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18일 목요일 오후 02시 18분 33초 제 목(Title): 진중권/ 박정희와 악마주의 이번호 차례 | 과월호/DB 검색 | 홈페이지 ------------------------------------------------------------------------------- - 계간 문학동네 1997년 겨울/제4권 제4호/통권13호/특집-90년대 소설의 문제성 박정희와 악마주의 ―혹은 ‘숭고한 희극’의 미학적 가능성에 관한 고찰 진중권 “한국인들에게는 마법적인 지도자가 필요해.” “북한, 아니면 남한?” “둘 다.” 삼 년 전 버스에 탔다가 엿들은 두 독일 학생의 대화다. 마침 신문에서 북한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있던 참이었다. 이 싸가지 없는 두 녀석은 지금 북한은 물론, 남한까지 싸잡아 ‘욕’을 한 거다. 정상적 언어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욕’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이인화는 다르다. 그에게는 이게 ‘욕’이 아니다. 그는 이 녀석들의 대화를 자기 세계관의 확증으로 이해할 게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건 이인화가 정상인의 언어능력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서론은 이만하면 됐다. 1. 문제제기 이인화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이렇게 요약한다. “험악하고 심정적이다.”1) 그리고 이 험악하고 심정적인 견해는 “바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모든 전제와 추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위인의 영웅적인 천분을 부정하는 모든 소인배들”의 견해라는 것이다. 이 전지적 작가 시점. 한편 진형준은 이인화의 소설을 평하면서 “유신세대의 한 명으로서 청년기에 받았던 정신적 상처의 억압으로부터 내가 조금도 자유로워지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고백”한다. 여기서 (그들의) 독재는, 심리요법으로 치료해야 할 (우리의) 피해망상증이 된다. 이렇게 진형준이 독재라는 사회현상을 심리적 트라우마로 환원시키면, 이 공을 받아 이인화는 박정희 비판이 심리적 성격의 것, 즉 “험악하고 심정적인 것”이라는 골대에 집어넣는다. 이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 유신시대를 겪은 한 사람으로부터 자백(“고백”)을 받은 후, 유신을 겪지 않은 이인화는 “박정희의 시대를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거리를 가진 세대로서 보다 객관적인 진리에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여기서 체험은 사태의 객관적 이해를 막는 인식론적 장애물이 되고, “거리를 가진 세대”인 이인화는 “보다 객관적 진리에 다가”갈 존재론적 보장을 갖게 된다. 이 심오한 인식론. 역(逆)경험론? 이 심오한 인식론으로 도달한 “보다 객관적인 진리”란 게 이런 거다 :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가 갖는 억압적 본질에 대해 어떤 위선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까놓고 하는 강도짓은 강도짓이 아니란 얘긴지? 그나마 뻔뻔한 거짓말이다. 박정희는 자기의 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고, 그걸 ‘독재’라 부르면 잡아 가두었다. 아무리 민주주의의 형태가 다양해도 대체적 기준은 있는 법이다. 텔레비전을 샀는데 화면이 없고 소리만 난다면, 그건 텔레비전이 아니라 라디오라 불러야 한다. “박정희 시대를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거리”, 이 거리 때문에 이인화는 박정희가 ‘위선적인 거짓말’을 해도 장충체육관에 오천 명을 모아놓고 집단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인화 특유의 영웅주의사관은 제3공화국에 대한 평가를, “영웅의 천분”을 알아보는 신비한 인식기관을 가진 군자와 그걸 갖지 못한 “소인배” 간의 유교적(?) 대립으로 바꾸어버린다. 여기에 전범 출신의 어느 일본인을 모범으로 삼은 정진홍의 인물타령이 한몫 거들고(‘사람이 고픈 것이다’), 이 쪼르륵거리는 소리의 반주에 맞추어 진형준은 “아기장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민중의 염원을 들먹인다. 난리가 났다. 영웅이여, 오라. 민중이 기다리노라. 그대의 천분을 알아줄 사람들도 이미 있노라. 정말 한국인에게는 ‘마술적 지도자’가 필요한가 보다. 이 엄청난 시대착오. 2. 영웅시대 역사가 영웅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다. 그때에는 서사시가 역사학을 대신했다. 이어서 중세에는 신의 의지가 역사를 이끌었다. 이때는 성경이 역사를 대신했다. 근대인들은 이런 미신을 믿지 않았다. 이때 역사에서 법칙을 찾는 합리적 연구가 시작된다. 하지만 합리적인 건 원래 재미가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의 산문성에 하품이 났던 낭만주의자들은 역사를 다시 시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역사법칙’이 서사시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영웅이 부활해야 했다. 이인화와 정진홍이 좋아하는 칼라일에 따르면, “세계는 신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데 신의 의지를 대행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자가 영웅”이라고 한다. 고대 영웅사관과 중세 기독교사관의 짬뽕이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위인전이 된다. 이 ‘반동적 낭만주의’. 위대한 영웅시대 히틀러와 스탈린 독재를 경험한 오늘날, 제정신 갖고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상』 편집부도 이를 안다. 편집부는 칼라일의 『역사상의 영웅과 영웅 숭배 및 영웅 정신』이 이미 “당대는 물론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고 말한다. 주의하라. 여기서 칼라일이 받은 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비난’은 뭔가 부당하다는 인상을 준다. 편집부는 말한다. 그의 『역사상의 영웅과 영웅 숭배 및 영웅 정신』에는 “칼라일의 눈치보지 않는 역사관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칼라일은 부당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지켰다는 거다. 여기서 옳고 그름의 인식론적 문제는 소신을 지키는 지사적 도덕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했다는 사실에서 그가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 아니다. 이 ‘범주오류’. 오늘날 영웅사관이라는 것은 더이상 학계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역사기술 모델이 아니다. 이건 상식이다. 이때 『상상』 편집부는 고전의 권위에 호소한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백5십 년 이상이 지난 현재까지 (……)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로 분류되는 ‘힘’을 과시하고 있다.” ‘힘’에 붙인 따옴표는 이 권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국가론』이 2천 년 이상 읽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그게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 아니다. 이 얄팍한 ‘권위에 의한 논증의 오류’, 또 “1백5십 년”이라는 표현. ‘150년’보다 왠지 더 유구하다는 느낌을 준다. 칼라일의 영향사(影響史)를 ‘인상’주의적으로 늘리려는 편법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칼라일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사학자들 중 제 편이 오죽 없었으면, 장장 “1백5십 년”을 거슬러올라가야 했을까? 이 처절한 닮은 발가락 찾기. 3. 박정희와 근대 이게 이인화의 세계관이다. 이 황당한 논리를 가지고 그는 이제 한국 근대사를 설명한다 : 박정희는 한국에 근대를 도입한 “영웅”이다. 이 영웅을 만들어낸 것은 “시대”다. 물론 이 의인법의 배후엔 사람이, 즉 영웅을 만든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 “영남 남인” “영남 남인의 지역적 기반”이 영웅을 만들고, 이 영웅이 한국의 근대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한국 근대사는 영남 남인 종친회사(?)가 되고, 한국정치의 고질병은 숭고한 영웅서사시로 변용(變容)된다. 압권이다. 영남 남인 양반님네들 다음에 영웅을 또하나 만들거든 그땐 향우회장을 시킬 일이다. 내가 다른 지역 출신이라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역에도 월매나 헐 일이 많은디……. 어쨌든 박정희는 “우리 사회의 봉건적 잔재를 완전히 격퇴”시키고 한국에 근대를 도입했다고 한다. 과장이다. 최초로 근대를 도입한 것은 갑오개혁이고, 국사학에서도 이를 기점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또 한국에 자본주의를 도입한 건 일본이다. 일본의 극우파들이 이걸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철학사전에 안 나오는 “박정희 철학”도 일본 ‘메이지 유신’을 베낀 거다. 즉 그의 “천분”이 실은 후천적 획득형질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인화의 애국심은 진보의 역할을 일본에게 빼앗기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한국은 구한말과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를 통과하면서도 그 봉건적 잔재를 거의 청산하지 못했다. (……) 경제적인 잉여의 지주적 기원은 봉건사회가 산출한 전통적 문화적 가치를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경제적 잉여의 지주적 기원”을 없앤 게(토지개혁이) 박정희의 작품이었던가? 이런 왜곡과 과장을 통해 박정희를 근대성의 ‘유일한’ 담지자로 만들어놓으면, 그는 이제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가 나폴레옹이 된다.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오직 잠깐의 음주밖에 몰랐던 그 융통성 없는 위인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 가까이 마련한 안가에서 때로 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의 헌신을 그토록 전인격적으로 평가절하해야 할 이유의 전부란 말인가? 어떤 저능아가 이런 이유로 나폴레옹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저능아가 이런 논리로 박정희를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박정희는 나폴레옹이 아니다. 박정희가 나폴레옹이라면, 이디 아민은 알렉산더다. 둘째로, 나폴레옹이 안가를 차려놓고 여자 불러다 술먹었다는 얘긴 들은 적 없다. “우리 사회의 봉건적 잔재를 완전히 청산한” “위인”이 즐긴 이 ‘봉건적’ 기생문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던 그 “융통성 없는 위인”이 국민이 밀가루 막걸리 마시며 힘들게 벌어들인 외화로 ‘때로’ 양주를 사 마시는 “융통성”은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금욕과 절약을 규율”했다던 그 “위인”이 말이다. 셋째로, 나폴레옹은 왜 비난하면 안 되는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순간 베토벤은 〈영웅〉의 원고를 찢어버렸다. ‘저능아’였을까? 나폴레옹을 지지한 고야도 그의 만행은 가차없이 고발했다. ‘저능아’? 4. 영웅의 윤리학 설사 박정희가 “위인”이라 믿어도, 그가 저지른 범죄만은 비판할 수 없을까? 그럴 수 없다. 이인화는 베토벤 같은 ‘저능아’가 아니므로. 영웅은 비난할 수 없다. 영웅은 선악의 피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인화의 영웅윤리학이 시작된다. “수단과 목적이란 (……) 하나는 정당화되고 다른 하나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 거짓말이다. 가령 내가 친구를 돕기 위해 은행을 턴다면, 이때 하나(목적)는 정당화되나 다른 하나(수단)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렇게 양자는 분명하게 분리될 수 있다. 이건 상식이다. 이인화는 해괴한 논증으로 이 상식을 뒤엎는다. “우리는 ‘집’이라는 수단을 통해 ‘거주’라는 목적을 실현한다. 인간행위의 목적은 인간의 충동이 야기하는 인과적 필연성 때문에 원인〔作用因〕이자 동시에 결과〔目的因〕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2) 횡설수설이다. 거주(목적)를 실현케 하는 집(수단)은 정당하다? 원래 ‘집’이라는 단어엔 ‘정당하다’라는 술어를 붙이지 않는 게 일상언어의 문법이다. (여기서 그는 ‘집은 합목적적이다’라고 했어야 한다.) 일을 해서 집을 샀건, 사기를 쳐서 집을 빼앗았건, 모두 거주라는 목적을 실현시킨다. 그렇다고 둘 다 정당한 건 아니다. 그가 이 상식을 무시하는 건 얼렁뚱땅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날아가고픈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 때문이 다 : 그러므로 “박정희의 ‘잘살아보세’ 철학이 설정한 목적이 일정하게 실현되었다면, 우리는 그가 선택한 수단에도 상당한 합·목·적·성·이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는 ‘수단에도 정·당·성·이 있었다’고 했어야 한다.) 이걸 ‘논증’이라고 하고 있다. 거주라는 목적이 일정하게 실현되었다면, 내가 선택한 모든 수단, 가령 사기에도 상당한 정당성이 있었다? 여기서 이인화는 ‘정당성’과 ‘합목적성’을 혼동한다. 의도적일까? 피임을 가능케 하는 콘돔은 합목적적이다. 그런데 콘돔의 반투과성이 어떻게 독재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걸까? 이인화는 말한다. “우리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때로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과 실제로 악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태에 대해 개인주의적 윤리는 어떤 해답도 주지 못한다.” 이 자신감.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개인주의적 윤리”를 가진 내가 그 “해답”을 주겠다. ‘그러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조국과 의학의 발전을 위해) “때로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수단”(생체실험)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치 의사들의 멘탤리티를 본다. 가령 스피노자를 왜곡 인용했을 때, 이인화는 자기가 생각하는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모르지만, 독자에게 그 결과로 발생하는 “악을 감수”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그러면 안 된다. 5.법치국가의 포기 이인화에 따르면 “최초에 대의를 위한 동기가 있었고 그것의 실질적인 결과가 대의에 합당했다면 그 범죄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대의인지를 ‘누가’ 정의하고, 또 그 실질적 결과가 대의에 합당했는지 ‘누가’ 판단하는가? 민주적 토론이 없는 상황에선 당연히 독재자와 그 일당이 유일한 판단주체가 된다. 저지르는 주체도 그들이고, 판단도 그들이 하고, 정당화도 그들이 한다.3) 가령 이렇게 : “그 범죄가 설사 헌법을 파괴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도의 인간적인 도덕성의 표출일 수가 있다.” 최고의 범죄도 이렇게 간단하게 정당화되는데, 납치나 고문, 인권탄압 같은 시시한 범죄는 닐러 무삼하리요. 압권은 이 끔찍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논증이다 : “인간을 위해 법을 만든 것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태적이다. “인간을 위해 법을 만든 것”이라면 마땅히 “인간을 위해” 그 법을 지켜야지, 왜 깨는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 “만든” “법”을 깬다? 이걸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헌법을 무시함으로써 “고도의 인간적 도덕성”을 표출했던 그 자들이 정작 국민들에게는 ‘악법도 법이니까 지키라’며 집시법 위반 정도의 저도(低度)의 인간적 도덕성의 표출도 금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적 도덕성을 마구 표출해도 되는 고귀한 족속이 따로 있다는 얘길까? 이인화가 좋아하는 ‘엘리트’? 이인화는 “선과 악, 범죄와 위업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을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라고 자처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의견이 다르면 서로 토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보고 “토론”을 하잰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없다”는 그 권리를 이상하게도 박정희는 갖고 있었다.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의 개발독재가 행사되었다.” 일상언어의 문법은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독재”를 “행사”하는 걸 “토론”이라 부르는 걸 금한다. 이인화는 박정희 비판을 가리켜 “토론 자체를 거부하는 반(反)지성적인 파시스트의 논리”라 부른다. 그 “반지성적인 파시스트 논리”를 박정희가 휘둘렀다. 그런데 박정희는 선악과 헌법을 초월한 “영웅”이다. 왜? “절대정신” 앞에서는 “악조차도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란다. 그 “앞에서는 악조차도 의미를 상실하는 존재”로는 철학사에서 딱 두 가지가 알려져 있다 :금수(禽獸) 아니면 신(神). 박정희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는 (……) 국가의 절대정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앞에서는(……) 그 비열함과 천박함, 간악함과 기만을 비판하는 어떤 개인주의적 윤리도 무시된다.” “어떤 개인주의적 윤리도” 무시로 “무시”하는 이 전체주의 윤리의 무시무시함. 이 정도면 가히 헤겔 극우파다. 앞에서 나는 독재국가에서 유일한 판단주체는 독재자와 그 일당들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끔찍한 폐쇄회로의 철학적 정당화를 발견한다. 왜 독재자는 혼자서만 판단할 권리를 갖는 걸까? 왜냐하면 그는 “유일한 진리의 수호자”이자 모든 진리를 한 몸에 구현한 “절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한 몸에 담지한 절대적 진리들 속에는 ‘내가 절대정신’이라는 판단도 아주 중요한 일부로 속한다. 또 국가주의를 위한 변명 : “허정훈의 국가주의는 역사적 필연과 결합하면서 나타났고 역사적 필연에 의해 타도된 것이다.” 독재를 역사적 필연으로 만듦으로써 도덕적 당위의 문제를 피해가겠다는 속셈이다. 히틀러의 국가주의도 역사적 필연과 결합하면서 나타났고 역사적 필연에 의해 타도되었다. 그런데 왜 그의 “비열함과 천박함, 간악함과 기만을 비판하”면 안 되는 걸까? 그리고 왜 개인주의는 무시되어야 할까? 하긴 정당화가 안 돼도 상관없다. 이인화는 아직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으니까. “그것은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영웅적 확신의 문제이며 의지의 문제이다.” 이렇게 “가치판단의 문제”를 “영웅적인 확신의 문제” 혹은 “의지의 문제”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파시스트 윤리학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이렇게 옳고 그름의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영웅적”으로 “확신”부터 하는 것을, 일상언어에서는 ‘광신’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광신자들이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우슈비츠가 증언한다. 여기서 이인화는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필연’의 개념을 곧바로 자연과학적 ‘필연’과 등치한다. 이 무지막지한 ‘환원주의’. 만약 인간의 행동이 정말 낙하법칙과 같은 자연과학적 필연성에 지배된다면, 도덕이나 윤리나 정당화 같은 건 필요없을 게다. 그런데 왜 이인화는 굳이 스피노자를 왜곡해가면서까지 박정희를 ‘정당화’하는 수고를 하는 걸까? 6. 이인화의 텍스트 읽기 이인화는 이런 몰상식을 뒷받침하려고 애꿎은 철학자들을 괴롭힌다.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박정희=절대정신’이라는 등식으로,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 3부작』을 국가주의의 정당화의 근거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박정희 서사시에 써먹을 오디세우스 신화로 요약한다. 여기서 텍스트를 읽는 그의 수준이 드러난다. 놀랍지만 이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젊은 교수”님께서 자기 세계관을 구성한 방식이다. 이쯤 되면 지능 아니면 양심의 문제다. 그나마 맥락이 좀 닿게 인용한 게 있다면 헤겔의 『법철학』 정도인데, 거기서도 그가 고르고 고른 옥석 같은 구절이 이런 거다 : “공민의 최고 형태로서” “국가이성의 정점에 서서 보편자를 위한 범죄(전쟁)를 수행하는 보편적 신분(군인).” 이 인용구가 실은 철학자들이 헤겔을 욕할 때, 즉 그의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경향을 비판할 때 써먹는 구절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군국주의가 ‘욕’이 아니라는 건지. 스피노자에게서 그는 인민을 국가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만들려 했던 민주주의적 자연법 사상을 배웠어야 한다. 마르크스에게서는 ‘국가의 대의’라는 구호가 실은 특정집단(가령 “영남 남인” “군부 엘리트” 등)의 특수이익을 보편이익으로 가장한 이데올로기라는 유물론적 관점을 배웠어야 한다. 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서는 박정희 추종자처럼 “물질적 발전”을 곧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능성의 발전”으로 통치하는 반성 없는 계몽이 결국 파시즘을 낳는다는 경고를 배웠어야 한다. 그리고 헤겔에게서는 ‘영웅’도 역사발전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이성의 간지’를, 그리고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었다면 ‘절대정신’이라는 게 실은 이름없이 묵묵히 제 일만 하는 수많은 민중의 힘이 합해져 만들어내는 역사적 원동력의 신학적 표현임을 읽어냈어야 한다. 이게 정상이다. 그리고 이게 인문학의 상식이다. 이 상식이 없는 이인화. “항공모함으로 돌진하는 카미까제 같은 심정”으로 용감하게 십자포화망 속으로 돌진한다. 불타는 눈초리로 민방위모자를 굳게 눌러쓰고. 카미까제 이인화는 사방에서 논리적 십자포화를 받아 만신창이가 되어도 끝까지 제 비행기를 버리지 않을 게다. 나는 그걸 안다. 그는 끝까지 “눈치보지 않고” “솔직하게” 우길 것이다.(‘우둔하다’는 인식론적 단점을 ‘소신있다’는 윤리학적 장점으로 전환시키는 이 변태적 멘탤리티를 포착하는 데에 ‘장세동 철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을, 이 자리를 빌려 한국철학계에 건의하는 바다.) 카미까제에게 중요한 건 전사의 장렬함이라는 죽음의 미학뿐이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왜, 무엇을 위해 죽는지’ 묻기 전에 먼저 죽을 준비부터 한다. 옳은지 그른지 따지기 전에 ‘소신’부터 지키는 이인화와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그래서 그는 “카미까제”의 “심정”에 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거다. 그나마 카미까제 조종사들은 최소한 적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인화의 인문학적 소양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수준도 못 된다. 그는 좌파의 도서목록으로 무장한 채 거꾸로 제 우군의 “항공모함으로 돌진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7. 지도자 숭배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심지어 아도르노까지 써먹는 이인화가 정작 우익의 바이블을 인용하지 않는 건 왜일까? 모르는 걸까?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을 비판하며 지도자 숭배를 정초했던 칼 슈미트. 전체주의를 이론화했던 이 유명한 파시스트 이데올로그. 만약 이인화가 그를 읽었더라면 이렇게 억지를 부려가며 애꿎은 철학자들을 괴롭힐 필요는 없었을 게다. 게다가 이인화는 따옴표 붙은 ‘힘’을 좋아하지 않는가. 칼 슈미트의 저서도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철학이나 정치학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로 분류되는 ‘힘’을 과시하고 있”다. 한 번 꼭 읽어보시고, 기회가 있으면 칼라일의 책처럼 『상상』에 한 번 소개하기를. 독일 파시스트들의 저서에는 이인화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고스란히 다 들어 있다. 지도자에게 무시로 헌정을 파괴할 권리를 주는 것,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우기는 것, 국가적 목적 앞에 개인주의를 무시하는 것, 그리고 특히 지도자 숭배(F웘rerkult)…….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참으로 꿰뚫어보는 예지, 만난을 무릅쓰고 시대를 그것으로 인도할 용기를 지닌 지도자……”. 이게 인문학의 언어일까? 한마디로, 위대하시며 영명하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불러도 불러도 그 이름 길이 빛나실 분이라는 거다.4) “그의 영웅적 천분을 알아보고, 깊고 크고 참된 성실성으로 기꺼이 자신의 삶을 희생한 국민들은 상상을 초월한 경제적 발전을 하게 된다.” 천분 인식의 법칙. 내년 노벨경제학상은 따논 당상이다. 세계의 경제학자들은 왜 이 해법을 모르는 걸까? 하긴, 지도자를 알아보았던 독일 국민들을 보라. 단번에 인프라를 구축하고 실업자를 없애고 마이카 시대를 열지 않았던가. “이러한 경제의 발전은 단순한 물질적 부의 증대가 아니라 인간적인 힘의 발전이며,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가능성의 발전이다.” ‘철학적 인간학’?! 꼴에 갖출 건 다 갖추었다. 바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자들은 줄지어 파시스트가 되었던 거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흘러넘치는 그 “인간적인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전쟁을 일으켜야 했던 거다. 이인화는 아마 이 “인간적인 힘”이 동아시아로, 세계로 마구마구 뻗어나가는 게 보고 싶을 거다. 그치?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이 “인간적 힘”이 차고 넘쳐 근질거리는 사람들이 있다.5) 이인화는 ‘반지성적인 파시스트 논리’가 나쁘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가 구사하는 그 끔찍한 논리가 실은 ‘반지성적 파시스트 논리’라는 건 모른다.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자를 못 만난 모양이다. 그건 꼭 남이 말해주어야 하는가? 당신은 파시스트다. 8. 고독과 우수의 마키아벨리즘 “고독과 우수의 마키아벨리즘”. 이인화는 마키아벨리의 위대성이 ‘군주는 제멋대로 법을 무시해도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 믿는 모양이다. 여기서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또 한 번 드러난다. 『군주론』이 고전이 된 것은, 바로 이 책에서 정치학이 비로소 도덕론의 수준을 넘어 근대적 과학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을 열거하는 대신 정치라는 현상의 실제과정을 냉정한 눈으로 기술했고, 바로 이 근대적 과학정신에 그의 위대함이 있었던 거다. 생각해보라. ‘군주는 법을 마구 무시할 권리가 있다’는 반가운 내용의 책을, 왜 당시의 군주들은 정작 금서로 묶어놓았던 걸까? 창피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그들이 실제로 저지르고 있었던 온갖 못된 짓거리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으니까. 따라서 이인화가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읽었다면, 거기서 그는 입으로 ‘군주의 덕’을 떠들던 당시의 군주들이 ‘실제로’ 저지른 추악함을 냉정하게 묘사한 사실주의 정신을 배웠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신으로 위대한 영웅시대 3공화국 시절에 ‘실제로’ 저질러진 추악상을 가차없이 폭로했어야 한다. 하지만 카미까제에게 이런 분별력이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정치학을 군주의 덕을 나열하는 수준에서 과학으로 끌어올린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이인화는 거꾸로 과학이 된 정치학을 다시 “지도자의 천분”에 관한 중세적 자질론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참으로 꿰뚫어보는 예지, 만난을 무릅쓰고 시대를 그것으로 인도할 용기…….” 그러면서도 『군주론』을 읽었던 수백 년 전의 군주들과 달리 창피한 줄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독일말로 된 거창한 해석학적 명제(“Verstehen dessen, was war”)를 내걸고 이인화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마키아벨리를 곡해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거나 ‘지도자는 법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이 천박한 독해법, 이것도 실은 이미 나치들이 한 번 써 먹었던 거다. 원전에 가하는 이 무지막지한 난도질. 이게 파시스트 해석학의 증상이다. 이렇게 얼렁뚱땅 만들어낸 이 황당한 세계관에는 물론 여기저기 보기 싫은 땜질 자국이 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흉측한 물건엔 미학적 포장이 필요하다. 이렇게 : “우수와 고독의 마키아벨리즘.” 물론 ‘멜랑콜리’가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낭만주의적 천재(=영웅=악마)의 심리적 특징이니까. 주제에 갖출 건 찾아서 다 갖춘다. 그대여 아는가, 지도자가 얼마나 고독한지를……. 9.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 “영남 남인” 합창단은 비명을 지른다. ‘하모, 억쑤로 고독하제’. 이렇게 박정희 신화를 낭만주의 미학으로 포장하는 것은 콤비 플레이어 진형준의 몫이다. “따라서 그 아름다움은 선악을 넘어서 있고,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악마적 아름다움에 가깝다. 선악의 구분을 넘어선 미학의 가능성”! 여기서 박정희가 저지른 악은 “아름다움”이 된다. 진형준은 이렇게 허정훈(=박정희)을 19세기의 “낭만주의적 악마”로 보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이게 좀 억지다. 극단적 개인주의자인 낭만주의적 악마의 감성과 “국가의 생존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그”의 감성은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인화의 자평에 따르면, 허정훈은 “동성연애, 마약, 알코올” “정신이상자, 방탕자, 절망자들”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여성숭배”와 같은 “낭만주의는 (……) 국가에 의해 달성될 인륜적인 자유를 방해”한다고 믿는 국가주의자다. 그러므로 박정희 신화에 어울리는 것은 19세기 낭만주의가 아니라, 20세기에 주책없이 등장한 국가주의적 낭만주의, 즉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일 게다. 나치 역시 “국가에 의해 달성될 인륜적인 자유를 방해”하는, 쉽게 말하면 국가에 돈이 안 되는 “동성연애자, 정신이상자, 방탕자, 절망자들”을 강제수용소에 보내고,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여성 숭배” 대신 현모양처주의, 성차별주의 마초 도덕을 관철시켰다. 20세기 유럽의 여성을 남자 말 잘 들어 그 삶이 너무나 행복하고 가치가 있었던, 우리네 조선시대 여인들의 처지로 만들었던 거다. 게다가 성배의 기사 히틀러의 영웅서사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했던 지도자는 마침내 제 역사적 사명을 다한 후에야 연인과 결혼식을 올린 뒤,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을 들으며 영웅적으로 몰락한다. 아무래도 심수봉보다는 바그너쪽이 더 미학적이지 않은가? 전쟁을 겪으며 “국가의 생존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데올로그로 다시 태어”났던 히틀러는 이렇게 “살아서는 온 세상이 놀랄 일세의 인걸로 살고, 죽을 때는 귀신도 울 만큼 참혹하게 영웅으로 죽”었다.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의 특징은 ‘천재=영웅=악마 대(對) 범인=속물=대중’이라는 낭만주의적 엘리트주의 미학을 정치에 외삽하는 데에 있다. 이때 생기는 게 지도자 숭배 및 대중선동이라는 파시즘의 두 기능이다. 이인화는 『인간의 길』을 가지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다. 진형준은 말한다. “나는 그 가능성을 단순한 예술에서의, 문학에서의 미학의 가능성으로 읽지 않는다.” 맞다. 그게 문제다. 영웅서사시는 미학의 가능성으로 머무는 게 좋다. 이게 예술의 벽을 넘어 주책없이 현실로 기어나올 때, 비극이 시작된다. 히틀러는 바그너 오페라를 보며 유럽을 무대로 웅장한 민족서사시를 쓸 구상을 했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게 파시스트들의 인식론적 특징이다. 파시즘은 도대체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족한 지능과 논리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때워야 한다. 파시스트들이 그토록 신화와 영웅서사시를 좋아하는 건 이 때문이다.6) 10. 리얼리스트 이인화 진형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인간의 길』은 박정희의 일대기가 아니다. 『인간의 길』이 박정희의 일대기가 아니라는 말은, 이 소설이 박정희에 대한 회고조의 그리움, 영웅적 미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길』에 대한 그의 평론은 이렇게 처음부터 뻔뻔한 거짓말로 시작한다. 작가 자신, 즉 이인화의 자평을 읽어보면, 분명히 『인간의 길』은 “박정희의 일대기”이며, “박정희에 대한 회고조의 그리움, 영웅적 미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정상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 그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정진홍 교수는 실업자가 된다. 그래도 좋단 말인가? 게다가 남들은 부끄러워해도 카미까제 이인화는 이 사실을 결코 부끄러워할 사람이 아니다. 이인화가 자백한 대로 진형준은 그의 소설에 “과분한 평”을 해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길』은 “한 시대가, 특히 어려운 시대가 낳을 수 있는 독특한 인간의 전형을 그려 보이고 있다”. “전형!” 이 리얼리즘의 범주를 그는 엉뚱하게 ‘신화’와 ‘영웅서사시’에 적용시킨다. 평론가라면 적어도 ‘신화’와 ‘영웅서사시’의 본질이 ‘전형화’가 아니라 ‘과장’ ‘상징화’ ‘이상화’에 있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헌병대의 총탄이 날아오는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그때 이미 자기 운명의 찻잔을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다 재고 있었다.” 점쟁이도 모른다는 제 운명을 허정훈은 이렇게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미리 “다 재고” 있었다 한다. 중세 기사문학 속의 영웅들도 이상하게 자기들이 죽을 때를 미리 알고 있다. hora certa? 이게 어디 개연적인 일, 있을 법한 일인가? 이어 이인화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바로 이것이 “시대가 낳을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그리는 위대한 리얼리스트가,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제가 만들었던 그 기관의 장에게 총을 맞아 죽어야 했던 한 독재자의 어리석은 “운명”을 “서사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이다. 왜 이인화는 허정훈(박정희)이 제 운명을 미리 “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비극의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다. 역사 비극의 플롯은 한 인물이 자기가 대변하는 이념을 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제 목숨을 버리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이인화는 박정희가 가수 불러다 술 먹다 총 맞아 죽으리라는 걸 “미리” “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고 ‘서사적’으로 우기는 거다. 이렇게 그는 중세 기사문학의 장치를 이용해 한 독재자의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비장한’ 것으로 만든다. 성배의 기사 박정희? 또 한 가지. 이인화가 “존경하는 인물”이 “국가이성의 정점에 서서 보편자를 위한 범죄(전쟁)를 수행하는 보편적 신분”이 된 것은 관동군 소좌로서였다. 이 민족반역자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돌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기로 숭고한 결심을 한다. 이거야말로 절대정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세계사적 사건일 게다. 사울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예수의 음성을 듣는 신비체험을 통해 바울로 거듭났다. 박정희는? 여기에도 ‘서사적 해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가령 군마를 타고 순찰을 하다가 단군할아버지를 만나 말에서 굴러떨어졌다든지……. 이인화는 제 입으로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자신의 선악을 초월하여 우리를 형성해준다”7)는 거창한 “인문학의 명제에 복무”한다고 말한다. 이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가 정작 모든 독자가 궁금하게 여기는 이 부분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다. 왜 그럴까? 잠깐 잊은 걸까? “치밀하다 싶을 정도로 소설을 구성하고, 복원하고 또 그 속에 들어가 살아내는 소설가”가 그럴 리가. 하긴 해명 비슷한 것은 있다. “6·25를 겪은 허정훈은 자기 자신과 국가의 생존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데올로그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 박정희가 그것의 “생존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국가”를 슬쩍 바꾼 것은 분명히 6·25 이전이다. “그것이 바로(6·25전쟁에서필자) 살아남은 자들의 복수심이 만든 ‘반공’이었으며……” 친일파들이 광신적 반공주의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하지만 박정희를 비롯한 친일파들의 변신은 분명히 6·25전쟁 전이었다. 이들의 변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6·25전쟁”이라는 “철학적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북괴’ 핑계대지 말라는 얘기다. 11. 『상상』의 책 읽기 다음은 『인간의 길』에 대한 상상 편집부의 해설이다. 이인화가 이 소설을 쓰는 데 기울인 심혈을 보아서라도 우리는 그 소설의 미학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 해설을 좀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아래 텍스트를 무성영화시대 변사들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읽어보라. (물론 리듬과 강약이 생명이다.) “악신들이 날뛰는 광포한 바다 위에 가랑잎처럼 내던져진 민족의 운명을 배경으로 이 공포와 고통의 세계 속에서 악마적 초인들이 저마다의 정치적 모럴을 수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영웅서사시…….” 개·봉·박·두·. 여기서 이 국가주의자들의 감성의 수준이 드러난다. 이어서 편집부는 말한다. “이 소설에서는…… 여러 이념들이 각각 곤, 여희, 대우, 치우, 방황 같은 동아시아 고대의 신화로 재해석”된다고. 우리는 이인화가 어떤 방식으로 제 세계관을 형성했는지 익히 알고 있다. 그 한심한 세계관에 그는 이제 “곤, 여희, 대우, 치우, 방황”과 같은 “신화”의 옷을 입히고, 이로써 한국근대사를 〈독수리 5형제〉 비슷한 만화로 만들어버린다.8) 진형준이 인정하는 대로 “고대의 설화, 신화들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단순한 장치들”이 아니다. 이 장치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 이인화를,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할 촌스러운 “근대”적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혁명적 기능을 한다. 이런 류의 만화가 “영웅담의 시대가 지났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신화가…… 언제고 살아 있는 우리의 이야기”라 믿는 “몽매한 민중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게 될지를, 진형준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보여준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비록 허구이지만, 우리에게 공허한 관념의 싸움으로 알려졌던 사색당파간의 논의가 실은 그 얼마나 ‘현실적 제도’의 혁신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현실적 싸움이었던가를 보여준다. 이 “허구”에서 그가 어떤 역사학적 결론을 끄집어내는지 보라. 여기서 우리는 파시스트 영웅서사시의 독자들이 제 역사관을 형성하는 방식을 보고 있다.9) 진형준은 “조선조 지식인의 역사를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관념의 유희의 역사로만 보는 견해에는 어떤 식으로건 동의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왜? 그건 “오백 년을…… 몇 가지 자료나 짐작으로 뭉뚱그릴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퍽이나 겸손을 떨면서, 그는 “몇 가지 자료나 짐작만으로” 조선조 오백 년을 “뭉뚱그”리는 사람들을 죄책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죄책감에의 논증의 오류? 이로써 진형준은 논리학 오류론의 레퍼토리에 창조적 기여를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오백 년을…… 몇 가지 자료나 짐작으로 뭉뚱그릴 용기가 없”다는 이 소심한 사람이, 그래서 “프랑스문학사를 강의하면서 겨우 삼백 년 전부터 강의를 시작”한다는 이 겸손한 사람이 “한문 해독 능력의 결여”를 이유로 한글로도 얼마든지 나와 있을 “몇 가지 자료”를 읽는 수고도 없이 그저 삼류 소설 딱 한 권을 읽고 이렇게 조선시대 오백 년을 과감하게 “뭉뚱”그린다 : “그 얼마나…… 치열한 현실적 싸움이었던가.” 그리고 이로써 자신의 겸손을 너무나 허무하게 배반한다. “공허한 관념의 싸움” 아니면 “치열한 현실적 싸움”. 이 사이비 이분법은 더 그럴듯한 제삼의 가능성을 슬쩍 지워버린다. 혹시 아는가? 그 “논의”가 당파들 간의 추잡한 이권 투쟁이었는지. 아니면 세 가지 다였을지. 가령 자기 당파의 경제적 이익과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저마다 나라를 위한다는 “현실적” 명분을 내걸고, 실질적 논의 대신에 경전의 자구 해석을 놓고 벌인 “공허한 관념의 싸움”이었을지. ‘바늘에 천사가 몇 명이 내려 앉을 수 있는가’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중세의 논쟁도 알고 보면 다 심오한 뜻이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인화의 존재구속성, 그의 의식의 ‘종친회 결정성’, 즉 그의 역사관이 “영남 남인”의 “당파”적 입장일 수 있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쳐야 했다. 또 사색당파 간의 “논의”(sic!)라는 표현,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흔적을 살짝 지워버린다. 왜 “논의”를 하면서 서로 죽여야 했을까? 물론 다 심오한 뜻이 있어서다. 가령 나랏님 잘 보필해 정조대왕(?) 때처럼 “세계의 선진국”을 만들려다가 그랬다든지. 선조의 이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또 한 번 “논의”(sic!)를 통해 국론을 통일하고 전하께 모든 힘을 몰아줌으로써 이번엔 정말로 한번 조국을 초일류국가로 만들자는 것, 이게 바로 “조국재생”을 꿈꾸는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의 야무진 꿈이다. 에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둘러싼 추리소설의 포맷으로 중세라는 숭고한 시대의 ‘웃음 적대성’을 비판했다. 이인화는 똑같은 포맷으로 거꾸로 제 조상들, 즉 조선시대의 호르게들이 저지른 그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숭고’하게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베낄 때에도 그는 이렇게 거꾸로 베낀다. 이상한 버릇이다. 12. 중세냐 포스트모던이냐 압권은 그 다음 구절이다. 『인간의 길』에서는 “‘이성에 의한 탈마법화의 합리화 과정으로서의 근대’라는 상투적인 관점이 전복되고 근대로부터 벗어나려는 탈근대의 지향이 옹호된다”. 여기서 이인화는 갑자기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둔갑한다. 국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근대” 철학의 최정점에 서 있는 헤겔철학을 동원하여 박정희가 “절대정신”이었다고 주장을 하는 그 소설이, 또 이 “절대정신 앞에서는” “어떤 개인주의적 윤리도 무시된다”고 우기는 그 소설이 “탈근대의 지향”을 “옹호”한다는 거다. 사실 세계철학자를 통틀어 헤겔철학만큼 “탈근대”의 철학과 대극을 이루는 것도 없으며, 또 그의 철학을 통틀어 “절대정신”이라는 개념만큼 “탈근대”의 시대정신과 대극을 이루는 것도 없을 게다. 이게 바로 “『상상』의 책읽기”다. 이 해석학적 도착증. 이게 극우파들의 국제적 공통성인 모양이다. 어느 독일 작가가 쓴 연극. 어느 날 히틀러의 일기가 발견된다. 네오 나치들은 열광한다.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돌아가신 “지도자”의 일기는 성경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일기가 가짜임이 밝혀진다. 일기에 사용된 종이가 실은 히틀러가 사망한 이후인 50년대산(産)으로 드러났던 거다. 누군가가 멍청한 네오 나치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관의 공백을 “신화”로 메우는 “몽매한” 자들의 무궁한 상상력은 바로 이런 난처한 상황 속에서 비로소 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들은 거꾸로 추론을 한다. “그럼, 총통은 아직 살아 계시다!” “신화”는 이런 방식으로 탄생하는 법이다. 왜 극우파들은 이렇게 거꾸로 움직이는 걸까? 진형준의 말대로 아마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열망” 때문일 게다. 열망이 너무 크면 이렇게 현실이 눈에 안 보이는 법이다. 또 진형준은 여기서 “사람들”의 열망을 얘기하는데, 그건 ‘모든’ “사람들의 열망”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의 열망”, 가령 “영남 남인의 지역적 기반”을 이루는 그 “사람들의 열망”이라 해야 옳다. 왜냐하면 분류학적으로 보아 난 분명히 “사람”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영남 남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게다. 이때 진형준은 그 “열망”이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우긴다. 이렇게 그는 “무의식”의 이름으로 그 “열망”을 전 “민중”에게 “집단적”으로 안겨버린 후, 그걸 간파했다고 이인화를 찬양한다 : “그러한 신화들이 오늘날까지 (최소한 집단적 무의식 상태로서) 하나의 잠재적 열망으로 살아 있음을 작가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칸트? 이들은 이렇게 소설을,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구성하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는 “신화에의 청원”이 “오늘날 살아 있는 인간들의 가장 내밀한 욕구에 대한 귀 기울임”이라 우기며, 이로써 그런 “내밀한 욕구”가 전혀 없는 나를,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나를 졸지에 시체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테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진형준이 예리하게 지적한 대로 “허정훈의 탄생, 성장, 고뇌를 윤색하고 있는 고대의 설화, 신화들은, 소설적 재미를 더하기 위한 단순한 장치들이 아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게다. 이 장치들은 진형준이 말하는 그 “살아 있는 인간들”을, 합리적 논증의 논리적 강제와 객관적 사실의 현실적 강제에서 해방시켜주는 혁명적(?) 수단이다. 머리가 나쁜 자들은 오직 논리적 강제가 없는 신화의 세계 속에서만 자유로움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신화에” “청원”을 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신화에” “청원”을 하는 것을, 『상상』 편집부는 “‘이성에 의한 탈마법화의 합리화 과정으로서의 근대’라는 상투적 관점”의 “전복”이라 부른다. 여기서 그들의 비논리성, 몰상식성, 이성적 판단능력의 결여는 “상투적 관점을 전복”하는 “탈근대”가 된다. 김이 새겠지만, 사실 이런 “신화”적 방식으로 “탈” “근대”를 하는 것도 이미 나치가 한 번 써먹었다.10) “탈근대”를 성취한 벅찬 마음으로 이인화는 외친다. “우리는 7,80년대를 건너온 나룻배를 불태워야 한다.” 이인화. 여기서 딱 한 번 올바른 소리 했다. 근데 이번엔 방향이 틀렸다. 우리가 그에게 해야 할 소리를, 그는 거꾸로 우리에게 한다. 생각해보라. “이야기꾼” 이인화가 우리에게 “겸손하게” “들려주는” 그 “이야기”에는 사실 새로운 게 하나도 없다. 7,80년대에 학교 다닐 때 바른생활과 국민윤리 시간에 지겹게 듣고, 외워 시험지에 긁어대도록 강요받았던 바로 그 얘기다. 그런데 왜 이인화는 “7,80년대를 건너온” 그 “나룻배를 불태”우지 않는 걸까? 이인화가 올바로 지적한 대로 “우리가 7,80년대와 똑같은 시각으로 90년대와 21세기의 역사적 현실을 조망한다는 것은 새로운 진보를 향한 모든 의미있는 모색의 실천적 부정이 될 것이다”. 이걸 알면서 그는 왜 “7,80년대와 똑같은 시각으로 90년대와 21세기의 역사적 현실을 조망”함으로써 “새로운 진보를 향한 모든 의미있는 모색”을 “실천적”으로 “부정”하는 걸까? 그것도 장장 “1백5십 년”이나 뒤로 돌아가서 말이다. “신의 의지를 대행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자가 영웅이고, 영웅의 신적인 면을 숭배하는 것이 영웅숭배…….” 13. 신의 아들 박정희 박정희를 영웅으로 숭배하나, 도널드 덕을 신으로 섬기나, 그건 개인적 취향의 문제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문제는 이 박정희 신학이 함축하는 끔찍한 결론이다. 즉 “영웅” 박정희는 “신의 의지”의 “대행”자였고, “인간을 지배”했던 그의 파쇼독재가 결국은 “신의 의지”였다는 것이다. 이인화 목사님은 결국 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목사님은 박정희가 신의 아들임을 어떻게 아셨을까? 물론 “천분을 알아보”는 그 신비한 인식기관을 통해서다. 그럼 그 계시의 능력이 없는 미천한 우리는? 물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 믿습니꺄?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박정희의 사도들은 지금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열심히 복음서를 쓰는 중이다 : 『무궁화……』 복음, 『……길』 복음, 『……조선』 복음. 이들이 신약성서를 쓰는 동안 조선일보는 구약성서를 쓰고 있다. 한국의 모세 이승만이 어떻게 우리 민족을 일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켰으며 (‘출애굽기’),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율법을 제정해 주었으며 (‘레위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나먼 하와이 땅에서 얼마나 조국을 걱정하면서 죽었는지(‘신명기’). 신화가 있으면, 당연히 신학이 있어야 한다. 파시스트 철학이 신학적 성격을 띠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조국 대한민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근대”를 “탈(脫)”하여 결국 어느 시대로 날아갔는지 잘 드러난다. 『상상』은 이인화의 반동적 낭만주의가 포스트모던이라고 야무지게 ‘상상’한다. 이건 내 추측인데, 아마 움베르토 에코의 『포스트모던이냐 새로운 중세냐』를 읽었던 모양이다. 물론 자기들 방식(‘도착증적 혼성모방?’)으로 말이다.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에코의 전망이다. (중세의) 전체적인 과정은 페스트의 물결, 대량학살, 불관용, 그리고 죽음으로 점철되었다. 새로운 중세에 대한 전망이 전적으로 만족스럽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않으리라. 중국인들이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말하듯이 “흥미로운 시대를 잘살아봐”. “근대”를 “탈”한 이인화, 진형준에게 보내는 에코의 인사 : “흥미로운 시대를 잘살아봐”. 14. 숭고한 희극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영웅’에 적합한 미학적 범주는 ‘숭고’다. 숭고가 ‘크기’라는 것쯤은 이인화도 본능적으로 안다. 박정희를 숭고하게 만들고 싶었던 이인화. 그래서 그는 박정희의 사이즈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개구리의 항문에 호스를 꽂고 공기펌프질을 하면 개구리의 부피가 좀 늘어나긴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개구리를 황소로 만들 수는 없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다. ‘질량보존의 법칙’이라고.(무게는 어떡하고?) 근사한 가상 속에 숨어 있는 한심한 실상, 황소만한 부피에 담긴 어쩔 수 없는 개구리의 체중. 이거야말로 ‘희극성’이라는 미학적 범주의 본질적 특징이다. 개구리의 몸을 한없이 부풀리고 싶은 이인화. 하지만 그의 숭고한 “열망”도 물리학의 법칙만은 이길 수가 없다. 무리하게 불리면 가엾은 개구리의 몸은 언젠가 뻥 터지고 마니까. 이게 크릴로프 우화의 교훈이다. 자기 상상력이 만들어낸 우상 앞에서 ‘숭고’를 느끼는 건 작가의 자유다. 퉁퉁 불어오른 개구리의 모습에서 ‘희극성’을 느끼는 건 독자들의 자유다. 이렇게 서로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데에 민주주의의 ‘아름다움’이 있고, 이 ‘아름다움’을 짓밟았던 데에 박정희 파쇼정권의 ‘추함’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 ‘추함’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데에 20세기 말에 느닷없이 등장한 우리 국가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변태성’이 있다. 갑자기 부상하는 죽은 독재자에 대한 사랑, 이 정치적 네크로필리아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칼 마르크스는 어디선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는 왜 희극으로 끝나는 걸까?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제 우리도 세기말에 벌어진 이 소극(笑劇)을 바라보며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15. 맺음말 요약하자. 첫째, 이인화는 제 영웅을 정당화하려는 “열망”에서 일상언어의 문법을 무시한다. 둘째, 그는 텍스트를 늘 거꾸로 읽는 이상한 도착증을 가지고 상식을 무시한 엉터리 인용을 서슴지 않는다. 셋째, 그가 박정희를 옹호하는 데 동원하는 논리는 신학적 형식에 파시스트적 내용이다. 넷째, 박정희 서사시에 어울리는 미학적 개념은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다. 이로써 나는 철학적, 미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동어반복(Tautologie)의 진리를 상기시켰고, 이 공리를 부정할 때 언어소통이 불가능해짐을 시사했다. 그 밖에도 나는, 이인화의 몰상식의 원인을 설명하는 두 가지 가설(‘지능’ 아니면 ‘양심’)을 제시했고, 아직 자기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의 실존적 고민의 해소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써 나는 이인화가 ‘숭고’하게 부풀린 개구리의 배에 상승기 부르주아의 무기였던 ‘풍자’의 바늘을 찌르고, 거기서 나오는 김새는 소리를 들으며 독자와 함께 과거의 망령과 명랑하게 작별하고자 했다. 독자들은 이 글에 유난히 따옴표가 많은 것을 눈치챘을 게다. 원래 내 의도는, 전적으로 이인화와 진형준이 쓴 글에서 따온 인용문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좀 유보적이다. 하지만 “동아시아”가 낳은 위대한 국가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비장함을 보면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한번 포스트모던 철학을 흉내내어, 철학자들을 ‘혼성모방’하는 이 위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을 ‘해체’해볼까? 그래서 이 놀이의 규칙을 몇 가지 세워보았다. 1. 논증을 하는 데에 상식 이외의 전문지식을 사용하는 걸 피한다. 2. 글을 텍스트의 ‘인용’으로 채운다. 3. 이 인용들을 병렬시켜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독자들도 한번 해보라. 재미있다. 수준 있는 텍스트라면, 전문지식이 필요하겠지만, 대한민국 국가주의자들의 텍스트는 초보자라도 상식만 가지고 능히 ‘해체’할 수 있다. 연습문제. 가령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조선일보의 주장. 원시적 수준의 논리적 오류다. 한번 해체해보라. (힌트; can과 may는 종종 혼용된다.) 마지막으로, 원래 나는 여기서 『상상』에 실릴 예정이었던 이 글이 여기에 실리게 된 경위를, 우리 국가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용하는 도착증적 논리에 따라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인격의 성숙함은 ‘『상상』 편집위원회가 애초의 약속을 깨고 내 글을 검열에서 삭제해버렸다’고 해서 이를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그런 옹졸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아무 납득할 만한 이유도 대지 못하고 공식해명을 요구하는 내 요청을 거부했다는 사실도 그냥 비밀로 접어두련다. 또 이들이 내 원고를 삭제한 실제 이유가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면 ‘쟤들 놀고 있네’ 할 게 아니냐”는 편집위원회의 예리한 판단에 있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그들을 난처하게 할 만큼, 내가 남의 처지를 배려 못하는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나의 개인적 윤리관을 국가주의자들에게까지 권고할 권리는 내게 더더욱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불쾌한 경험을, 이 한을 혼자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냥 무덤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