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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6일 금요일 오후 12시 28분 09초
제 목(Title): 김용옥/마야문명 탐험기 


    
 
도올 김용옥의 마야문명 탐험기

마야는 멸망하지 않았다

마야!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무엇인가 애틋한 인간의 비극이, 못다 말한 순박한 
원혼의 아우성이 소리없이 내 귓전을 때리곤 했었다. 마야여,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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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리가 사랑하는 작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그림에 『집 떠나는 
가족』이란 그림이 있다. 1954년작으로 기억되는데, 벌거벗은 두 아들과 한복 입은 
부인을 달구지에 태우고 앞에서 작가 자신이 소를 끌며 떠나가는 이 그림은 소를 
몰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작가 자신의 희학적 모습과, 텅 빈 소달구지 마루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방금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그 신명나는 
해학적 모습이, 아주 불분명한 선율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이 나타내고 있는 외면적인 신바람과 해학성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그 선명한 붉은 색조에 밴 하늘의 기운에는 말할 수 없는 비극적 삶의 
정조(情調), 가족과 생이별해야만 했던 이중섭의 애틋한 혼이 촉촉히 젖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마야문명을 바라보는 정조의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해학성과 비극성이, 
마야문명 자체에도, 그리고 그것을 가서 보는 나 자신의 내면에도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결혼을 해서 자식을 키운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없었던, 어릴 때의 추억만이 나 자신의 삶에 느껴지는 
강렬함의 이면에 간직되어 있는 그러한 행복한 비극성이 요번 여행의 주된 정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참으로 오랫동안 한 식구 단출히 앉을 기회가 
없었다. 다섯 식구가 다같이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모처럼 주어진 이번 이국에서의 
크리스마스 배케이션! 나는 용단을 내려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가족만의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심했다. 어디 가든지,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리고 한국이라는 
사회와 연결된 공동체 속에서는 여간해서 그런 세계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지, 
떠나자! 돈이 좀 들더라도 훌쩍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여행을 많이 한 줄 
아는데, 사실 보통 한국사람들에 비하면야 세상구경을 적게 한 편도 아니겠지만, 
결코 많은 세상을 본 사람도 아니다. 인도도 이집트도 중동도 동남아도 남미도 
가보질 못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중국대륙도, 실상 그 대륙의 문명에 가장 
선구적으로 정통한 한 사람이건만, 97년 여름 삼성그룹의 베세토 어드벤처의 
초대로 상해·남경·북경을 한번 잠깐 다녀왔을 뿐이다. 

미국에서 그래도 가장 돈 적게 들이고 갈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이 
멕시코였다. 그래서 멕시코의 태권도 대부라 할 수 있는 문대원 사범과 연락을 
취했다. 그랬더니 내가 여행 떠날 수 있는 그 시간에 문사범은 가족사정으로 
미국에 와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전화로 추천한 곳이 카리브해를 안고 
있는 유카탄 반도(the Yucat′an peninsula)의 동북쪽 첨단에 자리잡고 있는 
칸쿤(Canc′un)이라는 리조트비치였다. 칸쿤은 1970년까지만 해도 원주민 
100여명이 살고 있던 조그만 어촌이었다. 해변이 육지에서 낫 모양으로 기다랗게 
뻗친 섬인데, 그러니까 양쪽이 다 바다인 셈, 하이얀 모래, 종려 숲과 산호의 
천국, 바닷물같이 느껴지지 않는 카리브해의 따스한 물결이 점잖은 파도를 
자랑하면서 푸르다 못해 뽀이얀 옥색의 물보라를 휘날리는 곳, 그런 환상의 비치가 
21km나 뻗은 이 칸쿤은 국제 관광단지화 계획에 따라 순식간에 세계적인 호텔과 
유락시설이 들어선 번화가로 일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관광단지에는 가고 싶질 않았다. 그리고 나는 칸쿤과 마야문명을 
연결시킬 수 있는 아무런 사전지식도 가지고 있질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칸쿤이 
마야문명 유적지의 한복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주저없이 칸쿤행을 
결정했다. 그래도 들어갈 돈을 생각하니, 『야! 그 돈 가지고 뉴욕에서 브로드웨이 
쇼나 실컷 보고 차이나타운 이태리타운 저팬타운 코리아타운에서 실컷 때려먹기나 
하자우!』 『아! 그런 실리만 생각하단 만날 빤할 빤자에서 맴돌아요! 뉴 
익스피리언스! 가요. 이성의 기능이란 새로움의 발견 아니겠어요? 가요!』 다섯 명 
비행기 삯에 호텔값만 해도 눈물이 핑 돌 판, 옹색한 한국인들의 대화는 항상 
맴도는 곳을 맴돌 뿐, 끝까지 주저주저한 바도 아니었지만, 용감한 큰딸 승중이가 
컴퓨터를 두드려 순식간에 비행기표를 사버렸고 칸쿤의 하얏트호텔 3박4일의 
숙식을 예약해버렸다. 

뉴왁에서 휴스턴공항을 거쳐 콘티넨털 111편에 세 시간 몸을 싣고 드디어 
칸쿤국제공항에 근접해갈 때, 나에게 떠오른 것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제2권 
첫머리엔가, 「도전과 대응」(Challenge-and-Response)의 비교문명론을 논구하는 
자리에서 「자연 회귀」(The Return of Nature)라는 소제목을 달았던 
구절들이었다. 

1998년 12월22일 대낮 12시 반 쯤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영하 10°를 넘는 
미국 동부의 강추위에 몸을 으스스스 떨고 있어야만 했던 나에게 펼쳐진 열대림의 
풍경은, 「겨울에 수박을 길러먹는 불경(不敬)」에 격노하시는 정약용 선생의 
『樂書孤存』의 문장과 함께, 내 느낌에 기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냈다. 계절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순응해 살아야 한다는 동양인의 예지를 거스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겨울 한복판에 있던 나의 몸이 열대라는 뜨거움으로 이동하는 
느낌에서 유발되는 몸의 활력이 결코 불쾌한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아이러니의 
발견에 흐뭇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비행기에서 부지런히 겨울옷들을 훨훨 벗어 
가방 속에 꾸겨넣고 시원한 남방셔츠로 갈아입으면서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의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온 유카탄 반도의 비치라인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웠지만, 처음에 충격적이었던 것은 해변의 곡선 안으로 내륙을 뒤덮은 
광막한 수림의 전개였다. 울창한 밀림이 높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균등한 짙은 
색조로 거대한 평지를 덮고 있었다. 꼭 이부가리를 친 내 머리처럼. 아프리카의 
밀림과는 또 느낌이 전혀 다른 새로운 수림의 제물(齊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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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산, 신성한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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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도전과 대응의 도식이 말하려는 문명탄생의 골자는, 문명 발상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편하고 아름답고 쉽고 비옥한 곳에서 결코 고등한 문명이 발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문명 발상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악조건의 
기후나 자원상태에서, 그러한 도전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문명이 발상했다는 
것이다. 이집트문명도 그 주변의 비옥한 곳과 비교해서 오히려 악조건의 도전적 
환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집트문명과 비슷한 실례의 하나로 그는 
마야문명을 들고 있는 것이다. 

마야문명의 탄생을 유발시킨 자연의 재앙, 그 도전, 그 챌린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내 눈앞에 전개된 저 숲(the forest)이었던 것이다. 그 거대한 사원, 
인류문명의 찬란한 유산,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불교예술의 정화, 
캄보디아(크메르)의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15세기 초에 버려진 후로 완벽하게 
밀림 속에 숨어 있었다. 지금도 그것은 밀어닥치는 주변의 밀림과 싸우며 밀림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왜 그 거대한 사원이 하필 밀림 속에 지어졌는가? 왜 하필 
아무도 살지않는 밀림 한가운데 그것은 서 있는가? 이러한 신비로운 사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앙코르와트가 죽은 돌의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공간이었을 당시 그 주변은 밀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크메르제국의 수도였고 그 
수도 한복판에 앙코르와트는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명으로서 
기능하기를 그쳤을 때, 자연이 회귀한 것이다. 문명은 자연의 밀림 속에 그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영원히 회귀하는 자연의 위력 앞에 문명은 곧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이다. 

마야문명의 거대한 피라미드·사원이 밀림 속에 우뚝 서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토록 거대한 유적이 아무도 모르는 숲속에 몰래 지어진 듯한 인상을 받는다. 
허나 그것은 그 주변에 형성된 방대한 인간의 코스모스, 즉 도시문명의 센터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주변의 그러한 문명이 밀림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 도시센터를 제외한 모든 
건물(서민주택)이 최소한 석조가 아닌 것이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만큼 도시 중심에 살았던 제사장―통치자계급과 서민 사이에 엄청난 격절이 
존재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코판(Copan), 티칼(Tikal), 팔렌크(Palenque)의 거대한 마야 유적들 주변이 완전히 
밀림으로 덮여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밀림 전역이 그러한 유적의 존립(存立)을 
가능케 하는 문명 세계였다는 것을 연상한다면, 오늘의 자연 회귀는 바로 
역설적으로 그러한 문명의 존립을 촉발시킨 자연의 도전을 웅변하는 것이다. 
마야문명에 대한 도전은 바로 저 숲이었다! 마야문명의 유적은, 바로 그 숲의 
도전에 대한 인간 승리의 기념비적 트로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인비의 학설에 대하여 엘스워스 헌팅턴 박사(Dr. Ellsworth 
Hunting-ton)는 이견(異見)을 제시한다. 엘스워스의 이론은 적도와 극 사이 
기후대의 위도적 변화 주기에 관한 것이다. 마야문명이 흥기했을 때 그 중심지인 
과테말라 지역은 지금과는 달리 건조한 지대였다. 건조기후대가 북상하면서 
과테말라는 점점 습기가 차 살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고 그에 따라, 마야문명은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후 변화에 따른 인간문명의 수동적 변화를 말하고 
있으나, 역시 헌팅턴 박사의 이론은 설득력이 빈약하다. 토인비의 학설이 꼭 
문명발상의 유일무이한 조건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토인비 학설의 
설득력은 마야문명의 성격 자체에 내재한다는 것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일차적으로 기하학적 조형성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가 현실적 존재의 형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후의 
세계와 관련된 어떤 영적 연계를 나타내는 상징성이다. 허나 마야문명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는 근원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피라미드를 
부르는 마야말은 「위즈」(witz)다. 이 위즈는 곧 산(山)을 의미한다. 그들의 
피라미드는 곧 신성한 산, 신성한 자연, 신성한 숲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산신령을 『호랑이를 타고 있는 할아버지』로 표현했다. 

사실 그 할아버지는 호랑이의 인격화다. 호랑이의 존재성(存在性)은 곧 숲의 
생명력을 깊게 해준다. 호랑이가 하나 존재하기 위해서는 멧돼지가 수백 마리 
살아야 하고, 멧돼지 수백 마리가 살기 위해서는 다람쥐가 수만 마리 살아야 하고, 
다람쥐가 수만 마리 살기 위해서는 도토리나무 수백만 그루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호랑이의 존재성은 곧 숲의 연계성의 심화다. 그 심화는 반드시 영적인 
현현(emergence), 즉 복합성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성격을 초월하는 새로운 성격의 
현현을 의미하는 사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호랑이가 없는 산은 죽은(barren) 산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에게 있어서 
호랑이는 공포의 존재며 죽음의 사자며, 밭에 잠깐 놓아둔 귀한 외아들 동자 
불알도 순식간에 잘라먹는 흉악한 놈이다(虎患). 다시 말해서 이러한 
호환(虎患)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문명의 대응을 바로 삼신각의 
호랑이 산신령이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비극을 희화할 줄 아는 
천재들인 것이다. 

마야인들에게는 피라미드가 곧 산이었다는 뜻, 그리고 피라미드를 구성하거나 그 
주변에 서 있는 수많은 돌기둥들이 나무를 상징한다고 하는 뜻은, 곧 그들 문명의 
센터인 피라미드 성전의 의미가 바로 「숲」이라는 자연의 도전에 인간문명이 
대응해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숲에 대한 인간정복의 반사적 
심리가 숲에 살고 있는 온갖 신(神)들에 대한 경외와 경배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토인비의 이론은 이 점에 있어서 적확했다. 사실 요번 여행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포함한 사흘의 일가족 나들이에 불과했다(1998. 12. 22∼25). 내가 
마야문명을 얼마나 보고 느낄 수 있었겠는가? 사실 요번 여행에서 더 깊게 남은 
인상은 한가족이 모두 같이 단란하게 시간을 보냈다는 그 사실이다. 이제 대가리가 
큰 자식들과 떨어져 살던 부부가 한곳에 모였을 때, 개성이 강하게 형성된 
지식인들의 기(氣)의 충돌현상은 부권(父權)이라고 하는 권위의 틀에 복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타게 그리던 만남의 실상은 이중섭의 소달구지 광경과는 달리 
희극적인 고집들의 아우성만 카리브해의 태양을 더 작열시키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칸쿤 해변에서 해수욕도 즐겼고, 또 멕시코의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자식들의 행동거지에 대한 훈계도 실컷했다. 멕시코 
사람들은, 그 곳이 관광지라는 사실을 감안해도, 관광지의 한국인들이 보이는 
행태와는 달리, 순진하고 낙천적이고 불쾌감을 주는 행동이 없었다. 그리고 음식의 
질도 결코 낮지 않았다. 균질화되어버린 미국음식과 각양각색의 라틴계 음식과 
자극성 높은 토속음식의 조화된 다양성은 미각에 풍족감을 제공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야문명 후예들의 평범한 얼굴들은 마야유적의 심벌들의 
원형과 살아있는 의미를 찾기에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인간은 객화시켜 
바라보면 참으로 성스러운 것이다. 

아마도 요번 여행에서 가장 새로운 체험은 지상 탐험보다는 바닷속 탐험이었다. 
우리 일가족은 하루 배를 대절해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겼다. 꿈에만 그리던 바닷속 
여행!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절차적 교육을 받느라고 퍽 고생스러웠지만, 
그리고 심해(深海)로 들어가는 공포감도 작은 것이 아니었지만, 바다에 풍덩, 
용기를 내어 뛰어들었을 때 나는 바닷속이, 내가 생각했던 그런 아름다운 꿈속의 
오색영롱한 산호와 찬란한 비늘로 덮여 있는 고기들의 무도장이 아니라, 너무도 
황량하고 텅빈 세계라는 데 충격을 금치 못했다. 바닷속은 생각보다 
현묘(玄妙)했다.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푸른 하늘의 현묘함이 아닌 죽음의 색깔이 
감도는 음산한 현묘함이었다. 나는 바닷속에서 너무도 고독했다. 너무도 외로웠다.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었다. 분명 내가 살 곳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의 진화의 
기억이 나를 태고의 자궁으로 껴안아주는 그런 포근함이 결여된, 내가 이미 
벗어나버린 세계였다. 그냥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고, 산소통이 아닌 맨코로 숨쉴 
수 있고, 그리고 나무, 새, 바위가 같이 노니는 육지가 내게는 얼마나 자연스러운 
곳인가? 그냥 마구 뛰놀 수 있는 육지가 얼마나 아름답고 편하고 좋은 곳인가? 
새삼 육지라는 환경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현묘한 바닷속을 본 그 날의 
체험은, 앞으로 내가 반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승중이 일중이 미루와 같이 
즐겼던 그 떨리는 순간들의 감흥은 일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분명 
다른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색다른 나의 존재의 체험이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마야문명도 분명 나의 상식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 또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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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문명의 3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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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내가 사흘 동안 느꼈던 것을 전부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실제로 가본 마야유적은 우리가 칸쿤에 도착한 첫날 곧바로 가본 
툴룸(Tulum)이라는 해변도시의 잔해와, 그 다음날 반듯하게 뚫린 고속도로 180번을 
타고 달려가 본 유카탄반도 중간에 있는 치첸잇차(Chichen Itza)라고 하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된,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는 종교·정치·문화 중심의 유적, 이 두 개에 
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유적이 모두 톨텍(the Toltecs of central 
Mexico)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며 마야문명의 수많은 유적 중 비교적 최후기에 
속하는 것이다(후고전시대, Post-Classic Period). 

그러나 이 두 개의 유적만으로도 마야문명의 통시적인 측면과 공시적인 측면을 다 
말하기에 충분했다. 통시적 측면이라 함은, 치첸잇차의 유적은 눈에 띄는 주요 
건조물이 비록 후기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 주변으로 광범하게 형성된 많은 
건조물들이 전고전시대, 고전시대의 축적된 양식(퓨욱양식 등, the Puuc)들을 잘 
보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시적 측면이라 함은, 이 두 유적의 
영상을 통해서 나는 북부·남부 마야 저지대(Northern and Southern Maya 
Lowlands)에 흩어져 있는 주요유적지(Mayapan, Uxmal, Kabah, Sayil, Labna, Jaina 
Island, Hochob, Palenque, Yaxchil′an, Bonampak, Tikal, Cop′an 등지)에 
나타나는 공통적 보편성의 심층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내가 본 이 두 유적의 이야기만 하려해도 나는 기나긴 견문기를 집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행전문가나 史家나 여유로운 수필가들의 
한담(閑談)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면의 서물들이, 한국어라는 형태를 
빌리지 않고 있다는 안타까움은 있지만, 알고 보면 즐비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러한 서물의 내용을 한국말로 옮기는 작업에 나의 
창조적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조금 전문적 관심을 
갖는다면 마야문명에 대한 세계적 연구성과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문제는 사흘 
동안 유카탄반도에서 내가 한 체험이 나에게 마야문명이라고 하는 방대한 인류 
유산의 연구성과와 관련된 어떠한 확고한 관점과 관심을 촉발시켰다는 데 있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나는 매우 무지한 사람이다. 나의 좁은 관심이나 체험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사태에 대해 놀랍도록 무지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무지할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해 항상 감사한다. 나는 부모님께서 명석하지 못한 두뇌를 조합해주신 것에 대해 
아쉬움과 함께 고마움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때때로 무지는 깨달음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실 콜럼버스 이전(PreColum-bian Civilizations) 의 3대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아즈텍(Aztec)문명과 마야(Maya)문명, 그리고 잉카(Inca)문명의 지역적 
구분조차 명확히 할 줄 몰랐다. 알고 보니 아즈텍은 15~16세기에 지금의 
멕시코시티가 있는 중·남부 멕시코를 중심으로 융성했던 문명이고, 잉카는 저 
남미대륙 태평양 연안의 안데스 고지대, 그러니까 페루·칠레 지역에 12∼15세기에 
융성했던 문명이다. 아즈텍과 잉카 사이, 중미의 멕시코만 동쪽 유카탄반도, 
벨리즈,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포함하는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문명이 바로 마야문명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문명 중에서 가장 인류 대문명의 
종합적 면모를 갖추었고,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이 바로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야문명인 것이다. 

마야문명은 연구가들에 의하여 보통 전고전시대, 고전시대, 후고전시대의 3기로 
나누어 논의된다. 전고전시대(Pre-Classic Era)는 BC 2000∼AD 250의 시기로 
마야문명의 발상기에 해당된다. 마야문명의 발상에 관해서 어떤 중국학자들은 중국 
고대 청동기의 문양과 마야문명 석조건물 문양의 놀라운 양식적 유사성(사실 내 
눈으로 보아도 너무도 비슷하다)과 신화구조의 공통성 등을 들어 아시아대륙의 
중국 일족이 알래스카를 거쳐 대서양연안을 따라 중미로 이동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여튼 북방에서 대서양 루트를 따라 남하했다는 설과, 또 
안데스산맥지역으로부터 북상했다는 설과, 또 태평양 쪽으로 배를 타고 건너온 
모종의 유래가 있다는 설 등등은 마야문명의 유래에 관하여 통상적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민족이동설」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 귀속감의 과시에서 비롯된 
졸렬한 발상으로 인류문명의 출발을 곡해하는 「실체이동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문명의 아키타입(原型)의 실체가 문명 이전에 존재하고, 그것이 
이동하면서 문명의 새끼를 친다는 발상은 현재의 고고학을 지배하는 공통된 
오류다. 인류가 유사한 환경조건에서 유사한 행태의 삶을 영위하며 유사한 형태의 
예술양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의 보편성, 즉 인간 인식능력의 
보편적·선험적·심층적 구조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문자와 
천문학적 지식과, 마야문명의 피라미드와 문자와 천문학적 지식이 유사하다고 해서 
이집트에서 사람이 배를 타고 마야까지 건너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빗살무늬, 민무늬, 채도, 흑도 운운하는 고고학적 논의가 때로는 아무 가치 없는 
낭설일 경우가 많다는 것도 우리가 박물관을 지나칠 때 꼭 유념해야 할 상식인 
것이다. 

다음의 고전시대(Classic Era)는 AD 250∼AD 900년에 해당하며 이 시기야말로 
마야문명이 전성기를 누린 시기며, 예술과 과학이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던 시기다. 
그리고 제3의 시기인 후고전시대(Post-Classic Era)는 마야문명이 쇠퇴를 
거듭하면서 퇴락하는 시기고, 마야문명 저지대의 도시 중심들이 대부분 멸망하고 
드디어 스페인 사람들의 침공(The Spanish Conquest, 1528∼1542)으로 멸절된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저지대란 멕시코 유카탄반도, 과테말라 북부, 벨리즈, 
온두라스 북부의 열대림지대를 말하고 고지대란 과테말라 남부, 온두라스 남부, 
엘살바도르의 산악지대를 말한다. 저지대가 먼저 쇠락했고 고지대는 계속 
번창하면서 16세기 스페인 침공에 완강히 저항했다. 고지대에는 돌단을 쌓아올리는 
피라미드와 같은 복합적 건축양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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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기억 속의 비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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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문명! 마야문명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은 없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마야」라는 자음과 모음 소리의 조합에 대해 아주 특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와 동시대의 체험을 공유한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모두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저 아메리카대륙의 밀림 속에 남모르게 
피어올랐던 찬란한 꽃, 고립되었지만 평화스럽고 유족했던 삶, 
수학·천문학·건축·예술·공예·기술의 고수준을 자랑했던 찬란한 고문명! 
어느날 갑자기 철갑에, 기마에, 총포에, 성경에, 십자가에, 이단몰살에 대책없이 
당해야만 했던 서글픈 문명, 마야! 천주님을 내세운 기독교문명의 제국주의적 
참혹한 죄악상이 유감없이 발휘된 인류사의 비극, 스페인의 말발굽이 일으킨 풍진 
속에 영원한 침묵으로 사라져버린, 인류의 명멸했던 꿈, 마야! 

내가 어렸을 때, 천안극장에서 본 한두편의 외화도 그러한 제국주의적 참상을 
고발하는 명화였다는 기억이 새롭다. 마야! 막연한 기억의 연쇄 속에, 하루하루 
밀어닥치는 조선반도의 비극상 때문에, 마야까지 손볼 겨를은 없었지만, 마야!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무엇인가 애틋한 인간의 비극이, 못다 말한 순박한 원혼의 
아우성이 소리없이 내 귓전을 때리곤 했던 것이다. 괘씸한 서양놈들! 그래도 
대원군은 손돌목(孫乭項)에 이른 미국함대에 대포라도 쏴보고 당했지만, 쯧쯧! 
마야사람들은 스페인놈들에게 소리없이 멸절당했대! 그래도 우린 일본놈들에게 
광화문을 헐리고 마야 피라미드에 해당되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라는 
새로운 피라미드가 앞을 가렸어도, 결국 다시 헐어내버렸잖아? 그리고 조선의 
국체라는 아이덴티티는 오늘까지 보전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아니 스페인놈들 
오죽 지독했으면 그렇게 한 거대문명의 씨를 말릴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도 
우라지게 지독한 놈들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도 양심 없는 놈들이 있을까? 
왜놈들은 백운대 정상에까지 쇠를 박고 온갖 풍수명당에 저주를 박았어도 조선의 
귀신을 다 죽일 수 없었는데, 스페인놈들은 얼마나 지독한 놈들이기에 마야의 
귀신들을 모조리 박멸시킬 수 있었는가? 스페인놈들이 싸지르는 오줌이 떨어진 
곳에는 풀도 안 나나보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좀 동정심이 많고 감성적으로 여린 사람이어서, 마야! 
마야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또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여 
모종의 이상향에 대한 무한한 동경심을 발동하면서, 죄없이 죽어간 그 문명의 
평화로운 사람들에 대하여 한없는 연민의 정을 품고 눈물까지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마야문명을 이해해보리라 하고 대학시절에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열 
권을 원서로 사둔 기억까지 난다. 난 항상 좀 황당했다. 그 뒤로 『역사의 
연구』를 내가 읽었을 리 없고, 또 최근에 뒤져보니 『역사의 연구』 속엔 마야에 
대한 언급이 극소했다. 

과연 한 문명이 타문명의 침략으로 그렇게 완전히, 소리없이, 흔적없이 멸절될 수 
있는 것일까? 문명이란 보이지 않는 것일진대, 물리적 멸절 이상의 것일진대, 
그것이 지속하고자 하는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면 과연 멸절 가능한 것인가? 여기에 
우리가 한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의 아주 상식적이고 소박한 측면을 교정해야만 할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현재 마야의 후예들은 인종적으로 살아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야의 
언어조차도 그들 삶에 보전되어 있다(남부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서부 
온두라스, 서부 엘살바도르에 산재하는데, 이 언어 그룹은 우아스텍[Huastec], 
유카텍[Yucatec], 서마야, 동마야 그룹으로 4분되어 있다). 허나 이들에게서 
치첸잇차의 피라미드 센터가, 시·공간적으로 조선인들에게서 경복궁이 갖는 
의미만큼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마야문명은 분명히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명의 멸절 이유를 단순히 외래적 침략의 일시적 사건에 전가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 전멸했을지라도 그것이 응집력이라는 
혹은 생명을 갖는 것이라면 하시(何時)고 광복의 기운을 회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아편전쟁에도 중일전쟁에도, 인도는 영국의 300년 통치에도, 조선은 
일본인의 악랄한 30년 통치에도 결국 멸절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야문명의 멸절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나의 기철학적 해답은 아주 
단순하다. 모든 기의 멸절 원인은 그 기의 관계(그물)의 주체적 구조 
자내(自內)에서 찾아져야 한다. 

내가 어릴 때 상상 속에 그리던 마야와, 내가 성숙해서 두 눈으로 직접 감지한 
마야는 너무도 다른 마야였다. 마야는 피(Blood)의 마야였다! 마야는 
평화(Peace)의 마야가 아닌 폭력(Violence)의 마야였다. 마야는 인간의 마야가 
아닌 신(神)의 마야였다. 마야에는 문화가 없고 문명만 있었고, 문명은 없고 
종교만 있었고, 종교는 없고 제식만 있었고, 제식은 없고 희생만 있었고, 희생은 
없고 피만 있었다. 

마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아이러니였다. 풀기 힘든 
수수께끼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아주 통속적 경구가, 사흘 동안 
작열하는 유카탄 태양 아래 끄슬리는 나의 방황을 아주 유익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어렸을 때의 막연했던 동경을 하나 제거해버리고 칸쿤 국제비행장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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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없었던 마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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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상기한 시대구분부터 살펴보자! 마야문명은 우선 생각하는 것처럼 고문명이 
아니다. 사실 전고전시대라는 것은 아주 소박한 촌락의 원시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뚜렷한 문명의 자취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청동기를 남긴 
은문명(殷文明)이나, 『시경(詩經)』을 남긴 주문명(周文明)에는 비교될 수 없는 
그런 소박한 상태의 문명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마야문명의 정체는 주로 
고전시대에 한정되는 것인데 고전시대란 중국으로 말하면 관우·장비·조조가 
싸우던 3국시대로부터 당제국(唐帝國)의 멸망시기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마야문명의 전성시기는 당현종(唐玄宗)이 양가녀(楊家女)와 놀아나고 
이태백(李太白)이 월하(月下)에서 독작(獨酌)을 기울이던 즈음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경주 남산에 흩어져 있는 불상, 그리고 석굴암의 느낌과 마야문명의 
느낌은 그것의 상징적 구조와 의미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바로 동시대적 
사건(contemporary events)이라는 데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시성의 구조 속에서 인류문명에 공통된 축의 전개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야는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과거가 아니다. 인류 문명의 찬란한 전개에 
행보를 맞춰, 한(漢)제국의 분열로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로부터 
성당(盛唐)의 찬란한 불교미술이 전개되기까지의 시기를, 같이 걸어온 근세의 
문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명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미 9세기 말에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페인의 침공이 스페인국왕에게서 
아델란타도(Adelantado)라는 작위를 받은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Francisco de 
Montejo)의 1528년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마야문명은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600년 전에 이미 그 성세(盛勢)를 상실했던 것이다. 

몬테호에게는 정복해야 할 제국(帝國)이 없었다. 조직적 저항도 없었다. 
소부족들과 치른 게릴라전만 있었다. 스페인사람들은 아주 소규모 병력으로 1542년 
메리다(M′erida)에 수도를 세우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대규모의 조직적 저항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선 마야문명이 통일제국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금 남아 있는 수많은 마야문명의 센터들은 각 부족들의 문명센터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 센터간에는 신화적 공통성이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마야문명은 단 한 번도 통일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마야역사에는 
진시황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마야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했고 실존성이 확실시되는 왕은 파칼(Lord Pacal, 
608∼683)과 그의 아들 찬 바룸(Chan-Bahlum)이다. 그러나 파칼의 치세도, 멕시코 
중부의 우수마킨타 강과 리오그란데 데 치아파스 강 사이에 있는 팔렌크(Palenque)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다. 그 지역은 마야문명의 유적들이 집결한 곳과는 먼 거리에 
있다. 

성당(盛唐)은 안록산의 난으로 당현종이 사랑하는 양귀비의 목을 쳐야만 했을 때 
그 성세(盛勢)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9세기 말에(AD 900년을 전후로 하여) 
한결같이 마야문명의 센터들은 황폐화했는가? 마야문명의 어마어마하고 찬란한 
센터들은 결코 정복과 피정복의 처절한 싸움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대부분 그냥 버려졌던 것이다. 그냥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폐기처분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900년경의 마야문명 황폐화의 원인을 구명하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현재까지 뚜렷한 단서를 제시하지 못했다. 토인비는 말한다. 

『아마도 그 재앙은 그 사회 자체에 있는 어떤 인간학적 결함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고고학은 그 재앙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하여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여태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은 우리에게 마야의 멸망이 어떠한 
종류의 폭력으로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혁명이나 전쟁의 
흔적이 없는 것이다』(Here, as elsewhere, the catastrophe is more likely to 
have been due to some human failure in Society itself; but Archaeology gives 
us no clue to what this failure was. It only tells us that the 「First 
Empire」 of the Mayas did not perish by violence of any kind: not by 
revolution and not by war. A Study of History, Vol. Ⅰ, p. 126)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혹자는 이런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설은 모두 
서구 학자들이 스페인 침략의 잔혹성을 은폐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학문의 
동료의식에서 나온 개구라에 불과하다는. 과거의 진실은 영원한 침묵 속에 놓여 
있고 어떠한 거짓말도 가능하다. 허나 내가 확인한 것은 유물 그 자체가 말해주는 
진실이었다. 돌 한 조각, 유물 그 자체의 진실, 그 이상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 
역사에서 그것은 어떠한 문헌적 기록보다도 생생한 직접기록이다. 나는 마야문명의 
멸망에 대한 명백한 해답을 즐비하게 널려 있는 돌조각 속에서 찾아냈다. 나는 
고고학이 찾아내지 못한 이유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해답은 너무도 명백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피(Blood)였던 것이다. 피! 

마야문명은 분명 고급 문명이었다. 그 예술의 상징성과 채색벽화들의 색채감, 
그리고 건축물들의 기하학적 조형성, 그들이 수에서 이미 제로(zero)라는 개념을 
창안했다는 것, 그리고 일식·월식을 예측했고, 달의 변화, 비너스(금성), 
마르스(화성), 주피터(목성)의 주기를 정확히 알았고, 태양력·음력·성력(聖曆) 
등 다양한 캘린더 시스템을 활용했다는 것(태양력은 20일 단위 18개월 더하기 
不運日 5일, 성력은 20일 단위 13사이클로 전체가 260일, 그리고 윤달 개념은 
사용하지 않았고, 60甲子 대신에 52甲子를 썼다) 등으로 그 문명의 고등성과 
체계성이 증명된다. 그리고 그들은 괴이하게 생긴, 마치 전국시대의 
과두(㏛?)문자보다도 더 복잡하고 회화적인 상형문자(hieroglyphic writing)를 
사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문자의 해독이 불가능했지만 최근 마야상형문자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 힘입어 그것이 과연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정확히 재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 그 의미만은 85% 이상 해독이 가능해졌다. 

1952년 러시아인 유리 크노로소프(Yuri Knorosov)의 연구는 그 분수령이 된다. 
그것은 중국의 형성자 체계보다 더 복잡한 것으로, 뜻글과 소리글의 체계를 
자유롭게 복합시킨, 좀 불규칙적 체계인데 대체로 소리글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마야문명에는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 못지않은 방대한 
문헌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코우덱스」라고 불리는, 무화과나무껍질로 만든 
종이를 병풍처럼 포개 접은 책(옛날 중국 비단帛書도 같은 양식이다)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1560년대 후반에 유카탄의 스페인 대주교를 지낸 란다 신부(Fray 
Diego de Landa)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마야사람들은 일정한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 문자로 과거의 일과 
과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이 문자로 쓴 코우덱스 책들을 검토해본 결과, 
대부분이 미신과 흉악한 악마들의 거짓말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랬더니 이 마야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쉬워했다. 우리의 분서가 그들을 그토록 상심케 하고 애통케 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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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주받을 대주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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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원대대로 저주받을, 우라질 놈의 새끼, 란다 대주교의 코우덱스문서 분서가 
얼마나 집요하고 철저한 것이었는지 그 방대한 문헌이 남김없이 태워졌고, 현재 
오직 4개의 두루마리만 남아 있다. 그것이 남아 있는 지명에 따라, 
드레스덴(Dresden), 파리, 마드리드 코우덱스라고 불린다. 단 하나의 그롤리어 
코우덱스(Grolier Codex)만 현지에 생존하고 있다. 기독교 배타주의의 몰상식함은 
이토록 저주스러운 것이다. 

란다 대주교가 이 문헌을 그토록 집요하게 태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문자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회화적 문양을 많이 
삽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신의 얘기를 할 때는 신의 단순한 이름 대신 그 
생김새가 그려진다. 그리고 오늘날의 삽화 같은 그림이 그려져 문자를 간략화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젖퉁이가 요염하게 불거진 젊은 달신(Young Moon Goddess)의 
모습이라든가 다른 신들의 모습이 흉악한 이단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고 
야훼하나님 만신의 경배를 위하여 이런 잡신들의 모습과 기록은 철저히 불살라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잔인하고 무도하고 몰상식하고 파렴치하고 
잔악한 야훼하나님의 똘만이들이 저지른 악행의 전범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이 
만행의 업으로 마야의 과거는 신비의 미궁으로 미궁으로 빠져들어간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4대 사고(史庫)를 만들어 사실(史實)을 비밀리에 봉안하여 전화에 대비할 
줄 알았던 조선왕조인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후세인들을 위한 깊은 배려의 
소산이었나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시조신화인 단군의 이야기는 일연(一然)이라는 실존성이 확실한 
스님(종교인)에 의하여 『三國遺事』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그 책의 제1권은 
왕력(王曆)이라는 왕들의 연표로 구성된 것이고, 제2권은 「기이(紀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바로 단군신화는 기이의 첫 사례로 고조선 왕검조선 조(古朝鮮 
王儉朝鮮 條)에 실려 있는 것이다. 「기이」라는 말을 해설하는 일연 스님의 
「서(敍)」에 이르기를, 원래 예악(禮樂)과 인의(仁義)를 말하는 성인(聖人)의 
나라에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은 있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제왕(帝王)이 최초로 흥기할 때는 사람의 상식과는 좀 다른 신이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고전의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이것을 여기 기록함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이겠느냐는, 매우 
겸손하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紀異」란 『神異한 일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일연 스님의 히스토리오그라피의 배면에 
깔린 스님의 신화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이다. 일연 스님에게는 분명 신화가 신화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나라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기록하고 
있는 자들의 인식태도와도 사뭇 다르다. 신화를 신화로 인식할 때만 오히려 신화는 
그 상징적 의미가 우리 삶에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신화란 「기이한 
것」이라는 일연 스님의 발언 자체가 신화와 우리 의식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존(存)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오늘날 단군신화를 사실로 입증하고자 발악하는 
관변우익사학자들이나 종교적 국수주의자들, 온갖 단군교의 신봉자들을 바라볼 때, 
바로 그들이 말하는 신화를 최초로 기록한 일연스님의 의연한 역사적 태도의 
발꼬락지 때만도 못한 그 치졸함을 가련하게 여긴다. 

그런데 마야의 비극은 바로 一然이 기술하고 있는 「기이(紀異)」적 태도의 결여에 
있다. 마야인들에게 신화는 신화가 아닌 사실이었다. 신은 이상체가 아닌 
현실태였고, 인간을 지배하는 관념이 아닌 물리적 사실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의 
소관이 아닌 엄존하는 사실의 영역이었다. 인간을 위하여, 개체적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세의 도덕적 선(善)을 위하여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이라는 
현실태를 위하여 존재할 뿐이다. 인간세는 신의 세계를 위한 도구적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세에 실제적으로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란 인간 삶의 
양식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는 오로지 신의 양식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상황이다. 더욱이 그들의 신(神)은 피의 신이었다. 인간의 피를 요구하는 
신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비가 내리는 것도 우신(雨神) 샤크(Rain God, Chac: 
동그란 눈에 코가 뭉뚱하게 고리처럼 내려와 있는데 많은 마야 건물의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가 피를 흘리는 것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신의 피에 인간은 
피흘림으로써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피의 제식 앞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없었다. 서민의 인신희생은 물론, 지배자(제사장=정치지도자)들도 매우 
고통스러운 피의 제식을 거행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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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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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제식의 모자(꼭 우리나라 상복두건같이 생겼다)를 쓰고 목과 어깨에 신줄과 
같은 새끼를 걸치고 앉아 자기 자지를 짜개서 피를 내고 있는 끔찍한 모양의 토기, 
그것은 마야에 매우 흔한 지배자의 생김새다. 마야의 왕들은 항상 자기 자지를 
짜개서 피를 내야만 했다. 그것은 유태인의 할례와 같은 어떤 합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지를 상처내는 부위가 자지를 덮고 있는 
껍질부분(prepuce)이 아닌 요도해면체의 귀두(glans)라 할 때 그 고통의 심각성은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자지로는 몇 달간, 아니 몇 년간 성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처에 발견되는 린텔(Lintel, 정교한 그림들이 새겨진 큰 
석판의 단위를 말함)의 그림을 보면 화려하고 한없이 복잡한 의상을 입고 있는 
지배자들이 손목이나 얼굴에 칼로 흠집을 내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다반사(茶飯事)다. 천문이나 관측하는 평화로운 과학자 같던 마야의 
제사장―지배자들의 이미지는 마야문명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 될수록, 아주 
호전적이고 맹포(猛暴)한 사람들로 변모해갔던 것이다. 마야의 리더들은 물론 
영토를 획득하기 위해서도 이웃 종족들과 전쟁을 했지만, 그들이 전쟁을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신에게 바칠 인신제물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피에 굶주린 표범 같았다. 그들은 신에 바칠 피를 위해 알고 보면 가족이고 
이웃들일 텐데 서로 죽이고 죽였다. 그러나 더욱 음산하고도 괴이한 사실은 바로 
그러한 전쟁의 리더들 자신이 끔찍하도록 고통스러운 피의 제식을 거쳐야만 했다는 
것이다. 

『구약』 「창세기」 22장에 보면 백살이 된 바로 그 해에 아내 사라로부터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야훼의 분부대로 모리야 땅으로 향하고 있는 백발 성성한 
노인 아브라함이 나온다. 그 아리따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칼로 찔러 장작불에 태우기 위해, 나귀에 장작을 싣고 아들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사흘간의 긴 여행을 떠난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모리야 땅의, 하느님께서 일러준 산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에 올려 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훼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슬람의 성전 『코란』에 보면 이 이삭의 얘기는 이스마엘의 이야기로 둔갑해 
기술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번제가 이삭이었든 이스마엘이었든 그것은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최소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신희생을 
동물희생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헤브라이즘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인신제사의 폐해와 인간학적 참혹성 때문에, 그것이 동물제사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인간화(Humanization)의 비약을 이러한 신화로 표현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유태인들이 아직도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그들의 유월절을 
기리기 위해 인신희생의 제사를 올리고 있다면 과연 아인슈타인인들 스필버그인들 
대접받는 인류의 리더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 동양사람들이 사랑하는 옛 노래를 담은 중국의 성경 『詩經』의 국풍(國風), 
진풍(秦風) 중 「황조」(黃鳥)라는 노래의 첫 소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쾨르 쾨르 꾀꼬리 

대추나무에 멈추었다 

누가 목공을 따라갔나 

자거 엄식이었어 

이 엄식이야말로 

일당백의 특출한 인물이었지 

용맹스러운 엄식도 

그 검은 묘혈 앞에선 

부르 부르 떨었네 

저 푸르른 하늘이여 

우리네 좋은 사람 죽이는구나 

만일 대속할 수 있을진대 

우리네 모두 그 몸을 백번이라도 바치리 


交交黃鳥, 止于棘. 

誰從穆公, 子車奄息. 

維此奄息, 百夫之特. 

臨其穴, 其慄. 

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 


이 노래는 명백하게 秦나라의 순장풍습을 읊고 있다. 이것은 진나라의 왕 
목공(穆公)이 죽었을 때 子車氏의 훌륭한 세 아들을 순장한 사건으로 
『춘추좌씨전』 7 文公六年條에도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BC 621년의 
사건이었다. 과거 殷나라는 대규모의 순장제도가 있었다. 殷에서 周나라로 
革命되면서 인간적 문화를 표방한 새왕조 주는 이 은의 순장풍습을 폐지했다. 허나 
秦은 후진국가였기 때문에 이 殷의 古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특별히 아름답다. 

맨처음 쾨르 쾨르(交交의 의성을 고음으로 재구성한 것) 꾀꼬리의 아름답고 청초한 
모습이 무덤가에 심어지는 대추나무(혹은 가시나무)에 사뿐히 앉는 경쾌한 광경을 
통해 이 비극의 목격자로서의 꾀꼬리와 「대추나무에 앉는다」는 이미지를 통해 
무덤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子車氏의 아들 엄식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리고 
목공을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이 서술된다. 그러한 
불합리한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비극상황이 묘사되는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노래의 톤은 일변하여 의연하고 무용(武勇)에 빛나는 사나이의 늠름한 
모습이 묘사된다. 百夫之特! 백명의 사내라도 한 몸으로 당해낼 수 있는 특출한 
인물이었지! 

이 노래의 가장 비극적 톤의 강화는 바로 이 늠름한 사나이,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만인의 사랑을 받던 훌륭한 젊은 정치가 자거(復姓이다) 엄식이 묘혈 앞에서 
부르르 떠는 모습이다. 여기 묘혈이란 왕의 거대 묘지는 지하의 궁전이다. 묘혈은 
그 음택으로 들어가는 入口다. 그 음택에 들어가는 순간을 사랑하는 
부모·아내·자식들과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 입구의 돌이 덜컹 
닫히는 순간 위대하고 늠름한 엄식은 빛 한점 없는 컴컴한 암흑 속에 갇혀버리고 
묘혈 앞에는 흙이 덮이게 되는 것이다. 그 얼마나 끔찍한 비극의 순간인가? 
「百夫之特」에서 「臨其穴, 其慄」로 바뀌는 그 순간의 콘트라스트는 있을 수 
없는 인간의 비극에 대한 더없는 느낌의 강화를 유발시킨다. 「췌췌기율!」 나의 
삶에서 가장 음산한 공포감이 엄습할 때면 이 췌췌기율이라는 『詩經』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췌췌기율, 누구인들 그 검은 구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바랐겠는가? 

이 詩(노래)의 위대성은 마지막, 이 노래를 지은 秦나라 백성들의 탄식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은 회한의 표현, 그 마지막 구절에 있다. 아∼ 저 푸른 
하늘이여!우리네 좋은 사람을 죽이는구나! 만일 대속할 수 있을진대 우리네 모두 
그 몸을 백번이라도 바치련만! 

이것은 정확하게 BC 621년에 지어진 노래다. 비록 불합리한 사회적 규약에 
순응해야 했지만 진나라 백성들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 췌췌기율의 그 
비극성의 본체에 대한 통찰을 잊지 않았다. 秦나라 武公이 BC 697년에 죽었을 때 
66명을 순장했다. 그후 BC 621년에 죽은 穆公은 子車氏의 세 아들을 순장했다. 
허나 그뒤 400년이 지난 후 세상을 하직했던 희대의 帝皇 政 진시황제는 자기 
무덤에 들어가는 수만명의 사람들을 토용으로 대치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인류사에 진보의 한 획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이삭에서 숫양으로 바꾼 것이 이미 BC 2000년경이다. 목공의 비극을 노래한 것이 
BC 7세기의 일이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이태백이 明月에서 노닐던 盛唐시대 
한복판에도 아무런 반추없이, 췌췌기율의 느낌도 없이 수없는 피의 제전, 
인신제사를 자행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에게는 췌췌기율의 느낌이 없었을까? 

마야문자의 해독이 가능해짐에 따라 정확한 연대까지 구성해낼 수 있는 
야쉬칠란(Yaxchil′an)의 린텔 석판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췌췌기율의 음산한 이야기를 구성해낼 수 있다. 정확하게 AD 724∼726년에 
일어났던 일이다. 

야쉬칠란 왕국의 왕과 그 왕후 쇼크(Lady Xoc: 「x」는 「sh」로 발음되고, 
「c」는 항상 「k」로 발음된다)의 이야기다. 아름다운 왕후 쇼크는 아주 아름다운 
문양의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거대한 왕후 관이 실려 있으며 목과 손목은 찬란한 
목걸이와 팔찌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아마도 왕후 쇼크는 이 끔찍한 제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며칠간 단식했을 것이다. 長恨歌의 양귀비(楊貴妃)처럼 
화청지(華淸池)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백옥 같은 응지(凝脂)의 피부를 가꾸고, 
교무력(嬌無力)한 몸을 일으켜 이 끔찍한 제식의 컴컴한 장소로 부축되어 갔을 
것이다. 아마도 쇼크 왕후는 환각의 마약을 들이켰을 것이다. 이 제식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캄캄한 방 속에서 왕과 왕후 단 둘만이 거행한 제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남편(Shield Jaguar: 「방패표범」이란 뜻인데 왕의 이름이다. 이름이 
이런 합성어로 되어 있다)이 옆에서 횃불을 들고 서 있기 때문이다. 왕후는 
혓바닥을 꺼내 그 가운데를 칼로 뚫고 그곳으로 기다란 가시가 돋친 새끼줄을 
통과시킨다. 끔찍하게 아플 이 가시 돋친 새끼줄이 통과하는 동안 그 새끼줄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바로 사발에 담긴 코우덱스 종이에 적셔내는 것이다. 그 
끔찍한 새끼줄이 다 통과한 다음, 그 종이는 제식장 한가운데 엄숙하게 놓이고 
불이 지펴진다. 그 피가 타오르는 연기는 거무스레한 허공에 기묘하고 푸르스름한 
문양을 그릴 것이다. 이 연기의 문양을 그들은 바로 거대한 우주적 뱀(Vision 
Serpent)이라고 생각했다. 이 뱀의 심벌은 마야인들의 신화와 건축양식 도처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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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神의 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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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본 치첸잇차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3면체)와는 달리 균형 잡힌 
4면체로 되어 있다. 이 4면체의 한 면은 각기 9단으로 쌓여 있고 그 중앙에 매우 
가파른 계단이 나 있는데 한 계단은 91개로 구성되어 있다. 91계단을 4곱하면 
364개가 되는데 그 꼭대기에 있는 제단과 합쳐서 365일이라는 태양력의 날수가 
나온다. 그리고 9단이 계단을 중심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18단이 되고, 이 18단은 
20일을 한 달로 계산하는 1년 18개월의 숫자가 된다. 마야의 피라미드가 山이라고 
하는 자연을 상징한 것이라면,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복합체, 즉 그들의 우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의 서쪽면 계단 양쪽 난간은 거대한(34m)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계단이 땅과 만나는 곳에 거대한 뱀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다. 그런데 석굴암의 일출이 부처님의 이마에 신묘한 빛줄기를 때리듯이, 
춘분(3월20일)과 추분(9월21일) 때가 되면 이 피라미드 서쪽 뱀난간에는 신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난간에 7개의 이등변삼각형 빛의 문양이 나타나면서 약 10분간 
뱀이 꿈틀거리며 하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것을 쿠쿨칸(Kukulc′an, 날개 
돋친 뱀神)의 하강이라고 부른다. 

본시 마야인들에게 있어서 뱀은 하늘의 은하수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 은하수는 
그들이 생각하는 十三天九地의 거대한 주축(axis)이었다. 

쇼크 왕후에게 피어오른 뱀신은 무엇이었을까? 이 뱀은 머리부분과 꼬리부분에 
각각 머리가 하나씩 달려 있다. 마야의 예술가들은 이 뱀의 생김새를 아주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빨 달린 아가리를 180°로 딱 벌리고 긴 혀를 
널름거리고 아래턱과 위턱에는 긴 수염이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짝 벌린 
아가리로부터 방패와 창을 든 神이 나타난다. 이 神이 곧 야쉬칠란왕조의 단군신인 
야트 발람(Yat Balam)이다. 이 야트 발람의 별명은 「자지표범」(Jaguar Penis, 
아까 「방패표범」과 대비된다)이다. 방패와 창을 든 것으로 보아 軍神, 즉 
전쟁의(승리의) 신일 것이다. 

쇼크 왕후가 이 제식을 한 것은 그러한 피의 제식을 통해서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장벽을 소통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우리나라 무속 굿에도 동일한 구조가 
발견된다). 쇼크 왕후의 제식을 통해 야쉬칠란의 신들은 뱀의 아가리로 들어가 
기나긴 뱀의 몸뚱이를 여행하여 꼬리부분 아가리로 다시 나오게 된다. 이것은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를 소통하는 심벌이다. 그리고 쇼크 왕후는 이 제식을 통하여 
자기 남편 「방패표범」이 이제부터 싸우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뱀의 
아가리로부터 나오는 자지표범, 야트 발람신에게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식은 아마도 방패표범의 대관식 즈음에 행하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왕비 
해먹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쯧쯧! 쇼크 왕후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하나의 
쇼크다. 이 쇼킹한 이야기는 마야사람들에게는 쇼크 아닌 일상이었고, 신화 아닌 
사실이었다. 

『論語』 「泰伯」편에 보면, 『孝經』의 저자로 알려진, 성품이 아름다웠던 
孔子의 제자 曾子가 임종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는 매우 
화평한 정경이 그려지고 있다.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증자는 제자들에게 
이른다. 

『얘들아! 내 다리를 열어보아라. 내 손을 열어보아라』 

이불을 걷었을 때 뽀얀 노인의 얌전한 수족이 드러났을 것이다. 

『「시경」에 말했지. 전전긍긍, 깊은 못에 임한 듯하고, 엷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고. 나는 그렇게 조심하며 살아왔지. 이제야 그 짐을 벗겠구나.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터럭 하나도 부모에게 받은 것, 불감훼상이라, 감히 다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내 명을 다하여 九天으로 가니 이제야 그 짐을 벗겠노라고 
한 曾子의 고백이다. 자아! 이제 대답은 명백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 그대들은 
마야의 왕후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초가삼간에서 부모에게 받은 수족을 온전히 
하면서 살 수 있는 유교문명의 보금자리를 원하겠는가? 마야문명의 멸망 원인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외형적으로 치첸잇차의 가장 찬란한 유적은 기하학적 조형미를 자랑하는 엘 
카스틸로(El Castillo)라고 통칭되는 피라미드지만, 실제로 이 치첸잇차라는 도시 
중심지가 생겨난 가장 중심이 되는 유적은 피라미드 서쪽 계단, 그러니까 그 뱀 
아가리 있는 곳으로부터 275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우물(Cenote 
Sagrado, Sacred Well. 마야 말로는 조노트, dzonot)이다. 지름이 60m나 되는 이 
거대한 자연 우물에서 치(아구) 첸(우물) 잇차(地名), 즉 「잇차 우물의 입」이란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마야문명이 자리잡은 이 거대한 유카탄반도는 엄청난 밀림으로 덮인 대평원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江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물구경을 할 수가 없다. 
밀림열대지역에서 비가 많이 올 것 같지만 이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치첸잇차에서 오다가 도중에 발라돌리드(Valladolid)라는 도시에서 사진을 찍다가 
그만 안경을 잃어버렸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오다 뒤늦게 그 사실을 발견하고, 
어련하랴!식구들을 다그쳐 다시 돌아가 안경을 찾다 찾다 못찾고 풀이 죽어 밤 
늦게 호텔로 돌아오는데, 비가 어찌나 쏟아지는지 빌린 렌터카의 지붕이 뚫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간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확 개고 선선한 밤하늘에 별이 
초롱초롱 빛났다. 내린 비는 금방 땅속으로 숨어 도망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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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옥수수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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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인들의 주된 식량은 옥수수(메이즈, maize)였다. 인간은 자기 삶의 체험과 
가장 밀접한 곳에서 神을 찾는다. 마야인들에게는 수많은 신이 있지만 그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가장 보편적인 신, 그러니까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제우스 같은 
신이, 훈 후나푸(Hun Hunaphu)라고 불리는 옥수수神(Maize God)이었다. 그의 
머리는 항상 옥수수 잎을 연상케 하는 상징체로 장식되어 있고 아주 젊은 남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 세계의 창조를 주관했고 옥수수의 생산(fertility)을 
주관한다. 

인간의 탄생설화 역시 옥수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신들이 태초에 땅을 창조했을 
때, 자기들을 경배할 물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처음에 신들은 동물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그놈들은 신을 몰라보고 꽥꽥거리기만 했다. 실망한 그들은 두 번째로 
인간의 형상을 흙으로 빚었다. 그랬더니 이놈들은 말은 하는데 도무지 아무런 
의미를 조합해내지 못했다. 그러더니 그것은 곧 형태 없는 흙으로 분해되어 
버렸다. 그래서 신들은 세 번째로 나무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이놈들은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았고 섹스도 할 줄 알아 새끼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나무인간들은 영혼이 결여되었다. 그래서 창조주인 신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신들은 회의 끝에 나무인간들을 멸종시키기로 결정했다. 엄청난 홍수를 
일으키고 표범을 시켜 이들을 공격하게 했다. 나중에 결국 불을 질러 태워 
나무인간들을 멸종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몇 개의 나무인간은 살아남아 원숭이로 
변해버렸다. 이 원숭이가 바로 오늘 숲에 살고 있는 나무인간의 변종들이다. 

분노와 실망에 찬 신들은 사람을 만들려는 최후의 노력에 착수했다. 
슈무카네(Xmucane)라는 늙고 현명한 여신이 옥수수알갱이를 아홉 번 갈아 만든 
옥수수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하여 4개의 인간 형상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기적적으로 이 4개의 옥수수인간은 말도 했고 생식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신을 
경배할 줄 알고 신에게 희생을 바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인간은 
『구약』에서처럼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옥수수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것이다. 
마야인들에게 옥수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이 창조설화가 너무 잘 
대변해준다. 그들은 정글림을 선택하여 나무를 베고 건기에 그 숲을 불살랐다. 
그리고 우기가 시작할 때 곡괭이질을 해서 옥수수를 심었다. 몇 년 이런 방식으로 
경작하다가 생산성이 떨어지면 숲을 옮기곤 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물이었다. 이들은 경작한 물을 주로 샘에서 
얻었다. 따라서 샘이란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석회질층이 무너지면서 
생긴 지하동공 아래로 거대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물을 길어오는 광경은 
19세기 초에 이 지역을 탐험한 사람들이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마야인들에게 지하세계는 매우 중요하고도 가까운 세계였다. 그것은 九重의 
암흑세계였다. 

마야는 이 지하세계를 쉬발바(Xibal b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공포의 세계」(The 
Place of Fright)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지하세계에 사는 신들, 쉬발반들(The 
Xibalbans)은 신화 속에서 거의 공포의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은 대강 똥배가 
나왔고 악취 나는 입김을 내뿜는다. 그리고 이들은 눈을 뽑아 꿰매서 목걸이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방귀를 뀌고 똥줄기가 똥구멍에 달려있곤 
한다. 오늘날의 마야말로 악마는 키진(Cizin)인데 이것은 「방귀쟁이」라는 
뜻이다. 

치첸잇차의 거대한 우물을, 사계의 전문가들은 대개 가뭄이 들었을 때 雨神 
샤크에게 기우제를 올린 곳으로 말하고 있다. 이 우물 역시 생명의 샘이 아닌 
죽음의 샘이었던 것이다. 마야인들에겐 죽음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도 아침에는 젊은 신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기나긴 
황도를 지나 석양에 이르른 해는 수염 난 할아버지로 묘사된다. 태양도 하루 
사이에 탄생과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노테라고 불리는 치첸잇차의 거대한 우물은 바로 지하세계 
쉬발바의 입구였을 것이다. 지하세계의 신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은 아름다운 
처녀들, 아기들, 그리고 전사들을 그 우물에 바쳤던 것이다. 가뭄이 들거나 우환이 
겹치면, 그들은 피라미드 앞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새벽 먼동이 틀 무렵 
아름답게 치장한 새색시들을, 북 치고 장구 치며 데려갔다. 그 우물 주변에서 
장엄한 의식을 거행한 후 그들은 그 새악씨들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이 깊은 
우물 속으로 던졌다. 여인들은 자기들의 소망을 빌고 또 풍요로운 한 해가 되기를 
탄원한 후 첨벙! 그들의 몸뚱이가 고요한 수면을 때릴 때 꺄르르르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몸이 묶여지지 않은 채 던져진 이 여인들은 처절한 외침과 
함께 물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하나 둘, 그들은 제물이 되어갔다.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죽지 않고 소리지르는 여인에게는 구원의 밧줄이 내려졌다. 이것은 
1579년 스페인사람 돈 디에고 사르미엔토 데 피게로아의 증언이다. 후에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의 탐험가이며 고고학자인 에드워드 허버트 톰슨(E. H. Thompson, 
1856∼1935)의 역사적인 잠수탐험에 의하여 실증되었다. 톰슨은 준설작업으로 
별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25m나 되는 이 깊은 우물로 몸소 다이빙을 하여 엄청난 
유물을 발굴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인신해골과 더불어 그때 같이 수장된 
수많은 장신구, 용기, 금붙이, 마스크, 도끼, 인간희생의 순간을 새긴 금판 등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톰슨은 심해다이빙 연습을 하고 들어갔지만, 온갖 전설과 
흉악한 귀신의 캄캄한 무덤인 그 25m의 심연을 뚫고 들어가 3m나 쌓인 진흙더미를 
헤치는 작업이 얼마나 끔찍한 작업이었을지, 스쿠버 다이빙을 몸소 체험해본 나는 
그 스산한 느낌이 이해가 간다. 톰슨은 위대한 탐험가였다. 그의 탐험정신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는 이 세노트 탐사에서 고막을 잃었다. 기진맥진한 그가 
땅으로 올라왔을 때 원주민들은 뱀神이 그를 삼켰다 뱉었다고 말했다. 

나는 한참, 성스러운 우물, 세노테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의 아해들은 그 앞의 
초가지붕 매점에서 콜라를 마시며 갈증을 달래고 있었다. 승중이가 감기로 열이 
오른다고 했고, 일중이·미루는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우물의 비극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우물은 짙은 초록 수면 위에 새파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우물에 던져진 생령들의 
함성이 움푹 팬 그윽한 지하세계로부터 무한한 침묵의 공명을 자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완벽한 적정(寂靜)이었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문명이란 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일까? 마야인의 잔혹함을 말하기 전에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수수께끼가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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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영웅의 神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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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마야문명의 모든 신화에서 종주를 이루는, 아마도 그 문명 
자체의 딥 스트럭처를 반영한다고 할 가장 유명한, 쌍둥이 영웅(The Hero Twins)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둘의 이야기는 마야의 모든 건축과 문양과 습속에 
현실적으로 반영되어 있는데, 사실 우리 상식적 감각으로는 석연하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우리 체험이 이 신화의 심벌리즘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1554년부터 1558년 사이에 마야인이, 스페인 문자를 빌려 과테말라 
마야언어인 퀴체(Quich)어로 집필한, 마야문명과 신화에 관해 가장 소중한 자료로 
간주되는 『포폴 부(Popol Vuh)』라는 책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바로 이 
쌍둥이영웅 이야기는 마야인의 가장 광적인 유희며 또한 죽음의 제전인 
볼게임(Ball Game)이라고 하는 구기(球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쌍둥이는 바로 앞서 말한 마야의 제우스, 훈 후나푸(옥수수신)의 두 아들이다. 
그리고 이 신화는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라고 하는 삼재적(三才的)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유념할 부분이다. 

훈 후나푸는 지상에서 너무 소란스러운 볼게임을 하느라 지하세계를 혼란시켰기 
때문에 지하세계 쉬발바의 영주(귀신)들에 의하여 지하세계로 소환된다. 그리고 
거기서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한다. 곧 훈 후나푸의 모가지는 지하세계의 나무에 
달린다. 이때 지하세계의 어여쁜 젊은 여자, 「피의 달(Blood Moon)」이 나무를 
지나치게 된다. 훈 후나푸의 머리는 그 여자의 손에 침을 뱉는데 이로 인하여 피의 
달은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피의 달은 지하의 아버지의 노여움이 두려워 
지상세계로 도망간다. 지상에서 이 여인은 쌍둥이를 낳는데 이들이 바로 
후나푸(Hunahpu)와 쉬발랑케(Xbalanque)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아버지 훈 후나푸에게는 이미 다른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쌍둥이의 도착을 환영하지 않고 그들을 괴롭혔다. 후나푸와 
쉬발랑케는 이 이복 쌍둥이 형제를 원숭이로 둔갑시켰다. 이 원숭이들은 탁월한 
창조적 기술의 소유자들이었고 예술의 신이 되었다. 

이 쌍둥이는 탁월한 볼 게임 선수였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볼게임의 소란이 
또다시 지하 쉬발바의 귀신들을 자극했고 이들은 또다시 지하로 소환되었다. 
이들에게는 지하에 있는 피의 강과 고름의 강을 건너 특별한 시험에 참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첫날 밤, 이들에게는 타는 횃불과 시가가 주어졌고 이 다음날 
아침에 동일한 사이즈의 횃불과 시가를 반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쌍둥이는 이 
횃불과 시가를 꺼버리고 대신 딴 재료로 만든 횃불과 시가를 피워 쉬발반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다. 다음, 이들은 칼의 집, 표범의 집, 극한(極寒)의 집, 불의 
집에서 차례로 밤을 지새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살인 박쥐인 좃츠(Zotz)의 집에 
감금된다. 이 무서운 박쥐를 피하기 위하여 이 쌍둥이는 마술을 부려 퉁소 속에 
몸을 숨긴다. 먼동이 트기 직전, 쉬발랑케는 형에게 퉁소 밖으로 나가도 좋겠냐고 
묻는다. 이때 형 후나푸는 밖을 내다보기 위해 퉁소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 
이때였다. 살인박쥐 좃츠는 후나푸의 모가지를 잽싸게 잘라버린다. 그러자 잔인한 
쉬발반들은 쉬발랑케에게 후나푸의 대가리를 공으로 삼아 볼게임을 할 것을 
명한다(실제로 마야인들은 사람대가리로 볼게임을 하기도 했다). 

볼게임의 명수인 쉬발랑케는 쉬발반들의 눈을 속이며 볼게임을 하는 동안 형 
후나푸의 목을 다시 몸뚱어리에 붙이는 데 성공한다. 

다시 살아난 쌍둥이 형제는 죽은 아버지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그 묘책을 
수립한다. 이 쌍둥이 형제는 희생제물이 돼 불구덩이로 들어가고 쉬발반들은 
이들의 시체 조각을 강물에 흩뿌려 버린다. 그런데 이 쌍둥이 형제는 닷새 후에 물 
속에서 半人半메기 형상으로 부활한다. 이들은 아주 탁월한 엔터테이너였다. 
이들은 요술과 요염한 춤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며 모든 사람을 즐겁게 
만들었다(신나게 춤추는 쌍둥이 메기를 그린 벽화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탁월한 재능과 기적적 행위를 전해 들은 쉬발반의 가장 높은 두 영주는 이 
위장된 쌍둥이 형제를 그들의 궁정으로 불러 춤을 추게 한다. 그리고 이들 보고 
불구덩이에 희생물로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한번 해보라고 한다. 이들은 다시 희생물이 되었다가 즉각 다시 
부활한다. 그런 현실을 목격한 쉬발반들은 그 마술을 자기들에게도 부려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옳다 하고, 쌍둥이 형제는 그들에게 마술을 부린다는 조건으로 
그들 모두를 불구덩이로 집어넣는다. 그리곤 그들에게 다시는 생명을 불어넣지 
않았다. 이로써 지하세계는 이 쌍둥이 영웅에 의하여 멸절된 것이다.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로움에 의하여 개가를 울린 것이다. 개선 후 후나푸와 
쉬발랑케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후나푸는 태양이 되었고 쉬발랑케는 달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의 배면에 깔린 심층구조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모른다. 허나 이 
이야기들이 말해주는 상상력의 기괴함과 기발함, 그리고 유머와 해학,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없어져버린 存在의 투영, … 하여튼 마야인은 고등한 문명의 
소유자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들에겐 정치가 
부재하고 종교만 있었고, 현실이 부재하고 신화만 있었고, 헌신은 부재하고 희생만 
있었다는 것이다. 마야는 인류의 집단적 비극의 전형이며 모든 이데올로기에 있는 
허상의 신기루였다. 그리고 끝내 나를 괴롭히는 것은 피(Bloo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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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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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화와 관련하여 마야문명을 얘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쌍둥이 
영웅 드라마에 등장하는 볼게임(Ball Game)이다. 실제로 치첸잇차에서 나를 가장 
경악시킨 것은 피라미드보다 바로 이 볼게임 구장이었다. 네모반듯한 직사각형 
구장에 별 기대없이 들어서는 순간, 나는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주 심플한 
디자인의 이 거대한 구장은 로마에 있는 원형경기장 콜로세움보다 더 웅장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길이 168m, 너비 70m, 그리고 8m의 높이로 
반듯반듯한 석재로 삥 둘러쌓은 벽, 그리고 그 벽 위로 4방에 각기 신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리비아의 지중해연안에 자리잡은 로마제국의 랩티스 
마그나(Leptis Magna)의 바실리카(basilica, 公會所)를 방문했을 때 받았던 
압도적인 느낌과 유사했다. 허나 이 구장은 더 단순했고 훨씬 규모가 컸고 
현대적이었다. 그리고 양옆 벽면에 뱀 두 마리가 서로 꼬고 있는 문양으로 장식된, 
거대한 도넛처럼 생긴 통돌석조 링이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며 돌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장은 사이즈는 좀 다르지만 남부 코판(Cop′an)에 이르기까지 대강의 
모든 도시중심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문명의 발전단계에서 격투기는 
구기의 발달보다 先行한다. 마야는 BC 2000년 전부터 이 볼게임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볼게임은 전적으로 쌍둥이 영웅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 

이 게임은 바로 쉬발랑케와 후나푸가 지하세계의 쉬발반들과 벌였던 게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쉬발랑케가 좃츠박쥐에게 잘린 형 후나푸의 모가지로 볼게임을 
하도록 명령받았을 때, 쉬발랑케는 호박을 하나 구해 형의 머리와 비슷하게 조각을 
한다. 그리고 잠시 형의 모가지로 게임을 하다가 그것을 구장 밖으로 차버린다. 
이때 놀란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가는데 쉬발반들은 토끼가 후나푸의 모가지를 
가지고 도망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숲을 뒤진다. 이때 쉬발랑케는 형 머리를 
몸뚱이에 붙여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쉬발랑케는 호박을 쳐들며 후나푸의 
머리를 찾았다 외치고 호박으로 게임을 계속한다. 그러자 곧 이 호박이 깨지고 
쉬발반들은 그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볼게임 구장은 곧 
지하세계를 지상에 구현한 것이요, 지하의 신적 세계와 통하는 관문이다. 지하는 
물의 세계다. 지상의 옥수수는 지하의 물이 없이는 자랄 수 없다. 지하의 쉬발반이 
지상의 옥수수神 훈 후나푸의 목을 칠 정도로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내가 본 치첸잇차의 거대한(아마도 마야문명 유적 중에서 최대 규모일 것이다) 
구장(球場)의 양 세로벽면 아래에는 한 단이 기다랗게 석축으로 쌓여 있다. 여기에 
관객들이 자리잡는다. 그런데 그 밑의 석축에는 바로 이 볼게임 그림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풍상으로 거의 마멸되어 식별이 어려웠다). 우리는 바로 이 그림들을 
통해 이 볼게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이 볼게임 선수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도무지 실제로 볼게임을 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헤비한 
갑옷을 입고, 코에도 귀에도 상아막대 같은 것이 끼워져 있고 모자도 성대하다. 
아마 내가 생각하기엔 이것은 실제 선수들의 경기장면이라기보다는 경기에 임하기 
전에 성대하게 벌어지는 종교적 제식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일본의 
스모토리들이 스모하기 전에 성대한 복장을 하고 예식을 치르지만 그것이 끝나면 
다 벗어버리고 경기에 임하는 것과 같은 스토리일 것이다. 

8세기경 자이나섬(Jaina Island)에서 발굴된 한 토용은 바로 이렇게 경쾌하게 
발가벗은 모습을 하고 손에 볼을 쥐고 있다. 그런데 이 토용의 비극적 사실은 
어김없이 따라오는 「피」의 주제다. 그 얼굴에 나 있는 끔찍한 상처와 손목에 
두른 붕대는 바로 이 선수가 모종의 「피흘림」 제식을 거치고 경기에 임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기 특히 球技란 재미로 하는 것이다. 구기를 통해 서로가 
건강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야인들이 만나기만 
하면 했던 이 볼게임, 마야의 역사를 통해 마야인들이 거의 미치광이처럼 매달렸던 
이 볼게임의 음산한 성격은 바로 이 볼게임이 우리가 생각하는 유희가 아니라 
죽음의 제식이라는 데 있다. 삶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승패의 순간에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좌절이 엇갈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것이다. 더욱더 음산한 사실, 
더욱더 우리의 가슴을 죄게 하는 사실은 바로 패자가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승자가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에 있다. 승리의 기쁜 순간에 그 팀의 주장은 죽음의 
기쁨을 맞이하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신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죽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게임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 마야인의 심성(心性)을! 
그것이 희극인가? 비극인가? 저주인가? 영광인가? 그대 한번 판단해보라! 

볼은 야구공 사이즈로부터 축구공 사이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나무·가죽·고무 등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가장 정통의 볼은, 지난 게임에서 
승리한 주장의 모가지를 밀랍 속에 넣어 특별히 제조한 인두(人頭)였다. 그리고 
선수는 한 팀이 4~5명으로 구성된 것 같고, 공을 일정한 곳으로 모는 데서 득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 승리는 저 구장의 양벽에 높이 매달린 돌 링 사이로 
볼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그 링의 통과가 가장 높은 점수를 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머리일 경우, 생각해보면 그 구멍이 사람머리보다 별로 크질 않다. 그리고 
엄청나게 높이 달려 있다. 마이클 조던인들 그리 쉽게 득점할 수 있을 것 같질 
않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게임은 오늘날의 농구와 럭비를 짬뽕한 어떤 형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코판의 경기장은 경기장 자체가 「工」字 형태여서 그 룰이 좀 
달랐으리라고 짐작케 한다. 죽기 위해 열심히 싸운다! 한국의 축구선수들이 게임에 
승리할 때마다 영광스럽게 자기 목을 바쳐야 한다면? 물론 진 편이 죽는다는 
학설도 있으나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사계에서 논의되고 있다.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볼게임은 바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우물과, 같은 논리적 구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어느 종족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종족은 신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어떤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제물을 갹출하는 방식이 바로 볼게임일 것이다. 
선수들은 종족의 명예를 걸고 싸운다. 그리고 그 종족 전체의 명예와 자기가 
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종족의 특권 때문에, 주장은 용맹스럽게 희생한다. 
희생하기 위해 경기를 하는 본인과 관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과연 췌췌기율의 
느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예수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자기가 예견한 드라마 
속에서 기쁘게 십자가를 맞이했건만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인간예수는 바위를 
부둥켜 안고 울부짖었다.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느님! 하느님! 나는 죽기 싫어요! 난 죽기 무서워요!』 

마야의 볼게임 승리자들은 모두 청년예수였을 것이다. 대의를 위하여, 종족의 
공동선을 위하여, 신의 영광을 위하여, 一身이 죽는다는 고통을 참는, 용맹스러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해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대속 방식은 
없는가? 다른 진리와 善과 美의 방식은 없는가? 

바로 그 거대한 구장을 나오면 옆에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나지막한 돌계단이 있다. 촘판틀리(Tzompantli)라는 유적인데 나는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쯧쯧쯧쯧, 그랬구나!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혼자 울고 싶어졌다. 이 계단은 60×12m의, 동쪽으로 계단이 나있는, 아주 평범한 
제단이다. 그런데 이 제단을 쌓은 축대들을 보는 순간 나는 경악했다. 그 한개 
한개의 돌이 모두 정확하게, 해부학적으로 거의 어김없이 정확하게 묘사된 사람의 
해골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촘판틀리란 곧 아즈텍말로 「해골의 성벽」(wall 
of skulls)이란 뜻이다. 즉 이곳이 바로 볼게임이나 기타 제식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시체가 바쳐지는 곳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옆의 사원에는 사람의 심장을 
파먹고 있는 독수리와 표범의 신들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자아! 
이쯤 되었으면 내 무얼 더 말하랴! 마야문명의 「피」의 주제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더 말할 나위없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 것은 피의 폭력이었다. 죽음과 삶의 
해탈을 빙자한 피의 난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역사에 신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야는 나에게 있어선 신비였다.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품어온 동경의 세계, 인류의 고립된 천국과도 같은, 뽀이얀 숲속의 
안개속에 가려진 희미한 유토피아, 그런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사에 신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인간 몸의 경락도, 
크메르의 앙코르와트도, 나스카의 지오글립스도, 그것은 결코 신비가 아니다. 오직 
신비로운 것은 여기 살아 있는 풀 한포기일 뿐인 것이다. 나의 기철학은 바로 이 
살아 있는 풀 한포기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이러한 신비를 풀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여기 나는 너무도 할 말이 많다. 마야의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 표범, 
우주나무(Cosmic Tree), 비와 번개, 악어, 거북 등등의 이미지 속에서 인류신화의 
공통된 구조를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야인들에게도 분명 천지 코스몰로지가 
있었다. 하늘이 있었고 땅이 있었고, 그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나무가 있었고, 
뱀이 있었고 표범이 있었고, 거북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람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天才와 地才만 있었고 人才가 없었던 
것이다. 天地만 있고 人이 빠져 있을 때 그 天地는 때때로 人의 유위적(有爲的) 
장난을 극도로 효율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허나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天地는 
人間化해야만 하는 것이다. 天地의 주체로서 人의 창진적(創進的) 변화(Creative 
Advance)를 상실했을 때 그 天地는 토인비의 말대로 단순히 회귀하는 天地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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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버려진 마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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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리 속에 떠오른 9세기 마야문명의 멸망 드라마는 이러하다. 마야문명의 
멸망은 9세기 초로부터 한 세기에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한 문명의 멸망을 
결정짓는 결정적 사태는 우리 삶을 결정짓는 결정적 사실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정적 사태란 고대사회에 있어선 역시 식량이다. 숲을 태워 경작하는 
마야인들의 경작 방식이 땅을 보완하는 어떤 순환적 지혜를 결여할 때 그것은 땅의 
생산성 저하를 필연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도시 주변으로 과도하게 밀집된 인구는 
그러한 생산성의 하락과 역비례해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생산 수단을 
강구하기 위하여 인구는 하나둘 점차 도시 중심으로부터 
디센트랄라이즈(분산화)되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정치가 중앙체계에는 不在했다. 정치란 
인간의 구체적 삶의 방식에 대한 대응체계다. 땅의 생산성 저하를 어떠한 기술적 
혁신이니 체계의 보완이니 중심의 이동이니 하는 방식으로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이 
종교적 미신과 신화적 세계에 빠져 있는 제사장-지배자들 계급에 결여되었을 것은 
뻔하고, 이러한 유연성(flexibility)의 결여는 오히려 광신적 종교행태의 강화만을 
초래했을 것이다. 인민은 점점 더 괴로움을 당하는데 그럴수록 볼게임만 하고, 
그럴수록 우물에 사람만 빠뜨리고, 그럴수록 자지에 피만 내고 앉아 있었을 그들을 
생각해보라! 

9세기 말에 이르러 드디어 한 도시중심이 포기되었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에게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봉쇄시킨다. 그러나 
봉쇄의 근거는 인간의 인식 방법의 차단일 뿐 하등의 물리적·사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질 않다. 

평창동 꼭대기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휴거는 리얼한 것이지만, 그들의 
리얼리티는 사실적 근거가 전무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 체계이며, 그들의 
인식방법에 있어서 휴거 이외의 인식 가능성이 차단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한 사실 앞에 무기력하다. 몇년 몇월 며칠, 휴거가 온다, 그런데 휴거가 오지 
않았다. 그 사실 앞에 그들은 떠나야 한다. 휴거를 믿게 했던 그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마야문명의 멸망은 이러한 단순한 지배계급의 오류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몰지각한 인신제사나 제식들은 열대라는 기후조건에서 쉽게 전염병을 유발시켰을 
수도 있다. 지배계급자 내의 멸망도 급속화했을 것이다. 도시가 하나둘 포기되기 
시작하자, 인민들의 생존을 위한 열망은 민족 대러시로 이어졌다.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은 이 방대한 도시센터들이 9세기 말 한 10년간에 급속히 
버려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야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버려진 것이다. 
사람들이 그냥 떠나버린 것이다. 더 이상 문명이라는 소꿉장난에 속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은 급속히 해변으로 이주했고, 웅장한 도시센터에서 외롭게 자기 
자지만을 흠집내고 앉아 있었을 제사장―왕―귀족들은 바로 촘판틀리의 해골로 
장식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나 도올이 보고 느낀 마야문명의 전부다. 내가 탄 비행기가 칸쿤 공항을 
이륙할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여전히 푸른 숲과 아름다운 비취색 해변이었을 뿐, 
마야의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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