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0일 토요일 오전 01시 09분 24초 제 목(Title): 퍼온글/한국巫의 역사적개관 한국무(巫)의 역사적 개관 한국무(巫)의 역사는 문헌사료 이전의 시대인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적 상징으로 장식된 왕관이나 지금도 동북아시아의 무당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방울·칼·거울 등 각종 고고학적 유물자료들이 청동제로 제작되던 시기를 보건대, 적어도 기원전 1,000년 전부터는 20세기초까지 그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형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어떤 종교적 의식이 한반도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군신화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사회는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오늘날의 무(巫)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원시종교가 정치와 통합되어 있던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문헌적으로 가장 오래된 사료로는 아무래도 중국측의 기록을 살펴보아야 한다.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은 고대 한민족이 세운 여러 초기국가의 종교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는 첫 사료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여·고구려· 예 등지에 각각 영고·무천·동맹이라는 종교적 축제가 있었다. 또 마한에도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음력 5월과 10월에 큰 축제가 있었으며, 종교적 구역인 소도(蘇塗)의 존재에 대하여도 언급해 놓았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하늘을 바라며 연일 음주가무하는 이들 축제를 눈여겨보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들 축제는 대개 추수를 기원하거나 감사하는 농경제의적 성격을 가졌으리라 보이며 그 이후 한국인의 종교제의의 원형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축제가 천제(天祭, 하늘굿)이고 이를 주관한 것은 다름 아닌 무당이며, 오늘날까지도 마을굿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종교적 전통은 삼국시대 초기 이미 제정일치에서 정교분리가 이루어지고 삼국시대 중반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오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신앙전통과 불교와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서양과 같은 대규모 탄압 및 순교나 전쟁 등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인도식 샤머니즘이라 할 정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던 데에다 우리 조상들 역시 워낙에 다신교전통이었기에 자연스런 융합이 가능하였다. 삼국 말기에는 도교가 전래되었는데 이 역시 중국식 샤머니즘에 다름 아니다. 도교는 한국의 전통종교였던 샤머니즘에 쉽게 포용된 바 오늘날 무(巫)에 옥황상제가 등장하고 불교사찰에 칠성각이 있는 것이 그 흔적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우리에게 현묘한 도가 있으니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교는 국가경영이론인 유학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종교로서의 중국식 조상숭배를 말한다. 워낙에 종교전통 자체가 유불선 삼교의 면모가 있었다고 하니 융합에 무리가 없음은 당연하였으리라. 중국에서 건너온 도교 계통의 신령인 칠성(七星)을 그린 무신도(77cm×100cm). 한국의 많은 불교 사찰에는 칠성을 모신 칠성각이 있다. 불교와 도교와 무(巫)의 융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진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로서 <큰무당 우옥주 유품> 특별전(1995년)에서 전시된 바 있다. 임원순 촬영. 고려로 넘어오면 팔관회와 연등회가 국가적 종교행사로 자리하게 된다. 이 두 행사는 겉으로는 불교행사인 것처럼 보이나 그 내용은 기실 예로부터 전해오던 무(巫)의 축제전통을 이은 것이다. 양자가 겉으로는 불교적 이름을 취하고 있으나 내용은 모두 호국적 시조제·기복제의 성격을 지니며 군신(君臣)과 백성이 음주가무하고, 무당이 천신·용신·산신 및 하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등 토속적 신앙의 면모를 보여준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간 서긍(徐兢)은 자신이 관찰한 바를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팔관회는 고구려의 동맹제(東盟祭)에서 유래한 것"이라 밝혔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변하고 만다. 초기부터 굿을 단속하는 법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고, 무당을 한양에서 쫓아 냈으며 급기야 무당은 노비·승려·백정 등과 함께 사회 최하층인 8천(賤)의 하나로 규정되는 등 박해가 연이었다. 고려의 국가적 제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낭비로만 본 까닭도 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유교 이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지배층이 종교를 핑계로 구시대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목표가 정말로 무당 천대에 있던 것이 아니어서 왕실에서도 19세기말까지 꾸준히 굿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다. 비록 상징적 탄압이었지만 무당들이 무척 놀랐을 것은 자명하다. 그리하여 함께 배척당하던 불교와의 융합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석가모니·무학대사·삼불제석 등이 주요한 신령으로 모셔지고 불교 역시 무(巫)로부터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로 오면서부터는 정말로 탄압이 벌어진다. 일본은 조선 침략기에 많은 학자들을 동원, 한국의 사회·문화·종교 등을 정밀히 조사한다. 그리고는 마을 단위의 굿이 한국인의 정신적 원형질로 고래로부터 꾸준히 내려오며 지역주민의 유대감 형성에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군화발로 제상(祭床)을 짓밟고 무당들을 쫓아내고 구속하는 등 엄청난 핍박이 벌어졌다. 굿을 무조건 미신이라 강요하여 신령을 섬기지 못하게 했다. 또 나날이 교세가 늘어나던 새로운 종교들, 천주교와 기독교와의 갈등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무(巫)와 함께 탄압받던 이들 종교도 역시 굿을 덜 떨어진 마귀사탄을 섬기는 미신으로 몰아붙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오늘날 굿판에서 무당이 사람들에게 돈을 추렴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런 행위도 굿이 끝나기 전에 비용을 확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무당들에 의하면 당시보다 더 심했던 때가 바로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조국근대화 시기였다. 당집이 폭파되고 무당등록증이 없으면 굿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근대화·서구화라는 국가경영이념 앞에 전통적 문화와 종교는 맥없이 허물어졌다. 굿과 무당은 단지 미신을 조장하는 근대화의 걸림돌로 인식될 뿐이었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현재까지의 상황에서 한 가지 다행한 사실은 일제시대 일본인학자들과 초창기 민속학자들이 조사해 놓은 방대한 자료와 연구를 기초로 하여 무당과 무(巫)가 학문의 대상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전국 및 각 도 단위의 민속예술경연대회와 무형문화재 제도는 굿을 전통문화로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굿과 그 문화에 정통한 많은 큰무당들이 세상을 등지면서 뛰어난 기예와 법도가 끊어지게 되었으며, 모시는 신령이 대개 잡신에 불과한 학습이 덜된 선무당이 많아지면서 굿과 무당의 세계가 위축·변질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굿을 하기 위한 비용 마련과 바쁜 세상살이 등의 문제로 인해 대개의 굿은 절차가 생략되어 간소하게 치러지고 있으며, 질병상황의 개선으로 마마배송굿이 사라지는 등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무(巫) 안에는 자연과 인간의 포용, 타종교와의 자연스런 융합, 집단과 집단의 조화, 인생과 우주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중심의 합리주의에 바탕한 세계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무(巫)의 정신은 그만 미신으로 치부되어 버리고 말았다. 최근 서구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거부하던 편협한 안목을 버리고 차츰 인간의 정신세계를 인정하고 그와 관련된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가 진행되면서 굿과 무당에 대한 이해가 예전보다는 제법 나아질 기미가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바른 평가를 받기에는 요원한 실정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