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6일 금요일 오후 11시 23분 14초
제 목(Title): 한21/백년을 밝힌 9인의 지성 


 문화  .      
 

역사문제연구소가 뽑은 100년을 밝힌 9인의 지성 



<한겨레21>은 지난 250호(3월25일자) 창간 5돌 특대호에서 전국 42개 대학교수 
130명이 뽑은 ‘20세기 한국 정신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발표했다. 
김구부터 김일성까지, 이 설문조사에서 손꼽힌 10명 인물은 독립운동가 
6명(김구·안창호·신채호·안중근·한용운·장준하), 종교인이자 민중운동가 
1명(함석헌), 한글학자 1명(최현배), 소설가 1명(이광수), 정치가 
1명(김일성)이었다. 

지난 100년 한국 지성사 흐름을 인물 중심으로 정리하겠다는 기획 의도는 
기획단계에서부터 한국사 분야 학자들과 인물 관련 전공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역사문제연구소(이하 역문연)와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원들이 나타낸 첫 반응은 “학계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지성사를 언론이 
어찌 달려들었느냐”는 놀람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야심찬 기획의도는 실제 설문조사에 들어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모집단의 한계, 조사과정에서 빚어진 개념의 혼란, 짧은 기한 등으로 ‘한국에서 
지성사를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란 체험 하나를 보태면서 
아쉬우나마 ‘정신적으로 영향력있는 인물’이란 특집 기사로 마무리됐다. 

조사결과가 나간 뒤 <한겨레21>에 날아온 반향은 다양했다. 인물 선정을 맡았던 
교수들 전공분야가 인문·사회과학에 치우침으로써 상대적으로 해당 분야 인물을 
내기 어려웠던 자연과학대와 공대 교수들은 그 편견과 편파성을 섭섭해했다. 한국 
여성들이 쓰개치마를 벗고 거리를 활보하며 교육과 사회 현실에 참여하기 시작한 
20세기에 여성 인물들에 대한 주목이 너무 없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정치지도자와 사상가 또는 정치가와 지성인에 대한 명확한 개념 설정과 구분이 
부족했다는 따끔한 지적도 많았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에 지성사는 있는가. 이번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를 
정리하면서 <한겨레21>이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었던 뼈아픈 질문이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서구 열강들 힘에 밀려 문을 연 뒤 일제강점기, 해방혼란기, 전쟁과 
분단, 독재와 반민주사회로 부대끼는 한반도에서 한국 근대 지성이 걸어온 길은 
참혹한 현실보다 더 참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가 세계에 자랑하는 지성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지식인은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것에 개입하고, 인간과 사회의 전체적 이해를 
위해 일반적으로 인정된 진리 전체와 그 진리에 따른 행위 전체를 문제삼는다고 
주장하는 자’다.” <프랑스 지성사 50년>은 철학자 사르트르를 “굴욕과 모욕을 
당한 자들의 편에 서기 위해, 그리고 말뿐이 아니라 구체적 보편을 구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기로 결심했던 살아 있는 철학의 증인”이라고 썼다. 

우리 지성인이 모두 ‘사르트르’라는 서구 잣대 또는 프랑스 지식인상에 맞추어 
재단될 필요는 없다. 다만 지성사 전통이 길고 탄탄한 유럽에 비추어 우리 나름의 
지성사를 정리하고픈 욕구가 근현대 100년을 마감하는 지금쯤 학계에서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한겨레21>은 애초 한국지성사를 기획하면서 설문조사와는 별개로 
역사문화연구소의 젊은 연구원들에게 의뢰해 한국지성사를 쓰는 한 전개틀을 
꾸며봤다. 역문연이 틀을 잡은 한국 지성사는 대체로 한 시대의 좌와 우를 
아우르는 균형과 객관을 중시한 선택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가 독립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루며 국민주권주의를 세우려 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 
유길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노선에 섰던 신채호와 반민족적 노선으로 돌아선 
이광수, 우리나라 최초로 유물사관적 입장으로 역사를 이끌려했던 백남운과 
피지배계급을 전면에 내세워 작품을 쓴 홍명희, 해방운동 노선에서 좌우익 
통일전선을 내세웠던 안재홍과 유교계를 대표했던 김창숙, 박정희 독재시대에 
협력한 지식인 박종홍과 거부·비판했던 장준하, 그리고 이들 죽은 자들을 뒤로 
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뿜어내온 ‘80년대 지식인들’이다. 

이들 100년 지성은 또 한번의 논란과 갑론을박을 쏟아낼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한겨레21>이 다시금 ‘한국 지성사’에 도전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과거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는 틀 위에서 우리는 미래로 갈 수 있다. 지성사 없는 민족으로 
남는다면 21세기 한국은 훨씬 어두울 것이다. 

북쪽 지성들을 아우르지 못한 점, 여성 지식인들을 폭넓게 수용하지 못한 점, 
전공자들에겐 곤혹스러웠을 작은 지면 등 여전히 한계가 보이는 선정과 서술임에도 
편집진은 독자들이 이 연속 기획이 담고 있는 속 뜻을 헤아려 읽어주길 바란다. 
편집자 


유길준/조선식 근대화 추구했다 

 

19세기 후반 조선이 직면한 정치적 위기의 본질은 국내외적으로 유교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정치질서가 서구의 근대정치질서의 도전에 의해 더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국내외 전통질서를 근대질서로 전환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을 우리는 ‘개화파’라고 
부른다. 유길준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반도의 개화 개혁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1894∼96년에 추진됐던 
갑오경장에서 군국기무처 의원, 내각총서, 내부대신 등 요직을 차지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친 근대적 개혁을 주도했다. 또한 그의 
교육계몽사상은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교육계몽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유길준의 대표작 <서유견문>(1889년 탈고, 1895년 출간)은 단지 해외여행기가 
아니라 전 분야에 걸친 근대적 국정개혁의 내용과 그 방법론을 제시한 청사진이다. 
<서유견문>에 나타난 세계인식의 새로운 틀과 근대적 담론의 전개는 그 논리적 
치밀함이나 체계성에 있어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을 능가한다. 실로 한국의 
볼테르라고 할 수 있다. 

유길준의 사상적 특징은, 그의 스승이자 일본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서구적 근대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 것과는 달리, 전통과 
근대를 조화 또는 복합화하면서 조선적 근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변혁기의 혼돈 속에서 개화의 방법론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자기나라의 것을 
천하제일이라고 여기며 변화를 거부하는 개화의 원수나, 개화의 허풍에 취하여 
외국의 제도와 풍습을 기준으로 자기나라의 것을 모두 부끄럽게 여기는 개화의 
병신이 아니라 시세와 처지에 맞게 적극적으로 타국의 장기를 취하되 자기의 
장기를 보수하는 개화의 주인이 돼야 함을 역설했다. 

21세기 세계화의 변혁기를 맞아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 유길준의 
지극히 상식적인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정용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신채호/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급변하는 20세기 초 사상계에서 신채호는 유학자에서 
부르주아계몽사상가·민족주의자로, 그리고 다시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신채호의 사상적 변화는 지식인으로서 그만큼 치열하게 시대적 과제와 대결하고자 
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18살 되던 해인 1897년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이었던 신기선을 만나 목천에 있던 
그의 집에서 신사상에 관한 서적들을 접하기 시작한 뒤, 신채호는 당시 
중국·일본에서 수입된 신서적과 개화파들이 간행한 서적들을 본격적으로 보면서 
개화자강론자가 돼갔다. 그는 일부 자강론자들이 주장하던 보호정치하에서 일본의 
보호와 지도를 받으면서 문명개화·실력양성을 꾀하자는 비주체적인 실력양성론을 
통렬히 비난하고, 자력에 의한 주체적인 실력양성을 주장했다. 

그는 이 시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논설을 통해 ‘민족주의란 타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는 주의, 우리 민족의 나라는 우리 민족이 주장한다는 주의’라고 
설명하고,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길은 오로지 이 민족주의를 분휘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의 개념을 거론한 것이었다. 

1910년 망명한 그는 민족주의 사상과 민족주의 역사관을 좀더 체계화한 글을 
발표하고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노선과 무력항쟁 우선론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또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국수(國粹)의 보전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국수’란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속·습관·법률·제도 등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국수사상은 단군 숭배로 이어졌다. 

신채호는 3·1운동이 일어난 뒤 주로 베이징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중심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했는데, 국민대표회의의 좌절 뒤 
일시 낙망에 빠져 있던 그는 다시 조선사연구에 침잠해 민족주의사학이 이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조선상고사> 등을 썼다. 

그러나 신채호는 역사연구에만 만족할 줄 모르는 실천가형 지식인이었다. 그는 
26년경 베이징의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이 만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다. 그에게 무정부주의는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논리를 
갖추고 있고,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념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적 인간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치열하게 추구한 신채호의 사상은 그가 
1928년 대만에서 체포돼 투옥중이던 1936년 뇌일혈로 세상을 하직함으로써 미완의 
상태로 남게 됐다. 

박찬승/ 목포대 교수·역사문화학부 


이광수/현실에 무릎꿇은 논쟁적 인간 

 

이광수,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참으로 논쟁적인 사람이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관형구들도 종잡을 수 없다. 익히 알고 있는 식민지시기 최고의 소설가, 초인적인 
문필가에서부터 2·8독립선언서 기초자, 상하이 독립신문 주필, 안창호 흥사단의 
국내 대리인이자 영수, 실력양성론의 맹장, 자치론자, 급기야 극렬한 친일파 
민족반역자까지. 이런 그의 경력과 삶의 편력 하나하나가 모두 지금까지도 격렬한 
포폄의 공방을 불러일으킨다. 

혹자는 그의 청년기에서 말년의 친일까지 실력양성론의 원초적 한계, 그리고 
그것의 자기 부패과정으로 꿰어본다. 친일은 실력양성론에 이미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하에 백날을 실력양성이라고 해보아야 실력양성이란 애초 
불가능했고, 다만 결과하는 것은 민족독립의식의 약화란 것이다. 

약화의 자연스런 귀결은 친일이다. 그러나 불굴의 지사 아닌 다음에야 식민지 국내 
상황에서 실력양성이란 하나의 지향과 실천, 억압된 것이나마 조선이라는 
자기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고, 실력양성론을 택한 이들이 모두 친일로 간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실력양성론은 친일이고 이것의 화신을 이광수에서 찾는 것도 모두 
맞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광수를 조각조각 떼어내어 그는 위대한 
문학자이며 말년의 친일은 오직 당시의 힘든 상황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궁색스럽다. 사실 이광수는 해방되고 나서 자신의 친일을 반성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굴곡많은 전회를 모두 묶어서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 
절대적 이상론자! 이런 규정은 설혹 어떨까. 이상과 현실은 애초 대립적이며 또한 
그리하여야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운동이 나온다. 그는 조선독립이란 이상을 
버린 적은 없었고 그래서 자기파탄적 친일파나 현실에 순응해버린 훼절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독립이란 이상까지도 현실화했다. 이상도 현실적인 
것만이 이상이라는 것이다. 식민지 국내 상황에서는 그 이상이 위선적일 때도 
있었다. 이상을 움켜쥔 지조 뒤에 숨어 있는 무행동,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는 결기 
뒤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과시욕 등등이 곰팡이처럼 퍼져나갔다. 

이러한 모순적 인식논리와 운동은 이광수에게서 가장 특징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와 운동은 식민지시기 독립열망의 부단한 고조와 식민지 국내 
상황의 장기성과 엄혹성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제출될 수 있는 선택선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그 모순에 철저하지 못했지만 이광수는 철저했다. 
그 모순의 결과가 바로 그의 친일이었고 그의 인생이 되었다. 

한상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백남운/‘연합성민주주의’론의 좌익 이론가 

 

일반적으로 백남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좌익 이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좌우 구분만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는 수준에서나 가능한 독해이다. 백남운에 대한 
합리적 평가를 위해서는 좀더 면밀한 조직검사가 필요하다. 

태어나면서 마르크시스트가 된 사람이 없듯이, 백남운은 전북 고창군의 봉건적 
향촌에서 성장하여 20대 전반까지 근대계몽주의의 범주 안에 있었다. 그가 
마르크시스트 경제학자가 된 것은 그뒤 6년간 도쿄유학 때문이었다. 그런데 좌익 
백남운도 자세히 살펴보면 세가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첫번째는 좌익 백남운이 일본의 이론적 영향 아래 마르크시즘의 보편적 토대을 
번안하여 한국사에 적용시키던 단계로, 저서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가 주로 반영한다. 민족적 대립과 자본주의적 대립, 제국주의 
식민사학과 근대 부르주아 사학 일반을 등치시키는 이념 도입기 초기의 좌편향을 
보이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식민지 민족운동의 아시아적 토착화과정을 목도하고 난 뒤, 
특히 마오쩌둥이 제기한 신민주주의론에 많은 영향을 받아, 백남운은 마르크시즘의 
오리엔탈리즘적인 공식주의를 걷어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두번째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 1946년 조선민족의 진로에서 주창한 ‘연합성민주주의’이다. 백남운은 이제 
자본주의 일반의 계급적 대립을 넘어서 식민지·민족문제를 본격적으로 소화하여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연합, 즉 ‘연합성민주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좌익헤게모니를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취약점을 빌미로, 좌우대립의 
해방정국에서 백남운은 정치적 기회주의자로 비판받고, ‘연합성민주주의’는 
실종됐다. 1947년 말 백남운은 월북하여 북한의 국가건설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또 
한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는 이른바 북한의 민주개혁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연합성민주주의’와 좌익헤게모니가 결합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적극 주도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백남운의 사상적 궤적과 ‘연합성민주주의론’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적합하지 
않은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민족통일과 좌우합작은 21세기 한반도에서도 여전히 
가치있는 것들이다. 다만 우리가 그의 한계를 넘어설 때, 그에 대한 의미있는 
계승도 가능할 것이다. 

도진순/ 창원대 교수·한국현대사 


홍명희/애국을 향한 치열한 역정 

 

종래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이라는 역사소설을 한편 남긴 인물 정도로만 
알려져왔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해방 뒤 월북한 관계로 그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논의하는 일이 오랫동안 금기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시기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지도자로서 민족해방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임꺽정>은 발간되자마자 전 문단적인 찬탄을 받으며 우리 
근대문학의 고전이라는 정평을 얻은 만큼, 홍명희는 한국근대소설사상 최고의 
작가로도 평가돼야 할 것이다. 

홍명희 삶의 궤적은 조선조 말에서부터 식민지시기를 거쳐 분단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격변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 언론과 교육사업, 신간회 
활동, 민주독립당 대표 등을 거쳐 단정(單政)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진력하다 남북연석회의를 계기로 북에 남은 뒤 그곳에서 내각 부수상, 과학원 원장 
등을 지냈다. 그는 이러한 치열한 삶의 역정을 통해 한국근현대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과 교유하는 한편, 전통적인 한학의 세계로부터 
근대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을 부단히 
혁신해나간 특이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홍명희는 문인으로만 보기에는 폭넓은 삶을 살았다. 경술국치 당시 자결한 부친의 
순국에 영향을 받아 평생 민족의 해방과 통일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애국자로 
살려고 노력했다. 식민지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의 정치활동을 통틀어보면 그는 
한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뒤에는 좌우익의 대립을 지양하는 
진보적 민족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해방 뒤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한 것은 이러한 그의 정치노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작가로서 벽초는 민족문학적 개성과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문학관에 입각해 
‘조선 정조(情調)’를 적극 표현하고자 한 작가 의도에 따라 <임꺽정>을 창작해 
민족문학적 개성을 탁월하게 성취하고 있다.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넘어선 진정한 통일,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참된 융합이 우리의 정치적·문화적 과제로 남아 있는 한, 홍명희의 삶과 그의 
지적 모색의 자취는 그 빛을 잃지 않으리라 본다. 

강영주/ 상명대 교수·국문학 


안재홍/계급협조 기대한 중도 우익 

 

안재홍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일관된 사상체계를 가지고 하나의 독자적인 경향을 
이룩한 지사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한말 자강운동(自强運動)의 세례를 받으며 
형성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근대적인 부르주아 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근대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발전을 기조로 하면서도 자립적인 
소부르주아, 영세농민의 생존에 주목했고 사회주의와의 협조, 민중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 부르주아 민족주의 좌파 지식인으로서,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활동하게 하는 기반이 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민족자존의 생존협동체를 주도하는 이념으로서 신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을 지향했다. 안재홍은 해방 직후 한때 여운형 등과 손잡고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기도 했으나, 인민공화국 수립을 구상하는 그들과 
결별하고 중도 우익의 정치운동을 벌였다. 

1945년 말, 20세기 전반기를 관통하는 그의 사상체계를 새로운 국가 건설의 
정치이념으로 집대성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발표했다. 그는 여기에서 
민족과 계급을 중층적이고 병존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전망했다. 
즉 일제의 강점은 한국 민족 내부의 계급투쟁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국제적 침략에 
의한 전 민족적이고 초계급적인 몰락이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이나 신국가 건설운동도 농민, 노동자, 지주, 자본가 등 민족적인 
세력들의 결합에 의한 모든 부문에서의 균등사회를 만들어가는 객관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돼야 한다고 보았다. 계급투쟁이 아닌 계급협조에 의한 공생(共生)의 
이념이었다. 

그의 이러한 중도 우파적인 사상은 남북 분단이 고착되는 가운데 중간파 
정치노선의 도태와 같은 선상에서 현실 정치에서 배제돼 갔다. 더구나 그가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이후로는 분단시대 역사의 뒷장에 그 잔영만이 희미할 뿐이다. 

안재홍과 같은 중도파 사상이 존립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강박된 
현실 속에서 한국 근현대 지성의 기반과 폭이 협소해져갔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지원/ 대림대 교수·한국사 


김창숙/비타협 선비정신의 끝없는 수난 

 

김창숙은 호를 심산, 별호를 벽옹이라 했다. 일제의 고문과 옥중투쟁으로 
앉은뱅이가 된 자신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는 팔십평생 민족과 국가의 불행한 운명 
속에서 반침략 항일투쟁, 반분단 통일정부수립운동, 반족재 민주투쟁 등 투쟁과 
희생으로 일생을 마쳤다. 유림 출신으로 대의와 명분에 입각한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으로 불굴의 실천과 행동주의에 일관함으로써 우리 근현대사에 드물게 
진보적 유학정신과 민족주의를 일치시킨 실천적 지성의 사표가 됐다. 

그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서 문벌사족 가문 종손으로 태어났으나 젊은 시절부터 
모든 것을 뿌리치고 구국활동에 투신하여 스스로 기구한 행로를 택한다. 을사조약 
때 상경하여 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고 일진회를 성토했으며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성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펼치는 등 애국계몽활동에 
진력하였다.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탄원서를 만들어 
휴대하고 출국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합류 활동했으며,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위해 
국내에 잠입, 군자금을 모금함으로써 두차례의 ‘유림단 사건’의 장본인이 됐다. 
임정에서는 주로 중국의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인사들과의 교섭을 담당했고, 
베이징에 가서는 박은식과 <사민일보>, 신채호와 <천고>를 발간했다. 

27년 일경에 체포돼 대구로 압송된 뒤 14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일제의 법률 자체를 
부인하면서 일체의 변론을 거부하다가 불구의 몸으로 가출옥됐고, 다시 피검돼 
왜관에서 수감중 해방을 맞았다. 

김창숙에게 닥친 수난은 해방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정당불참, 신탁통치 반대, 
남한단독총선 반대운동을 벌이며 이승만 독재에 맞서 ‘대통령 하야 경고문’ 
사건, ‘부산 국제구락부 사건’ 등을 주도해 여러차례 옥고를 치렀다. 이승만 
독재와 싸우면서 그는 결국 자신이 일으켜 세운 성균관대학과 성균관 및 
유도회에서도 추방당하는 슬픔을 겪었다. 두 아들을 독립운동에 바친 그는 
4·19혁명 이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를 마지막으로 집 한칸 없이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6월항쟁 이후에야 성균관대학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학생들이 자신들을 
‘심산의 아들 딸’이라 자임하고 있음은 뒤늦은 감이 있다. 행동의 지성 심산은 
지금 지하에서 무엇이라고 답할까. 

김시업/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박종홍/민족계몽을 위해서라면… 

 

열암 박종홍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에 3·1운동에 가담해 20일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를 계기로 민족의 역사와 사상, 철학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켜 나갔다. 
1929년에 경성제대 철학과에 들어가 하이데거 등 서양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으며, 1937년 이화여전 교수를 거치면서 논문과 계몽적인 글을 많이 썼다. 
해방 뒤 열암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서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네소타대학에서 
서양현대철학을 연구한 뒤 50년대 중반 이후 한국철학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열암 철학사상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철학의 출발은 
식민지 현실의 억울함과 고뇌였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객관적 현실 속에 있는 
주체적 실존이 어떻게 창조적 실천을 할 것인가를 모색했다. 둘째, 그는 항상 
‘우리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불교와 우리 역사와 유학의 고전들을 폭넓게 읽었으며, 퇴계를 
평생의 스승으로 사숙했다. 셋째, 그는 서양철학의 과학적, 향외(向外)적 태도와 
실존철학, 동양철학의 향내(向內)적 태도를 종합하고자 했다. 넷째, 그는 ‘민족적 
주체성’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했다. 그는 급속한 근대화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 
염려하면서 경제발전과 도덕이 나란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제발전을 위해 강력하고 안정된 국가가 필요하며, 국가구성원들에게 공동체 
정신과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국민윤리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열암이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깊이 참여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것, 박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서 정치에 참여한 것은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고 주체적 
근대화와 전통윤리의 실현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철학함의 귀결이었다. 박정희가 
헌법개정(69년 9월)으로 3선의 길을 터놓고 선거(71년 4월)를 코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열암은 박정희 정권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실현시키고자 했고 
이것이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가. 열암 철학과 현실참여에 대한 
평가는 박정희식의 돌진적(?) 근대화와 전통사상의 관계,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해석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경제발전과 전통윤리의 동시적 발전이라는 열암의 사고와 정치적 실천에서 식민지 
시대를 거친 한 남한 지성인의 소박한 현실인식과 한계를 엿볼 수 있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 


장준하/민족주의의 신화로 남았다 

 

장준하는 1975년 8월에 등산을 갔다가 비명에 갔는데 단순한 실족사가 아니라 
권력에 의한 타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돼왔다. 만약 권력에 의한 타살이 사실이라면 
장준하에 대한 박정희의 콤플렉스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장준하가 광복군에 
투신한 항일투사이자 철저한 반공투사였다면,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일제 
앞잡이였고 남로당 관련으로 죽을 뻔했던 전향자였다. 친일과 용공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절대적 준거였는데 이 두 측면에서 장준하가 철저하게 결백했던 
것에 비해 박정희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사상계>는 50, 60년대의 독보적인 잡지였다. “<사상계>가 곧 장준하다”라는 
말이 가리키듯, 그는 <사상계> 발행인으로서 권두언 집필에다 편집진과 필진을 
선별함으로써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장준하를 연상할 때 떠오르는 철저한 
민족주의와 통일운동과 달리 <사상계> 논조는 친미·반공적이었다. 

장준하는 일제시기에 반일·우익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평북 삭주 출신으로 
일본신학대학을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갔으나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했다. 해방 뒤 김구와 함께 귀국하여 그의 비서로 활동했지만 김구와 달리 
남한 체제에 동참했다. 또 그는 해방 직전에 OSS대원으로, 해방 뒤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지원한 유일한 청년단체인 민족청년단에 참여하면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됐다. 

<사상계>는 민주의식을 신장시키고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충동하며 
4·19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기여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방벽으로 작용했다. 한일회담과 월남파병 반대운동의 배후에 장준하와 
<사상계>가 있었지만, 여전히 양 사태의 저변에 있는 미국 개입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박정희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노선에서 점차 일탈해갔다. 
반공주의자인 김구가 38선을 베고 쓰러질 각오로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등 
통일운동에 나섰듯이, 장준하도 어떠한 통일도 선(善)이라고 했다. 김구가 
그러했듯이 장준하도 비명에 가고 말았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던 두 거인의 존재는 친미·반공체제에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선 
전환에는 상당한 단절과 비약이 있었다. 두 거인의 행로는 우익민족주의의 최고의 
발전형태이자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임대식/ 서울대학교 강사·한국사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