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2월 14일 월요일 오전 04시 40분 49초
제 목(Title): 김석근/토착민간신앙과 불교의 힘겨루기 



 
 
토착민간신앙과 불교의 힘 겨루기
 
김석근
 
-------------------------------------------------------------------------------
-

1959년생. 81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92년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일본 
동경대 대학원 수학.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정치사상연구실장(현) 
<조선시대 군산관계의 에토스와 그 특징> <개혁과 혁명 그리고 주자학> 
<한국정치학의 불모지대 : 동양정치사상> <유교와 자본주의의 선택적 친화력?> 외 
논저 다수. 주요역서 : "주자학과 양명학" :불교와 양명학"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외 다수


-------------------------------------------------------------------------------
-
 

-------------------------------------------------------------------------------
-

1. 손오공과 '부처님 손바닥'
 "불교는 어학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언젠가 불교를 깊이 공부하는 한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이다. 즉각적으로 "그럼 어학 실력만으로 되는 게 뭐냐"는 
반문(反問)이 입안에 맴돌았으나, 그냥 웃고 말았다. 

그 후 가끔 혼자서 산책을 하거나 아니면 불교에 대해 생각하거나 할 때면,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아마 나름대로 묘한 여운이 남았기 때문이리라. 자연히 
다양한 각도에서 그 장면을 되새겨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고맙게도 나는 
앞으로 풀어 나가야 할 많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 그것은 
바로 '진리의 독점' 혹은 '진리 해석의 독점권',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사제(司祭)적인 폭력' 같은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의 영역에 들어서지 
말아라', 이른바 '쯩(證)'을 가진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는 것, 
더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일종의 '지적인 텃세'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내가 보기에, 엄정한 자격과 요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하는 
세계, 그것은 아무래도 '닫힌 구라(!)의 세계'일 뿐이다. 지루한 설교 같은 것. 
반면에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 설령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 , 또 기꺼이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는 그런 세계, 나는 그것을 '열린 구라의 
세계'라 부른다. 흔히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는 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 
덕분에, '진짜 무당'이 빛난다. 있다면! 정말 자신 있다면, 왜 굳이 '닫혀 있음'을 
고집하는가. 구체적으로 한 수 가르쳐 줘 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나는 이 글에서 과감하게 한 번 
'손오공'이 되어 보려고 한다. 일찍이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뛰놀았던 천방지축 
손오공, 아마 그 유명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손오공의 
눈부신 맹활약에 내심 감탄해마지 않다가, 나중에 부처님 손바닥의 그 크고 넓음에 
심히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이미 
머리가 커져버린(?) 나로서는, 그 오래된 이야기를 한 번쯤 뒤집어 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끼곤 한다: '결과적으로 손오공은 부처님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식으로. 


자아, 이제 나는, 나의 상상력을 근두운, 그리고 나의 붓을 여의봉 삼아 마음껏 한 
번 날아가 보려고 한다. 신나는 '지적인 여행'이라고나 할까.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종의 '모험'에 나서는 기분으로 과감하게 나아갈 
것이다. 

 

-------------------------------------------------------------------------------
-

2. 나는 이렇게 본다'
 '토착 민간신앙'(1)과 '불교'의 힘겨루기? 힘겨루기 이전에 먼저, 불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또 한 쪽의 당사자, 즉 토착 민간신앙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우리의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미리 말해둔다면, 우리의 경우 '토착 민간신앙,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쯤에서 "샤머니즘(혹은 무속)이 있지 않느냐"는 반문(反問)이 나올는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샤머니즘의 경우, 사제자와 제의(祭儀) 그리고 나름대로 
신도(信徒)들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 명맥(命脈)을 이어오고 
있다.(김인회, 1987; 김태곤, 1981; 유동식, 1975) 하지만 나의 입장은, 
샤머니즘이 토착 민간신앙의 일부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착 
민간신앙이 곧 샤머니즘은 아니라는 것. 어디까지나 토착 민간신앙의 부분집합일 
뿐이라는 것. 해서 내가 말하는 토착 민간신앙이란, 샤머니즘까지 포함한 보다 
넓은 범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득히 먼 옛날에 이미 사라져 
버렸거나 아니면 (뒤에서 보듯이 습합 되는 형태로) 불교 혹은 샤머니즘에 
'흡수(통합)'되어 버린 부분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제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과연 그런 부분을 어떻게 찾아내서, 복원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일종의 '지식고고학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비교적 
분명하고 확실한 부분, 전해지고 있는 자료에서 어떻게 해서든 읽어 내야 한다. 
남아 있는 것에서 사라진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리의 과제와 연결시켜 말한다면, 역시 샤머니즘과 불교, 그 중에서도 '자료'라는 
점에서 더 나은 편인 불교에 의거해서 거꾸로 추론해 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방법이라 하겠다. 뒤에서 보듯이(제3장), 새로이 등장한 불교는 토착 
민간신앙과의 갈등을 거쳐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며, 자연히 남기고 
있는 자료 역시 많은 편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기록은 승리한 자들의 그것이므로. 
승리한 자들의 기록에서 패배한 자들의 눈물과 아픔을 읽어 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도 역시 '상상력의 미학(美學)'이 발휘되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취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다른 나라와의 '비교' 내지 '크로스 체크'(cross check)를 
통해서 비슷한 현상 속에 관철되고 있는 흐름 내지는 보편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안이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인 만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의 그것들에서 시사점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경우가 
특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내가 말하는 '토착 민간신앙'에 거의 가까운 
것으로서의 '신토오(神道)'가 이미 오래 전에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관념형태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읽을 수 
있는 상대(上代)의 일본신화 내지는 신들의 계보가 나름대로의 '실마리'가 된다. 
에도(江戶) 후기에 발전한 코쿠가쿠(國學)의 흐름은 그들을 토대로 발전, 심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자, 유교, 불교 등 이른바 대륙의 선진문물은 
모두 한반도에서 전해졌다는 점, 게다가 불교와의 접촉과 갈등, 그리고 나아가서는 
'신토오와 불교의 습합(神佛習合)' 현상(田村圓澄, 1986; 義江彰夫, 1996) 등을 
비교적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이 글은 한국의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의 관계에 주목하는 만큼, 논지의 전개에 도움이 되는 참고 정도에 그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의 '관계'를 
살펴보는데 필요한 도구와 개념장치라고 하겠다. 과연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 들어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이 글에서는 1)정치와 종교와의 관계, 그리고 2)'외래사상'으로서의 불교, 다시 
말해 '토착적인 것들'과 대비되는 범주로서의 불교라는 두 측면에 주목하고자 
한다. 


1) 종교는 종교요, 정치는 정치다? 


종교는 종교요, 정치는 정치다? 이 말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몇해 전 
열반(涅槃)에 드신 훌륭하신 큰 스님의 말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을 
패러디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앵무새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좋다, 내가 보기에, '종교는 종교요, 정치는 정치다'라는 말,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말이다. 맞으면서 틀린다? 대략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정치학하는 사람이 종교에 왠 관심?" 하는 식의 대꾸에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역시 종교의 순수함과 독자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역사에서의 제정일치(祭政一致)와 종교전쟁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들은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현상이 
아닌가. 


대부분 우리는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사회로 
'발전'해 왔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발전의 
신화'가 무참히 깨지고 있는 오늘날, 적어도 나는, 그런 식의 검증되지 않은 관념 
역시 심각하게 한 번 반추(反芻)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 역시 '서구의 
근대'가 만들어낸 픽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제(祭)와 정(政), 다시 말해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서로 다를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저만치 21세기가 다가와 있는 이 시점,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제정일치' 
현상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사진작가 김수남의 아시아문화 탐험을 통해서, 
동남아 곳곳에서 제정일치 사회의 면모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김수남, 1997) 
정치와 종교가 일원화되어 있는 티벳 불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거기서는 
경전보다는 고승(高僧)으로서의 라마가 더 권위를 발휘한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지식의 스승이며, 관세음보살의 화현(化現)이기도 한 달라이 라마, 그는 
성속(聖俗)의 양권(兩權)을 장악하고 있는 살아있는 부처로서 명실공히 티벳 
최고의 지도자다. 그는 종교적인 스승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지도자인 
것이다.(김석근, 1996b) 우리는 또 이란의 호메이니에 의해 부활된 
'신권정치(神權政治, theocracy)'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인들이 '문명 
충돌의 잠재적 강력 변수' 내지는 '21세기의 새로운 공포'로까지 여기고 있는 
이슬람권의 부흥운동과 그들의 '정치'개념 역시 주목할 만한 것이다.(새뮤얼 
헌팅턴, 이희재 옮김, 1997; 이희수, 1997) "이슬람 정치이론의 기본원칙은 일원적 
유일신관(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고,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형태는 이슬람 성법(聖法)에 기초한 
신정주의(神政主義) 국가여야 한다."(이희수, 1997: 300) 

사실 정치적 안정(political stability)과 응집력(coherence)이라는 척도로 
보자면, 다른 어떤 체제 보다 신정정치(神政政治)가 높은 점수를 차지한다.(2) 
비근한 예로 사람들의 모임을 보더라도 약간의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어 있을 때, 
모임 자체도 잘 되고 또 오래간다.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는 조직, 사회, 
국가일수록, 바야흐로 이런 측면에 대한 재조명과 재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같은 논의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비서구사회의 그것일 뿐이라는 식의 논평이 
나올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는 바와 같이, 서구의 중세사회는 
신학(theology)이 곧 만학(萬學)의 왕인 그런 시대였다. 극히 단순화시키면, 서구 
중세의 정치사상은 '교권(敎權, ecclesiastical power)'과 '속권(俗權, secular 
power)'의 긴장, 대립과 갈등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고 본다. 그 안에서 다양한 
국면이 전개되었지만. 중세의 황혼기(혹은 근대의 여명기)를 수놓고 있는 
종교개혁(Reformation)과 왕권신수설(the divine right of kings)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권(the sovereignty)과 
민족국가(nation state) 같은 근대적인 범주의 성립, 그리고 '정치적'인 범주의 
독자성 확립과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은, 바로 종교와 관련된 중세적 범주에 
대한 반발과 지양(止揚) 위에서 꽃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정치와 종교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일본의 
케이스이긴 하지만, 『신들의 명치유신: 신불분리와 폐불훼석(神神の明治維新: 
神佛分離と廢佛毁釋)』이라는 책제목은 지극히 상징적이다.(安丸良夫, 1979) 
그리고 전체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리즈 21세기의 정치학' 첫 번째 권이 
『종교와 정치(宗敎と政治)』라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中野實, 1998) 
우리 학계에서도, 정치학계의 경우, 단군신화의 재해석(김석근, 1996a), 
풍수도참과 유교의 대립(김영수, 1997), 급진적인 정치사상으로서의 
미륵사상(전경옥, 1993), 『정감록(鄭鑑錄)』과 민중저항사상(배병삼, 1989), 
정조대의 천주교 비판(김홍우, 1991), 천주학의 전래와 조선조 지식인의 
고뇌(신복룡, 1997a), 동학의 정치사상(신복룡, 1997b), 한국 신흥종교의 
정치사상적 의의(정연선, 1992) 등등 정치와 종교의 상관성에 초점을 맞춘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면 이 글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고 있는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샤머니즘, 그들을 오로지 '종교' 영역으로 보기 쉽지만, 
전근대사회에서 그들이 갖는 의미가 오늘날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는 법. 단적으로 
말해서, 그들 역시 어떠한 형태로건 '정치성'을 지녔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샤머니즘을 포함한) 토착 민간신앙 역시, 아주 소박한 형태로나마, 정치적인 
사유를 지니고 있다. 이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부족사회에서 지금도 검증 
가능한 것이며, 또 샤머니즘에 대해서 '고대 국가의 통치이념'(장지훈, 1997) 
'무교(巫敎)의 정치적 상상력: 왕 바꾸기 혹은 살해하기'(이정희, 1993) 식으로 
접근하는 시각에 의해 상당 부분 뒷받침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그 당시의 지배적인 
정치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나는, 불교 역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역시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불타의 정치사상'(윤세원, 1986), 『불교의 정치사상』(피야세나 
딧사나야케, 정승석옮김, 1987) 등을 보라. 문제는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이다. 이미 드라마 '용의 눈물」을 통해서 익히 알려진 고려말의 상황은 불교와 
정치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유학의 창시자 
주자가(시마다 겐지, 김석근 옮김, 1986; 아라키 켄고, 김석근 옮김, 1993),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그 정도전이, 그리고 신흥사대부들이, 그토록 불교를 비판해마지 
않았던 것(김석근, 1996c; 김석근, 1997b), 그것은 불교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느낌이 들는지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기득권 층에 대해서도 어떤 
형태로건 비판을 가해야 했던 것이다. 그 사회를 틀 짓고 정당화해주던 이념에 
대한 비판이 없을 수 없다는 것. 여기서는 다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일단 
멈춰 서고자 한다. 


////"이 땅의 불교는 신라조, 고려조에 만학(萬學)의 왕으로서 그 형이상학적 
권좌를 누려왔다. 팔만의 장(바구니)을 채우고 인간의 모든 심령을 감싸는 언어를 
지배했으며 천당을 지배하고 지옥을 지배했다. 그러나 여말(麗末)로부터 그 
불교라는 제정일치의 형이상학에 대한 반란이 준비되기 시작했고 새로 성립한 
조선조의 관료계층은 그 반란을 배불의 기치 아래 완성시켰다. …… 유교적 
합리성은 불교적 종교성의 멸절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우리가 실학(實學)이라 
부르는 근대성(modernity)의 욕구는 저 멀리 서구라파 땅에서 르네상스이래 개화한 
과학문명과 이성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민주(democracy)의 계몽을 시작했다. 기실 
불교는 그 근본교리에 있어서 이러한 민주적 욕구와 명실상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제정일치의 중세기적 형이상학의 틀을 벗지 못하고 그러한 중세기적 독단의 
잠(dogmatic slumber)에서 깨어나고 있질 못하다. 그러한 불교는 기독교의 유입과 
더불어 미제국주의 문명의 구조 속에서 철저히 천대받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김용옥, 1989: 306∼7)//// 

2) '외래사상'으로서의 불교 


부처님 손바닥이 그렇게 크고 넓었다면, 그런 부처님께서 어깨에 걸쳤을 
옷(袈裟)은 얼마나 더 크고 또 길고 넓었으랴. 광대무변(廣大無邊)! 상상을 
넘어선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이천오백년에 걸쳐서 불교가 커버해온 영역과 
수준은 가히 그 끝간데를 헤아리기 어렵다.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찰나(刹那)에서 영겁(永劫)에 이르는 시간관(時間觀) 그리고 윤회(輪廻)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한없이 길게 보면, 인간과 삶 자체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3) 몇 해전 불교와 관련된 책 한권을 번역, 출간하면서 
흐뭇함보다는 오히려 "무거움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으리라.(4) 


해서, 그런 불교에 가까이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전략이 필요하다. 아차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상이므로. 내가 택한 길은, 불교의 철학적 깊이를 일단 
괄호쳐두고서, 아주 분명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불교는 역시 우리의 토착 
사상이라기 보다는 바깥에서 들어온 '외래사상'이라는 것. 다 아는 바와 같이, 
불교는 인도산(印度産) 즉 인도에서 생성된 것이며, 그것이 다시금 주변 지역으로 
계속 전파되어 간 것이다. 오늘날 인도에서 오히려 불교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어쨌든 출발 지점에서의 불교는 자연히 '인도적 
사유'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인도와 중국을 같은 '동양권'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구(the earth) 전체가 하나의 세계, 즉 근대세계(the modern 
world system)가 형성된 이후에 만들어진 관념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문명권)로 병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문명교섭사'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서 라이트(A. 
Wright)의 다음과 같은 대비를 보면, 두 문명권의 생각과 철학은 거의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어와 인도어는 매우 큰 차이를 지닌다. 중국어는 어미의 변화가 없는 
상형문자이며, 문장형식으로 볼 때 단음절어(單音節語)이다. 반면 인도어는 어미 
변화가 매우 심하며, 자모체계로 되어 있으며 다음절어(多音節語)이다. 중국어는 
체계적인 문법을 가지지 않으나, 인도어 특히 산스크리트어(Sanskrit)는 
질서정연하고 매우 정교한 문법체계를 가진다. 문체를 살펴보면, 중국 문체는 
간결체이고 친숙한 자연물로부터 은유적 표현을 빌려 오며 구체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는 반면, 인도어의 문체는 만연체이며 은유에 있어 과장이 심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많다. 중국문학에서 - 심지어 도교 고전에서조차 - 상상력의 범위는 인도의 
화려한 문체에 비해 훨씬 제한되고 보다 사실주의적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두 문화전통은 불교의 침투가 시작될 때는 서로 
상반되었다. 중국인들은 각 개인의 인성을 상세히 분석하는 면이 적었던 반면, 
인도인들은 심리학적 분석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를 나타냈다. 중국인들은 시간과 공간 모두를 유한한 것으로 생각했고, 
시간을 일생·세대 또는 정치적 시대의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반면 인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무한한 것으로 여기며, 인생의 단위를 넘어 우주적 영원성 속에서 
시간을 파악하였다. 

이들 두 전통은 사회적·정치적 가치기준에서 더욱 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가족주의와 개별주의적인 윤리관은 격변기에서도 중국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반면, 대승불교는 가족의 범주를 초월한 구원론과 보편적 윤리관을 
가르쳤다. 중국사상가들이 이상적 현세의 모습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반면, 
인도의 사상가들과 불교의 승려들은 내세의 추구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A. F. 
Wright, 1959: 33∼34)//// 


아무리 위대한 철학이고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혀 낯선 땅에 
'외래사상'으로 다가갔을 때, 자연히 거부반응과 마찰이 있기 마련이다.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토착적인 것들과의 갈등과 대립'을 상정할 
수 있다. 단적으로 유교적 교양에 익숙한 사람들이 부모·자식을 버리고 출가하는 
행위(독신!)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道端良秀, 1968) 불교 쪽에서 
보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이해시켜야 했다. 해서 양자의 관계가 언제나 갈등과 
대립만으로 점철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필요 혹은 일종의 
타협에 의해서 '화해와 포용'이 시작되기도 했다. 불교가 중국에 정착되는 
과정에서 그같은 두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수, 당대에는 이른바 
'불교가 지배적인 이념의 위상을 차지한 전성시대'를 구가하지 않았던가. 한 
학자가 그것을 간명하게 'The Buddhist Conquest of China(불교의 중국정복)'(E. 
Zurcher, 1972)이라 표현했듯이. 


그같은 마찰의 완충제 역할을 했던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불경번역 작업이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전혀 다른 언어체계인 한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통해,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적절한 수정과 가감이 
이루어졌다.(김석근, 1997b: 6∼7) 그 때 상당한 양의 경전이 
위작(僞作)되었으리라는 심증(心證)도 없지 않아 있다. 어쨌든 '동아시아불교'는 
모두 『漢譯大藏經』에 의거하고 있다.(高崎直道, 木村淸孝(編), 1995; 1996) 
"중국, 조선, 일본의 불교의 공통적인 면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다. 발음은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로 다르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경전이 독송(讀誦)되고 있다."(鎌田茂雄, 1982: 13) 


삼국시대 불교의 도입은, 이 같은 맥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국을 거치면서 
갈등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기까지에는 많은 시련을 거쳐야만 했다. 기존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토착 민간신앙이 부리는 '텃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외래사상으로서의 불교의 유입이 그들에게는 현실적인 도전과 
위협으로 비쳐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불교를 전해 준 일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서도 불교 교리 자체에 대한 이해와는 전혀 무관하게, 가문들 사이의 
대립이 발생했다. <불교 수용을 둘러싼 의견대립 및 토착 민간신앙과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기본 패턴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해당 부분을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발췌, 인용해 보기로 하자.(5) 


////"짐(朕)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이처럼 미묘한 법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짐 혼자서는 결정할 수가 없구나" 하셨다. 곧바로 신하들에게 물어 
말씀하시기를 …… 소카노오미나메노스쿠네(蘇我大臣稻日宿?)가 아뢰기를 "서쪽의 
이웃나라가 모두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어찌 일본이 홀로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모노베노오무라지오코시(物部大連尾輿)와 
나카토미노무라지카마코(中臣連謙子)가 같이 아뢰기를 "우리 조정이 천하에 왕으로 
계신 것은 항상 천지사직의 180신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받들어 모시는 것을 그 
본분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바꾸어서 다른 나라의 신(神)을 받들어 
모신다면 필시 쿠니쯔카미(國神)의 노여움을 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천황이 
말씀하시길, "청하는 사람인 이나메노스쿠네에게 주어서 시험삼아 섬기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다. …… 후에 나라 안에 유행병이 있어서 백성들이 
이상하게 많이 죽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죽는 사람이 늘었으나 치료할 
수가 없었다. 모노베노오무라지오코시와 나카토미노무라지노카마코가 같이 
아뢰기를 "전날 신(臣)들의 주청을 거두시지 않으셔서 이런 병이 생겼습니다. 지금 
오래되지 않았으니 원래로 돌아간다면 필시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던져 
버리시고, 진심으로 차후의 복을 구하소서"라고 했다. 천황이 말씀하시기를 
"주청하는대로 하겠다"라고 했다. 조정의 관리가 곧바로 불상을 나니와(難波)의 
호리에(堀江)에 던져 버렸다. 또 가람(伽藍)에 불을 질렀다. 따라서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에 하늘에 바람과 구름이 없어지고, 갑자기 궁전에 불이 
났다. (『日本書紀』 '欽明紀' 13年條.. 원문은 생략함. 강조는 글쓴이, 이하 
마찬가지.)//// 


 

-------------------------------------------------------------------------------
-

3. 갈등과 습합의 드라마
 외래사상으로 도입된 불교는 기존의 이념체계로서의 토착 민간신앙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한 번쯤은 힘겨루기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불교는 점점 
더 입지를 굳혀 가게 되었고, 마침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토착 
민간신앙은 버티다 못해 정치적인 영역에서 밀려나 종교 내지 신앙 차원으로 
조용히 밀려났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가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서로 싸울 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나 할까. 불교로서도 일반 
민중들의 의식을 파고들고 또 뿌리내려 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식세계를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포교와 교세의 확장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화해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이 토착 민간신앙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었고(習合!), 그 결과 이른바 '한국' 불교가 형성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동아시아불교에 속하면서도, '중국'불교나 '일본'불교와 구분해 주는 측면의 
엄청난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당연한 것이지만, 불교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토착 민간신앙 쪽에서 받은 
충격은 더 컸다. 게다가 사상계의 헤게모니 자리마저 내주지 않았던가. 바야흐로 
그들은 불교의 광대한 논리와 형이상학에 눈뜰 수 있었으리라. 그런 만큼 그들 
쪽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해서, 불교와 토착 민간신앙의 관계는 일면적인 그것이 아니라 갈등과 
습합(習合)이 교직해내는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이해라는 비판을 비켜가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건 나름대로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내가 택한 방식은, 갈등과 습합의 드라마에 거칠게나마 세 단계를 
설정하고, 그 단계마다의 성격과 상징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조금 
부연하자면,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 지점은 양자의 힘이 팽팽하게 
맞서 있을 터. 그것은 곧 불교가 균형(팽팽함)을 넘어서 우위를 차지하기 바로 
직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그 지점을 가시적으로 비정(比定)하자면, 역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직접적인 계기로서의 '이차돈의 죽음' 장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국면을 기점으로 삼아 그 이전 단계와 이후 단계로 나누는 
것이다. 자연히 죽음 이전 단계는, 불교가 토착 민간신앙의 헤게모니에 끊임없이 
도전해 가는 과정 - 헤게모니는 아직 토착 민간신앙 쪽에 있다 - 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단계는 불교가 마침내 균형을 깨고서 우위를 굳혀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해 미리 말해둘 것이 있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은 것은 주로 신라 
불교라는 점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사에도 관념적으로 
그같은 세 단계를 설정해볼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 장면들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문헌 자료에 의거하는 한,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 수용은 너무나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2년(372) 전진에서 
불교가 전해졌으며, "5년 봄 2월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가 있게 하고 또한 
아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가 되었다."(6) 
그리고 백제의 경우 침류왕 원년(384) 동진에서 마라난타에 의해 전해졌다.(7) 
이듬해인 "2년 봄 2월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중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8)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거하는 한, 고구려와 백제에서의 불교 도입은 
무리없이 게다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 한가지. 우리의 직접적인 관심사와 관련하여, 신라 불교에서 토착 민간신앙과의 
갈등 국면이 가장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어쨌든 불교 공인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이 죽었다.' 게다가 공인도 법흥왕 14년(527)에서야 이루어졌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면 약 14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당시의 교통이 열악하고, 또 세 나라 
사이의 관계가 적대적인 그것이라 하더라도, 너무 큰 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실제로는 527년 이전에 이미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9)) 그것은 곧 불교의 
침투가 쉽지 않았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토착 민간신앙이 그만큼 견고했다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견고했나? 신라 사회가 
갖는 특수성, 예컨대 왕의 성씨가 박→석→김씨로 바뀐다는 것, 최고권력자의 
다양한 칭호(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 화백회의의 존재, 골품제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리라.(김석근, 1996b) 

이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사 및 설화에 대한 적절한 재구성을 통해서 
세 단계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장면 1: '사금갑(射琴匣)' 설화(10)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 있는 설화로, 사금갑(射琴匣)과 서출지(書出池)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만큼, 전체 내용을 보기로 
하자.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 즉위 10년 무진년(488년)에 (왕이) 
천천정에 행차했다. 마침 그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 말을 
하면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라고 일렀다. [혹은 말하기를 선덕왕이 
흥륜사에 향을 피우고 가려 할 때, 길에서 쥐의 무리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괴상하게 여겨 돌아와 점을 치니, 이튿날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으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틀린 것이다.] 왕이 말 탄 군사에게 까마귀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남쪽 피촌[지금의 양피사촌이다.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는 것을 떠나지 못하고 보다가 까마귀가 어디로 갔는지 
문득 잃어 버리고 길에서 헤매었다. 그러나 어떤 노인이 못에서 나와 글을 올렸다. 
그 겉면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사자가 돌아와 왕에게 그 편지를 바치니,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열지 않아 한 사람이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점치는 관원(日官)이 
아뢨다.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기고 열어보니 그 글에 '거문고갑을 쏘라'고 했다. 왕이 궁중에 
들어가 거문고갑을 보고 쏘니, 내전에서 향 사르는 승려가 궁중 여인과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그 뒤로,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上午) 등의 날이면 모든 일을 조심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고, 
15일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으로 제사지내는 나라 풍속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 전하는 말에 이것을 '달도'라고 하니, 슬퍼하고 근심하며 백 가지 
일을 꺼린다는 말이다. 그 못을 일컬어 편지 나온 못, 즉 서출지(書出池)라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면, 어째서 '사금갑'과 '서출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순서를 따지자면, 어떤 신비한 노인이 글월을 들고 나온 연못(서출지)이 
앞선다. 바로 그 글월에 "금갑을 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 글월을 읽어야 할 사람, 다시 말해서 그것이 전해져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 
사람은 바로 왕이다. 허나 왕은 만나기 어렵고, 설령 만난다 하더라도 사정을 
자세히 말하기란 예삿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사롭지 않은, 기이한 요소가 
필요하다. 그 기이함은 일단은 까마귀, 사람 말을 하는 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쥐의 행렬, 싸우고 있는 돼지 두 마리, 그리고 연못에서 나온 신비한 노인 
등에 의해서 채색되고 있다. 그 위에 신비감을 한층 더해 줄 뿐만 아니라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덧붙여졌다.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 알쏭달쏭한 수수께끼같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두 사람이 한 사람 보다 많다, 당연하다. 왕 역시 자신의 
호기심(무엇이 쓰여 있는가?)을 충족시키기보다는 공리적인 계산을 택한다. 굳이 
그것을 열어 보아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 열지 않아 한 사람이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것. 과연 왕(王)은 다르다. 허나, 정말 그렇게 단순하고 명백한 
산수라면, 아예 얘기꺼리가 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얘기가 된다. 


바로 그 때 '점치는 관원'이 등장한다.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 그 순간 누가 보더라도 분명했던 산수는 완전히 뒤집혀 버린다. 
왕 한 사람의 목숨은 서민 두 사람의 목숨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왕 
자신에게는. 자기 귀로 그런 말을 듣고서 열어 보지 않을 왕이 어디 있으랴. 왕은 
이미 흥분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메시지는 '거문고갑을 
쏘라'는 것. 점치는 사람까지 가세했으니,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활시위를 떠난 
화살,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소리. 마침내 밝혀진 놀라운 사실, 사실들. '아니, 
저런 죽일 년놈들이!' 노발충천(怒髮衝天)! 


아니나 다를까, 그 예언대로 두 사람이 죽었다. '향 사르는 승려'와 '궁중 여인', 
그들은 거문고갑에서 금지된 사랑(密愛), 그래서 더 달콤한 사랑(蜜愛)을 나누고 
있었다. 얘기인즉슨 궁중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류의 스캔들 같은 것. 서로 눈이 
맞아 불륜으로 뜨겁게 타올랐던 두 남녀, 그들은 장차 발각될 것이 두려워 왕을 
죽여 버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어쨌거나 목숨을 구하게 된 왕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왕은 고마운 
마음에 그 연못에 '글월이 나온 연못'(書出池)라는 명호(名號)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上午) 등의 날이면 
모든 일을 조심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고, 15일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으로 제사" 지내게 했다. 그것은 마침내 나라의 풍속이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렇듯 '사금갑' 설화는 일단은 궁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모 내지는 스캔들 
그리고 그 뒷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것은 단순한 
궁정 일화(逸話)가 아니다. 그 궁정 여인(宮女)의 정부(情夫)가 다름아닌 
"내전에서 향 사르던 승려(焚修僧)"이기 때문에. 불교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 
게다가 설화의 배경은 비처왕 10년(488), 그러니까 불교는 왕실에서 향을 사를 
정도는 되었지만, 아직 공인에는 이르지 못했던 그런 시점이다. 비밀은 푸는 
열쇠는 '신비한 까마귀, 쥐, 돼지, 노인, 점치는 사람,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 등의 날, 오기일(烏忌日), 찰밥으로 
제사지내는 나라 풍속, 그리고 달도' 등에 있다. 과연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그들의 정확한 실체를 다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토착 
민간신앙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며 역사적으로 그 기원을 달리하는 
복잡다기한 측면들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서 어떤 통일된 이론구조나 
체계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나 매개체 같은 것도 
없었으리라. 어떤 대립과 갈등 없이 그저 '동거' 혹은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허나 '고등한 이념체계로서의 불교'가 도입되면서부터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강력한 적의 등장. 그들은 불교에 대해 경계심과 위기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으며, 일종의 동지의식 같은 것을 갖게 되었으리라. 


해서 '사금갑' 설화는 점차로 궁중에서 향을 사를 정도로 세를 얻어가고 있던 
불교에 대한 토착 민간신앙측의 반격 행위를 상징적으로 전해주고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그때까지 누려온 기득권과 이념적 헤게모니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 반격은 향을 사르는 승려가, 나아가서는 불교가 하라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예컨대 간음과 같은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권력자인 
왕에게 아주 신비롭게 그리고 넌지시 일러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직접 위기를 
알려주는 노인의 경우, 불교의 유행에 대해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던 토착 
민간신앙의 대상 혹은 그 사제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평소 "천상과 지상의 이상현상(異常現象)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왕의 측근에서 활약한 관리"(서영대, 1991: 233)인 '점치는 
관원(日官)'까지 가세하고 있다. 그는 준비된 각본에 따르기라도 하듯이,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해석해 왕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새로 
들어온 승려에게서 강한 라이벌 의식, 나아가서는 자신의 입지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대대적인 연합전선을 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또 한가지, 토착 민간신앙은 어쨌거나 불교에 대한 우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사건의 당사자인 비처왕 역시, 불교에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배척했을 것이다. 그 동안 다소 소원했던 토착 민간신앙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비처왕 9년 봄 2월 시조가 처음 탄생한 
곳인 나을에 신궁(神宮)을 설치했다는 점은 하나의 지표가 된다.(11) 그 신궁의 
성격은, 아무리 보아도 불교보다는 전통적인 토착 민간신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최광식, 1994: 제2부 제3장) 이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후 
호국사찰로 유명한 황룡사가 건립되는 사연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진흥왕 
14년(553) 월성(月城) 동쪽에 신궁을 세우기 위해 터를 닦았는데, 거기서 황룡이 
출현했다. 왕은 이상하게 여겨 신궁을 고쳐 불교 사찰을 세우고, '황룡사'라는 
이름을 하사했다.(『三國史記』 권 4; 가마타 시게오, 신현숙옮김, 1988: 45) 
이처럼 신궁과 불교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장면 2: 이차돈, 순교(殉敎)하다?(12) 


불교는 '공인' 이전에 이미 신라에 도입되어 있었다. 이는 정사(正史) 
『三國史記』의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 15년에 불법이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 눌지왕 때에 중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로 된 방을 만들어 
그를 편히 모셨다. 이 때에 양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하사하였으나 
임금이나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라서 사람을 보내어 향을 가지고 여러 
군데 물어 보았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명목을 말하되 '이것을 태우면 향기로운 
냄새를 피우면서 피어오르는 까닭에 정성이 신성한데 사무친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은 삼보(三寶)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요, 셋째는 승가(僧伽)이다. 만일 이것을 태우고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 때마침 왕녀의 병으로 위독하여 왕은 묵호자를 시켜 향을 태우고 발원을 
하도록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진작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묵호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주었더니 묵호자가 나와 모례를 보고 얻은 예물들을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갈 데가 있어서 작별코자 한다' 하고는 얼마 후 간 곳이 없어졌다. 비처왕 
때에 이르러 아도(阿를 我로도 적는다) 화상이라는 이가 있어 상자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두어 해 동안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그의 상자 세 사람이 머물러 있으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이따금 불교를 신봉하는 자가 생겼다. 이 때에 와서 왕도 역시 
불교를 숭상하여 보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아니하고 이러쿵저러쿵 
구설이 많으므로 왕도 난처하였다."//// 


'사금갑'설화에서 보았듯이, 토착 민간신앙측의 견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제 왕까지 "불교를 숭상하여 
보고자" 했다. 허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아니하고 이러쿵저러쿵 구설이 많으므로 
왕도 난처하였다." 이는 의미심장하다. 여러 신하들은 왜 믿으려 하지 않을까. 
대체 어떻게 해야, 왕은 그 난처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때, 불교 공인의 주인공 이차돈이 등장한다. 흔히 사람들은, 이차돈이 불교를 
탄압하고 박해하던 권력에 저항하다가 마침내 처형당했으며, 그 때 흰 우유같은 
피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역시 『삼국사기』 
기록을 조금 더 보는 것이 좋겠다. 


////(1) 이 때에 가까운 신하 이차돈(혹은 처도라고도 한다)이 왕에게 여쭈어 
말하기를 '청컨대 제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물의(物議)를 규정지우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가 도를 숭상하여 보려는 것인데 무죄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른 일이다' 하였다.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죽더라도 만약에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2) 왕이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어 보았다. 모두가 말하기를 '요즘 중들을 
보니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것이 괴상한 속임수이니 떳떳한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회가 있을까 염려되오니 우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들어보면 불교는 그 연원이 심오하니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까 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강경한 
주장을 깨뜨릴 수 없구나. 너만이 딴 말을 하니 두 편을 다 따를 수는 없다' 하고 
마침내 형리에게 내려 장차 목을 베려 하였다. 이차돈이 죽을 임시에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가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는데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목을 베자 목 벤 자리로부터 피가 솟아 
나오는데 빛깔이 젖빛처럼 희었다. 여럿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 행사에 관한 
비방을 하지 못하였다."////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이차돈이 왕에게 다름 아닌 자신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물의를 잠재울 것을 '자청(自請)'했다는 점이다. "비록 죽더라도 만약에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겠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 역시 "불교를 
숭상하여 보고자" 했다. 구도로 보자면, 왕과 이차돈이 한 편이 되어 있고,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은 중들의 도는 떳떳한 도가 아니라 주장하는 "여러 신하들"이 
한 편이 되어 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휘어잡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차돈은 불교의 특장(特長)을 힘주어 말하고, 왕은 여러 사람들과 다른 주장을 
펴는 그를, 다시 말해 자신과 입장이 같은 그를 처형하게 된다. '준비된' 
죽음이었던 만큼, 그가 남긴 예언은 헛되지 않았다. 마치 젖빛처럼 흰 피가 
솟아오른 것이다.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맥으로 보자면 여러 
신하들이 직접 그 장면을 보았다는 식이다 - 이는 중요한 측면이다. 불교를 우습게 
보고 왈가왈부했던 여러 신하들은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더 이상 불교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공인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읽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찬자(撰者)로서의 김부식, 당시 대표적인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불교가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고려시대를 산 그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어떤가. 종교적인 
영역에서 일어난 이적(異蹟)인 만큼,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지만, 한 
번쯤은 "젖빛처럼 흰 피"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이같은 '석연치 않음'과 의문은, 『삼국유사』의 해당 부분(권 제 3 흥법 
'원종흥법 염촉멸신'조) 기록을 아울러 검토함으로써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고 
본다. 찬자 자신이 스님(일연)인 만큼,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하기조차 
하다. 그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역시 전문을 인용해보는 것이 좋으리라.(13) 


////(1) 여기에 궁중에서 길러낸 자가 있어 성은 박가요 자는 염촉이며 그의 
아버지는 자세치 않으나 할아버지는 아진종으로 즉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다. 그는 
송죽같은 절개로 자질을 삼고 거울같은 지조를 품었으며 적선가의 증손으로 임금의 
측근자가 될 것을 지망하였으며 거룩한 왕조의 충신으로 태평한 시절의 시종이 
되고자 하였다. 젊은 나이에 사인(신라의 벼슬에 대사, 소사가 있으니 대체로 낮은 
벼슬 등급이다) 벼슬에 임명되어 임금의 얼굴을 우르러 보기만 하여도 눈치로 
사정을 알아맞힐 만큼 되었다. 

(2) 그가 아뢰기를 '제가 들으매 옛날 사람은 계책을 나뭇꾼에게도 물었다 합니다. 
죄송하오나 하문하신 데 대하여 여쭙고저 원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의 할 바가 못된다' 하니, 사인이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을 전한 죄로 저를 형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살점을 여이고 고문당하더라도 한 
마리 새를 위하여 희생할 것이요 피를 뿌리고 목숨을 잡치어더라도 일곱 가지 
짐승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도록 함이어늘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랴! 너로서는 비록 공덕을 세우는 것으로 되지마는 죄를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인이 대답하여 '모든 버리기 어려운 것들 
중에도 생명보다 더 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로 위대한 교리가 시행되어 부처님의 햇빛이 다시 중천에 뜨게 
되고 대왕께서는 길이 평안하시오리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대공으로 솟을 마음을 가지며 기러기와 따오기 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횡단할 기세를 품나니 네야말로 이와 같고 보니 가위 보살같은 
행실이로구나'하고 여기서 왕은 일부러 위풍을 차려 바람같은 조두를 동서로 
늘이고 서리같은 병장기를 양쪽으로 벌린 후 일부러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묻기를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주저하고 듣지 않는가'(향전에 
이르기를 '염촉이 왕의 명령이라하여 공사를 일으켜 절을 창건한다는 뜻을 
전했더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말했다. 왕이 노하여 염촉을 책망하고 거짓 왕명을 
전하였다하여 형벌을 하다'라고 하였다) 하니 이때야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면서 
겁을 내어 정성껏 맹세를하여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이 사인을 불러 
힐문하니 사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3) 대왕이 노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니 관원들이 그를 묶어 가지고 
관가에까지 왔다. 사인이 발원을 하고 유사가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 올랐다. (향전에는 사인이 발원맹세를 하여 말하기를 '큰 성인이신 법왕님이 
불교를 진흥시키고저 하시매 저는 신명을 돌보지 않겠사오니 한없이 오랜 세월에 
인연을 맺으시와 하늘은 상서로운 징조를 내려 두루 인간들에게 보여 주소서 라고 
하니 이때야 그의 머리가 날라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여졌다고 운운하였다.) 이 
때에 하늘이 사방으로 침침해들며 저녁나절 햇빛이 캄캄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빗방울이 꽃인양 나부끼며 떨어졌다. 임금은 애통해 하면서 구슬픈 눈물로 
곤룡포를 적시고 여러 재상들은 근심하여 머리에 쓴 사모에 땀이 흘렀다."(강조는 
글쓴이.)//// 

무엇보다 정사(正史)로서의 『삼국사기』의 기록과 얼마나 다른지를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공통되는 점도 많다. 그가 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 왕의 
불교 공인 노선에 동의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자처했다는 것 
등.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는 점도 그렇긴 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자면, 역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이 
'종교적인 색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반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인 색채'를 풍기고 있다. 게다가 '향전운(鄕傳云)'이라 하여 세간에 
떠도는 소문들까지 적어놓고 있어, 당시의 실제 상황을 유추하는데 도움이 된다. 


엄격하게 '역사적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삼국유사』 기록이 훨씬 
더 리얼하고 실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2)의 극히 리얼한 
서술에 비하면, (3)의 흰 젖(白乳)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거나 그의 머리가 
금강산으로 날아갔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생각건대 
그것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픽션 내지 퍼트린 소문 정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차돈은 『삼국사기』 기록처럼 뭇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된 
것이라기보다는 관아로 끌려가서 (비밀리에?) 처형당한 것이 아닐까. "관원들이 
그를 묶어 가지고 관가에까지 왔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직접 본 사람은 관아의 
담당자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왕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왕은 일부러 위풍을 차려 바람같은 조두를 동서로 늘이고 서리같은 
병장기를 양쪽으로 벌린 후"였다. 이미 각본이 마련된 후였다. 이쯤에서, 우리는 
아주 조심스레, "젖빛처럼 흰 피"가 의도적으로 전해진 말(傳言) 내지 소문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임금의 얼굴을 우르러 보기만 하여도 눈치로 사정을 알아맞힐 만큼" 측근이었던 
이차돈(염촉)은, 왕에게, 자신을 기꺼이 정치적인 희생양(scape goats)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릇되게 말을 전한 죄로 저를 형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왜 희생양이 필요한가. "제가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로 위대한 교리가 시행되어 부처님의 햇빛이 다시 
중천에 뜨게 되고 대왕께서는 길이 평안하시리라는 것" 때문에. "대왕께서는 길이 
평안"하실 수 있다고 한 점이 의미심장하다. 왕으로서는 죄 없는 사람, 더구나 
총애하는 신하이자 자신의 5촌 조카뻘이 되는 염촉을 죽이는 것이 달가울 리가 
없다. 허나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적으로 왕이 "애통해 하면서 구슬픈 눈물로 곤룡포를 적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 이 같은 비극이 있어야 했을까. 역시 왕과 "여러 신하들"의 대립구조를 
빼놓고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 대립과 갈등의 한 가운데, 바로 불교가, 불교의 
공인 문제가 놓여 있다. 이는 왕과 염촉의 대화, 그리고 향전의 내용(즉 '왕의 
명령이라하여 절을 지은 것')에 의해 뒷받침된다. 왕은 불교를 공인하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들의 '결사반대'라는 제동에 걸려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신라에서 국왕이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귀족들이 이를 완강히 반대한 데에는 
불교수용이 국왕측과 귀족측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크게 엇갈리게 한 것이기 
때문"(서영대, 1992: 255)이다. 그렇다, 그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면 여러 신하들의 "정치적인 이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불교를 반대하는 여러 신하들의 정신세계 내지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통, 우리의 관심사로 표현하자면 토착 
민간신앙의 담지자들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세계관이자 동시에 정치적 입지를 
공고하게 해주는 정치이념이기도 했다. 신라에서 전제왕권 강화와 고대국가 성립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훨씬 늦었다. 그 말은 구시대의 유제(遺制)가 강건하게 
온존했다는 것과도 같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왕실의 성씨가 박→석→김씨로 
바뀌는 것, 화백회의와 갈문왕의 존재, 골품제, 각 부족들의 설화 등이 그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중앙의 귀족들(여러 신하들)이 강한 반면, 왕권은 미약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출자(出自)와 관련된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예컨대 
박혁거세, 석탈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가 계속 
그런 전통에 의해서 이루어져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유지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왕으로서는 자연히 강력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한 고대 국가를 꿈꾸지 않을 수 
없었으며, 때마침 불교에서 그런 바램을 정당화·합리화 해줄 수 있는 
논리(정치철학)를 찾아낼 수 있었다.(14) 여러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서는, 역시 어떤 이벤트가 필요했다. 이차돈은 주인공이 되어 
그 이벤트를 추진했으며, 왕은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일부러 위풍을 차려 
바람같은 조두를 동서로 늘이고 서리 같은 병장기를 양쪽으로 벌린 후에" 신하들을 
불러 놓고 무작정 다그쳤다. 기선을 제압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왔다가, 서슬 시퍼런 왕의 얼굴과 급전되는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왕은 
자신의 명령 날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호통치고 또 처형하는 모습을 연출해냈다. 
왕은 자신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신하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공포감'을 안겨줄 수 있었다. 


해서 우리는 "이차돈의 순교는 순교가 아니다. 그것은 왕권이 귀족세력을 
진압(鎭護)하기 위한 친위쿠데타였고, 그러한 종교쿠데타를 통하여 왕권은 비약적 
강화의 계기를 획득하는 호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김용옥, 1989: 166)라는 
지적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한 불교학자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이차돈의 순교전설이 생긴 배경에는 재래의 고유신앙을 받들던 씨족과 새로운 
진보사상인 불교를 국교로 삼으려고 하는 법흥왕과의 사이에 벌어진 대립이 
있었다. 불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순교적인 활동을 한 사람이 나타나 법흥왕을 도와 
모든 씨족들의 반대를 억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법흥왕은 왜 불교공인의 결단을 
내렸는가. 국내적으로는 모든 부족을 통일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외래사상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며, 직접적인 동기는 8년(521) 백제의 사신을 소개시키고 
사신을 양(梁)으로 파견하여 조공한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제의 
불교에 의한 국가통치적 현실이 법흥왕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이미 
491년에 율령을 공포하였고 율령에 따라 국가통치를 불교에 의해 부족통일국가의 
이념을 확립하고 있었다." (가마타 시게오, 신현숙옮김, 1988: 44)//// 


우리의 관심사로 보자면, 이차돈 순교와 527년이라는 해는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의 
힘겨루기가 최고 절정에 달한 그런 지점이다. 거기서 또 팽팽하게 맞섰던 두 
세력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 받음과 
동시에 사상계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3) 장면 3: '독룡(毒龍)과 나찰녀(羅刹女)' 설화(15) 


불교와 토착 민간신앙의 힘겨루기는 이제 세 번째 단계, 즉 마지막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불교는,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인왕경』 등의 호국경전, 백좌강회와 팔관회, 황룡사 등의 호국사찰 건립, 
원광·자장·원효·의상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등장이 신라 불교를 수놓게 
된다.(김석근, 1996b)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양자의 관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승패가 결정나는 순간,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먼저 토착 민간신앙쪽을 간단히 
살펴본 후 불교로 넘어가기로 하자. 


토착 민간신앙의 경우 문제가 심각했다. 어쩔 수 없이 불교에 정치적·사상적 
헤게모니를 내주고서 부차적인 범주의 신앙과 종교(혹은 전통과 관습) 차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게다가 그대로 있다가는 '존재 자체의 위기'에 몰리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불교의 강력한 논리와 무기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인만큼, 실제로 그런 모습을 일일이 다 찾아낼 수는 없다. 토착 
민간신앙이라는 범주 자체가 이미 희미해져 있으니. 역시 기록은 이긴 자의 몫이자 
특권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실제로 불교 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불교라는 고등한 형이상학을 접함으로써 사유의 구조와 폭이 
확대되고, 자연히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사유가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 
내지 심증(心證)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물증(物證)이 필요하다. 허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샤머니즘(무속)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무속에서 
섬기는 무신(巫神)들 중에 "석가모니, 삼불제석, 약사보살, 지장보살" 등이 
있으며(16), 샤머니즘의 제의(祭儀)인 굿에서 볼 수 있는 불교적 요소(특히 
제석거리), '보살', '법사'를 자칭하는 무당들, 원형과는 달리 불교의 영향을 받은 
내세관(김태곤, 1993: 191-196) 등에서 그같은 편린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다. 


불교의 경우, 이제 '국가 공인' 차원을 떠나 '일반 민중' 차원으로 내려가 뿌리를 
내려야만 했다. 한편으로 불교의 우위를 인지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은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다음의 설화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만어사(萬魚寺) 절은 옛날의 자성산이니 
아야사산이라 하기도 한다. (아야사는 마땅히 마야사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魚)라고 이를 것이다.) 그 옆에 가라국(呵喝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곧 수로왕이었다. 이 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그 안에 독한 용(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계집 악귀)가 살고 있어 서로 왕래하고 교접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때로 뇌우(雷雨)를 내리곤 해서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잘 되지 않았다. 
왕은 주술로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머리 숙여 
공손히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그제야 나찰녀는 오계(五戒)를 받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재해가 없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동해의 어룡(魚龍)이 골속에 가득찬 
돌로 변하여 저마다 쇠북과 경쇠 소리를 냈다고 한다. 이상은 옛 기록이다.//// 


일연이 '만어산 부처님 영상(萬魚佛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첫 머리에 
놓은 옛 기록 부분이다. 그도 정확한 년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본문에 
가락국과 수로왕 이야기가 간략하게 등장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왜냐? 
부처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 도입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지리적으로는 경상남도 밀양군에 있는 만어산으로 설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에, 
예전의 가락국 땅 만어산에서 있던 일에 대한 옛 기록' 정도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설화에 등장하는 주요한 행위자는 독한 용(毒龍)과 다섯 나찰녀 그리고 부처다. 
왕이 등장하지만, 나약한 인간세계를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독한 용은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다섯 나찰녀는 만어산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연못, 강, 
바다(동해)를 장악하고 있는 용과 산을 지배하고 있는 신(산신?)의 대표격이다. 
산과 바다, 이는 곧 이 땅의 상징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처럼. 따라서 그들은 이 
땅에 뿌리를 둔 토착 민간신앙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필시 옛 사람들의 소박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앞서 본 사금갑 설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서출지(書出池) 역시 연못이었다, 그 연못에서 어떤 노인이 나와 서찰을 
건네주고는 사라졌다. 연못과 용 그리고 신비한 노인은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용과 나찰녀들은 "서로 왕래하고 교접하기도 
했다(往來交通)." 사이가 좋았다는 것. 지배 영역이 서로 다른 만큼(혹은 보완적인 
만큼), 애초에 갈등의 소지가 적었으리라. 새로이 침입해온 공동의 적(예컨대 
불교)에 대해서는 서로 연대할 수도 있었으리라. 남성 이미지의 용과 나찰녀들이 
한 데 어울렸을 수도 있겠다.(17) 


그런데 그들은 "뇌우(雷雨)를 내리곤 해서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잘 되지" 않도록 
했다. 민폐를 심히 끼친 것이다. 왕은 "주술로 그것을 막으려" 했다. 그 주술의 
내용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식의 의례(儀禮)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아마 온갖 방법을 다 썼을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왕은 
"마침내 머리숙여 공손히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전통적 방식, 나아가 토착 
민간신앙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지한 후, 마침내 왕은 불교에 호소한다. 여기서 
부처가 등장한다. 부처는 너무나 손쉽게 문제를 해결해버린다. 저 놀라운 위력, 
왕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행패를 부리던 나찰녀로 
하여금 "오계(五戒)를 받게" 한 것이다. 독한 용은 살짝 빠져 있으나, 한 패였던 
만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는 문맥을 뒤틀면서 갑작스레 등장하는 "동해의 
어룡(魚龍)이 골속에 가득찬 돌로 변하여 저마다 쇠북과 경쇠 소리를 냈다"는 것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왕이 차후 어떤 정책을 취했을 것인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다. 


이렇듯 불교는 다양한 토착 민간신앙에 대해 계속 우위를 확보해갔으며, 또 일반 
민중들에게 그런 사실을 널리 알리려 했을 것이다. '보라, 우리의 강력한 파워를, 
이제 저들이 아닌 우리에게로 오라.' 그런데 드러내놓고 선전하자니, 어딘지 
모르게 쑥스럽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 그런 류의 이야기(說話)를 
만들어서 민간에 유포시키는 것이다. 일단은 재미있고, 그리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은근히 불교에 호감을 갖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컨대 중국과 신라에서 
사람들을 해치고 질병을 일으키던 독룡을 혜통이 굴복시켜 살생계를 주었다는 
'혜통항룡(惠通降龍)' 설화 등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 중에는 불교 
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당시의 상황에 맞게 패러디한 것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측면, 그것은 용과 나찰녀 등 민간신앙의 대상들이 
오계를 받는 형태 등을 통해서, 불교에 포섭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이용가치가 있다. 그들에게 적절한 위상을 마련해주는 형태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감싸안았다. 나름대로 불교를 수호하거나 돕거나 하는 역할이 
주어졌다.(18) "동해의 어룡(魚龍)이 골속에 가득찬 돌로 변하여 저마다 쇠북과 
경쇠 소리를 냈다"는 식이다. 그것은 마침내 산신각이나 용왕당이라는 형태를 통해 
사원 내부에까지 포섭된 것으로 보인다.(19) 불교는 심지어 지난날의 신성지역 
예컨대 소도(蘇塗)나 갈반지(葛蟠地) 같은 지난날 민간신앙의 신성(神聖) 지역까지 
불교적으로 변용시켜가게 되었다.(서영대, 1991: 265-290) 이 같은 추세가 끝간데, 
바로 거기서 우리는 독자적인 '한국'불교를 만나게 된다. 사실 이런 패턴은 불교가 
흥기할 당시 인도에서 전통적인 신격을 포용,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 그 원형을 
이루고 있다. 생각건대 그것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리고 불교가 전파된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되풀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의 신들은 
본지(本地)인 부처와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어 그 자취를 
드러낸 것이라는 이른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불교 이전의 전통문화이자 
종교인 본 종교와 불교가 서로 독특하게 결합하여 성립된 티벳트불교(김수남, 
1997: 154)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습합 현상에 관해서는, 이 글을 쓰고 있던 도중에 직접 경험한 사례를 하나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하자: 더위와 장마가 기승을 부리다 모처럼 화창한 
날씨가 선보인 일요일(8월 16일),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한 친구로부터 '얘기도 
하면서 같이 관악산 등반을 하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얼마전, 무슨 얘기 
끝에 아직까지 관악산에 오른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언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서울대 교정을 갓 벗어났을 무렵 조그만 암자가 눈에 들어 왔고, 
모처럼 왔으니 들렀다 가자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런데 암자 내에 들어서는 
순간, 내심으로 나는 '아!'하는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벽에 붙어있는 
플랭카드에서 '관악산 OO암// 대웅전 산신각 칠성각 // 동기와 불사'라는 구절을 
읽었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그 조그만 암자에도 산신각과 칠성각이 있는게 
아닌가. 바로 내가 열심히 쓰고 있던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가 습합한 현장 내지 
살아있는 유적을 실제로 확인하게 된 셈이다. "산신은 원래의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민족 고유의 토속신이다. 그러나 불교가 재래 신앙을 수용할 때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삼아,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의 일부를 산신에게 
부여하였다. …… 산신각은 불교 바깥의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불교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김현준, 1991: 308) 
그리고 "칠성각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칠성을 봉안한 
전각이다. 따라서 이 전각을 북두각(北斗閣)이라고도 한다. 칠성은 원래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중국에서 형성된 다음 우리 나라에 유입된 신이다. 
우리 나라 불교 속에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 수용되었다가 다시 수명신인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었고, 이를 불교화시킴에 따라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서 
봉안하게 된 것이다."(김현준, 1991: 310∼311) 허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산신각과 
칠성각은 이미 오래 전에 한국 불교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사원에 전혀 없는 종교공간"이며, 그들이야말로 "중국불교 사원에도 일본불교의 
사원에도 없는 조선불교 독자적인 사원 내에 있는 건조물이다."(鎌田茂雄, 1982: 
6) 나는 두 전각을 차례로 찾아 정중하게 절했다, 그곳을 찾았을 그리고 앞으로도 
찾을 수많은 불자(佛子)들의 신심(信心)을 생각하면서. 

 

-------------------------------------------------------------------------------
-

4. '신들의 민주주의?'
 이 글에서는, 일차적으로 토착 민간신앙과 불교 사이의 '거대한 갈등과 습합의 
드라마'를 양자의 '힘겨루기' 장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했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설령 그것이 아무리 신성하고 엄격한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 땅에 발딛고 사는 인간들의 호흡과 땀에 젖어들게 되면, 자연히 
일정한 '변용'이 일어나 거기에 맞는 형태로 된다는 것. 설령 그 시점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다 할지라도, 그 과정은 엄연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 

극히 단순화시켜서 말하면, 동아시아의 사상사는 그같은 '갈등과 습합의 드라마'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갈등과 대립이 있지만, 초점은 언제나 '사상계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것이었다. 일단 승패가 결정되고 나면,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관용'(tolerance)은 있었다. 불교를 그렇게 배척해마지 않았던 
성리학자들이지만, 그들은 불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성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한, 문제는 없었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도 구현되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만 해도 같은 집에서 
아버지는 유학자,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들은 아무런 갈등없이 아들딸 낳고 잘도 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근대의 여명기, 우리가 서구 세계와 만나게 되면서, 그런 전통(?) 역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니 지금도 맞고 있다. 해서 이미 
살펴본 내용을 새삼스레 요약, 정리하기 보다는, 오늘의 우리 사회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물음 하나를 던지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구 세계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기독교 문명'을 떠올리게 된다.(20) 
그만큼 기독교가 동아시아 사회에 던진 충격은 컸다. 그것은 전혀 낯선 새로운 
세계였다. 실제로 성경(the Bible)을 한 페이지라도 펼쳐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신은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전지전능한 신(God)'이므로. 그는 하늘과 땅은 물론이고 그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창조주(the Creator) 하느님과 피조물(the creature)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존재한다. 우리 인간의 경우, 원죄의식(the original sin)이 그 단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선언한다. 
"그 분은 질투하는 신이시오. 여러분이 고의로든 실수로든 죄를 지으면, 그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야훼께서 여태까지는 여러분에게 잘해주셨지만, 여러분이 
만일 이제라도 그를 버리고 남의 나라 신을 섬긴다면, 반드시 앙화를 내려 
여러분을 멸망시켜버리실 것이오."('여호수아') 이른바 '협박의 하느님'(God of 
intimidation). '신의 도구'(Gottes Werkzeug) '신의 영광을 위해서'(zu seinem 
Ruhm) 그리고 '성전(聖戰)'(the Holy War) 같은 구절들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21) 


그런 측면에서 나는 농담반진담반으로 '신들의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보곤 한다. 이른바 신들 사이의 민주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공고화, 그들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유일신' 체계가 아닐까. 그것은 인간세계의 
'나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것은 논리의 명쾌함, 
분명한 목적의식, 그리고 신도들 사이의 응집력을 보여주지만 그와 더불어 독선과 
오만 그리고 배타성도 보여주고 있다.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은 이미 갈등과 투쟁을 배태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논리와 동아시아의 (종교적) 다원주의 전통은 과연 어떠한 
'갈등과 습합의 드라마'를 엮어왔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엮어갈 것인가. 
지금까지는 '갈등과 대립'이 더 두드러 보일는지도 모르겠다.(22)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떤 형태로건 기독교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다른 국가의 기독교와 구분되는 '한국'기독교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거기서 과연 한국적인 부분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적으로 
만들어 주는 부분은 또 어떤 것인가.(23)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한 오지(奧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십자가가 아주 특이했다. 십자가는 십자간데, 그 사이에 소나무 가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었다. 해설에 의하면, 십자가는 당연히 기독교를 나타내며, 소나무 
가지는 그들의 전통 신앙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변형 십자가는 곧 기독교와 전통 
신앙이 '습합'된 형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라 했다. 그걸 들으면서,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24)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문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한 번 얘기해 볼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신부와 스님 목사, 그리고 원불교, 천도교, 유교 
등 국내 각 교단의 성직자와 소장학자들이 무녀를 초청, 교파를 초월한 대화의 
장을 계획해" 마련한 것이 좋은 예가 된다.(『동아일보』. 97. 2. 14.) 거기서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 전통문화와 잇닿아 있으며 그 종교적 심성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는 샤머니즘과의 공개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현대 종교와 
샤머니즘'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기독교 불교 등 6개 교단, 무녀(巫女)들과 
'샤머니즘 대화'"를 나누었다. 기꺼이 초청에 응한 30대 초반 무녀(정순덕)의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겠다는 열린 마음가짐", 그리고 "각 종교는 비록 
윤리체계가 달라도 마치 등산할 때 하나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인 
것처럼 종교간 만남의 장을 통해 사회의 도덕적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등 서로 
배우고 공유하는 기회를 넓혀야 한다"(길희성 교수)는 발언 등은, 내가 말하는 
'신들의 민주주의?' 전망을 밝히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문제, 그것은 동아시아적 전통과 기독교의 '만남과 
대화(습합)'의 귀착점이 어디쯤 될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일신'과 '원죄의식' 관념이 어느 정도 변용될 수 있는지, 또 있다면 어떻게 
변용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어떨까. 정말이지 궁금하다. 아아,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알고 계실는지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