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1일 목요일 오전 09시 48분 43초 제 목(Title): 이동하/조선의 선비정신과 허생의 부끄러움 [3] 제목 : [다시 생각하는 고정관념] 조선의 선비정신과 허생의 부끄러움 이동하 /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일본이 한국을 강제적으로 점거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지배하는 동안, 일본의 여러 유력한 지식인들은 뜻을 하나로 모아, 한국에 대한 자기 나라의 폭력적 지배를 정당화해 주는 이론체계를 만들 어냈다. 그 이론체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이른바 식민 사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식민사관에 따르면, 한국의 역사는 한 국인이 식민 지배를 받아 마땅할 정도로 열등한 백성이라는 사실 을 증거해 주는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이 사회의 주축을 이루었던 조선 시대 의 역사가 그러하다고 한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기간 내내 한국인들의 머리 속에 이러한 식민사관을 주입하고자 조직적으로, 집요하게 시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식민사관을 구성 하고 있는 세부사항들 가운데 상당부분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 이는 경향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던 동안에는 물론이요 그 이후 까지도 꽤 오랫동안 나타난 것을 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선비 집단이 신봉하고 발전시킨 성리학의 사 상체계 전체를 쓰잘 데 없는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규정지어 폄해 버리는 주장은 엄연한 사실을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극단적 으로 왜곡한 사례 가운데서도 전형적인 것인데,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이 일제 강점기에는 물론이요 해방이 된 이후에조차 적지 않 은 수의 한국인들에게 타당한 얘기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식민사관의 허위성이 거의 남김없이 폭 로된 것으로 여겨진다. 방금 든 예를 놓고 살펴보더라도, 조선조 성리학의 사상체계 전반을 공리공론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인가 하는 사실은 이제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입증돼 있다. 단지 <조선조의 성리학을 그렇게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투의 심정적 반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조의 성리학 자체에 대한 자세하고도 깊이 있는 연구에 의하 여 그 점이 입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식민사관에서 중요한 항목을 이루고 있는 또다른 것들, 예컨대 사대근성에 대한 논의 라든가, 당파근성에 대한 논의라든가, 반도(半島)의 숙명적 한계 성에 대한 논의들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식민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인식을 갖지 않 고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우리 역사를―그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조선 시대 역사를―살펴볼 때, 그것의 실상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이 물음에 대한 내나름의 답은 지난호의 「돈 문제야 모르는 게 미덕이지」 속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 한 내용은 사실 너무나 불충분하고 소략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번에는 주자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이 사회의 주축을 이루었던 조 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내 나름의 관점을, 지난번과는 조금 각도 를 달리하는 가운데, 좀더 상세히 피력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러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현대를 사는 우리 자 신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몇 마디 의견을 적어보고자 한 다. 정신의 아름다움에 깃들인 문제점 시야를 넓혀서 관찰해 보면, 식민사관을 만들어 퍼뜨린 사람과는 정반대로 조선 시대의 역사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주장도 우리 주변에서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하나만 예를 들어 보면, 최근 에 『조선시대 조선사람들』(가람기획, 1997)이라는 책을 펴낸 젊은 국사학자 이영화씨는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적어 두고 있다. 「조선은 위대한 나라였다. 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위대한 사 람들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조선 시대만큼 정신적 가치를 추구했 던 시대는 없었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가치를 우선시했던 조선 사람들은 풍요 속의 빈곤에 찌들어 일그러진 우리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선 시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 내부에서 다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보면, 이들이 펴는 다양한 조선 시대 옹호론 가운데서 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는 세계사에서도 유례 가 드물 정도로 훌륭한 이념적 목표를 가진 나라였으며, 선비 집 단은 그 훌륭한 이념적 목표를 만들어내고 지속적으로 다듬어간 무리로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논리임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주장의 가장 뛰어난 문학적 표현은 작가 이문열씨에 의하여 지난 80년대 초에 이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 리』라는 소설의 형태로 제시된 바 있다. 지면관계상 그 책 가운 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 하나만을 들어 두기로 한다. 「오, 그 할아버지들. 우리들 옛 정신의 권화, 은성(殷盛)했던 시절의 흰 수염 드리운 수호부(守護符). 춘삼월 꽃 그늘에서 통음(痛飮)에 젖으시고, 잎 지는 정자에서 율(律) 지으셨다. 유묵(儒墨)을 논하실 땐 인간에 계셨지만 노장 (老莊)을 설하실 땐 무위(無爲)에 노니셨다. 당신들의 성성한 백발은 우주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통찰을 감추 고 있었으며, 골 깊은 주름과 형형한 눈빛에는 생에 대한 참다운 예지가 가득 고여 있었다. 지켜야 할 것에 엄격하셨고, 노(怒)해야 할 곳에 거침이 없으셨 다. 한번 노성을 발하시면 마른 하늘에서 벽력이 울렸으며 높지 않은 어깨에도 구름이 넘실거렸다.」 이러한 투의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 을까? 이 대목에서 잠깐 독자 여러분께 상기시키고 싶은 것이 있다. 내 가 「돈 문제야……」의 서두 부분에서 금전을 멸시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금전을 멸시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에는 그것대로 어떤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러한 정신의 아름다움은 당연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 점을 인 정하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정신에 깃들인 문제점을 비 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 었다. 거기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문제삼았던 것은 조선조 선비들의 금 전 멸시 사상 한 가지였지만, 사실 내가 거기서 이야기한 내용은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 전체에 대해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고 다듬어간 조선 시대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고스란히 그대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이러한 나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진술해보고 자 하거니와, <정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분명히 전제해 두면서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이야기를 집중시 키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제도적 장치의 중요성 우선 첫째로, 조선조 선비들이 가졌던 기본적 정신이나, 그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고 다듬어간 조선 시대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 나,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론 일변도로 흐른 것이었으며, 현실에 대한 냉철하고 치밀한 고려를 결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 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특히 그들이 지녔던 인간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공자에게서 본격적으로 발원된 유교의 큰 강물이 맹자의 성선설 과 순자의 성악설이라는 두 갈래 강물로 나뉘었다면, 조선의 선 비들은 철저하게 맹자 일변도로 기울었다. 유교를 그토록 존숭한 조선의 선비들이었지만 순자 계열의 사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 심도 기울인 흔적이 없다(이것은 일본의 유학자들이 순자 계열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반면 맹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 심을 갖지 않았던 것과 참으로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는 현상이 다). 이러한 사실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상론이 현실론보다 열등하다거나 맹자의 성선설이 순자의 성악설보다 못하다거나 하 는 투의 생각에서가 결코 아니다. 어찌 이상론이 현실론보다 본 질적으로 열등하겠는가? 어찌 맹자의 성선설이 순자의 성악설보 다 본질적으로 못하겠는가? 내가 위의 사실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상론이라든가 맹 자류의 사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자신의 주된 견해로 채택하는 것 자체야 얼마든지 좋은 일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경우, 현실론이라든가 순자류의 사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보조 적인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 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제목 : [다시 생각하는 고정관념] 조선의 선비정신과 허생의 부끄러움 2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이상론 일변도, 맹자류의 사상 일변 도로 나아갔기 때문에, 조선조의 선비들은 인간의 도덕적 자질에 대하여 지나치게 높은 신뢰를 가졌다. 설령 좀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이라도 도덕적인 설교를 베풀면 감화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 성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그들은 악한 인간이 권 력을 장악하고 날뛸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았다. 세상의 질서가 흐트러졌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았다. 법률체계를 정밀하게 다듬어 놓지 않았다. 사회 체제의 그물이 엉성한 꼴로 남겨져 있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제도적 장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인간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얼마나 불행한 결과 를 낳았는가 하는 것은 조선조 후기의 역사 전체가 증명한다. 정 약용(丁若鏞)의 사실적(寫實的)인 한시들 속에 그려져 있는 참담 한 사회상이 증명한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 증명한다. 탐관오리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날뛰게 되었을 때, 세상의 질서가 흐트러지게 되었을 때, 정밀하지 못한 법률체계의 허점을 악용당 하는 사례들이 속출하게 되었을 때, 사회 체제의 엉성한 그물을 찢고 온갖 부조리가 횡행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효과적으로 막 아낼 장치가 조선조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이상주의, 아름다운 맹자류 사상의 비극적인 패배였다. 어떻게 보면 그 패배 속에조차도 그것나름의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는 것 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패배라 하여 패배가 아니라고 주 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름다운 패배이기 때문에 또한 가장 추 악한 패배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엘리트·문화엘리트·경제엘리트 둘째로 내가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한 사회를 진정 건강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엘리트·문화엘리트·경제 엘리트라는 세 부류가 모두 존중받는 가운데 상호 협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견제하는 관계로 존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조선 시대의 우리 사회는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참으로 커다란 결함을 가진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정치엘리트와 문화엘리트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밀착해 있으면 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한 반면, 경제엘리트는 전적으로 무시·폄 훼당하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가 초래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조선조를 지배한 선비 집단의 정신세계 자체에 내재된 결함과 무관하지 않다. 인 간의 내면세계에서 똑같은 수준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한 정치적 관심·문화적 관심·경제적 관심이라는 세 항목 중에서 앞의 두 가지에만 드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마지막 한 가지는 철저하게 배 척·부정해버린 것이 그들의 정신세계였던 것이다. 「돈 문제야……」에서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한 사회의 경제엘 리트는 그 사회를 부강하게 만드는 주인공으로서, 또 그 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도록 만드는 데에 자기들의 의도와 관계 없이 가장 크게 공헌하는 집단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는 곧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경제적 관심이라는 것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선비 집단에는 이 점이 거의 인식되지 못하였던 것 이다. 조선조 선비 집단의 이러한 한계를 그래도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고 볼 수 있는 것이 실학파 지식인들 중에서도 특히 북학파에 속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실학파 지식인들 중에서도 예 컨대 성호(星湖) 이익(李瀷)과 같은 사람이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듯 화폐를 없애버려야 한다거나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펼쳐 보수주의의 극단을 보여준 것과는 자못 대조적인 위 치에 북학파 사상가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무릇 우리 나라는 지역이 좁은 데다가 물길이 사방으로 통해 있기 때문에 경화(硬貨)가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돈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다. (…) 지금 돈을 사용한 지 겨우 70년밖 에 되지 않았으나 폐단이 더욱 심하다. 돈은 탐관오리에게 편리 하고, 사치하는 풍속에 편리하고, 도둑에게 편리하나 농민에게는 불편하다. 돈꿰미를 차고 저자에 나가서 무수한 돈을 허비하는 자가 많으므로 인심이 날로 각박해진다. (…) 시골읍에는 저자가 점점 더 많이 생겨나서 사방 수십 리 사이에 장이 서지 않는 날 이 없으니, 이는 모두 놀고 먹는 자들의 이익이다. (…) 온 나라 안의 장을 같은 날에 서게 한다면 중요하지 않은 장은 저절로 없 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의 경우 위에서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은 한계를 완벽하게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북학파의 대표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그가 쓴 『 열하일기(熱河日記)』 중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나오는 허 생이라는 인물은 박지원이 생각한 가장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델 을 현시한 존재로 볼 수 있거니와,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 허생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자. 그는 당대의 부자인 변씨로부터 1만 냥을 빌려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인 결과 엄청난 이익을 올린다. 그렇게 해서 번 돈 중 50만 냥을 그는 바 다 속에 던진다. <바다가 마를 때면 이를 얻을 자 있겠지>라고 말하면서. 그리고는 <온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하 소연할 곳마저 없는 자에게 돈을 나눠 주는데>, 그렇게 한 다음 에도 10만 냥이 남는다. 그 다음 부분을 보자. 아직도 십만 냥이 남았기에, 『이것으로 변씨에게 빌린 것을 갚아야지』 하고는, 곧 변씨를 찾아 보고서, 『그대, 날 기억하겠소』 하고 물었다. 변씨는 놀란 어조로, 『그대의 얼굴빛이 조금도 전보다 낫지 않으니 만 냥을 잃어 버 린 모양이로군요』 한다. 허생은 껄껄 웃으며, 『재물로써 얼굴빛을 좋게 꾸미는 것은 그대들이나 할 일이지요. 만 냥이 아무리 중한들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할 수 있겠소』 하고는, 곧 돈 십만 냥을 변씨에게 주며, 『내가 한 때의 주림을 참지 못해서 글 읽기를 끝내지 못했으니, 그대의 만 냥을 부끄러워할 뿐이오』 했다. 변씨는 크게 놀라서 일어나 절하며 사양하고는 십분의 일 의 이문(利文)만 받으려 했다. 허생은 크게 노하여, 『그대는 어찌 날 장사치로 대우한단 말이오』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 허생이 변씨와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가 전통적인 선 비로서 지켜야 할 자기의식을 얼마나 철저하게 갖고 있으며 변씨 와 같은 경제엘리트를 마음 속으로 얼마나 낮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의 여지 없이 드러난다. 박지원이야 앞에서 내가 지적한 대로 허생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지식인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로 하여금 위와 같은 대 사를 말하게 한 것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전통 적인 선비 정신 속에 깃들인 문제점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박 지원 자신의 한계를 선명하게 드러낸, 안타깝지만 외면할 수 없 는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두에서 나는, 조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내나름의 관점을 피력 한 다음에는,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 자신이 가 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몇 마디 의견을 적어보고자 한다는 말 을 했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의견이 어떤 것인지를 벌써 짐작했으리라. 굳이 드러내서 적어 보자면, 그것은 (1) 이상론 일변도로 기울지 말고, 또 맹자류의 사유와 순자류의 사유 중에서 전자 일변도로 기울지 말고 이상론과 현실 론 사이에서, 그리고 맹자류의 사유와 순자류의 사유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취해야 한다는 것과, (2) 정치엘리트·문화엘리트 . 경제엘리트의 세 부류가 모두 존중받는 가운데 상호 협력하면 서 또한 상호 견제하기도 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두 가지 정도를 추가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3) 사회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덕적 규범이나 인간 본연의 선에 호소하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도 우수하 고 정밀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 여 가야 한다. 조그마한 예를 하나 들자면, 일찍이 사회평론가이 자 군사평론가인 지만원씨가 강조했던 바와 같이, 은행 창구에서 의 혼란과 무질서가 해소된 것은 고객들의 도덕성에 호소해 성과 를 거둔 것이 아니라, 번호표 시스템이라는 우수한 장치가 도입 된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 정치엘리트·문화엘리트·경제엘리트가 모두 존중받아야 한 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그들 각자가 자기와 다른 두 부류의 엘리 트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부류의 엘리트끼리 상 호 존중하는 태도가 전혀 정착되어 있지 못하다. 여기에는 세 부 류의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중 둘째 부류의 사람들과 특히 가까운 자리에 있고 그들과 대화 하는 기회를 많이 가진 사람인 나는 우선 둘째 부류의 사람들에 게 남들보다 앞서서 발상을 전환해 주기를 절실하게 요청하지 않 을 수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져 있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과 제는 정치엘리트와 어떤 관계인지가 문제되는 측면보다는 경제엘 리트와 어떤 관계인지가 문제되는 측면에서 훨씬 더 절실해진다 는 사실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