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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일 화요일 오전 03시 11분 48초
제 목(Title): 이덕일/서남연합정권의 맹약파기,조선멸망�





 [5] 제목 : [역사산책] 西南연합정권의 盟約파기, 조선멸망 부추겼다

     이덕일 / 역사평론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중국  춘추시대  사람인 공자(BC 551∼479년)가 천하를 돌아다닌 
     이유는 자신을 등용해줄 제후를 찾기 위해서였다. 정치가인 공자
     가 펼치기를 바랐던 정치사상의 핵심은 「주(周)나라로 돌아가자
     」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나라 중심의 정치체제로 복원하자고 외
     치는 공자의 정치 이상은, 각 제후국이 천하 통일을 꿈꾸며 패권
     을  추구하는 상황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이었다. 공자는 여
     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등용해줄 제후를 찾았으나 결국 실
     패하고 말았다.
     자신의  정치 이상을 펼치고 싶었던 공자는 심지어 계씨(季氏)의 
     가신인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비읍(費邑)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
     권을   잡아   부르자   이에   응하려   했다.  그러자  제자인 
     자로(子路)가 만류했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두셔야지 하필 공산씨에게 가려고 하십
     니까?』
     『무릇  나를 부르는 사람이 어찌 헛되이 부르겠느냐. 만일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나라를 동쪽의 주(周)나라로 만들
     겠다』
     한때 비난받는 자 밑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가르쳤던 
     공자는 그 무도한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는 논리를 펼 
     만큼 정치를 하고 싶어했다.
     사실  공자가 원했던 것은 권력이나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정
     치  이상, 즉 도(道)를 펼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는 점에서 권력
     만을 좇는 부나비와는 차원이 달랐다. 환갑이 지나서까지 천하를 
     주유하며  정치사상을 펼칠 기회를 바랐으나 끝내 무산되자 공자
     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라고 한탄했다.
     이상주의자 공자의 정치적 실패는 오늘의 정치 현실에 중요한 시
     사점을 준다. 정치세계에서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과 실제 맞딱뜨
     린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다는 점이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무엇
     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지만 『중용(中庸)』이 
     말해주듯이 양자를 아우르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두 정치지도자가 맺은 「16대 총선 전 내각제 
     개헌」이란 약속과 「IMF 비상체제」라는 현실이 팽팽히 맞서 있
     는 형국이다. 우리 국민의 반응은 어떤가.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
     제를 선호하지만 내각제 개헌 약속도 지켜져야 한다는 상호 모순
     으로  나타난다. 이는 정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공자의 
     고민이  2500년 후인 현재의 우리 국민들에게도 비슷하게 투영되
     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우리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런 
     사례들을 짚어보는 것은 중대한 결단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 하나
     의  판단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갈등하던 정치인들의 깨진 약속과 지켜진 약속들이다. 

     깨진 약속들     
     
     1. 나제동맹 깬 신라 진흥왕
     서기  427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만주의 통구(通溝)에 
     있던  수도를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옮겼다. 이는 남쪽의 백제
     와  신라, 그리고 가야로서는 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대사
     건이었다. 
     과거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고 신라를 
     도운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와 고구려는 우호 관계에 있었다. 
     반면 백제와 신라는 개국 이래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장수
     왕의 천도 사건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주적(主敵)을 고구려로 
     바꾸게  했다.  주적이 고구려로 바뀜에 따라 두 나라는 구원(舊
     怨)을 잊고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당시  백제는  20대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재위 15년(469년)에 고구려 남부 지역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고구려에  서울을 빼앗기고 전사한 판국(475년)이었다. 개로왕이 
     전사한 후에도 백제의 비극은 계속됐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개로왕이   전사한   그해   10월   서울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熊津:공주)으로  도망했다. 그러나 재위 3년 만에 부하였던 
     병관좌평 해구(解仇)에게 살해당했다. 이어 그 아들 삼근왕이 즉
     위했으나  그  역시  재위  3년  만에  사망하고, 문주왕의 아우 
     곤지(昆支)의 아들인 동성왕(東城王)이 뒤를 잇는 등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이 계속되었다.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에 공동 대응하는 것만이 공생(共生)의 길
     이라고 판단한 동성왕은 재위 7년(485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
     호관계를  맺었고,  재위 15년에는 신라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이른바 신라와 백제의 혼인동맹, 즉 나제동맹(羅
     濟同盟)은 이렇게 맺어졌다.
     전통적인 적국이 동맹국이 된 것이니 정치 현실에 있어 「관계」
     는  이처럼 무상한 것이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힘을 합해 한 나
     라가 고구려의 침공을 받으면 즉시 군사를 보내 도와주었다.
     신라  소지왕(炤知王) 3년(481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자 백
     제와  가야는 연합군을 결성해 고구려군을 이하(泥河:강릉) 서쪽
     까지    추격해   1000여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   동성왕 
     17년(495년)에는   고구려군이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德智)가  이끄는 신라군이 구원해주었다. 과거의 신라 백제 
     관계를  보면 글자 그대로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 것(桑田碧
     海)」과 같은 경천동지할 일들이었다.
     진흥왕의 배신
     나제동맹   덕으로   안정을   되찾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성왕(聖王)은 재위 16년(538년)에 서울을 웅진에서 더 넓은 사비
     (泗  ,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꿔 한강 유역을 고구
     려로부터   되찾으려는  투지를  불태웠다.  백제  성왕은  재위 
     원년(523년), 26년(548년), 28년(550년)에 고구려를 공격해 승리
     를  거두는데 이중 재위 26년의 전투는 신라 진흥왕과 함께 펼친 
     공동작전이었다.
     성왕은 드디어 재위 29년(551년)에 진흥왕과 함께 북진을 단행해 
     약  80여년 만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드디
     어 백제는 과거의 위상을 되찾아 한반도의 맹주로 떠오를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왕은 한반도의 맹주가 되지 못했다. 고구려 때문이 아
     니라 신라 진흥왕의 배신 때문이었다. 진흥왕은 성왕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553년 7월 백제가 되찾은 남·북한성을 습격해 함
     락하고 그곳을 신라의 신주(新州)로 편입시켰다.
     백제  쪽에서  볼 때 이것은 60여년간 계속돼온 나제동맹을 깨는 
     배신행위였다. 분개한 성왕은 이듬해인 554년 7월 가야와 연합해 
     신라의  관산성(管山城:沃川)을 쳤으나 오히려 신라의 매복에 걸
     려 원통함을 풀지 못한 채 전사하고 말았다.
     이는  윤리적·정치도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라의 배신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처지에서 볼 때 한강 유역의 확보는 그간 겪어왔
     던  약소국의  설움을 한꺼번에 상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선택할 만한 승부수였다. 
     이후     신라    진흥왕은    승승장구했다.    경남    창녕의 
     「창녕순수비」(561년),  「북한산순수비」(568년경), 함남의 「
     황초령순수비」(568년)·「마운령순수비」(568년) 등 4대 순수비
     를 세운 데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의 맹주로 웅비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백제가 보기에는 나제동맹의 파기가 배신이었지만 신라로
     서는  변화된 정치상황에 따른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
     택이  최약소국 신라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
     가 되었던 것이다. 
     진흥왕의  약속파기는 윤리적·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일임에 분
     명하지만 국익이 모든 가치에 앞서는 외교 관계에서는 그런 비난
     이  그다지  큰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국가 사이의 외교관계는 
     개인들의 약속이란 도덕적 잣대를 넘어서는 평가 논리를 갖기 때
     문이다.  이 또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 상존하는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2. 부처와 하늘 앞에 한 맹세
     고려  31대  공민왕(재위:1351∼1374년)은 조선의 정조에 비견될 
     정도의  개혁군주였다. 당시 고려의 개혁과제는 원(元)나라의 속
     박에서 벗어나는 것과 특권층인 권문세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나라에  빼앗겼던 동북면과 서북면을 회복하려고 군사를 
     일으키는 한편, 원의 연호(年號)를 정지시키고, 제후국 수준으로 
     강등되었던 관제(官制)도 원에 굴복하기 전인 11대 문종(文宗:재
     위 1046∼1083년) 당시로 환원시켰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외사촌인 홍언박(洪彦博)을 정점으로 하는 
     외척세력과  자신의  재원(在元) 당시 따르던 공신들을 중심으로 
     권문세족  제거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 개혁주체 세력 자체가 
     권문세족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
     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해 개혁 주체로 떠오른 인물이 승려 신돈(辛
     旽)이다.  신돈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현 경남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의 여종이었는데, 신돈은 이 때문에 승려들 사이에서도 한 
     축에 끼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만 기거했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하루는 공민왕이 꿈을 꾸었는데 자객의 습격을 받고 있는 자신을 
     승려가  나타나  구해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중의 생김새가 
     김원명(金元命)이  소개한 신돈과 똑같았다. 개혁에 대한 신돈의 
     의지가  굳은 것을 확인한 공민왕은 그를 개혁 주체로 삼기로 마
     음먹고  출세간(出世間)을 권했다. 거절하던 신돈은 출사하기 전
     에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왕과 대신들이 참소와 이간을 잘 듣는다는데 그러지 않아야 세
     상에 복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공민왕은 친필로 서약서를 써 주며 말했다.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하늘이 증
     명해줄 것이다』
     신돈은  공민왕의 서약과 그에 대한 「부처님과 하늘」의 증명을 
     믿고  과감한 개혁정치를 펼쳐나갔다. 권문세족들을 축출하는 한
     편, 이들이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강제로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다시 양민으로 환원시켰다. 
     권문세족의  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성인(聖人)이 나왔다』
     고  환호할  정도로 신돈의 개혁정치는 커다란 효과를 거두었다. 
     신돈의  개혁정치 때문에 입지가 약화된 권문세족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신돈을 음해하였는데, 공민왕은 이런 음해에 맞서 
     신돈을 적극 옹호해 스승을 구하겠다는 서약을 지켰다. 
     그러나 공민왕 18년경부터 주위 상황이 달라졌다. 개혁정치의 부
     작용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데다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민심
     이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이에 힘입은 권문세족들은 신돈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였다. 그러자 신돈이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데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던 공민왕마저 이에 동조해 재위 19년 
     말부터  친정(親政)을  단행하면서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다음해 7월 그를 유배지에서 처형해버렸다. 「스승은 나
     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겠다」는 서약은 스승을 죽이는 것으
     로 파기되고 말았던 것이다. 
     서약을  파기하고 신돈을 제거한 것은 공민왕의 커다란 실책이었
     다.  이후 권문세족에게 포위당한 공민왕은 신돈을 처형한 지 꼭 
     3년  만인  재위 23년(1374년) 7월 자제위(子弟衛) 소속 홍륜(洪
     倫)과  결탁한 내시 최만생(崔萬生) 등에게 죽임을 당했다. 결국 
     공민왕의  약속 파기는 두 사람 모두와 고려 사회를 불행으로 몰
     아갔던 것이다.
     공민왕과 신돈의 서약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잘 반
     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 약속의 실현에 목숨을 걸 만한 역사적 가
     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민왕의 서약파기는 신돈과 공민왕
     의  개인적 불행으로 그치지 않고, 개혁에 실패한 고려가 조선이
     란 새로운 개혁세력에 주인 자리를 내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3. 서인과 남인의 연합정권
     조선의  정당들이  분당(分黨)되는 과정은 정치적 약속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사색정당(四色政黨)으로 대표되는 
     동인·서인·남인·북인, 또는 노론·소론·남인·북인의 뿌리는 
     모두 같은 조선 중기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후 형성된 집권층 훈구파와 싸
     울  때는  동지적  연대로  굳게  뭉쳐  있다가, 네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를  딛고 선조 때는 마침내 훈구파를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사림파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둘로 갈라졌다. 이것이 바
     로  선조 8년(1575년)의 동서 분당으로, 이 해가 을해(乙亥)년이
     라  하여 을해당론이라고도 한다. 비교적 젊은 신진 선비들이 모
     였던  동인(東人)은 선조 22년(1589년) 발생한 동인 정여립의 모
     반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다. 위관을 
     맡은  동인  유성룡이 같은 당 이발의 죽음을 수수방관했다는 데 
     불만을 품은 일부 동인들이 북인이 된 것이다. 
     임진왜란  와중에 정권을 잡는 것은 이들 북인이었다. 북인의 정
     신적 지주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당시의 당론을 공리공론으
     로 치부하고 지리산 밑으로 이거해 손수 밭 갈며 학문을 할 정도
     로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인지 실질을 숭상하는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 곽재우 
     같은 조식의 실천적 제자들이 의병운동을 주도하는데, 이런 선명
     성과  실천성 덕분에 선조 말년과 광해군 때 정권을 장악하게 된
     다. 
     광해군 시절은 사실상 이들 북인들이 독주하던 체제로 서인과 남
     인은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북인들은 전후 복구사업과 명(明)과 
     청(淸)  사이의 등거리 외교라는 실질적인 정책으로 전란 복구에 
     큰  성과를 거뒀으나, 영창대군을 사사(賜死)하고 인목대비를 폐
     위시키는 무리수를 두기도 하였다.
     인조반정과 西·南人 합작
     권력에서  소외된 서인과 남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폐모론
     의  부당함을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권좌에서 몰
     아낸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하고, 퇴계 이황의 
     제자들인  남인들이 지지했던 인조반정은 서남(西南) 연합정권을 
     탄생시켰다.  사실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반정 직후의 상황은 남인과 권력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불안한 상황이었다. 반정 일등공신 이서(李曙)의 회고는 
     이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
     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 성덕이 있는 줄 몰랐으므로 상하가 놀라
     서 어쩔 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전 왕
     조  때의 원로 이원익(李元翼)이 영상에 제수되어 여주에서 오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인조반정에  대한 반발이 상하에서 일자 할 수 없이 남인 이원익
     에게  영의정을  제수하는 연합정권을 구성해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 주도자인 김류(金  )가 『이조참판 이하는 
     (남인을) 쓸 수 있지만 그 이상 및 의정부에는 못 쓴다』라고 말
     한 것이나, 국혼물실(國婚勿失), 즉 왕비는 서인가에서만 내겠다
     는 서인 당론은 서남 연합정권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었
     다.  실제로 인조 즉위 초 윤의립(尹毅立)의 딸을 소현세자의 부
     인으로  간택하려다가  강제로 파혼한 이유도 윤의립이 남인이기 
     때문이었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이런 당론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반정을 주도한 세력이 서인이라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에 서
     남  연합정권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정 40여년 
     후인 현종 즉위년(1659년)에 발생한 제1차 예송논쟁과 10년 후의 
     제2차 예송논쟁은 연합정권의 기초인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를 무너뜨렸다.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복제(服制)  문제가 불거졌다. 이 문제를 다룬 제1차 예송논쟁에
     서 서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란  이유로 1년 복설을 주장한 반면, 남인 윤휴(尹?)와 허
     목(許穆)은 왕조국가에서 왕통(王統)의 계승은 장자와 차자의 구
     분을 뛰어넘는다는 논리로 3년 복설을 주장했다.
     이는 두 당이 지닌 세계관·정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초 논쟁은 학문적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로  유명한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1년설을 주장한 
     송시열을 역적이란 논리로 공격함으로써 예송논쟁은 정치 논쟁으
     로 비화되었다.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사직을 관장하는 임금(효종)에게 
     돌려보내고  적통(嫡統)은 이미 죽은 장자(소현세자)에게 돌려보
     내니  종통과  적통을 어찌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명령과  왕명을 받았어도 정통이라고 하지 못한다면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가짜 황제란 말입니까?』
     서인은 남인의 3년설을 학문적인 논쟁으로 알고 있다가 윤선도의 
     과격한 상소를 보고 비로소 이 논쟁이 자신들을 현왕(現王) 현종
     의  종통을  부인하는 역적으로 몰아감으로써 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력투쟁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1차 예송논쟁은 서인들의 1년 복
     설이  승리하면서  일단락되고 서남 연합정권도 형식상 유지되었
     다.  그러나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년)에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면서 다시 자의대비 복제 문제로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은 
     서남 연합정권을 붕괴시키고 만다.
     우당(友黨)에서 적당(敵黨)으로
     2차 예송논쟁 와중에 사망한 현종의 뒤를 이은 15세의 어린 소년 
     숙종은  8개월설[大功服]을 주장한 송시열 등 서인들을 치죄하고 
     1년설(朞年服)을  주장한 윤휴, 허목 등 남인들에게 정권을 넘겼
     다. 이때부터 두 당은 우당(友黨)에서 적당(敵黨)으로 변해 서로 
     권력을  장악할 때마다 상대당에게 보복을 가하는 살육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연합정권의 두 당사자가 적당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연대(連帶)의 정치가 증오(憎惡)의 정치로 바뀐 것을 의미
     한다.
     숙종  초년  송시열이  귀양가면서 권력을 상실했던 서인은 숙종 
     6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남인 영수 
     허적(許積)과 그 서자 허견(許堅), 그리고 남인 허새(許璽) 등을 
     역모로  몰아 사형하는 등 그간 당해왔던 설움을 같은 방식의 정
     치보복으로 풀었는데 이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이런 증오의 정치를 종식시킬 것을 주장한 인물이 숙종 당시에도 
     있었다. 송시열의 제자 윤증(尹拯)과 박세채(朴世采) 등이다. 윤
     증은  치열한 살육의 현장에서 정치보복을 중지하고 연대와 화해
     의  정치체제로  복귀할 것을 역설했던 인물이다. 숙종 9년(1682
     년)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오던 그는 중간에 과천에 머물면
     서  정국을 관찰하던 중 그를 마중 나온 박세채에게 출사하기 위
     한 세 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잇단 역옥(逆獄)으로 남인들이 원한을 가지
     고 있는데 이들의 원한을 풀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재 집권당(서인)은 자기 당 사람만 등용하고 반대 당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데 이를 시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 그
     리고 다른 하나는 외척(外戚) 배제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결국 정권을 장악한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송시열 등 서인 강경파는 그
     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결국 남인을 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은 남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온
     건책을 주장하는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진다.
     이 당시 윤증의 주장대로 서남 연합정권의 틀을 복원했으면 남인
     은  물론 서인을 위해서도 좋았을 것이다. 화해를 거부하고 강경
     책을 펴던 서인들은 숙종 15년(1689년) 남인 장희빈이 임금의 총
     애를 받으며 남인이 정권을 잡자 또다시 극심한 정치보복을 당해 
     83세의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賜死) 당하는 등 커다란 비운을 
     겪게 된다.
     서남  연합정권의 붕괴, 즉 공존의 틀을 붕괴하는 것은 상대방뿐
     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그 화살이 되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것임
     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리고 그 붕괴는 결국 두 당이 속한 조
     선의 멸망으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제목 : [역사산책] 西南연합정권의 盟約파기, 조선멸망 부추겼다 2

     지켜진 약속들
     
     1. 문종의 유명(遺命)
     『축수록(逐睡錄)』에는 이런 내용이 전한다. 
     『병이  난 문종은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을 불러 촛불을 켜고 이
     야기하다가  밤중이  되자 무릎 아래 단종을 앉혀놓고 손으로 그 
     등을 만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아이를 그대들에게 부탁한다」 문종이 어탑(御榻:의
     자)에서 내려와 먼저 술잔을 권하니,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
     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잤다. 문종은 내시에게 명해 문 위에 가로 
     댄 나무를 걷어 들 것을 만들어 차례로 메고 나가 입직청(入直廳
     :숙직하는 사람들이 자던 곳)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그날 밤 큰 
     눈이  왔는데 이튿날 아침 신하들이 깨어보니 향기가 방 안에 가
     득하고,  자신들의 몸에 담비(貂皮) 갖옷이 덮여 있었다. 임금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다. 서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특별한 은
     혜에  보답하기를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신숙주의 거취는 
     저 모양이 되고 말았다』
     문종은 병이 나자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불러 『단
     종을  잘  보살피라』는 고명(顧命)을 내렸는데, 이 고명은 군주 
     문종과 의정부 대신들 사이의 약속이었다. 훗날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측에서는 이때 문종이 수양을 불렀는데 내시
     가 숙의로 잘못 알아듣고 수양을 부르지 않았다고 변명할 정도로 
     문종의  고명은 중요한 약속이었다. 당시 그 고명을 받은 사람은 
     수양이 아니라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이었다.
     단종  즉위 당시 김종서는 70세였으며, 황보인도 그와 비슷한 나
     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과 문종 사이의 약속은 열두 살에 
     즉위한  단종의  왕위를 성년이 될 때까지 지켜달라는 것이었고, 
     문종이 단종을 무릎에 앉히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한 부탁도 마찬
     가지였다. 그리고 이는 단종 개인에 대한 부탁이 아니라 국왕 → 
     세자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헌정질서를 지켜달라는 공적인 차원의 
     당부였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선왕과 한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으려는  수양대군에 맞서다 죽임을 당했고,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 학사들도 문종과의 정치적 약속을 지켜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려다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현실 정치 속에서는 패배해 본인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가
     족  중 남자는 모두 목이 잘리고 여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여
     종으로 노리개가 되는 치욕을 당했다. 역사가 이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들이 세종·문종 재위 기간에 이룩된 정상적인 
     헌정질서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국 초 
     태조∼태종 연간의 수많은 정변 끝에 세종∼문종 대에 겨우 자리
     를  잡기 시작한 정상적인 헌정질서 수호라는 시대정신과 부합되
     는 것이었다.
     2. 인조의 헛된 의리
     그러나  헛된  의리감 때문에 역사를 퇴보시킨 경우도 존재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은 이른바 「숭명의리(崇明義理)」를 
     내세웠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외교정책에 반발한 서인들은 정권
     을  잡은 후 숭명의리를 내세워 청과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들의 
     논리는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즉위시킨 교지에
     서 잘 드러난다.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지 200여 년으로 의리로는 군
     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구원
     병을 파견한 것)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겨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인조정권이 청과 관계를 끊고 명과 사대관계를 유지하려는 것 자
     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는 
     해」인 명과 관계를 유지하고 「뜨는 해」인 청과 관계를 끊으려
     면 그런 정책을 유지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  힘을 지니지 못한 채 비현실적인 외교관계를 고집한 결과, 
     인조  5년(1627년) 금(훗날의 청)나라의 침입을 받고 저항 한 번 
     변변히  못한  채 두 달 만에 무릎을 꿇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었다.
     인조 정권은 이런 굴욕을 겪은 후 최소한 민생을 위해 금과 친선
     관계는 아니더라도 적대관계로 가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인
     조 정권은 무릎을 꿇은 후에도 현실을 무시하고 계속 친명정책을 
     펼치다가 재차 병자호란을 당한다. 
     당시 만주에 있던 청으로서는 중원을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조선
     을 굴복시키든지 우호관계로 만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중원에 쳐들어갔는데 뒤에서 명과 결탁한 조선이 
     역습을  가하면 곤란한 상황에 빠지리라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
     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는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재위 14년(1636·병자년) 
     3월 「명을 향한 의리(向明大義)」를 위해 후금과 관계를 끊는다
     고 선언하는 선전 교서를 8도에 내렸다. 청 태종은 그해 12월 여
     진족과  몽골족으로 이루어진 12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
     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청군이 산
     성을 포위한 채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때, 인조는 혹시 명나
     라가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을까 기대했겠지만 이미 명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급급한 형편이었다.
     강화도가 점령당했다는 비보에 접한 인조는 한달 만인 다음해 정
     월  30일  소현세자와 함께 신하임을 나타내는 남융복(藍戎服)을 
     입고 지금의 송파인 삼전도에서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
     를  조아리는  삼궤구복의 황제 알현 예(禮)를 행할 수밖에 없었
     다.
     인조가  당한 수치도 수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년이 채 안 
     되어 거듭 발생한 전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또다시 도탄에 빠지고 
     전국토는  황폐해졌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소수 정치지도자들의 뒤틀린 명분과 
     의리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당사자는 힘없는 백성들
     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허황된 숭명의리, 향명대의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3. 도산 안창호의 작은 약속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1932년 4월 이만영이란 교포학생에
     게  주기로 약속한 소년단 후원금 2원을 전달하러 상해의 프랑스 
     조계내  하비로(霞飛路)에  나섰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그때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虹九)공원에서 거사한 직후여서 광분한 
     일제가 눈에 불을 켜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던 때였다. 도산은 
     이렇게 해서 1910년 망명의 길을 떠난 지 22년 만에 국내로 압송
     됐다. 
     일제가  눈을 부라리는 상황에도 한 소년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
     해  약속장소로 간 것은 『거짓말하지 말아라. 꿈 속에서라도 거
     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을 실천하기 위
     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이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은 결국 
     조국광복이란 더 큰 약속의 전선에서 그를 강제로 퇴출시키는 부
     작용을 낳았고, 그는 결국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조국 광복을 보
     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도산이 살아 있었으면 광복 후 우익 정계가 
     우남 이승만의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우리의 굴절됐
     던 민주주의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그런  점에서 도산의 죽음은 이상과 현실, 약속과 상황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오늘의 정치현실에 어떤 것이 최선의 길인지를 돌
     아보게 하는 시사점을 준다고 할 것이다.
     현실과 약속
     정치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현실의 논리가 시대정신과 
     부합할  때만  정당성을 가진다. 공민왕과 신돈의 약속과 문종과 
     김종서·사육신의  약속처럼 당시의 시대정신과 부합되는 약속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인조정권의 「숭명의리」처럼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으며, 
     백성들을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뜨릴 우려가 있는 약속은 일찍 
     깨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16대  총선  전 내각제 개헌이란 두 당의 약속은 IMF라는 새로운 
     정치현실  속에서도 무조건 지켜져야 할 만큼 소중한 것일까, 아
     니면  인조정권의  숭명의리같이 덧없는 것일까? 그 어떤 경우든 
     조선조 서인과 남인 연합정권의 붕괴가 가져온 비극적 결말은 결
     단을  눈앞에 둔 두 정치지도자와 두 당 관계자들이 타산지석(他
     山之石)으로  삼을 만한 사례일 것이다. 약간의 고통이 따르더라
     도 공존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했음을 역사는 전하고 있다.
     공자가  두 제자 안연(顔淵), 자로와 나눈 대화는 오늘의 우리에
     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다.
     『등용이  되면 나가서 도를 행하고, 버려지면 물러나 학문을 하
     는  것(用之則行 舍之則臟)은 오직 너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다』
     이  말을 들은 자로(子路)가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게 되신
     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
     한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으려고 덤비고, 맨발로 깊은 강을 건너려
     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그런 무모한 인간과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일에  임해서는 두려워 하고 충분히 논의하기를 좋아해 
     일을 완성시키는 사람과 함께할 것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무모함 보다는 합리성을 추구하
     는 정치적 지혜가 아쉬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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