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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31일 월요일 오전 02시 00분 34초
제 목(Title): 퍼온글/한21 만파식적 


지성/통일을 위한 관용의
미덕 

만파식적(萬波息笛). 

‘오만 가지 파도를 잠잠하게 만드는 피리’란 얘기다. ‘오만 가지 파도’에는
진짜 바닷물결은 물론, 전쟁·질병·기근·폭우 등 인간의 모든 근심사가 포함된다.
이 피리를 손에 넣으면 피리만 닐리리 불고 있어도 만사가 형통할 터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는 이 만파식적 설화를 독특하게 해석한 배병삼
교수(성심외국어대·한국정치사상)의 글 ‘통일 이후를 위한 만파식적의 정치학적
독해’가 실려 있어 흥미를 끈다. 

전설의 피리, 거기에 통일 뒤의 삶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신문왕 즉위 다음해인 682년,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왔다. 거북 머리를 닮은 산 위엔 대 한 그루가
자랐는데 낮에는 둘로 짜개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기이하게 여긴 신문왕이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가서 용에게 물으니 용은 이렇게 답했다.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난다.
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이다.” 왕이 용에게 후사하고
대나무를 베어와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땐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게 바로
통일신라 국보 제1호인 만파식적, 또는 만만파파식적의 유래담이다. 

배 교수는 이 설화가 삼국통일 이후 14년, 당나라 군사가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군한
지 6∼7년 뒤에 나왔다는 데 눈을 돌려 여기서 ‘통일 이후의 정치학’을 읽어낸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수천 수만의 군사들이 죽어갔고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나의 시대는 다투고 싸우는 시대였다”는
통일군주 문무왕의 발언은 이런 시대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유언에서 “병장기를
녹여 농기구로 만들고 백성들을 평화와 안녕의 땅으로 이끌고자 했다”고 썼지만,
대립과 원한의 시대를 마감하지는 못했다. 다음 군주인 신문왕 즉위 이듬해에
만파식적이 등장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배 교수는 우선 대나무가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한 것이 “신라인들의 지배욕망과 유민들에 대한 연민간의
갈등”을 뜻한다고 읽어낸다. 대나무의 ‘하나 되기’가 영토확장 욕구, 자기
원한을 깡그리 풀고 싶은 욕구, 남의 것을 내것으로 지배하려는 폭력의 욕구를
상징한다면, ‘둘이 되기’란 “내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폭력이 아니라, 남을
남으로 인정할 줄 아는 관용”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를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풀이한 용의 말은 “주먹에서
손바닥으로의 전환”에 대한 요청이다. 주먹에서 손바닥으로의 전환은 “무기에서
악기로의 전환”이다. “주먹이 마주칠 때 전쟁·불화·죽음이 발생하고 손바닥이
마주칠 때 평화·화목·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배 교수는 대를 베어 악기를
만든 일을 ‘소리의 정치학’이라고 자리매김한다. 그는 소리를 언어와 대비시킨다.
분절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는 이성적 지배의 상징이다. 반면 소리는
‘동감’을 추구한다. 지은이는 이 소리가 칼자루를 쥐고 ‘민족 화합’을 외치는
신라의 소리가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인들의 소외되고 억눌린 소리이며, 통일전쟁
과정에서 죽어간 삼국인들의 원성”일 것이며, 따라서 만파식적의 피리소리 또한
결코 맑고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소리의 정치학이란 결국 “피리소리로
치환되어 흘러나오는 그 원성의 의미를 제대로 새겨듣는” ‘새겨듣기의 정치학’을
뜻한다. 

만파식적의 정치학을 실천하는 길 

배 교수는 이런 독특한 신화읽기를 바탕으로 “나를 주장하고 확장하며, 남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통일 과정의 그 충혈된 열정(passion)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를
응축하고 남의 말에 귀기울이며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연민(compassion)으로의
전환이야말로 만파식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제시하는 통일 이후 삶의 길”이라고
맺고 있다. 

배 교수의 글은 통일과 그 이후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못지 않은 지역감정과 정치적 지역할거주의의 발톱이 백성들에게 원한과
갈등과 상처를 안겨주고 있는 오늘의 현실과 오버랩시켜 읽는 일이 더 생산적일지
모른다. 가령 박정희 기념관을 지원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행보는 만파식적의
정치학을 실천하는 길일까? 전혀 거기에 미치지 못함이 유감이다. 박정희에 대한
화해의 몸짓으로 대구 민심을 끌어보겠다는 그의 계산법은 박정희를 대구지역의
죽은 맹주로 보고 지역할거주의를 영속시켜 정치적 반사이득을 얻으려는, 깊지 않은
술수이기 때문이다. 지역할거주의를 끝장내고 진정한 겨레의 화합을 이루기 위한
‘새겨듣기의 정치학’은 어디서 가능할까.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이 마땅히
씨름해야 할 화두일 것이다. 

이상수 기자 

leess@ma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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