을 통하여 
이동하였을 것이고, 그만큼 관계된 지명이 이와 비슷하게 형성되어야 함에도 
웅계지명은 드넓은 평야를 벗어나 산악(山岳) 지역이나 언덕 등에 위치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에서도 비슷한 지명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서산(瑞山) 웅도(熊島)에서 안성(安城) 웅교리(熊橋里), 음성(陰城) 웅암(熊巖, 
槐山 佛頂面 雄洞으로 추정), 단양(丹陽) 곰절, 봉화(奉化) 큰곰이재를 연결하여 
보면 위도(緯度) 36°55′로서 등간격에다 거의 직선으로 연결되며, 보령(保寧) 
외웅리에서 공주(公州) 웅진동(熊津洞), 보은(報恩) 웅암소(熊岩所, 淸原郡 米院面 
雲岩里로 추정되지만 마을의 위치는 현재 漁岩으로 추정), 상주(尙州) 
웅이산(熊耳山, 현재 屛風山으로 추정)을 연결하여 보면 비록 간격은 다르지만 
대략 위도(緯度) 36°30′에 해당한다. 또한 김제(金提) 웅교리(熊橋里), 
진안(鎭安) 웅치(熊峙, 富貴面 곰치 추정), 거창(居昌) 웅양리(熊陽里)는 
위도(緯度) 35°45′에 맞추어져 있다. 그 남쪽으로 장성, 화순, 산청 등도 비록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거의 위도선(緯度線)과 일치한다. 

경도선(徑度線)와 위도선(緯度線)에 맞추어진 지명들이 우연(偶然)의 
일치(一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위에 그려놓은 분포도에서 보이듯이 
'고마'계 지명과 함께 볼 때는, 웅계와 고마계 지명이 거의 같은 시기(時期)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韓半島) 남부(南部), 즉 남한(南韓)의 
서쪽에서는 웅계지명이 있는 곳에 고마계 지명이 보이지 않으며, 설혹 
있다하더라도 근접(近接)하는 정도이지 같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웅계와 고마계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주하였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서로의 시간적 간격이 그리 많지 
않음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온조(溫祚) 백제(百濟)의 공주(公州) 
웅진(熊津)으로의 천도(遷都) 시기는 서력(西曆) 기원전(紀元前) 18년이며,(10)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온조왕(溫祚王) 24년조에 보면, 
기원후(紀元後) 6년 7월에 바다를 건너와서 발디딜 곳 없는 처지인 온조(溫祚)를 
동정하여 마한왕(馬韓王)이 동북(東北)에 있는 일백리(一百里)의 땅을 
나누어주었는데,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웅천책(熊川柵)을 세웠다가, 이를 나무라자 
울타리를 철거하였다는 기사(記事)가 있다.(11) 이를 통하여 충청남도 내의 
웅계지명은 기원(紀元) 전후(前後)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나머지의 웅계와 고마계 지명도 형성되었고, 이들의 이주(移住) 
시기(時期)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12)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 72국'에 보면 "통전(通典)에는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이 70여 개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지방이 1백 리(里)였다고 
했다." (13) 즉 바다를 건너온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세운 마한(馬韓)과 그리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이 모두 70여개 국가로서 남한의 각 지역이 100里(약 
40Km) 정도의 구역으로 분할되어 통치(統治)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맹자(孟子)'에 보면 천자(天子)는 
1000리, 제후(諸侯)는 100리, 방백(方伯)은 70리 등으로 영지(領地)를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14) 진한(辰韓)이 진시황(秦始皇)의 진역(秦役)을 피하여 
도망온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졌듯이, 기원 전 7세기 무렵부터 춘추(春秋) 
전국(戰國) 시대의 혼란기에 수많은 유민(流民)들이 전란(戰亂)을 피하여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는 이미 중국 내륙을 비롯한 
발해만(渤海灣)에서의 체제(體制)와 비슷한 국가적(國家的) 조직(組織)이 한반도 
내에서도 지역적으로나마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맹자(孟子)나 통전(通典)에서 말하는 100리의 관할구역은 당시의 봉건(封建) 
체제(體制)가 지역별로 분할되어 통치를 위임하였다는 말이 된다. 즉 각각의 
영지가 중심지에서 100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당시의 
영역(領域)이 지금과 같이 경계가 분명한 영토(領土)라기 보다는 성(城)과 같은 
각각의 근거지(根據地)를 중심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통치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100리의 영토를 주었다는 말은 근거지에서부터 50리에 해당하는 
범위(範圍)를 부여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근거지와 근거지의 거리가 100리라고 할 
수 있다.(15) 이러한 점을 웅계지명의 분포와 비교하여 보면 거의 들어맞는다. 
비록 이 상황이 우연이라 하더라도 100리 간의 거리는 마을이 세워지기에 적당한 
거리이며, 현재의 각 도시(都市)와 읍(邑)들의 분포와도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기원(紀元) 초(初)를 전후하여바다를 건너 이주하여온 
유민(遺民)들이 각 지역을 균등하게 분할하여 분산되었으며, 웅계지명의 위치가 그 
당시 각 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요충지(要衝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웅계지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경기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가야(伽倻)와 관련된 지명을 상당수 발견하게 되었는데, '가야' 지명이 있는 
곳에는 웅계 지명이 서로 교차(交叉)하고 있어 상호간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파주, 서울, 여주, 서산, 논산, 예천, 성주, 의령, 함안, 
김해, 부산 등으로 경기도에서 경상남도를 연결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해미성(海美城) 유적(遺跡) 바로 옆산이 바로 가야산(伽倻山)이라는 점은 경상도 
지역에서 고마계보다 먼저 거주(居住)하였으리라 생각되는 '가야(伽倻, 
駕洛國)'조차 웅계와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마系 地名 
고마는 앞에서 열거(列擧)한 곰의 옛말을 통칭(統稱)한 것으로, 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부족들이 이주하면서 곳곳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는 
가정(假定) 아래, 동일 계열의 지명을 조사한 것이다. 경상북도의 구미(龜尾)와 
대구(大邱), 구룡포(九龍浦)를 동서(東西)로 연결하는 지역에서 상당수 볼 수 있는 
'금오(金烏)'는 비록 태양을 뜻하는 어휘(語彙)이지만 분명히 같은 어원(語源)에서 
출발한 것이며, '구미(龜尾)'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남한의 서쪽에서는 
'금마(金馬)' 계열이 우세하며, 동쪽에서는 '금오(金烏)' 계열이 압도적인 숫자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구미'와 '금오(금호)'를 중심으로 하고, '구마'와 
비슷한 '가마', '고모' 그리고 앞에서 열거한 변화 가능한 지명까지 포함하여 
남한의 전국을 조사한 결과, 웅계(熊系)와는 달리 뜻밖에도 일정한 흐름을 찾을 수 
있었다. 

지명분포도에서 볼 수 있듯이 '고마'계 지명은 줄을 이으면서 연속되어 있는데, 
아직 북한 지도를 입수하지 못한 탓으로 서울 이북(以北)에서 어떠한 경로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선 서울에서 대략 다섯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탄강(漢灘江)을 거슬러 전곡(全谷) 방향으로, 두번째는 북한강(北漢江)을 
거슬러 춘천(春川) 방향으로, 세번째는 남한강을 거슬러 충주(忠州), 
제천(提川)으로, 네번째는 용인(龍仁)을 거쳐 증평(曾坪)으로, 다섯번째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南下)하여 삽교(揷橋)를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도에서 분산한 
듯이 가장 적은 밀도(密度)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서울을 비롯한 한강 
주변이 가장 돗보이며, 인제(麟蹄)과 여주(驪州)에서 부터 동쪽으로는 다수의 
지명이 보이고 있다. 

한강(漢江)의 물줄기와는 별도로 남북으로 뻗은 태백산맥의 서쪽을 따라서 
분포되었으며, 그 근처인 인제(麟蹄)와 제천(提川), 정선(旌善) 일대에서 집중되어 
있어서 과거 이 부족들이 살기힘든 험준한 계곡을 지나간 특별난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한다. 즉 이들에게는 거의 정동(正東) 방향으로 그 흔적을 남기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어서, 아마도 이동의 목적이 동쪽으로 가고자 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춘천(春川)으로 향한 부족은 북한강(北漢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인제(麟蹄)에서 
동해안의 고성(高城)으로 빠진 것으로 보이며, 여주(驪州)로 향한 부족(部族)은 
남한강(南漢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정선(旌善)을 지나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봉화까지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태백(太白)이나 봉화(奉化)에서 부터는 더 이상 동쪽으로 가지 못하고 남하하여, 
안동(安東), 의성(義城), 대구(大邱)로 연결되고 있으며, 안동에서도 일부는 
청송(靑松) 인근으로 가서 주왕산(周王山) 남쪽 계곡을 통하여 
태백산맥(太白山脈)을 넘게 되었으며, 이어서 영덕(盈德)으로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구 인근에서는 동쪽의 경주(慶州), 남쪽의 창녕(昌寧) 그리고 서쪽의 구미(龜尾) 
등 세갈래로 갈라졌는데, 동쪽으로 향한 부족은 경주를 지나 구룡포(九龍浦) 
인근에서 동해(東海)와 만나고 있다. 창녕으로 향한 부족은 김해(金海)에서 그 
흔적을 보이며, 일부는 낙동강(洛東江) 지류인 남강(南江)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진주(晋州)와 남해안의 광양(光陽)에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광양에서는 다시 섬진강(蟾津江)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남원(南原) 인근에서 
멈추고 있으며, 일부는 남해안과 서해안의 섬과 제주도(濟州道)로 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쪽지역인 동해안에서는 '곰'과 관련된 지명이 고성(高城)과 영덕 
사이에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즉 험준한 태백산맥(太白山脈)을 넘지 못하였으며, 
산맥의 서쪽 여러곳에 발자취를 남기고 있어, 이 부족들이 동진(東進)하고자 애를 
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그 중에서 고미성(古味城)이 있는 고성(高城)의 
남강(南江) 계곡과 주왕산(周王山) 남쪽의 대서천(大西川) 계곡으로만 지나갈 수 
있었다. 대서천 계곡은 태백산맥의 중간이면서도 그리 험준하지 않은 좁은 계곡이 
산맥의 중간을 통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동해안의 영덕(盈德)과 
구룡포(九龍浦), 고성(高城)은 동진의 종착지이면서도, 최종 목적지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즉 최종 목적지에 많은 발자취가 남게되는 것이 당연한데도 
동해안을 따라서 그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대구 인근의 내륙에서 
흔적들이 많기에 일단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정착(定着)한 것 같으며, 
정착하려면서 다시 서쪽의 구미(龜尾)와 김천(金川), 금릉(金陵)으로 퍼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한편 증평(曾坪)으로 남하(南下)한 일부는 속리산(俗離山)의 화양구곡(華陽九曲)을 
통하여 소백산맥(小白山脈)을 넘은 듯 보이며, 이어서 가은(加恩)을 지나 
상주(尙州)를 돌아서 선산(善山)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다. 
속리산(俗離山)은 소백산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지만 그 곳의 
화양구곡(華陽九曲)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을 정도로 그리 험하지 않은 계곡이 산 
허리를 통과하고 있다. 상주(尙州)를 통과한 일부는 선산(善山)을 거쳐 구미와 
대구 지역에서 태백산맥을 넘어온 부족들과 합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특이하게도 상주(尙州)와 예천(醴泉), 선산(善山)을 연결하는 지역에는 
구마계가 아닌 웅계 지명이 보이고 있다. 이 점은 구마계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웅계 부족이 이 곳까지 진출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성주(星州), 거창(居昌), 산청(山淸), 고령(高靈), 청도(淸道), 영일(迎日), 
함안(咸安), 진주(晋州)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지역에서는 
웅계지명조차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거의 둥근 원을 그리며 고마계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구 인근에서 부터 그 아래 낙동강 하류로는 창녕(昌寧)에서 모여있어 
연속은 되어 있지만 그리 많은 흔적이 없다. 대신에 금호강(琴湖江)을 거슬러 
올라가 동쪽으로 향하여 경주(慶州)와 구룡포(九龍浦)까지 연속되어 지명이 
나타난다. 이것은 분명 이 부족의 일부는 계속 원래의 목적대로 
동진(東進)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이 부족들의 일부는 다시 
구룡포 근처에서 바다를 건너 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熊系와 고마系
서울과 오산(烏山) 인근 까지는 고마계 지명이 보이는데, 그 남쪽으로는 아주 
미약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 대신 웅계(熊系) 지명이 안성(安城)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이루면서 남해안까지 펼쳐있다. 웅계와 고마계는 앞서도 말했듯이 
모두 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족으로서 서로의 조상(祖上)이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두 계열의 지명 분포를 보면 너무 달라서 과연 같은 조상을 둔 
부족(部族)일까도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즉 웅계는 일정한 간격으로 
계획적(計劃的)인 구성(構成)을 보여주고 있어서, 웅계 이전에 고마계가 우선 
이주하였고 나중에 중국의 동해안에서 이주해 온 같은 계열의 부족이 과거의 
지명을 바꾸지 않았을까 여겨지기 조차 한다. 

그러나 여기서 최소한 산천(山川)의 지명 만큼은 과거 그대로 전해지거나 주변에 
최소한의 잔재(殘在)가 남아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서해안과 동해안을 비교하면 
너무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초에 오산(烏山)과 안성(安城) 
인근에서 고마계와 웅계(熊系)가 일단 갈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며, 또한 
고마계는 동진(東進), 웅계는 남진(南進)을 택하였으며, 비록 같은 조상(祖上)을 
두었지만 경기도 인근에서 서로의 문화(文化)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이러한 추정(推定)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웅계와 고마계는 동일 
부족으로서 한 지역에서 출발하였지만 발해만(渤海灣) 인근까지 퍼지면서 이미 
한문(漢文)을 사용하는 한족(漢族)과 접촉하여 그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어느 
시기에 한글과 한문(漢文)을 사용하는 동일 부족이 일단 혼합(混合)되고 그 후 
문헌(文獻)에서 말하듯이 육상(陸上)과 해로(海路) 등 여러 경로(經路)를 통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경기도(京畿道)와 아산만(牙山灣) 일대로 각각 이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에서 이주한 고마계는 거의 동시에 아산만(牙山灣) 
근처로 이주한 웅계와 일단 안성(安城) 인근에서 조우(遭遇)하였으며, 더이상 
남하(南下)하지 못한 고마계는 원래의 목적대로 동진(東進)하였고, 웅계는 이미 
갖추어진 체제(體制)를 활용하여 등간격(等間隔)으로 마을을 건설하면서 동진을 
하기 위한 남진(南進)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남진하던 웅계는 장흥(長興)에서 
남해안을 따라 동진하게 되고 결국 진해(鎭海)와 울산(蔚山)을 연결하는 지역에서 
모이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서로의 조상(祖上)은 같지만 각기 다른 
길로 이주를 계속하였던 부족들은 울산 인근에서 다시 한번 조우(遭遇)하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여겨진다. 

다시 한번 마주치게 된 웅계와 고마계 부족들은 울산(蔚山) 인근에서 만나면서 
서로의 문화적 충돌을 격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비록 사용하는 말의 근본은 
비슷하여도 각 지역의 다른 환경과 기존의 선주민(先住民) 및 
선이주민(先移住民)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갈라지기 전의 한강 유역에서의 원래 
문화는 상당히 변화되었을 것이며, 수많은 세월동안 이주(移住)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문화가 눈에 띄게 달라졌으리라고 짐작된다. 그 후 지도에서도 표시되어 알 
수 있듯이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웅계와 고마계가 교차(交叉)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황해도나 남해안에서 웅계지명을 보면 해안선에 가까이 분포되어 있음에 반하여 
서해안 남부에서는 지금의 해안선에서 내륙 쪽으로 상당히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성(長城)의 쌍웅리(雙熊里), 화순(和順)의 도웅리(道熊里)의 경우는 다른 
여타의 지역과는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육지(陸地)에서 멀리 떨어진 
신안군(新安郡) 하의도(荷衣島)에 웅곡(熊谷)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웅계지명인 장흥(長興) 웅점(熊岾)에서 무려 80Km나 간격을 두고 있다. 그 
사이에는 영광(靈光), 나주(羅州), 영암(靈岩) 지역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곳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지역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미 
원주민(原住民)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계획적인 분할 통치를 하는 
웅계집단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그 
정도라면 기원 전후에 관한 역사서(歷史書)에 흔적이 있을 터인데, 이 지역에 관한 
특별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16) 

이 지역에서의 고마계 지명은 웅계지명에 가까이 다가서 있지만 고마계 지명 또한 
평야(平野) 지역에서 볼 수 없고 산(山)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영광(靈光), 나주(羅州), 영암(靈岩) 지역의 광활한 평야가 웅계와 
고마계가 이주하였을 당시에는 지금과 환경이 다른 것으로서 웅계지명이 자리잡지 
못할 정도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으며, 오랜 시간 동안 해안선(海岸線)이 차츰 
전진(前進)하였거나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인하여 단시간 내에 해안선이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事例)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라북도의 부안(扶安)과 김제(金堤), 정주(井州) 지역에서 웅계 관련 지명이 
상당수 보이는데 반하여 구마계 지명은 하나도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 남쪽인 
장성(長城), 화순(和順)과 목포(木浦) 인근의 도서(島嶼) 지역에서는 구마계 
지명이 상당수 보이고 있다. 앞서 말한 해안선의 변화를 감안(勘案)한다면 이 
대부분이 섬과 해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내륙 깊숙히 퍼져 동진(東進)하였던 
부족들과는 전혀 상반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는 서해안을 따라 
내려온 고마계 부족이 아니라, 한반도 동쪽의 내륙을 거쳐 광양(光陽) 인근까지 
내려온 이주민(移住民)들이 남해안(南海岸)에서 바다로 향하면서 여러 섬을 거쳐 
다시 나주(羅州) 인근의 해안까지 이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 한반도 서해안 
남부 지역의 고마계 지명은 웅계 지명에 비하여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웅계 지명과 고마계 지명을 전 지역에서 비교하여 보면 여주(驪州), 상주(尙州), 
김해(金海)를 기선(基線)으로 하여 그 동쪽인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는 고마계 
지명이 압도적인 다수를 보이고 있다. 앞서도 언급(言及)하였듯이 웅계와 고마계는 
각각의 방법은 달라도 똑같이 동진(東進)을 하였으며, 동쪽으로 이주를 거듭하는 
사이에 웅계가 먼저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고마계는 그 다음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동진(東進)의 의욕(意慾)을 유지하고 있는 일부 만이 바다를 건너갔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웅계 지명과 고마계 지명이 교차하는 진안(鎭安) 인근에서는 
매우 색다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청주(淸州)와 대전(大田)을 통하여 남하한 
고마계는 진안(鎭安) 인근의 덕유산(德裕山) 서쪽 소백산맥 줄기에서 흔적이 
이어지는데, 동시에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익산(益山)에서 금마(金馬) 지명을 
형성한 일부도 묘하게 그 머리를 웅계지명이 자리잡고있는 진안(鎭安)으로 두고 
있어 시선을 끈다. 

웅계 지명이 계획적인 구성(構成)을 보여주듯이 다시 한번 우연(偶然)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매우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웅계 지명이 널려진 지역의 한 
가운데이며, 험하기로 소문난 덕유산(德裕山)과 지리산(智離山) 사이에서 
평야지역(平野地域)도 아닌 산간지역(山間地域)에서 자리잡고 있는 진안(鎭安)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은 이 지역 근처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웅계와 고마계가 
무엇인가 같은 목적을 갖고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는 동진(東進)과 같이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고자 하려는 의도(意圖)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어 과연 이 
당시에 진안(鎭安)은 어떠한 장소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지명 분포도를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진안(鎭安)은 서산(瑞山) 웅도(熊島), 
예천(醴泉) 웅골, 신안(新安) 웅곡(熊谷), 여천(麗川) 웅천동(熊川洞)을 연결하는 
네모꼴 지역에서 중심에 해당한다. 비록 지도 상에서 네귀퉁이를 연결하여 
교차되는 정확한 정중앙은 임실군(任實郡) 청웅(靑雄)에 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진안(鎭安)이 중앙에 가깝다. 그리고 말의 귀 모양처럼 솟아있는 
마이산(馬耳山)이 자리잡고 있으며, 진안(鎭安)을 중심으로한 이 네모꼴 지역은 
문헌(文獻)을 통하여 종종 마한(馬韓)으로 비정(比定)되고 있어, 구마계가 
이쪽으로 향한 이유가 아마도 마한(馬韓)의 중심지로서 신령(神靈)이 깃든 
영험(靈驗)한 장소에 가고자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문헌에서 말하는 금마산(金馬山)이 바로 마이산(馬耳山)이 아닌가 싶다.(17) 





기선(基線)의 서쪽에는 웅계 지명이 있는 곳에 고마계 지명이 그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으며, 특히 괴산(槐山)의 경우, 고마계 지명은 그 주변 산악지역에서 
둥글게 반원(半圓)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보은(報恩), 상주(尙州)와 
성주(星州)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웅계 지명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늘어서있는 고마계 지명은 곧 웅계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만 고마계가 
들어설 수 있었으며, 웅계 부족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여 세력을 키워논 상황에서 
고마계가 이주하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남한의 서쪽 지역에는 이미 오래 전에서부터 웅계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서울 인근에서는 거꾸로 고마계가 압도적인 다수(多數)를 보이고 
있으니, 경기도와 충청남도는 각각 고마계와 웅계가 들어서서 대치(代置)하고 
있었으며, 각각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웅계는 계획적으로 확장(擴張)되었고, 
고마계는 미처 제도(制度)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주(移住)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한편으로는 웅계는 어쩌면 기존(旣存)에 성립되어 있는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대신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확장을 할 수 
있었으며, 웅계 지명과 교차되는 가야계 지명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래에는 남한 내의 가야계(伽倻系) 지명을 나열하여 놓은 것으로서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야계 지명은 남한을 사선(斜線)으로 횡단하면서 부산(釜山)에 
정점(頂點)을 두고 있어 웅계지명과 여러 면에서 겹치고 있다. 

파주군(坡州郡) 법원면(法院面) 가야(加野), 서울시 송파구(松坡區) 
가락동(可樂洞), 여주군(驪州郡) 강천면(康川面) 가야(伽倻),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 가야산(伽倻山), 논산군(論山郡) 연무읍(練武邑) 가야곡(可也谷),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 가야(佳野), 성주군(星州郡) 가천면(伽泉面) 
가야산(伽倻山), 의령군(宜寧郡) 용덕면(龍德面) 가락(佳樂), 함안군(咸安郡) 
가야읍(伽倻邑, 咸安), 김해시(金海市) 가락면(駕洛面) 가락(駕洛, 竹林), 
부산시(釜山市) 부산진구(釜山鎭區) 가야동(伽倻洞) 
또한 일본의 쿠슈(九州) 지방에서만 가야계 지명이 44개이며, 일본 전역에서는 
무려 115개나 된다고 하는데, 그 중 몇군데만 추려보면 이렇다.(18) 쿠슈(九州) 
가야산(可也山), 나가사키 현의 가라노사키(韓崎), 미야자키 현의 가라야(韓家), 
히로시마 현의 가라가와(加羅加波), 효고 현의 가라도마리(韓泊), 오사카 부의 
가라무로(韓室里), 나라 현의 가라코(唐古, 韓人), 가라쿠니(韓國, 唐國), 쿄토 
부의 가야하시(河陽橋), 군마 현의 가라시나(韓級) 등으로 '한(韓)'이나 
'당(唐)'을 '가라(khara)'라고 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라'라는 일본말은 
옛날에는 주로 외국(外國)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까마귀(烏)'를 
가라스(kharas), 도자기(陶瓷器)를 뜻하는 '당진(唐津)'은 가야의 항구(港口)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지명으로서 가라쯔(kharaz)라고 읽는다. 앞서 말했듯이 '간(干, 
khan)'에서 '한(韓, han)'이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일본에서는 한(韓)을 당시 한반도의 발음 그대로 '가라(可樂)'라고 읽어 내려왔을 
가능성이 많다. (19) 즉 과거에는 한반도 내에서 '한(韓, han)'을 
'가라(khara)'라고 읽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가야(伽倻)'와 '가라(加羅)' 또는 
'가락(駕洛)'은 한(韓)과 같은 어휘(語彙)로서 음역(音譯)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위에서 열거하였듯이 가야계(伽倻系) 지명의 분포는 웅계지명의 분포와 비슷하며, 
동시에 마한(馬韓)이라고 비정(比定)되는 지역과 서로 교차하고 있어, 
가야계(伽倻系) 지명은 최소한 웅계 영역이나 마한의 영역에 포함된 
읍락국가(邑落國家)로서의 지명이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파주에서부터 
시작하여 부산까지 이어진 지명의 흐름은 최소한의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할 수 
있으며, 일본의 쿠슈에 무수히 분포되어 있는 가야계 지명이 바로 한반도의 김해와 
부산에서 건너간 가야계의 이주 경로이자 종착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삼한(三韓) 이전의 한(韓)은 '가야' 또는 '가락'으로 불리웠으며, 
한(韓)을 바탕으로 삼한(三韓)이 성립되었고, 기원 후 42년에 김해(金海)에서 
수로왕(首露王)이 세운 가락국(駕洛國)은 읍락국가로 잔존(殘存)하던 한(韓, 伽倻, 
駕洛)계 부족들이 힘을 합하여 비로서 국가체제를 갖추게된 연맹국가(聯盟國家)라 
할 수 있다. (20) 





웅계지명이든 고마계지명이든 전체를 늘여 놓고 볼 때,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산악지역(山岳地域)도 아닌데, 군데군데 빈 곳이 있음을 
알게된다. 강화도(江華島), 가평(加平), 천안(天安), 대전(大田), 증평(曾坪), 
청양(靑陽), 고창(高敞), 영암(靈岩), 진도(珍島), 고흥(高興), 영일(迎日), 
합천(陜川), 고성(固城), 거제도(巨濟島), 제주도(濟州島) 등지로 웅계나 고마계가 
소수 분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하여 눈에 띄게끔 비어있는 
지역들이다. 그렇다고 이곳들만이 육지가 상승하거나 수면이 하강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사정에 들 만한 이유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앞에서 열거한 
지역에서는 이 두가지 계열의 지명이 보이지 않으며, 대신 그 대부분 지역에서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설혹 있다하더라도 고창 지역의 경우 산 너머 
골짜기에 웅계 지명이 있으며, 영일 성계리의 경우도 고마계 지명이 
보현산(普賢山) 까지는 접근했어도 그 동쪽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현산 
지역이 그리 험한 것은 아니다. 아주 부드러운 능선과 편안하기조차 한 매우 
여성적인 산으로서 절대로 오르지 못할 그런 험준한 산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보면 웅계와 고마계가 한반도 남부를 휩슬기 전에 이미 
청동기(靑銅器) 문화의 고인돌 사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어쩌면 웅계와 고마계는 
고인돌이 아닌 돌무지이거나 일명 '고려장(高麗葬)'이라고 하는 횡혈식(橫穴式)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의 사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고려장은 한반도 남부 여러지역, 즉 전라도나 경상도에도 있었으며, 워낙 
입구(入口)가 드러나있는 봉토분(封土墳)이라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고인돌보다 
찾기 힘들어졌지만, 이러한 점이 감안되어 현재와 같이 입구가 봉쇄된 
봉토분(封土墳)으로 바뀌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강화도나 고창의 고인돌 사회가 
그 자취를 잃어버리고, 창녕(昌寧) 유리(幽里)의 고인돌 사회가 갑자기 봉토분으로 
바뀌게 된 사연(事緣)이 수많은 웅계와 고마계 이주민(移住民)들에 의하여 
영향(影響)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화(同化)되고 수렴(收斂)되어진 증거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21) 
(1997년 12월 작성, 1998년 1월 수정, 보완)       웅계, 고마계 지명의 목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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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연, 이재호 옮김, 삼국유사, 솔출판사, 1997. 104~105쪽 참조,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 取탁水之名 稱所居之邑里", 
여기에서 탁수는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탁록(탁鹿)의 강(江)을 말하며, 탁록의 
동남방 유웅(有熊)이라는 벌판에서 중국의 삼황(三皇) 중에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치우천왕(蚩尤天王)과 싸웠다고 전해진다. 구리(銅)로 된 
머리와 쇠(鐵)로된 이마를 갖고 모래와 쇳가루를 먹고 산다는 치우(蚩尤)는 비록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비전(秘傳)되는 '삼성기전(三聖記全)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서는 제14대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이라고 하며, 
중국의 왕동령(王桐齡)이 지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는 "4000년전 현재의 
호북, 호남,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麗)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 
치우는 황제(黃帝)의 한족(漢族)과 다른 족속(族屬)으로 동이족(東夷族)에 
속한다고 하며, 치우에 대한 묘사로 보아 이 시대에 이미 청동기와 철기가 
생산되었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청동기 시대를 올려놓는 근거로는 
양평군 양수리 고인돌의 유적이 서기 전 2300~2600년 경으로 알려져 있고,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만주 하가점 하층 문화가 서기 전 2410년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탁록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부(大同府)라고 말하기도 하나, 현재 중국 
북경(北京)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여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탁록의 현대음은 
'주루(zhuolu)'이다. 또한 김성호는 '탁수'의 '탁'을 '도(道)'로 읽은 것은 
한족(漢族)과는 다른 연(燕)나라(B.C. ? ~B.C. 222)의 원주민이라 생각하여 
'탁수'를 '도물(道勿, tomur)' 또는 '다물(多勿, tamur), 담로(tamro)와 같은 
계열의 지명으로 해석하였다. 
(2) 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지문사, 1984. 109쪽 참조 
(3) 필자와는 다르게 감(地神) - 곰(熊) - 검(儉) - 고마(固麻) - 개마(蓋馬)의 
순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임승국 번역, '한단고기', 정신세계사, 1987. 37쪽 
참조) 
(4) 한국도로지도, 중앙지도문화사, 1987 
(5) 정연규, '언어로 풀어보는 한민족의 뿌리와 역사', 한국문화사, 1997. 
59~63쪽, 170~173쪽 참조 
(6) 윤내현,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 '한국사론 14', 1984. 130~133쪽 
참조 
(7) "云蓋馬奚摩離之轉音", 李陌, 太白逸史/三神五帝本紀, '한단고기', 155쪽 
참조. 
개마(이) - 해마리 - 하이머리 - 흰머리 - 백두(白頭)로 바뀌었으며, 따라서 
마(馬, 麻, 摩)는 '머리'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마한(馬韓)에서는 
말(馬)을 타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마한(馬韓)은 '머리(頭)'와 '한(韓)'이 
합쳐진 단어로서, 한(韓)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마이산(馬耳山)', '말이산(末而山)', '말산(末山)', '마산(馬山)'이 모두 같은 
뜻으로서 '우두머리산'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배'는 '밝은(白)', '붉은(赤)'에서 변한 것으로 '박(朴)'의 어원(語源)과 
같으며, '달'은 우리의 옛말에서 산이나 땅을 '달'이라 불렀기에 '배달'은 해뜨는 
'밝은 땅'을 말한다. 신목(神木)으로 알려진 박달나무(檀木)는 '밝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군(檀君, 壇君)'은 곧 '밝은 땅의 군주(君主)'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제사장(祭司長)인 무당을 뜻하는 '탱그르', '당굴'이 음역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하나님'과 같은 의미로 알려진 '환웅(한웅, 桓雄)'과 
'단군(檀君)'은 음운(音韻)과 의미(意味)에서 구별되며, 시대적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임승국 번역, 위의 책. 19, 36쪽 참조) 
(8) 정연규, 위의 책 61~62쪽 참조 
(9) 임승국 번역, 위의 책, 삼성기전, 19~20 쪽 참조 
(10) 김성호는 B.C. 193년 직후 한강변 한터로 이주하였으며, B.C. 18년에 
웅진으로 남하하였다고 한다. (金聖昊, '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源', 知文社, 
1984. 115~116쪽 참조) 
그리고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上篇)에는 이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술년(壬戌年, B.C. 239) 진나라 시황(秦始皇, B.C. 
246~206) 때 신인(神人)이신 대해모수(大解慕漱)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정미년(丁未年, B.C. 194) 한나라 혜제(漢惠帝, B.C. 195~188) 때, 
연(燕)나라 추장이었던 위만(衛滿)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番韓)의 준(準)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의 무리는 거의 한수(漢水)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년(癸酉年, B.C. 108) 한나라 무제 (漢武帝, B.C. 141~87) 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 서압록(西鴨綠) 사람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역시 단군(檀君)이라고 했다." (위의 
책, 삼성기전, 23쪽 인용) 
삼성밀기(三聖密記)의 주석(註釋)에 개마국(蓋馬國)은 일명 웅심국(熊心國)이라고 
하였기에, 여기에서의 웅심산(熊心山)은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책, 태백일사/한국본기, 164쪽 참조) 이런 점에서 웅계 부족과 
고마계 부족의 근본이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1) "秋七月王作熊川柵 馬韓王遺使責讓曰 王初渡河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其待王不爲不厚 ...... 王慙壤其柵" (三國史記 百濟本記1 溫祚王 24年條), 
그러나 지리산의 달궁(達宮)에 대한 기록인 청허당집(淸虛堂集)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년(B.C. 78)에 마한의 효왕이 진한과 
변한에   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황(黃), 정(鄭)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 분명하겠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서기후 8년에 마한이 멸망하였다고 하며, 
청허당집에는 서기전 78년에 마한이 쇠락하여   기는 것으로 적혀있으며, 박찬규는 
기원후 4세기 무렵에 마한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 흡수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있어 서로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웹페이지 
http://www.gsnu.ac.kr/~dairy/jiri/jiri67.html, 1998-01-22 참조) 
(12) 그러나 읍락(邑落)의 건설은 대부분 기존의 마을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다는 
고고학적 사실에 비추어 대부분의 웅계지명의 마을이 기원 전에서부터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발해만 인근에 대한 사료(史料)에서 볼 수 있는 
탁록의 유웅(有熊)이나 백두산을 말하는 웅심산(熊心山) 등으로 인하여 웅계지명의 
형성은 상당히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대한 
자료가 미비되어 웅계지명의 형성 시기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으며, 단지 전거한 
사료에 비추어 서기 전후로 추정할 뿐이다. 
(13) "通典云 朝鮮之遺民 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 이재호 옮김, 삼국유사, 
82~83쪽 참조. 
(14) "天子之制地方千里 公侯皆方百里 伯七十里 子男五十里 凡四等不能五十里 
不達於天子 附於諸候曰附庸" ("孟子", 卷10, 萬章章句 下) 
(15) 박찬규는 이를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서도, 마한왕이 떼어준 동북일백리를 
거리보다는 100리 정도의 면적범위로 보고 있다. (朴燦圭, 百濟의 馬韓征服過程 
硏究, 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5. 97~98쪽 참조, 웹페이지 
http://www.nl.or.kr/image/kdm1995/kdm14989.htm, 1998-01-22) 
(16) 기원 후 4세기 경 백제의 마한 정복 이외에는 특별난 사료(史料)가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17) 김성호는 '한(韓)'이 제일 먼저 한강유역 가락동 일대에 '한터馬韓'을 
세우고, 다음에 '熊津馬韓', '益山馬韓' 순으로 남하 과정에서 형성된 국가들로 
보고 있으며, '마한(馬韓)'의 '마(馬, 麻)'는 '남(南)'과 같은 음(音)으로서 
남쪽의 한(韓)을 뜻한다고 한다. 이 구분으로는 '익산마한 (益山馬韓)'에 
해당한다. (金聖昊, 위의 책, 110~111쪽 참조) 
(18) 서희건, "화려한 철기문화, 일본에 가야 지명 많아", '월간조선' 1998년 
1월호, 조선일보사. 585쪽 참조 
(19) 현재 '한(韓)'의 일본음은 '간(khan)' 또는 '강(khang)'이다. 
(20) 결국 가야 또는 가락은 김수로의 가락국 성립을 전후하여 지역 곳곳에 세워진 
가야계 읍락국가(邑落國家)로서, 가락국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마한 등의 
삼한의 속국(屬國)으로 잔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지리산 이곳저곳에 
남겨진 가락의 마지막 왕에 대한 전설을 대강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구형왕릉이라 전해지는 산청의 적석총은 왕위를 순순히 양보하였다는 구형왕과는 
다르게 지리산 일대에서 항전하다가 죽은 가락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웹페이지 http://www.gsnu.ac.kr/~dairy/jiri/jiri38.html, 1998-01-22 참조) 
(21) 전라남도에는 무려 16369기(1993년도 조사)에 달하는 수많은 남방식 
고인돌들이 산재하고 있는데, 상한선(上限線)은 기원 전 8~7세기 경으로 
올라가지만 하한선(下限線)은 마한과 온조 백제가 교차할 무렵인 기원 전후까지 
조성되었다. 그 대부분이 소규모에다 형태가 각양각색으로 고인돌 사회의 말기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웅계, 고마계 지명의 목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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