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일 금요일 오전 07시 03분 58초 제 목(Title): 천쓰허/90년대 중국문학에 대하여 90년대 중국문학에 관하여 천쓰허(陳思和) 노정은 옮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중국은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소련과 동구의 붕괴로 인한 이념적 동요와 천안문 사태에 따른 민주화운동의 퇴조 및 사회주의 체제하의 시장경제의 공식적인 천명으로 추진된 개혁개방의 경제정책으로 90년대 중국사회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특히 정치권력에 의해 주도된 경제개발 일변도의 경제정책이 합법성과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강렬한 기대감으로 확산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활동들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금전만능주의는 이념에 대한 상실감을 상쇄시켰다. 그러나 이런 시장경제의 수혜계층에서 제외된 중국의 지식인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소외감과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원래 사회문화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지식인은 점점 그 지위를 상실하고, 사회적 문화적 공간의 주변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근원을 살펴보면 경제적 요소 외에 정치적 문화적 배경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989년 6월 4일의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지식인들의 정치개혁 이상이 심각한 좌절을 겪게 되고 정치적 논의의 기반이 철저하게 제한되자, 지식인은 기존의 계몽주의와 현실주의를 기치로 한 이념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전위적 역할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좌절은 오랫동안 그들을 제약해왔던, 엘리트 의식이 표출된 경박성과 염세적 태도에 대한 근본적 반성의 계기로 작용하였고 다양한 문화의 저류로 스며들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배경으로 90년대 문화는 기본적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정치적 좌절감과 시장경제의 급격한 확산이라는 이중의 충격으로 지식인은 자기 상실감을 겪게 되고, 일원화된 정치적 사회적 이상의 붕괴로 말미암아 다양한 문화적 틀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창작 방면에서는 거시적인 역사서술적 입장에서 개인의 다양한 정신세계를 서술하는 각도로 전환되었다. 특히 이로 말미암아 문학의 주변에서 오랜 생명력으로 지속되어온 민간 문학을 새로이 발견하고 더불어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전환된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문학사상 80년대 문학을 문화대혁명에 의해 단절된 ‘5·4’ 이래의 현실주의 문학 전통의 부활로 볼 수 있다면, 90년대 중국문학은 20세기의 마지막 십 년이란 시점에서 세기를 지배해오던 문학 전통의 주류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문학 본연의 자율성에 기초한 미학적 추구와 다양한 서사적 방식을 찾아가는 새로운 출발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90년대 문학은 문화대혁명 이후 반항과 부정의 기치를 내건 80년대 문학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무명(無名)’의 문화 형태 90년대 문학이 반영하는 새로운 문학적 특징에 대해, 문학평론가들은 각종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1) 그 개념들은 각종 현상을 개괄하는 데 단지 제한된 상대적 의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러한 문학적 현상들을 통칭하여 ‘무명(無名)’이라 부르고자 하는데, 이는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해내기 어려운 상태라는 뜻이다. 20세기 중국문학사 전 과정을 고찰해본다면 거의 모든 역사적 단계마다 시대적으로 공유하는 공통의 주제가 있다. 예를 들면 ‘5·4’ ‘대혁명’ ‘항전(抗戰)’ ‘개혁개방’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시대적인 공통 주제는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가치의 기준인 동시에 그들의 사고를 제약하는 억압적 기능도 하였다. 나는 이를 ‘공명(共名)’이라 부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지식인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공명’ 문화 건설에 참여해왔다. 이는 바로 지식인의 이상 실현에 대한 가능성의 신념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위에서 지적한 ‘공명’의 주제들은 실제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유토피아적 해답에 대한 낙관과 갈망으로 표현되어왔다. 이 두 가지 유형은 중국 30년대 문학에서 잘 설명되고 있는데, 당시 ‘대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이자 주제의 실패2)는 지식인들에게 참담한 실망과 혼돈으로 다가왔으나, 다행히 ‘공명’의 이상이 파괴되면서 다원적인 자유 경쟁의 문화적 국면이 생성됨에 따라 주제와 작가 면에서 다양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문학상의 번영은 짤막한 시기에 불과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의 발발로 이런 다원적 구도는 다시 ‘항전’과 ‘구국’이라는 시대적 주제로 대치된다. 그러나 예측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내포한 90년대 문학에서 우리는 30년대 문학의 ‘무명’ 전통의 새로운 재기를 기대해본다. 소위 ‘무명’이란 개념은, 시대가 안정되고 개방적이며 다원화된 사회적 기반을 갖게 되어 사회 구성원의 정신생활이 점차적으로 풍부해지면서 더이상 기존의 중대하고 일치된 시대 주제로써 민족 정신의 새로운 동향을 담아낼 수 없기에 나타난 다원화된 공생공존의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무명’이란 시대적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주제가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모든 문화활동이나 문학 창작은 각기 그 시대의 단면을 반영할 뿐이며 ‘공명’ 상태로 확대되기는 힘들다. 90년대 문학에 표현된 ‘무명’의 특징은, 문학 유파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기술된 단선적 문학사3)가 파괴되면서 일정한 주제나 방향이 없으며 ‘공명’이 없는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여러 가지의 문학 성향이 공존하는 다원적 가치 체계를 반영하였다. 정치적 선전 색채가 짙은 작품은 일반적으로 정부의 장려금이나 포상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상업성이 짙은 작품은 대중문화 시장에서 상품적 가치 획득을 목표로 삼았다. 한편 순수 문학작품은 전문가에게 인정받고 진지한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렇게 ‘무명’ 문화 상태는 다양한 시대의 주제를 담았으며 복합적인 문화 구조의 틀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문화 구조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정치체제가 가한 강한 정치적 외압의 결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작가들은 더이상 국가의 미래에 대한 이상주의적 추구를 포기했다. 원칙적인 면에서는 개혁개방 정책4)에 대해 인정하면서 이념적 가치의 공백 상태를 개인의 생존 환경에 대한 절실한 관심으로 메우고자 했으며,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주류의식에 대한 강한 부정을 극도로 사적인 언어로 융화시켰다. 동시에 제도권에서도 모든 창작을 국가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도구로 간주했던 공리주의적인 태도를 버리고 제한된 범주 안에서나마 개인의 입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인정하였다. ‘무명’의 문화 상태에서 작가의 서사적 입장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즉 기존의 공통된 사회 이상을 대변하는 입장이 더이상 수용되지 못하고 개별화되고 내면화된 서사적 입장으로 전환된다. 90년대에는 인문정신(人文精神)을 강조하는 신진 작가들이 등단하는데, 장청즈(張承志), 장웨이(張火韋), 왕안이(王安憶), 스티에셩(史鐵生), 리루이(李銳), 한샤오꿍(韓少功), 위화(余華) 등은 이미 문단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은 작가들이다. 사회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란 면에서 그들은 서로 근접해 있지만, 작품에서는 독립된 개별적 방식으로 함께 체험했던 시대 정신을 그려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오로지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표현함으로써 시대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이행하고자 했다. 거의 모든 작가마다 자신의 독립된 정신세계를 지닌 채 자신의 가장 은밀한 경험과 결합시켜, 자기만의 사유 방식의 표현을 통해 시대적인 소명을 완수한 것이다. 이 밖에도 ‘공명’의 소실로 자아에 직면하게 된 일군의 작가들은 자신의 심리 공간을 개척하려는 실험적 창작을 시도한다. 일명 ‘신생대 작가(新生代作家)’로 불리는 젊은 작가들이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출현했다. 그들은 완전히 개인의 생존 환경에서 출발하여 개인과 사회의 긴장된 대치관계를 과장하였으며, 개인의 생활 공간의 잡다함, 혼란, 의미의 부재 등을 통해 신세대 젊은 지식인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처지를 표현하였다. 80년대의 문학과는 달리, 90년대 문학은 문학 유파로 귀납시키기 어렵다. ‘무명’ 상태의 문학은 조각난 파편들의 세계로, 작가들이 자신만의 언어로써 낱개의 파편을 만들어간다. 일부는 기존의 전통적인 엘리트적 입장을 고수하였고, 일부는 시장경제 발전으로 출현한 대중화된 소비문화에 적응하였으며, 일부는 민간 문화의 입장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을 고민하였으며, 혹자는 극단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세계에서의 자아를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무명’ 상태는 처음에는 매우 낯설고 혼란스럽게 보였으나 궁극적으로 문학이 시대적 ‘공명’이라는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 공간 안에서 자신의 독립된 목소리를 갖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다원성이 보장되는 문화적 풍토에서 작가들은 ‘무명’의 특성을 가진 작품들을 써냈는데, 왕안이의 『아저씨 이야기(叔叔的故事)』와 『장한가(長恨歌)』, 스티에셩의 『제단과 나(我與地壇)』, 장청즈의 『심령사(心靈史)』, 장웨이의 『구월의 우화(九月寓言)』, 위화의 『쉬싼관의 피를 판 이야기(許三觀賣血記)』, 한샤오꿍의 『마교사전(馬橋辭典)』 등은 20세기 문학사에서 매우 소중한 성과라 하겠다. 신생대 작가 신생대 작가는 90년대 문단에 등장한 작가들로 대부분 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출생하여 문화대혁명 이후에 정식 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50년대에 활동한 작가들처럼 직접적인 정치적 박해를 받지도 않았고 지청(知靑)5) 세대처럼 상산하향(上山下鄕)6)을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화대혁명’이란 재난은 어린 시절에 본 공포 영화와 같은 무의식 속의 기억일 뿐이었으며, 그들이 교육을 받은 80년대는 중국 사회의 격동적 전환기로, 기존의 견고한 가치 체계들이 모두 새롭게 실천의 검증을 거쳐 현재적 의미를 평가받게 되면서 수용과 회의가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그들이 사회적 활동을 시작한 90년대 사회는 신화 속의 요술지팡이처럼 무수한 욕망을 양산해냄으로써 이는 그들에게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작가들은 본능적으로 주류 문화를 낯설어하여 이를 인정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으려 하였고,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제도권 밖의 주변인으로 자처하며 사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활 방식과 심리적 욕구를 표현하였다. 그들 중에는 50년대에 출생한 지식청년 작가들도 있다. 그들은 80년대에 이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지만 비교적 사적인 서사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시대적 ‘공명’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고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90년대에 들어서야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유명한 페미니즘 작가인 린바이(林白)나 요절한 수필 작가 왕샤오뽀(王小波)가 이런 경우이다. 신생대 작가들은 대부분이 비교적 높은 교육을 받았으나 고정된 직업이 없는 생활을 해나간다. 시장경제가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인구의 유동이 심해지고 자유 직업이 생성되었는데, 신생대 작가들은 대부분 변두리 소도시나 농촌에서 대학 졸업 후 일정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떠돌다가 대도시에 모여 살게 된다. 그들은 막연하게 도시생활에 대한 환상과 예술에 대한 꿈을 품은 채, 반은 자발적으로 고료로 살아가는 ‘자유 기고인’의 삶을 영위해간다. 원래 사회주의 체제하의 중국에서는 문화정책상 전업 작가들은 국가 간부급의 대우와 고정 수입을 받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특권계층의 생활을 영위해왔다. 이로 인해 그들은 체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회 주변을 떠돌며 불안정하고 빈곤한 생활을 선택한 신생대 작가들은 오히려 체제 밖의 자유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만의 독특한 서사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80년대 문학은 그 문학적 주류가 여전히 국가, 민족, 인민 등의 큰 개념을 그 출발로 삼고 있는 시대의 ‘공명’을 반영하는 데 비해, 90년대의 신생대 작가들은 먼저 이런 추상적 개념을 거부하면서 시대적인 주제로부터 관심을 돌려 극단적으로 개별화된 서사 방식으로 사회체제 밖의 유랑자인 자신들의 자유로운 정신과 반항을 표현하였다. 사실 이런 사적인 서사 방식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문단에 등단한 전위적인 일부 젊은 시인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는데, 그들은 문화 공간의 변경에서 다양한 형식의 실험적인 시를 창작하였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짧은 이삼 년 내에 그들은 백여 종의 시 동우회와 소모임을 형성하고 비공식 출판 경로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통계에 의하면 “1986년 7월까지 전국에서 비공식적으로 출판된 시집은 905종, 비정기 간행물이 70종, 비공식적으로 발행된 활자본 시 간행물과 시보(詩報)가 22종에 다다른다”.7) 이는 엄격한 이념의 통제가 가해지는 국가에서 단순한 산술적 기록을 넘어서는 기적적 의미를 지니는데, 지하 출판을 통해 일원화된 국가 이념의 전제적인 면을 해체하려는 그들 나름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공통된 특징이나 통일된 조직이 없으며, 일명 ‘신생대 시가(新生代詩歌)’ 혹은 ‘제3세대 작가’8)로 불린다. 그중에는 비교적 영향력 있는 단체로 난징(南京)의 ‘그들(他們)’, 상하이의 ‘바다에서(海上)’, 쓰촨(四川)의 ‘신전통주의(新傳統主義)’ ‘총체주의’ ‘비비주의(非非主義)’ ‘야만인주의(莽漢主義)’ 등과 이렇다 할 유파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청년 시인들이 포함되며, 그들은 ‘제2세대 시인’이라 불리는 몽롱시인(朦朧詩人)9)들이 가진 선구자적 입장의 지식인 속성과는 구별되는 사적인 서사 방식과 가치 성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문화와 의미의 원류가 되고자 한다”.10)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생활 방식과 창작 방식, 실험적인 시학 관념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철저히 대치되었으며, 90년대에 ‘무명’의 시대가 도래하자 신생대 작가의 원류로서 재구성된다. 90년대의 신생대 작가라는 명칭은 그 성격이나 범주가 불명확한 개념이다. 그들의 창작은 일정한 특징을 지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히 문화적 소비시장이 형성된 후 고료로 살아가는 이 작가들은 세속에 타협하여 상업적 대중문학에 영합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비교적 ‘무명’ 문화의 특성을 개인적 서사 방식으로 잘 소화시킨 작가로는 난징의 ‘그들’에서 활동하던 한뚱(韓東)과 주원(朱文)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신생대 시가’에서 표현된, 사회의 주류 문화에 반대하고 일상성을 특징으로 하는 90년대의 문화 배경 속에서 ‘무명’의 특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한뚱은 주원 소설집 서문에서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자기 자신의 가장 절박한 고통을 포착하여, 가장 진실하고 용감하게 대면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이는 비애와 절망을 조작하는 작가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면서 기존 시인들이 “권력사회에서 민중의 이름으로 글을 쓰거나” 혹은 “인류라는 명목하에서 글을 쓰는데” “이 두 가지 글쓰기 모두 자신이 배제되어 있으며 단지 대변인의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11)라고 비판하였다. 그가 말하는 ‘가장 절실한 고통’과 ‘가장 용감한 대응’은 80년대 지식인들의 ‘민중을 위해서’라는 계몽주의의 엘리트적 입장에 대한 냉철한 자성적 비판이었다. 80년대 작가들은 ‘인민’이나 ‘인류’와 같은 공허한 이름의 대변인으로 자처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추상화된 허위 감정에 의탁하여 그들의 시를 시대의 선전 도구로 전락시켰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공명’의 시대에는 역사적 전통의 중압감 때문에 개인의 생명 체험은 거대한 역사적 서사 속에 완전히 함몰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절감했다. 따라서 ‘공명’에 항거하기 위하여 기꺼이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의 생명으로 ‘직접 창작에 임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아동의 시각이나 소년 시절에 대한 회상 기법을 사용하여 기존 이념에 의한 시대 해석을 와해하고자 하였다. 이런 기법이 성공적으로 구현된 작품으로 한뚱의 단편소설 「세 자 땅굴(掘地三尺)」을 꼽을 수 있는데, 작가는 아이의 눈으로 문화대혁명을 새로이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당시 중국과 소련이 영토 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자 중국정부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민들을 강제 동원시켜 지하 땅굴과 방공호를 만드는데, 이런 노역은 성인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힘겹고 혐오스러운 것이었으나, 순수하고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마냥 재미있고 신기한 볼거리였으며 신나는 ‘전쟁’ 놀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소설은 현실적 논리에서 이탈된 방식으로 시대를 재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시 개개인의 일상의 파편 속으로 환원되어 시대에 대한 강한 조소와 풍자를 담아냈다. 신생대 작가의 소설은 개인 생활의 자질구레하고 무료한 내용으로 충만해 있는 것 같지만, 내심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인간의 생존 환경과 대립되는 긴장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 중에서도 주원은 거센 비판과 더불어 쟁론을 불러일으킨 작가로서, 그의 『집게손가락(食指)』 『난 달러를 사랑한다(我愛美元)』 『치열한 가을(尖銳之秋)』 등과 같은 소설은 현대인의 “초조, 허무, 절망을 그렸으나 순수하게 사적인 언어로 진정한 인간의 소리를 담으려 하였고 이런 모든 감정의 사슬이 모여서 일종의 실존적 정신 상태가 되었다”.12) 처음 그의 소설을 접하게 되면 다소 가볍고 산만하다고 느끼는데, 사실 작가는 이런 ‘가벼운’ 서사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엄숙한 탐색을 시도하고 있다. 1997년에 발표한 『치열한 가을』에서는 성병에 걸린 유랑 작가를 다루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왔으나, 성병에 걸린 후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병을 발견하면서 돌연 인간성의 모종의 엄숙한 의미를 되짚게 되고, 따라서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과정에 가슴 저미는 고통이 뒤따른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에서 성병은 하나의 사회 현상에 비유되고, 주인공은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가 마치 성병과 신체와의 관계와 같다고 느끼면서 “비록 살아는 있지만 호흡조차도 온기가 없으며, 성병은 불결하다는 오명을 짊어지고 있지만 성병을 만드는 육체보다는 결백하며 무고하다”고 보았다. 과거 문학 창작에서 ‘성병’은 부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모욕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주원의 작품에서는 단순한 질병의 하나일 뿐 환자에 대한 인격적인 경시를 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곳곳에서 관대한 인간적인 따스함이 표현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작품들이 진실하게 ‘인간 정신의 비상’을 그려냈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만약 80년대 인성의 숭고함을 강조한 인도주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겸허한 자세로 대지와 하나로 결합한, 혹은 생명 본연의 모습으로 스며든 겸허한 정신적 비상”13)이라고 말하고 싶다. 신생대 작가는 현대화된 대도시나 변경의 중소도시 등 중국의 많은 도시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각각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창작 경향도 다르지만, 대도시에 모여 사는 방랑 문인들을 다룬 점이 공통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주인공은 아직 이름이 나지 않은 시인이나 화가, 음악가 등 분명한 직업이나 신분이 없는 유랑 예술가로서 대부분 지방이나 농촌에서 대도시로 이주하여 활동하면서 현대화된 도시의 사치스런 생활 방식에 환상을 갖고 있지만, 늘 권력의 중심이나 문화의 주류에서 이탈되어 정상적인 사회관계 밖으로 배척된다. 이로 인해 도처에 폭발하려는 광기가 가득한 욕망의 도시 속에서 그들은 이방인이며, 자유롭고 궁핍한 유랑자였다. 이런 전형적인 인물은 90년대 시장경제 발전의 산물로서 일부 신생대 작가 자신의 생활 상태와 정신적 면모가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유랑 문인의 형상은 서로 다른 면모로 형상화되었는데, 한뚱이나 주원은 세속적 도덕을 부정하는 정신으로 빈곤한 물질 생활에 대해 자조적으로 웃어넘겼으나, 다른 작가에게서는 이것이 오히려 사회의 권력과 재력에서 배제된 계층의 강한 분노로 표현된다. 북경에서 활동하는 작가 치우화뚱(邱華棟)의 단편소설「모래 도시」는 후자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주인공의 습관성 동작에 관한 독백으로 시작된다. “매번 내가 빌딩 숲의 골짜기와 3층 입체 교차 다리를 지날 때마다 이 도시의 거대한 몸뚱이가 부들부들 떨며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나는 무의식중에 중지와 엄지를 내밀어 툭 건드리고는 악랄하면서도 얼마간은 치기 어린 웃음을 터뜨린다.” 이런 무의식적 동작은 도시에 대한 주인공의 미움과 혐오를 나타내는데 손가락의 ‘가벼운 퉁김’만으로도 북경의 빌딩들은 ‘길을 따라 도미노의 패처럼 차례차례 쓰러져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징적 동작은 가난한 예술가를 소재로 한 평범한 애정 소설에 무게 있는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였고, 유랑아인 세 명의 주인공 외에 북경이라는 현대화된 도시를 또하나의 잠재적인 배역으로 부가하였다. 유랑자들은 시장경제가 부활하고 있는 베이징이라는 도시를 기회와 욕망이 충만한 도시로 여기지만, 그들은 이 도시에 호적도 없고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맺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도시는 이들 예술가와 그들의 재능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자유 경쟁으로 경제적인 활기를 회복한 도시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부의 욕구를 자극하지만, 그러나 개인이 정당하게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부는 권력자의 것일 뿐 대다수 인간은 맹목적으로 미친 듯이 금을 캐는 행렬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랑 예술가들은 기회와 욕망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적인 재능을 표현할 기회와 부를 추구하는 그들의 욕망은 이 도시에 대한 일종의 관계로 전환된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은 전쟁을 선포한 자가 굴복하고, 이로 인해 대도시의 하층을 떠돌며 부를 추구하다가 참혹한 대가를 치르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심초사하는 심정과 어찌할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치우화뚱은 기존의 작가들처럼 민중 혹은 정의의 이름으로 부 자체를 비난하거나 분배의 불공정함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부를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갖게 되는 도시에 대한 강렬한 증오와 원망을 기탄없이 표현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욕망을 진취적이고 주체적으로 표현했고 물욕에 대한 인간 영혼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려냈다. 생활 속에서 이러한 장면은 90년대에야 비로소 출현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작중인물의 정신 상태와 심리 묘사도 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진실성을 얻게 되었다. 당대(當代)* 여성 작가의 창작 기존의 중국 여성 작가의 자아 표현이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권리의 쟁취라는 일반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고 한다면, 새로운 세대의 여성의 창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창작되었다. 그들은 일종의 개인적인 언어로 여성의 개체적인 생존 상태를 직접적으로 묘사했으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느낌, 감정과 욕망, 남성에 대한 절망 등 여성의 은밀한 감성적 경험에 중점을 두어 묘사했다. 여기에 표현된 여성의식은 더이상 사회의 공공의식에 참여하거나 공공의식과 서로 용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성적 권력으로 상징되는 사회와 종종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제시하는 여성 문제도 더이상 ‘공명’의 보편적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당대 여성 창작의 첫번째 고조는 80년대 중기의 여성 시가 창작이다. 강렬한 주의를 불러일으킨 자이융밍(翟永明)의 연작 장시 「여인」은 자각적인 여성 창작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그후 탕야핑(唐亞平)의 연작시 「검은 사막」, 이레이(伊雷)의 연작시 「독신녀의 침실」과 자이융밍의 연작시 「징안좡(靜安莊)」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人生在世)」 등이 계속 발표되었으며, 또한 루이민(陸憶敏), 장쩐(張眞), 장예(張燁), 샤오쥔(小君) 등의 여성 시인도 풍격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여성의 개체로서의 체험을 표현한 서정시를 썼다. 이러한 작품들은 거의 모두 남성세계(사실은 바로 보통 의미에서의 권력세계 혹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세계)를 반항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여성 자신의 언어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주목이 요구된다. 이러한 노력은 남성 중심 언어를 근본적으로 전복하기 위한 것으로, 여성/남성, 밤/낮, 달/해, 광증/이성, 반역/소유 등등 이원적으로 대립하는 일련의 시적 경계가 출현했다. 이러한 첨예한 대립 구조 속에서 여성의 삶의 감성적 내용을 부각시켜 표현했으며, 동시에 사회 역사와 권력의식의 온갖 허망한 가상을 와해시켰다. 자이융밍이 「여인」의 서(序) 「어두운 밤의 의식」에서 창조해낸 ‘어두운 밤’의 경계(境界)는 후에 차츰 대다수 여성 시인에게 받아들여져 여성 시가 창작의 핵심적 상징이 되었다. 당대 여성 창작의 두번째 고조는 90년대 여성 소설과 산문의 창작이다. 대표적 작가로는 천란(陳染), 린바이, 쉬샤오빈(徐小斌), 홍잉(虹影), 쟈오메이(趙政) 등이 있다. 여성 작가의 창작은 한때 일부 평론가에게 ‘사적인 창작’이라는 부정확한 칭호로 불린 적이 있다. 그러나 여성의식은 결코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여성의식은 사회 전체와의 격렬한 투쟁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여성 작가가 사적인 언어로 자신을 표현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다른 문학 양식과 비교해보건대 소설 영역에 반영된 여성의식과 사회적 대립은 더욱 직접적이고 첨예하며, 이로 인해 일어난 논쟁도 더욱 격렬한 편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천란의 중편 「정처없는 작별(無處告別)」 「옛일과 건배를(與往事乾杯)」과 장편 『개인적 인생』이 있으며, 린바이의 『한 사람의 전쟁』 『방을 이야기하 자』*와 중편 「회랑(回廊)의 의자」 「치명적 비상」 등이 있다. 천란과 린바이는 이 시기 가장 주목받는 두 명의 여성 작가이다. 천란은 베이징의 상류 지식인 가정 출신으로, 비교적 고상한 문화적 분위기에서 여성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후 그녀는 출국과 귀국, 결혼과 이혼을 통해 지식인 여성이 대면하게 되는 특수한 사회적 압력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녀는 소설에서 ‘따이얼(黛二) 아가씨’ 등 일련의 자전적 색채를 지닌 여성 형상을 창조하여 개인과 전체가 상호대립되는 첨예한 형식을 통해 현실사회에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젊은 지식인 여성의 곤경을 이성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장편 『개인적 인생』은 여성 개체의 생존 환경과의 대치와 소외를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주인공 니아오아오(倪拗拗)는 이름 자체가 강렬한 반역적 성격을 표현하고 있듯이 성격이 괴팍하고 민감하며 집요한 여성이다. 그녀는 완전히 내심의 삶 속에 함몰되어 어떠한 공공의식이든 모두 증오하며 철저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결국은 사회와의 교류에 적응할 수 없는 자폐증 환자가 되고 만다. 그녀 자신의 말을 빌리면 “일그러진 세대의 일그러진 인간”이 되고 만다. 린바이는 중국 서남쪽 주술문화적 색채가 충만한 편벽된 문화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여성으로, 90년대 유랑 문인의 신분으로 베이징에 들어와 결혼으로 베이징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문화적 환경의 면에서 그녀는 여전히 타지 사람으로 베이징 문화권의 배척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풍부한 감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유미적인 수법으로 성욕과 폭력 장면을 묘사하여 논쟁을 일으키곤 했다. 『한 사람의 전쟁』은 발표되자마자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서, 작가의 심리적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암시적인 수법으로 한 여성이 겪게 되는 삶의 여정을 묘사했으며 주인공의 각종 성격적인 결함 및 성(性)의식의 성숙 과정을 극히 솔직하게 묘사했다. 주인공 뚜어미(多米)는 어린 시절 모기장 속에서 성의식에 눈뜨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이 소녀 시절에 겪게 된 강간, 간통과 첫사랑의 경험을 통해 남성세계가 그녀에게 입힌 상처와 거부를 드러내 보여준다. 뚜어미는 자각적인 페미니즘의 정신적 표본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녀는 처음에는 남성으로 상징되는 세계에 비굴하게 영합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인정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는 오히려 그녀의 환상과 기대를 쉽사리 부수어버렸으며 그녀를 정신적으로 폐쇄된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 ‘한 사람의 전쟁’이라는 제목 자체가 바로 어찌할 수 없는 여성의 자아에 대한 사랑을 암시한다. 이 두 명의 여성 작가는 현대 여성이 현실사회에서 부딪치게 되는 갖가지 곤경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주인공의 정신세계 및 성적 욕망을 부각시켜 표현한 점, 편모 슬하의 결손 가정에서 자라난 소녀가 품게 되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증오 및 남성세계에 대한 실망 후 전환하여 동성애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게 되는 모습 등 사적이고 은밀한 서사적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상응하여 모종의 참신한 심미적 풍격을 가져왔다. 즉 여성성을 재발견하는 과정 중 대량의 자아 감상적인 독백, 신체와 신체 각 부위에 대한 느낌, 순수하게 정신적인 백일몽적 환상 등의 묘사에서 자아 도취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으며, 바꾸어 말하자면 여성 창작의 독특한 심미적 정신을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다. 민간이상주의(民間理想主義) 민간이상주의는 90년대에 출현한, 민간의 이상을 작품에 표현하려는 일군의 작가들의 창작을 가리킨다. 50, 60년대에 이상주의라는 용어는 정치 이념의 대명사였으나, 80년대 말의 천안문 사태와 90년대의 경제 개혁 정책의 영향으로 허위 이상주의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인류가 향상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요구도 포기하고, 이상도 저버린 채 속된 유물주의로 도피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정치 투쟁에서 빠져나온 지식인들은 일시적인 가치 부재의 혼돈을 겪게 되나 혼돈 속에서 점차 대중 소비문화에 영합하게 된다. 이들은 경제개방이 시작된 80년대부터 독자의 호응을 얻었던 작가들로 본래 대중문화를 거부하는 것을 특색으로 삼았던 전위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은 영화나 연속극의 대본을 쓰거나 일간지에 생활 소품을 기고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게 된다. 이런 문화적 풍토의 확산은 정신문화 영역 전반에 걸쳐 위기감을 가져오게 됨에 따라, 1993년 상하이의 일부 지식인들은 ‘인문정신의 탐색’이라는 토론회를 개최하여 다시금 정신 영역의 가치를 찾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시도는 지식층에서 열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부 작가들에게도 반영되었는데, 그들은 역사적 경험을 교훈삼아 50년대식의 이상 추구 방식이 아닌,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운 민간의 대지로부터 자신들의 이상을 세우려 하였으며, 새로운 언어 공간을 개척하여 이런 다원성을 표현해내고자 했다. 민간이상주의는 또하나의 새로운 서사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민간’이란 용어는 각 역사 시기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한데 여기에서 말하는 ‘민간’이란 90년대 중국 문학작품에 표현된 특정한 문화 형태와 가치 성향을 가리킨다. 이는 전통적인 농촌의 자연경제를 기초로 한 종법(宗法)사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구체적인 제재나 창작 방법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민간’이 포괄하는 범주는 훨씬 광범위한 것으로서, 권력과는 무관한 일종의 문화 형태이다. 이는 지식인의 엘리트적 문화 형태가 아니라 새롭게 제시된 문화적 시각이자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작가의 창작 태도, 가치관, 심미적 특성에 스며 있다. 지식인은 과거 오랜 역사 동안 줄곧 거대한 서사에 의해 가려져왔던 ‘민간’이라는 문화 공간 속에 자신을 은닉시켜 ‘민간이 풀어내는 이야기 방식’을 새로운 세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아, 지금까지 표현하기 어려웠던 사회에 대한 비판을 그려내고자 한다. 이런 노력들은 주로 80년대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문화 뿌리찾기(文化尋根)’ 작가와 선봉파 작가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그들은 실제로 직접적 체험을 통해 민간의 생활 토양 위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채 여기에서 이상적인 생활 방식과 가치를 확인해가는 작업들을 전개하였다. 민간으로부터 이상을 흡수하는 것은 정치 이념이 제시하는 이상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우선 민간의 이상은 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민중의 낙관주의와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나오며, 민중의 삶의 원초적 잔혹성과 고통을 정시해야만이 비로소 감당하기 어려운 운명을 짊어지는 가운데에서 나오는 본능적 유머로부터 고난에 맞서는 정신적 힘의 근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저명한 전위파 작가인 위화는 90년대에 장편소설 『살아간다는 것(活著)』과 『쉬싼관의 피를 판 이야기』를 연이어 발표하였는데, 두 편 모두 근 반세기 동안에 중국의 도시 하층민이 겪는 일상적인 고난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기존의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회 비판적 작품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위화는 의도적으로 역사적 현실들을 우회하여 그려내어 작품의 서사적 요소를 강조했다. 그의 작품은 마치 한 편의 장편 민가(民歌)처럼 인생의 고난과 운명의 무상함을 되풀이하여 노래했으며, 반복되는 사망과 불행한 운명을 통해 고난을 받아들이는 힘과 그 고통을 승화시켜가는 중국 민중의 모습을 그려냈다. 1977년에 발표된 단편 「노을 속의 아이」는 일종의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사과를 훔친 소년에 대한 노점상의 잔혹한 징벌이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세부 묘사가 대단히 핍진하여 이러한 잔혹한 이야기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발생할 수 있을 거라 믿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결코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다. 단지 이 이야기를 빌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 있는가’라는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노점상은 사과 한 개를 훔친 사내아이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는 그것도 모자라 그 소년에게 “나는 도둑이다”라고 외치도록 윽박지른다. 그리고는 “내 평생 제일 미워하는 놈이 바로 이런 좀도둑이지” “이것도 다 저 아일 위해서지요”라고 하며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당당하게 선포한다. 이로 인해 그의 폭력 행위는 사회적 윤리적 합법성을 얻게 되며, 방관자와 전체 사회윤리, 도덕, 법률 등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 노점상의 공범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우화처럼 의미심장한데, 가해자인 그 노점상 역시 운명적인 비극에 의해 정상적인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작가의 용서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은 운명적 비극과 인간성의 비극이 결합되어 영원히 순환되는 인간성의 타락사를 이루고 만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노을 속의 아이가 그러한 폭력을 당한 후 제2의 잔혹한 행상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민간의 이상은 자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중국 공산당사에서 보이는 선전적 입장을 의식적으로 탈피하여 민간 자신의 역사적 모습과 생활 논리를 드러내고 있다.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현대사를 소재로 한 작품은 엄격하게 사회주의 역사관에 따라야 하는 제약을 받았으며, 이는 정치권력의 합법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에 발표된 『붉은 수수밭(紅高梁)』은 기존의 역사 제재를 다룬 작품들과는 달리 새로운 사관에 의해 서술되었다. 작가 모엔(莫言)은 민중의 생활에 근거한 직접 서술 방식으로 역사적 모습을 재구성하였으며, 도적떼와 주모의 사랑을 줄거리로 하여 민간에 전해지는 연애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이 30년대 중일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공산당이나 국민당의 군대가 아니라 지방의 도적떼로 조직된 자발적인 민군을 중심으로 전쟁을 서술하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90년대 민중의 입장에서 현대사를 다룬 ‘신역사 소설(新歷史小說)’의 장을 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수퉁(蘇童)의 『처와 첩들(妻妾成群)』, 에자오엔(葉兆言)의 『친화이강 이야기(夜泊秦淮)』, 리샤오(李曉)의 『민요(民謠)』, 천중스(陳忠實)의 『바이루위엔(白鹿原)』 등도 이 시기에 발표되어 관심을 모았던 대표적인 신역사 소설들이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여류 작가 왕안이가 199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장한가』이다. 이 작품은 민중의 모습을 현대 도시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결합시켜 예술적으로 표현했으며, 민간의 입장에서 4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대도시 상하이의 역사적 변천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 미의 상징이었던 ‘미스 상하이’ 왕치야오(王琦瑤)는 중일 전쟁이 종식되자 허영의 도시 상하이에서 갑자기 얻은 명성만큼 쉽게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결국 국민당 관료의 정부로 전락하게 된다. 50년대에 상하이는 공산당의 통치하에 들어가고 일련의 정치적 변혁을 겪게 되지만 상하이의 시민들은 암담한 삶 속에서도 화려한 문화생활에 대한 환상을 상하이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여전히 이전의 생활 방식대로 살아간다. 경제 개방이 실행된 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상하이는 다시 과거의 문화적 활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왕치야오의 황금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상하이의 옛 꿈에 대한 환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왕치야오에게서 ‘미스 상하이’의 옛 꿈을 되돌려보려 하지만 결국 거칠고 냉혹한 세태에 휘말려 그녀는 화석처럼 풍화되고 만다. 왕안이는 이 작품에서 정치적 사건으로 상하이의 역사를 끼워맞춘 전통적 서사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운명을 축으로 상하이의 역사를 기술해갔으며, 개인의 운명을 통해 역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왕치야오의 이야기는 상하이 역사의 ‘화려한 옛 꿈’이 된 것이다. 끝으로, 민간 문화 형태의 다원성은 이상의 다원성으로 전환된다. 민간 이상은 어떤 선험적인 이상 모형이 아니며, 모든 작가는 자신의 다양한 민간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이상에 대해 전혀 다른 이해를 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이슬람 민간 신앙에 심취한 장청즈는 비밀리에 전수되어오던 민간 종교 문헌을 대량 발굴, 조사하면서 저허렌예교14)의 역사와 교리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장편 종교 역사소설 『영혼의 역사(心靈史)』를 써냈다. 작가가 그려낸 종교의 세계가 독자들에게 친숙한 문화는 아니지만, 작품에 내포된 형이상학적인 종교정신의 탐구를 통해서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팽배한 현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작가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으며, 이는 독자에게 진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산둥(山東) 작가 장웨이도 오랜 농장생활을 바탕으로 자연계의 평형을 파괴하는 현대화된 생산 방식을 거부한다. 그의 장편소설 『구월의 우화(九月寓言)』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대지에 대한 절대적 찬미와 더불어 여기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삶의 자연스럽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통하여 생명력이 충만한 문화정신을 그려냈다. 이 외에도 한샤오꿍, 리루이, 천춘(陳村), 쉬훼이(許輝) 등은 비록 각자 다른 민간 이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각각 개인적 입장과 민간세계와의 성공적인 결합을 통해 개인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다원화된 사회상과 가치 체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가히 세기말 문학의 최고의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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