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2월 4일 금요일 오후 05시 10분 51초 제 목(Title): 창비/임형택 한국문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 한국문화에 대한 역사적 인식논리 --동아시아 전통 및 근대적 세계와 관련해서 임형택 1.역사적 권역으로서의 동아시아 세계 2.동아시아 세계에서 문명의 개념 3.근대적 세계로의 전입 과정 4.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명담론들 5.식민지시기 우리 문화의 인식 문제 6.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명담론들 필자 자신 20세기의 인간으로 취급되겠지만, 이제 곧 작별하는 20세기는 이전의 오랜 기간과 너무도 달라진 시대이다. 반만년의 역사와 문화라고 자랑들 하는 이 나라, 6백년의 고도 서울에는 1백년 넘는 건축물로서 실제 삶의 공간으로 이용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더러 남아 있기야 하지만 오직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이 오늘날 영위하는 생활이며 문화를 혹시 우리 조상님들이 와서 보신다면 얼마나 낯설게 여길 것인가. 사람 자체가 의식은 물론 생김새까지도 뒤바뀐 모습이다. 최근 1백년을 경과하는 사이에 이질화가 급속히 진행된 나머지, 앞의 장구한 시간대와는 마침내 문화적 단층이 현격해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당위론으로 판단해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미학적으로 평가해서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고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현상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포괄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단절의 이면에는 연속성의 저류가 있다. 주로 자각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저절로 그러나 폭넓게 이루어지는 형태다. 뿐 아니고 적극적인 노력도 상당히 바쳐졌다. 전통의 부활, 동양식과 서양식의 결합을 위한 창조적 시도들 가운데서 기대해봄직한 성과들이 없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문화를 전체적으로 살피자면 이런 면들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필자는 한국문화를 인식하는 논리를 역사적으로 통관해서 세워보고자 한다. 물론 힘에 버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만두지 않고 시론이나마 펴려는 데는 까닭이 있다. 20세기를 살아오면서 한문학을 주전공으로 삼아 공부하고 글쓰기를 한 인간으로 세기 전환점에 서서 자기확인을 겸해 우리 문화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작금에 대두하는 민족과 문화의 위기론에 관련하여, 문제를 근원적으로 사고하는 데 참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역사적 권역으로서의 동아시아 세계 신채호(申采浩)의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로 요약되는 투쟁사관의 논리는 민족문화를 인식함에 있어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는 직접으로 ‘아’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에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강토의 범위가 줄어졌나”라고, 역시 상호관계를 맺고 교류한 측면에 대해서 다분히 부정적·배타적으로 치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자의 논리는 일찍이 홍기문(洪起文)으로부터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申丹齋學說의 批判」) 그러나 일제하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 제1의 과제인 마당에서 투쟁사관은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해 마땅하다. 뿐 아니라 주체를 강조하면서도 고립화시키지 않고 ‘비아’라는 대립항을 설정해서 시야의 폭을 넓게 가질 가능성을 열어준 점은 따로 또 평가할 부분이다. 하지만, ‘나’와 연관된 외부를 투쟁의 측면에서만 보고 여러 착종된 면들과 함께 선린호혜(善隣互惠)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한 태도는 다시 성찰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무릇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며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름이 있지 않다. 때문에 동방의 사람들이 혹은 불자도 되고 혹은 유자도 되어 필히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가서 중역(重譯)으로 통하여 학업을 닦기도 하는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의 첫머리다. 국경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성,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 및 그 진리를 향해 해외로 진출한 신라인의 진취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위의 ‘중역’이란 이중통역을 뜻하는 말이니 불교의 원류를 찾아 멀리 인도까지 간 경우를 가리킬 터이다. 이렇듯 천여년 전에 보여주었던 최치원의 진취성은 박제가(朴齊家) 같은 실학파 학자로부터 흠모를 받기까지 했으나 오히려 근대 이후로 들어와서는 다분히 부정적으로 비춰졌다. 최치원의 그러한 자세 자체가 사대주의 내지 모화주의(慕華主義)로 비판을 당하게 되었으니 신채호는 “지나사상의 노예인 최치원”이라고까지 매도한 바 있다. 일찍이 중세의 질곡에서 자유정신을 체현하였던 16세기 조선의 시인 백호 임제(林悌)는 죽음에 이르러 역시 특이한 말을 남겼다. “사이팔만(四夷八蠻)으로 일컬어지는 변방의 여러 민족들이 황제로 호령해보지 않은 자가 없었다. 우리만 예로부터 못했으니 이런 보잘것없는 나라에 태어났다 가는데 내 죽음을 슬퍼할 것이 있느냐?” 사대로 위축된 조선조 당시의 민족 현실을 통한하는 신음으로 여겨진다. 어쨌건 그는 동아시아 영역을 역시 하나의 천하로 바라본 것이다. 고대 중국의 철인 장자는 이르기를 “육합(六合)의 바깥은 성인이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육합이란 천지사방, 즉 우주를 뜻하지만 기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소우주다. 북으로 고비사막, 남으로 인도차이나, 동으로 일본열도, 서로 곤륜산맥에 이르는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육합─인식범위의 바깥은 아무리 성인이라도 알 수 없기에 불문에 붙여 논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리라. 전해오는 ‘천하도’란 이름의 고지도를 펼쳐보면 역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로 국한되어 있다. 해가 뜨는 부상(扶桑)이 동쪽 가에, 해가 지는 함지(咸池)가 서쪽 가에 선명히 그려져 있는가 하면, 대인국·소인국·여인국 등등의 명목이 변두리로 모호하게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던 천하관을 출력시킨 모양이다. 바로 이러한 천하관에 동아시아 세계는 결부되어 있었다. 이 중국 중심의 천하에서는, 사이팔만이 ‘저마다 홍길동’으로 제각기 황제를 자처했다 하였듯, 한족(漢族)과 주변 여러 민족의 역학관계에 의해 주인이 교체되는 역사가 전개되어왔다. 그 세계의 동쪽 끝에 놓인 우리나라는 역사축의 움직임을 따라서 전환을 한 것이다. 원·명의 교체가 일어난 14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가 있었거니와, 앞의 7세기에는 대륙에 남북조시대가 당제국으로 통합되는 과정과 연계되어 우리 한반도에도 삼국의 대립이 해소되었고, 10세기 당제국의 몰락과 나려(羅麗)의 교체가 궤적을 같이했다. 그 이후로도 19세기말 20세기초의 근대적 전환의 정황 또한 여러모로 유사했다. 이 연대기적 사실을 새삼 들추는 것은 그 사실의 의미를 주의깊게 보자는 뜻에서다. 바깥의 동향을 고려하지 않거나 고려하더라도 투쟁의 측면에서만 보면 역사를 충분히, 총체적으로 읽어내기 어렵다. 동(북)아시아 역사권은 소우주로서 그대로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2. 동아시아 세계에서 문명의 개념 동아시아 세계는 동서를 대비하는 관점에서 말하면 서방의 라틴문화권·기독교문명권에 대응되는 것이다. 이 권역에 형성된 문명은 종래 ‘서동문(書同文)’으로 일컫던 ‘한자문화권’이다. ‘행동륜(行同倫)’이란 문자에 의거해서 표현하면 ‘유교문명권’으로도 칭할 수 있는 것이다.註1) 알다시피 지금 통용하는 문명 혹은 문화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는 신조어가 아니고 예전부터 있던 말을 원용한 경우다. 더욱이 문명이란 말 자체가 유서깊고 한국 사상사에서도 주의해야 할 의의를 함축하고 있다. 문명의 동양적 개념을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문명’이라는 두 자로 구성된 단어에서 주어는 ‘문’이다. ‘文明’의 ‘文’은 본디 문의 가지가지로 층위가 엇갈리고 범위가 다른 뜻풀이에서 경천위지(經天緯地)에 해당하는 것이다. 천지간에서 인간사회의 제도를 마련하고 그 삶을 위해 문물을 개발하는 것이 이른바 경천위지다. 이는 성인의 공능(功能)이니 자고로 요순이나 공자에게 부여되었던 ‘문’의 개념이다.註2) 이 문채(文彩), 문덕(文德)이 찬연히 빛나는 상태를 ‘문명’이라 했던 것이다. 『주역』의 논리를 보면 인간 만사의 변화를 해명하는 데 문명이 중요한 의미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첫머리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서부터 “출현한 용이 지상에 있음에 천하가 문명한다(見龍在田 天下文明)”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 분괘(賁卦)에 와서는 ‘분(賁)’이란 괘이름 자체가 인간이 공력을 가해 빛나게 되는 상태, 즉 문명을 형상화하고 있다. 지상에 문명이 펼쳐지는 형상 거기에 인문이란 개념이 부여된다. 그리하여 “인문에서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한다(觀乎人文 化成天下: 化成天下는 經天緯地와 같은 의미)”고 하였으니 문명은 인류적 이상의 구현태인 셈이다. 곧 “출현한 용이 지상에 있음에 천하가 문명한다”와 의미 맥락이 상통하는 것이다. 용이란 상징물은 이 경우 성인을 암시할 터인데 직접적으로는 양기운을 뜻한다. 에너지를 문명의 시발로 사고한 것으로 붙여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해가 떠서 어둠이 가시고 세상이 밝아오는 것을 가리켜 문명이라 이르기도 하였다. 고려의 시인 진화(陳 의 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노니 하늘 동쪽으로 해가 붉게 떠오르려네(坐待文明旦 天東日欲紅)”는 바로 이 뜻을 취해 쓴 것이다. 이 시의 문면에서 문명의 일차적 어의는 해가 떠서 밝아지는 자연현상을 가리킨다. 그 자연현상을 감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붙인 뜻이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앞구절에서 “북쪽 변방은 아직 혼몽하다(北塞尙昏蒙)”고 한즉 ‘문명의 아침’은 어둡고 미개한 상태에 대조되는 것이다. 비록 시적 표현이긴 하지만 문명의 의미가 야만의 상대적 개념으로 떠오른 점은 주목을 요한다. 실학파 학자들에 이르러 문명은 이 개념으로 확실히 잡히게 된다. 정약용(丁若鏞)의 글에서 중국은 문명이 지방에까지 보급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달라 서울 도성 밖으로 십리만 벗어나도 홍황(鴻荒)세계나 다름없다고 말한 곳이 있다.(「示二兒家誡」) 홍황세계에 대조되는 개념의 문명, 그 원적지는 아무래도 중국일 터이며, 조선의 그 현주소는 수도 서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렇듯 ‘문’의 독특한 의미에 기초해서 성립·발전한 동양적(중국적) 개념의 문명이 한자문화권으로 구현된 사실은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하겠다. 다음에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중국문명의 위상과 그것의 주변부와의 관계를 간략히 짚어보기로 한다. 이 권역에서 중국의 비중은 역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척 막대하다. 중국이란 나라는 자고로 흥망·교체의 무상한 변천을 거듭했으되 하여간 그 세계에서는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서 꾸준히 판도를 확대하고 인종을 포괄하여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유럽 지역을 비롯한 여러 권역과는 전혀 다른, 동아시아의 특수한 정황이다. 문명 역시 중국을 벗어나서는 개념 범주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역사상 상·주(商周)로부터 한·당·송(漢唐宋)으로 이어진 문화전통이 적어도 이 권역에서는 보편의 가치로 인식·통용되고 있었다. ‘화하문명(華夏文明)’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에 문명의 중심부로서의 중화에 대하여 그 주변 인종의 지역은 고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를 ‘바르바르’라고 불렀듯 야만시하였다. 인종을 구분하던 화이(華夷)란 말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문화론적 개념으로 전이된다. 문명이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파급되는 것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한 일로 생각했으니, ‘용하변이(用夏變夷)’가 그것이다. 화하의 문명을 가지고 야만적인 주변부의 인종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형성된 한자문명권은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으로 국제관계의 질서를 유지해왔다. 이 조공체제가 중세의 중국중심적 세계질서를 반영한 형태였음은 물론이다. 한반도는 중국중심적 세계에서 비록 주변부에 속했으나 소중화로 자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처럼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일본은 그 세계체제에서 주변부의 주변부로 치부되었다. 주로 지리적 거리 때문이었겠는데 그로 인해 일본인 스스로 당착(撞着)된 의식을 보이고 있었다. 자기들의 영역을 신주(神州)로 자부하는 등 일본중심의 천하관을 내세우는 한편 중심부로 기울어진 마음은 마치 꿈속에서 임을 그리듯 하였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17세기에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당인(唐人)’으로 일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註3) 중국과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인을 통해 중국문화(중심부)에 대한 짝사랑을 해소했던 셈이다. ‘소중화’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얻었다고나 할까. 오늘날의 관점에서 소중화란 떳떳치 못하게 의식되는 면이 있거니와, 일본은 중국과 상대적으로 소원했던 관계가 도리어 자존심을 세워주는 재료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항시 한족이 주인 노릇을 한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역사를 보더라도 몽골족의 원에서 한족의 명으로 넘어온 이후로도 다시 만주족의 청이 들어섰다가는 20세기 들어 겨우 한족의 주권을 회복한 것이다. 이런 역사의 실제 상황에 화이론은 어떻게 굴절하였던가? 예컨대 17세기 청황제 체제의 등장에 대해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이념에 입각해 북벌(北伐)을 국시로 내세웠던 것이다. 청황제 체제는 ‘천하일통(天下一統)’에 ‘화이일가(華夷一家)’의 논리를 세워 중국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청의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3~35)가 조칙에서 밝힌 말인데 한·당·송의 전성시에도 북적(北狄)·서융(西戎)은 신복(臣服)하지 않아 변방의 우환이 끊이지 않았으나 지금 자기들이 들어와 군주의 자리에 앉은 이후 ‘천하일통’이 한결 광역으로 완수되어 화이의 구분을 해소하는 대통합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한족 본위로부터 ‘화이일가’로 지양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문명 또한 화이를 혼합하는 형태를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청황제들이 제2의 수도로 건설했던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증언하고 있는 바다. 그곳의 궁전과 사원의 현판들을 보면 모두 한·만·몽(漢滿蒙)의 문자를 같이 쓰고 있거니와, 화하의 전통에 티벳·몽골 등의 종교·문화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모습은 지금 보아도 자못 장관이다. ‘화이일가’의 천하일통론은 물론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출한 자의 지배합리화를 위한 논리다. 그렇긴 하지만 한족 본위의 화이론을 현실적으로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제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대국주의적인 논리다. 한족 본위의 정통적 중국중심주의는 아니지만 좀더 포괄적인 중국중심주의다. 중국중심주의는 (정통적인 형태이건 포괄적인 형태이건) 주변부의 민족국가에 대해서 현실적 위압이었음은 물론, 정신적 질곡으로 부단히 작용해왔다. 그 질곡으로부터 깨어나는 시점에서 실로 민족자아가 모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거대 중국은 인지가능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명한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우리나라는 한자문화권에 일찍부터 합류하여, 대체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기에 힘썼다. 한·당·송 같은 한족의 시대에는 말할 나위 없었고 몽골의 원제국에 대해서도 가일층 진취적으로 교류했던 것이다. 그런데 청에는 태도가 달랐다. 청과의 사대적 국교를 거부하지 못했지만 이념상으로는 청의 존재를 부인했던 것이다. 때문에 선진문물과 대국(大局)의 흐름에 대해 폐쇄와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빚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화하문명의 적통이라고 ‘방안 풍수’처럼 자부하곤 했다. 다름아닌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이념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반면에 고려는 몽골의 침략의 발굽에 맞서 40년 항전을 벌였지만 일단 화친이 이루어지자 원제국을 긍정하고 새로 전개되는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승휴(李承休)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영토의 광대, 인민의 다중이 개벽 이래 견줄 데 없다”면서 그 위업을 찬미하였으며, 이색(李穡) 역시 이제현(李齊賢)의 문집 서문에 붙여 쓰기를 원의 대일통적 세계를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창조의 약동은 중화와 변방의 차이가 없다”고 마치 창세기의 도래처럼 인식했던 것이다. 이같은 고려의 문인지식층이 취했던 대원(對元) 자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필자는 그것을 문명의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앞서 원용한 진화의 시에서 문명의식의 단초를 볼 수 있거니와, 원제국의 세계에 문인지식층이 많이 유학을 가고 관직 활동을 하는 등 직접 경험으로 견문을 넓히게 되자 문명을 지향하는 의식이 높아졌고 아울러 동인(東人)으로서의 자기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들 문인지식층은 성장하여 원명이 교체되는 전환기 역사에서 주체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 주역의 한 사람인 정도전(鄭道傳)은 전환의 시대에 즈음하여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인문(人文)을 양성하여 천지의 질서를 세울 때가 바로 지금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땅에서 동양적 개념의 ‘문명의 건설’을 사명으로 자각했던 것으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조선조 후기의 보수 집권세력이 고집한바, 존화양이의 이념에 입각한 북벌론은 그것의 비현실성·허위성은 별 문제로 치고라도 존화양이라는 논리 자체가 동아시아의 역사 현실에서 이미 용도폐기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19세기 서양제국주의의 위협을 받은 막판까지도 존화양이의 논리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물론 존화양이의 시대착오적 논리에 개명적 지식인들의 비판이 가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실학파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북학론은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이론이다. 북학론의 앞선 이론가 박지원(朴趾源)은 앞에서 인용했던 “출현한 용이 지상에 있음에 천하가 문명한다”는 바로 그 대문을 들어 독서하는 사(士)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하였다. 옛 성현의 공능(功能)으로 의식해왔던 ‘천하문명’이란 과제를 사의 실천적·현재적 임무로 명백히 각성한 것이다.註4) 시대의 변화에 대응해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 하는 주체의식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이들 시대의 진운을 감지한 주체적인 사들의 현실적 입지는 넓지 못했다. 나말여초와 달리 근대 전환의 과정에서 좌절을 경험하게 된 사실을 지금 회고해보면 여기에도 요인의 일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근대적 세계로의 전입 과정 ‘근대적 세계’는 서양의 자본주의적 문명에 의해 주도되었던바, 그 형세는 도도히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지구적으로 확장하여 기왕에 권역별로 형성되었던 소우주적·전통적 사회문화의 양식을 유린·해체하고 통합하더니 드디어는 지금 전지구적 대일통을 완결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가 ‘근대적 세계’로 향한 움직임 앞에서 완전히 무감각했거나 대응의 노력들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4세기 대륙에서의 원·명 교체와 한반도에서의 여·선(麗鮮)의 교체는 역사적 동향과 기맥이 통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16세기 명의 정화(鄭和)가 이끈 선단이 인도양을 지나 중동지역으로까지 진출했던 사실에서는 동세서점의 움직임을 유추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들은 근대로 이어지는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으며, 결국 서세동점의 조류에 수세로 밀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 서양의 존재가 알려지고 저들의 과학기술이 소개된 단계(17세기 이후)에 이르러도 이에 대응하는 학술적 강구, 사상적 준비가 전혀 없이 속수무책으로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조선왕조 사회에서 실학을 그 사상적 준비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실학을 평가하는 어떤 자리에서 “개혁과 개방의 길을 모색하였던 실학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서세동점의 조류에 대한 주체적 대응으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註5)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역시 앞서 언급했듯 ‘깨달은 자의 외로운 외침’으로 그치고 현실에 폭넓게 적용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조선이 ‘근대적 세계’에 들어간 시점은 주지하는 대로 1876년의 개항이다. 실제적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득이 문호를 개방하여 제국주의 열강이 각축하는 ‘근대적 세계’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다. 그 시점으로부터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은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전환·대변혁이 일어났던바, 이 과정을 엄청난 혼란과 고난, 민족적 위기를 겪으며 통과한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의 논리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문명적 충돌의 시점이었으니 동서와 신구의 문명이 갈등·혼돈하는 창조적 계기이기도 했다. 본조(조선왕조─인용자) 초엽 이래로 문명이 다시 자라날 기회가 있었으나 미치지 못하고 날로 하강이 되어 본조 중엽 이후로 암흑시대에 점차 떨어졌고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드디어 참담비분(慘憺悲憤)의 천지를 지었도다. 그러나 수년 이래로 신문명의 맹아시대를 다시 조성하여, 그 기운이 처음 솟아나는 우물 같으니 과연 구문명의 유진(遺珍, 진수)을 수습하고 신문명의 대광을 발휘하면 문명의 거룩한 시대가 또한 멀지 않을 것이로다. (「담총(談叢)」, 『대한매일신보』 1910. 1. 8.─강조는 인용자) 「담총」의 검심(劒心)이란 필명의 주인공은 신채호(申采浩)로 추정된다. 문명의 진보를 희구하던 이 글의 논자는 조선왕조의 개국으로 문명의 부흥이 기대되었으나 기실 후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참담비분의 천지를 지었다”고 근대적 세계에 노출된 상황을 극히 비관적으로 기술하였다. 그런데 1910년 초의 시점에서 지난 몇년 사이에 신문명의 맹아가 싹터서 활발하게 솟아나는 듯 묘사하고 있다. 신문명의 맹아로 포착할 수 있었던 실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 동아시아적 문명의 전통이 서양문명과 부딪치면서 일으킨 반응, 그리고 이내 곧 ‘신문명’으로 지향하게 된 경위를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이 문제와 연관해서 먼저 한 가지 논급할 사항이 있다. 그 역사과정에서의 중국문명의 운명이다. 중국대륙은 19세기 중반의 아편전쟁 이래 1세기 동안 내내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분할의 마당이 되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로서 주목할바, 이 과정에서 중국은 전에 없이 문명적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다. 외부의 무력에 정복을 당하여 국가체제가 붕괴된 사례가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사실을 이미 지적하였거니와, 그런 경우에도 ‘화하문명’은 별로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내용을 다양화하면서 전통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와선 사정이 달랐다. 종래 세계의 주인으로서 조공체제를 고수했던 종주국의 입장에서는 국가간의 평등을 원칙으로 한 서구적 방식의 조약을 맺는 일부터 체모의 손상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근대적 세계의 국제질서하에서 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시 국제관계에서 만국의 질서를 세우는 공법회의란 것이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 공법회의에 동양권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참여하였고 종주국으로 군림해왔던 중국은 끼지 못했던 것이다. 문명국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 것이니 5천년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던 나라가 갈데없이 야만국 꼴이 되고 말았다. 어쩌다가 이 모양으로 전락했을까?유럽사가들의 견해인데 유럽이 중국을 기술의 측면에서 따라잡고 넘어선 것은 18세기 이후부터라 한다.註6) 요컨대, 근대적 세계를 창출한 19세기 유럽 선진국가들의 산업화의 성공을 가능케 한 기술문명이 화하문명을 압도한 것이다. 중국과 유사한 상황에 처했던 일본 역시 문호를 개방한 당초엔 열세를 면치 못했으나 이내 근대적 세계의 문명국 대열에 끼여들 수 있었다. 반면에 중국은 경쟁에서 패배하자 자신을 다시 추스르지 못하고 5천년 문명의 붕괴로 급락한 것이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역조를 만회하기 위해 아편을 중국에 강매한 것이 아편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터이니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직 서양에 대해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실로 문제적 안건인데 한국의 근대계몽기의 한 지식인은 이렇게 논하고 있다. 중국은 수십대 이어온 ‘일통(一統)의 문명’을 텅 빈 상태로 잘난 체하며 캄캄히 깨닫지 못해 다시 세계 대국(大局)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단지 미봉·구차의 태도로 일시의 편안에 빠져서 오로지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여 저항의 싹을 꺾어 뭉개기로 힘쓰니, 국민은 압제를 받은 지 너무 오래되어 분개·불굴의 정신이 온통 소멸되고 독립·자유의 기운이 또한 탕진해서 통양(痛痒)을 느낄 줄도 모르는 오늘의 천하를 조성한 것이다. 이 곧 2천년 일통의 국세가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다. (李鍾泰 편, 『進明彙論』) 문명론적 차원에서의 통일적 세계 중국이 바야흐로 몰락하는 원인을 진단한 내용이다. 중국 신문학의 개척자 루쉰(魯迅)이 아Q라는 전형적 형상을 그려서 중국인의 고질병을 비판·성토하여 자기반성·자아각성을 촉구했던 그 문제의식과 일맥 상통하는 듯하다. 노대(老大) 중국은 공연히 자만에 빠져 세계 대국의 진로에서 비켜선 채 오직 전제정치를 강화하여 인민을 압제하는 방식으로 현상적 안정을 누렸던 것이 일차적 과오지만 인민들 역시 압제에 길들어서 분노할 줄도 모르고 독립·자유의 기백을 상실한 것이 결국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점으로 남았다고 본다. 앞의 논자의 판단이 대개 이러한데 우리의 경우까지 염두에 둔 발언일 것이다. 이 중국이란 존재 및 동아시아의 문명전통은 우리나라가 근대적 세계에 진입하는 도정에서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거기에는 현실적인 면과 관념적인 면이 있는바, 양자는 문제의 발단이 다르면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현실적인 문제는 다름아닌 청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다. 조선국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맺은 최초의 국제협약인 강화도조약 제1조에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동등한 관계임이 명시되어 있다. 강화도조약이 우리나라에 불리하고 불평등한 조문을 담고 있긴 하지만 최초의 국제협약에서 자주국으로 승인받은 점은 적지않은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1887년 조선국이 미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했을 때 청국은 조선이란 나라가 자기네 속방이라고 주장하여 조선의 자주적 외교활동을 방해하고 나섰다. 급기야 국왕은 공사를 소환하는 외교적 수모를 당한 사실이 있었다. 청국은 종래의 조공관계를 제국주의적 지배관계로 해석한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근대적 세계에서 자주국으로 서려면 중국에 대한 독립을 분명히하는 것은 꼭 필요한 수순이었다. 일본은 조선국에 대해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적극 지원하였던바, 일본측의 입장은 그것이 조선을 병탄하는 수순이었다.註7) 그래서 일본측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부추긴 것은 과거 임진왜란 때 저들이 “명나라를 치러 갈 길을 빌려달라(假道入明)”던 술책과 다름없다는 말이 있었다.(李南珪, 「請絶倭疏」) 아무튼 이 엄중한 현실적 걸림돌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입장에선 저절로 치워진 꼴이 되었다. 관념적인 문제란 주로 동서문명의 충돌로 인해 빚어진 것이다. 이질적인 문명이 만날 때는 상호 가치관의 차이, 생활관습의 낯설음으로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가령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의 갈등은 중세 이래로 치열한 전쟁을 불러일으켜 현재에 와서까지 종종 분쟁의 원인으로 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에서는 전혀 생소한 문명과의 마찰이 종교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양 주도의 근대적 세계에 비교적 순탄하게 참여했다고도 보겠다. 하지만 진통을 겪지 않고 무갈등으로 이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해서 ‘관념적 문제’가 함께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관념적 문제’는 우리의 민족 주체가 근대적 세계로 나아가는 방향과 관련되기 마련이니 실로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4. 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명담론들 동서와 신구가 부딪쳐 갈등하던 1876~1910년을 연대기순으로 훑어보면 1884년의 갑신정변을 거쳐 1894년에 이르러 개혁·개방은 이미 불가피한 상황으로 발전하였으며, 1897년에 와서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으로 자주독립의 기치를 세우고 근대국가로의 탈바꿈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국 처지가 되고 1910년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주체적인 근대전환의 길은 차단되고 말았다. 이 도정은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식민지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어렵고 혼란스런 와중에서 민족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변혁의 과제를 어떤 방향으로 해결하느냐는 문제를 앞에 놓고 뜻있는 사람이면 다들 고뇌하며 나름으로 행동했다. 오히려 혼돈·갈등의 창조적·역동적 시공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신문·잡지 등의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연설·토론의 풍조가 성행해서 백가쟁명을 연출하였으니 또한 ‘담론의 시대’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바, 그 시대 담론에서 문명론은 중요한 논제로 제기되었다. 문명은 일시 유행어처럼 떠올랐다. 문명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이 안될 지경이었다. 당시 문명담론은 구구각색으로 입장과 주장이 다른 것은 물론, 그것은 또한 각기 전환기적 현실의 대응논리와도 연계되기 마련이었다. 논리의 편차에 따라 대략 몇가지로 갈래를 잡아본다.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 양이(洋夷)라는 존재는 인간 이전의 금수(禽獸)라고 규정짓는 데서 척사위정론은 출발하고 있다.註8) 이 금수의 무리가 바야흐로 가공할 힘으로 밀려오는 판국이니 이 위기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논법이다. 자아는 ‘화하(華夏)의 정도’를 보위하는 주체요, 그렇게 되는 것이 당위라고 확신하고 있다. 존화양이의 논리적 연장이다. 이 논리는 서구문명을 관용할 여지가 전무하며, 서세의 침략은 오직 강경히 맞서 격퇴해야 했다. 곧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해서 쇄국을 사상적으로 주도한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 역시 “왜는 양복을 입고 양포(洋砲)를 쏘고 양박(洋舶)을 타고 있으니 이는 왜와 양이 일체라는 분명한 증거다”(「持斧斥和疏」)고 규정하여 양이와 같은 방식의 대응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한 사상으로 되었다. 문명적 시각의 비교우위의 논리 고전적 인문 개념과 유교적 가치관, 한자문화권의 입장에 근거해서 서구문명에 대항해 동양문명 우월론을 주장한 것이다. 예컨대 서구의 민주적 정치제도는 “저 세계의 인종들이 위로 안이(安易)하고 아래로 완악(頑惡)한 때문에 부득이 채용한 것이니 우리 ‘예의(禮義)문명’의 세계에 어찌 시행할 수 있겠는가”(「論民會疏」)라고 이남규(李南珪, 1855~1907) 같은 이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김택영(金澤榮, 1850~1927) 같은 이는 서구의 자유란 개념은 인간학적으로 혈기에 근원하고 있음에 반해 유교의 병이(秉彛, 이성에 기초한 도덕심)란 개념은 의리에 바탕을 두어서 이 양자는 정치하고 거s의 정도가 현격히 다르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 일반의 심리에서 의리를 지키는 자 하나둘 있을까 말까 한 데 반해 혈기는 만인이면 만인이 다 가지고 있으니 경쟁의 세상에서는 자유의 논리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雜言 二」, 『韶濩堂文集』 券6)고 말하였다. 문명관에 입각한 동양문명 우월론을 완강히 고집하는 경우 위정척사의 자세 같은 길로 가게 될 터이다. 그런데 위정척사의 논리는 고유한 성격이 종교신앙적이어서 저들과 대립·투쟁하는 것밖에 변통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문명적 시각에서 보면 대개 그렇지 않다. 척사위정은 도학자들의 논리였지만 비교우위론은 주로 문학가들이 제기했다. 당시 저명한 문학가로서 통상 온건개화파로 분류되는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주장 또한 여기에 속한다. 김윤식은 ‘개화’라는 용어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개화란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감을 뜻하는바, 오랜 문명의 구역인 우리 동토에는 당치 않은 개념이라 한다. 그는 동양학술이 서양세계에 널리 파급될 것으로 낙관한다. 동교서피(東敎西被)를 전망하는 동양문명 우월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여겨진다. 한편 비교의 관점에 서 있으니 개방과 교류를 긍정할 수 있게 되어, 저들의 장점은 배우자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논리적 거점이다. 동양이 비교우위에 있는 정신문명은 온전히 견지하면서 서양이 비교우위에 있는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논법인데, 김윤식은 “그 종교는 사악한 것이니 응당 음란한 소리나 어여쁜 여색을 멀리하듯 배격할 일이로되 그 기계는 날랜 것이니 참으로 이용후생에 도움을 준다면 농상(農桑)·의약(醫藥)·갑병(甲兵)·주거(舟車) 등의 제도에 무엇을 꺼려 이용하지 않으리오”(「曉諭國內大小民人」)라는 견해를 편 것이다. 문명개조의 논리 동도서기는 같은 시기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과 함께 서양 주도의 세계에 맞서기 위한 대응논리로 고안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동아시아의 문명전통 및 정치제도를 성역처럼 고수하면서 단지 기계기술의 측면만 제한적으로 수용해서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논법이다. 이 논리는 중국의 경우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실천되었던바,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깨어짐으로써 이론적·현실적 파산을 고하였다. 우리 역시 1894년 이후의 상황에서 동도서기론으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들 되었다. 황현(黃玹, 1855~1910) 같은 시인도 약육강식의 엄혹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국가로서 존립하고 인간으로서 자립하자면 “저들의 부강을 본받을 도리밖에 없다. 부강을 이루려면 저들의 학문을 배울 도리밖에 없는데 그러자면 근대적 학교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養英學校記」)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황현 자신은 구지식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응당 앞의 비교우위론자로 분류될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서구의 부강을 배우자는 점에서는 동도서기론과 마찬가지지만) 서구학문을 수용하는 기반으로 교육제도를 바꾸자는 데로 여러 걸음 나아간 것이다. 이에 개화란 개념 자체를 그는 개물화민(開物化民), 즉 물질 개발과 문화인 육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동도’는 아직 성역으로 남아 있었다. 근일 우리 민족의 지위와 경우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 반만년 역사를 올라가 살펴보면, 그 문명이 세계 어느 민족의 뒤에 떨어졌다 하지 아니하겠으나 현상(現狀)의 비참을 돌아보고 그 원인을 추구하건대 도덕의 문명만 오로지 숭상하고 물질을 경시하다가 쇠퇴 유약(柔弱)을 자초하여 악랄, 참독(慘毒)한 마귀 그물에 스스로 걸렸도다. (강조는 인용자) 이상재(李商在, 1850~1927)의 「문명의 해석」이란 논설의 한 대목이다. 우리가 지금 쇠약의 국면에 빠진 원인은 오랫동안 도덕적 문명만을 숭상했던 데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문명론적 차원에서의 근원적인 자기반성이다. ‘동도의 성역’이 드디어 무너지고 있다. 이에 “도덕문명이 쇠약을 자취(自取)했다 하여 물질과학에만 치중하여 전속력으로 급전하고 도덕을 경시한즉 뿌리없는 초목과 기초 없는 가옥과 같이 필경은 전복부패의 화가 금방 닥칠” 것으로 내다보고 그가 내린 처방은 ‘정신적 문명’과 ‘형식적 문명’의 균형잡힌 발전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자에 실린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을 보면 우리 한국이 오랫동안 ‘문화’에 깊이 취한 나머지 문약에 빠져 지금 자멸의 위기에 이른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를 경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면서 역시 유사한 처방을 내놓았다.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융흥하여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고대의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케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 유지(有志)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일종 신국민을 양성할 만한 문화를 진흥할지어다. (강조는 인용자) 여기 처음 선보인 문화란 말을 먼저 살펴보자. 원래 ‘문화’는 무공(武功)의 상대적 개념으로 문치 교화를 뜻하였다. 그 전래의 개념과 근대적 개념 사이에는 서로 통하는 바 없지 않으나 간극이 있다. 문명과는 달리 문화란 말은 옛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는데 문명담론의 성행에 발맞추어 새롭게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용례 하나를 들어 보면 “사민의 문화시대에 임하여 진보하니 조국의 깃발 날로 다시 빛나도다(士民文化臨時進 祖國旗光復日生)”라고, 여기서 문화는 진보와 애국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논자는 ‘우리가 지금 지향해야 할 가치의 문화는 서구열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들을 ‘금수’로 치부했던 데서 180도로 시각교정이 된 셈이다. 반면 동양 전래의 문화는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에 굴복케 하던” 실로 야만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인식상의 급전환이 일어난 계기는 대체 어디 있었을까?다른 어디보다 앞의 문면에서 가까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신국민을 양성할 만한 문화의 진흥” 바로 이 문제를 긴급하고도 중요한 과업으로 각성한 때문이다. ‘신국민’이란 전제군주 치하에서 굴종하는 중세기 백성과 구별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이다. 국민국가의 주체를 상정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신채호는 「20세기의 신국민」이란 장편논설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해서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도 있었다. 문제의 초점은 신국민을 어떻게 양성하느냐다. 이에 구래의 문화전통은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에 굴복”시켰던 것으로 비춰진 반면, 서구문화에 대해서는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로 긍정하는 관점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구문화의 적극적인 수용·학습으로 비약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라는 시대에 대응할 신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관건적 사안으로 판단하였음은 물론이다. 구래의 문물제도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실로 이 파천황적 문명개조론이 담지한 정치적 입장은, 당시의 의론에서 뚜렷이 표명된 주장을 찾기는 어렵지만, 대개 국민국가를 지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5백여년을 넘겨 이미 임종에 다다른 왕조국가는 어떤 형식으로 대치되어야 할 것인가? 서양제국의 전지구적 진출로 인해 직면한 위기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여 자주독립을 회득할 수 있는 체제는 과연 어떤 형태로 재구되어야 할 것인가? 국민국가로 가야 한다는 점은 이후 지금에 이르는 역사의 진로로 보아 자명하게 된 사실이다. 당시에도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읽은 인물이라면 이 점을 각성하고 있었다. 「20세기 신국민」에서는 “국민적 국가가 아닌 국(입헌국이 아니요 한두 사람이 전제하는 국─원주)과 세계 대세를 거역하는 국은 필망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민족위기는 이미 절망상태로 들어가 있었다. 더구나 개혁개방은 망국을 초래하고 촉진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 형편에서 ‘이에는 이’로 맞서듯, 외세의 영향을 강고히 거부하는 비타협적 의병투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대응자세가 명분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으로 큰 방향이 잡혀갔던 것이다. “민지 발달된 연후에 국가문명 하겠기로”라는 계몽가사의 한 구절에 그 시대 정신이 압축되어 있다. 이 고비에서 문제점은 문명개조의 방법론이다. 앞의 「문화와 무력」의 논자는 서구문화로 경도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자국의 고유의 장점”에다가 “외래문화의 정화”를 배합하는, 말하자면 우성(優性)접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앞의 『담총』에서 “구문명의 유진을 수습하고 신문명의 대광을 발휘”할 날을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발상이다. 동아시아 전통과 서구문명의 우성접합, 이는 근대계몽기 지식인에 의해 제시된 문명개조의 기본방향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론으로는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우세한 논리들은 따로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적 개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친일적 개화론이다. 기독교적 개화론은 서양문명을 수용하기 위한 정신적 기초를 마련하자면 종교까지 개종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유교개신론은 이에 대한 수정제의였던 셈이다. 친일적 개화론은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달성하자면 일본의 성공사례를 배우고 또 그들의 직접적인 지도까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5. 식민지시기 우리 문화의 인식 문제 이상의 문명담론은 동아시아적 전통으로부터 근대적 세계로 이행하는 시공간에서 당면한 문제를 놓고 모색하고 강구한 내용이었다. 궁극에는 자주적 국민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가 제기되었으며, 그것이 역사의 정당한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우리의 선배세대들이 뼈아프게 경험했던 대로─근대사의 자율적 경로는 차단을 당했다. 식민지시기의 우리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모처럼 일어났던 문명담론들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던가?서양 주도의 근대적 세계가 전지구를 뒤덮은 20세기 초반에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아주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이란 섬나라가 근대국가로 급성장하여 비서양권에서는 유일하게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이 일본이 세계열강의 마지막 각축장처럼 된 동아시아 지역에서 마침내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병탄하고 나서 중국대륙을 유린해 들어가지 않았던가. 제국주의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비서양권에서 자기들 사이에 형성된 것 또한 지구상에서 유일한 사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특수상황에 대해서 일단 유의해볼 필요가 있겠다. 동아시아에서 역사적 의미의 권역은 근대적 세계체제와 연계되면서 곧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 내부의 상호관계는 오히려 훨씬 활발하고도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일본은 이 지역의 패권국가로 등장하게 되자 그때까지 계속 열심히 주장해왔던 소위 탈아론(脫亞論)을 슬그머니 집어넣고 아시아주의를 제창하고 나왔다. ‘근대화의 선진’ 일본이 백인종의 침략의 발굽 아래서 황인종을 구원하고 나아가 낙후한 이웃들의 근대화를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논법이다. ‘아시아인의 아시아’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이 논리는 후일 일본 군국주의 침략의 위장 논리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연장된 것이다.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강도 일본’이라고 일본국가의 성격을 규정지었듯 그들의 논리는 강도국가의 자기합리화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터이다. 일본중심적·침략주의적 아시아론에 대항하여 아시아의 평화와 연대를 모색하는 논리가 반대편에서 제기되었다. 예컨대 한국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중국에서 쑨원(孫文)의 「대(大)아시아주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중국땅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중국문제의 해결이 곧 조선문제의 해결이다”라고 부르짖고 실천했던 것은 바로 아시아적 연대를 통한 진정한 아시아 재건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한마디로 서구를 배우고 따라잡기라고 하는 근대기획에서 큰 차질을 빚지 않고 성공한 데 있었다. 동아시아의 여타 지역 사람들에게 일본의 토오꾜오는 일시 근대문명의 학습장처럼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물론 중국의 초창기 신지식층들의 상당수가 일본 유학의 경력을 가졌던 것이다. 서구의 학술문화 수용도 역시 일본이 선도하였다. 여기서 또 눈여겨볼 것은 서구의 문물을 번역할 때 일본인들이 한문의 전통을 십분 활용한 점이다. 때문에 서구적 개념은 일본의 번역어가 한국과 중국에도 용이하게 통행될 수 있었다. 일본이 오늘날까지 한자를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들의 문자로 접수하고 한문교육을 소홀히하지 않는 데 어떤 국가적 문화전략이 있었던가 한번 알아볼 일이다. 하여튼 근대적 세계체제에서 일본은 ‘부심권’으로 되어 구한자문화권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면이 분명히 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 제국주의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설정되고 나서 그 결과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을까? 최근 우리 학계에서 이 식민지시기에 대한 평가 문제가 쟁점 사안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기간을 두고 ‘근대화론’과 ‘수탈론’으로 예민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식민지시기는 마침 근대문화의 형성기에 해당한다. 이 글이 당초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되 이 단원에서 쟁점 사안에 맞닥뜨려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일제하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 문제를 논의하는 데 관련하여 학계의 쟁점 사안을 언급이나 하고 지나갈까 한다. 이번 논쟁을 지켜보면서 필자의 소견으로는 대단히 의아스럽게 느껴진 점이 있다. 식민지를 놓고 ‘발전론’(근대화론)으로 해석해야 맞다느니 ‘수탈론’으로 해석해야 맞다느니 하는 다툼 자체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아니냐는 것이다. 식민지지배는 자본주의의 생리적 현상이며, 그것은 다른 어디가 아니고 근대적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속성 자체가 억압체제요, 수탈구조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면서 지배논리는 피식민지에 대한 근대적 개발을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피식민지로 지배하되 근대적 방식을 도입해서 관리·경영했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근대적인 변화·발전을 초래한 일면은 없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경우 덧붙여 고려할 사항이 있으니, 위에서 거론했던 식민지적 관계가 비서양권에서, 그것도 근린지역에서 성립한 동아시아적 특수상황이다. 그로 인해 피식민지에 대한 파괴·폭력을 조직적으로 강화하면서 ‘근대화’라는 개발·개혁의 명분을 더욱 증대시킨, 일견 모순되는 양면성이 광범위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사실이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 역시 침략·수탈과 발전·개발의 양면을 아울러 보아야 한다고 주장은 한다. 그럼에도 수탈의 유무를 실증적으로 해명하여 입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데 학적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수탈이 자행되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마치 여기서 논쟁의 결판이라도 내려는 듯. 때문에 ‘식민지근대화론’은 논자들의 주관적 의도가 어디에 있건 ‘식민지미화론’으로 비쳤으며, 그래서 야기된 논쟁 또한 감정이 평탄치 않은 상태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문화 쪽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논쟁은 경제중심의 논리로 시종하였을뿐, 문화적 측면은 시각에 잡혀지지조차 못했다. 문화는 시대의 거울이다. 물론 식민지는 경제논리에 의해 관철된 제도이다. 하지만 경제논리로는 잘 보이지 않는 면이 있기 마련이다. 문화의 거울을 통해 보면 경제논리에서 몰각된 그 시기의 진면목을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논리에서 몰각된,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의 괴로운 사연이나 희로애락의 감정과 함께 창조적 고뇌와 인문적 창발성까지 거기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리라. 일제식민지하에서 우리 문화는 과연 존재했고, 존재했다면 그것을 어떤 논리로 평가할 것인가? 부정적 시각의 인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식문화로서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것으로 흔히들 논해왔으며, 심지어 ‘문화적 강간’을 당한 시대라는 지적도 일리가 없지 않다. 앞서 근대계몽기의 문명담론에서는 전통의 진수와 서구문화의 정화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신문명을 창출하고자 하는 근대기획이 모색되었고, 그러한 방향으로의 활발한 운동이 있었다. 이 자주적 근대기획은 식민지 터널로 들어서면서 무화된 듯 보였으며, 전통의 파괴 및 문화의 왜곡·편향 등 현상이 여러모로 복잡다단하게 빚어진 것이다. 비록 그런 가운데도 부정적으로 속단하기 어려운, 도리어 괄목상대를 해야 할 만큼 놀라운 문화적 진보가 특히 1920, 30년대에 이룩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필자가 전공하는 문학분야를 두고 말하면, 서구문학의 양식을 도입한 신문학의 형식이 마련되어 새로운 형식에 의해 우리의 근현대문학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신문학이 성립함으로써 발전한 근현대문학은 긍정적인 각도로 평가하자면 실로 한국문학사를 통관해서 유례없이 획기적이고 풍부한 성과를 남긴 것이다. 두 가지 핵심적인 근거에서 감히 평가를 내리는바, 하나는 근대성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문학적 성취다. 나아가 지구상에 편재한 피압박민족의 삶의 고통과 인간해방의 염원을 구체적 형상으로 대변했다는 점에서는 인류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식민지적 억압구조, 구체적 사례로 이 잡듯이 정밀했던 검열제도를 통과해서 그토록 대단한 성과를 남긴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그것은 어느 면에서 일제가 펴놓은 멍석 위에 올라가 한판 정신없이 놀아난 꼴이었을지 모른다. 소설이며 노래란 우리 강토를 내주고 바꾼 격이라는 비난이 그 당시에도 없지 않았다. 아니면, 민족적 대의명분을 종래의 위정척사론자처럼 고수해야 할까? ‘항일혁명문학’을 중심축에 놓은 북한의 문학사 서술은 이 원칙에 충실한 셈이다. 조선조의 충신 성삼문(成三問)은 만고충신으로 추앙을 받는 중국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향해서 “굶어죽을지언정 고사리를 캤더뇨? 아무리 풋나물인들 누구 땅에 났더냐?”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성삼문의 이 관념적 순수성 속에 역설적으로 무서운 현실성이 깃들여 있다. 옛날 백이·숙제는 ‘불의가 지배하는 땅’의 곡식을 결코 먹지 않으려니 산속으로 숨을 길밖에 없어, 마침내 성삼문으로부터 항의를 받게 된 것이다. 근대에는 ‘왜놈’의 세상이 된 이땅에서 종노릇을 하지 않겠다며 국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하는 그런 악전고투의 방도가 있긴 했다. 삶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이땅에서 태어났던 대다수의 인간들은 식민지적 일상성에 얽매여 삶을 영위하였다. 실로 거부하기 난감한 형세였다. 이 현실성은 곧 시대현실이기도 하니 그 속을 지혜롭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1910년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는 3·1운동을 불러일으켰다. 3·1운동을 계기로 이땅에 근대적 신문화가 발흥하여, 1930년대에 군국주의적 체제 강화로 억눌리고 꺾이는 가운데에도 문화적 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중국 근대혁명의 아버지 쑨원이 3·1운동 직후 김창숙(金昌淑)을 만난 자리에서 “대저 10년이 못 되어서 이같은 대혁명이 일어난 일은 동서고금의 역사에 보기 드문 일입니다”(「j翁73年回想記」)고 지적했던 사실이 떠오른다. 과중한 억압이 저항의 반작용을 일으킨 것임은 물론이다. 이때 저항은 근대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으니, 다른 어디가 아니고 식민지 현실 그 속에서 실력이 배양되고 의식이 개발된 것이다. 식민지적 일상성의 포로로 갇혀 있으면서 일상성의 구도를 타파하려는 의식이 성장하여 갈등과 고뇌를 무한히 재생산하였다. 여기에 인간주체의 역동성과 인문(人文)의 창발성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식민지시기의 우리 문화를 기본적으로 타율적 근대상황에 대한 주체적·진취적 대응의 산물,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자기발견·자기표현의 형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일찍이 화하문명을 수용하여 높은 수준에 도달했던 우리 민족의 소화능력과 문화적 저력이 서구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앞서 성행했던 문명담론이 이질적인 서구문화와의 충돌에 상당한 완충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6. 결론에 대신하여 이상의 인식논리에 비추어 동아시아와 그 문명전통의 현재를 언급하고 우리의 위기상황에서 신세기를 간단히 전망해보는 것으로 마칠까 한다. 동아시아 전통의 회복문제 동아시아 지역에서 역사상의 문명권은 서구 주도의 근대적 세계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찢겨졌다. 그리고 아직 새로운 아시아상(像)은 세워지지 못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형성되었던 기독교문명권의 유럽지역 역시 내부에서 대립과 반목이 계속 끊이지 않았다. 금세기로 들어와서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고 또 동서냉전의 중심고리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유럽국가들은 공동체를 구성하여 냉전이 종식되자 이내 하나의 유럽을 향해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지 않은가. 반면 동쪽의 아시아는 지금 어떤가? 동서냉전이 해소됨에 따라 이 지역 국가들 상호간의 적대관계는 해소되었고 교류 또한 활발해진 편이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에 준하는 정도의 연합체는 눈앞에 그려보기조차 요원하다. 이 대목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우리 한반도가 냉전의 중심고리로서 이쪽의 화합과 연대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계속 작용해왔다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 이 지역 국가들의 경제적 추락을 보면서 아시아에 대한 환멸의 논리가 안팎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동아시아의 국제적 우호 및 지역적 연대는 굳이 꼭 요망되는 일인가? 이미 잃어버린 동아시아 전통은 또 찾아서 무엇할 것인가. 싱거운 물음인 듯 싶지만 그동안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국대륙으로 향해서는 내내 소원한 관계를 당연시하며 지내지 않았던가. 일본열도를 향해서는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라는 지나간 악연을 청산하지 못한 채 현실로는 친밀하고 관념으로는 혐오하는 관계가 지속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까닭에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문화는 서구편향의 역반응을 더 심하게 일으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또 국수적 민족주의가 만연하는 아이러니를 빚어내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적지 않은 인연이다. 어떤 형태로든 상호간의 관계와 영향은 과거에도 피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서로 어울려 주고받으며 평화와 공존을 성취하는 일은 인류의 지극한 이상인데 더구나 가까운 이웃끼리는 이 대업을 힘써 강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아시아의 우량한 전통을 회복하는 일은 이 대업을 완수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한동안 유교자본주의론이 제창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아시아적 가치’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 이 지역의 경제적 추락과 함께 아시아적 가치는 무화되고 말았다. 유교자본주의는 허상으로 판명된 터이지만, 그 사이비 논리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충분히 가해지지 못한 것 같다. 이 모두 동아시아적 전통이 알차고 참된 내용으로 회복되지 못한 데 착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상품과 문화운동 이 글은 당초 오늘의 상황에 대한 문화적·문명적 위기의식에서 출발하였다. 대략 두 가지 차원에서 제기된 문제이다. 한편은 민족적 차원이고 다른 한편은 인류적 차원이다. 민족적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해체 능력과 서구문화에 대한 편향으로 마침내 자기정체성을 망실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민족문화의 위기는 지금 돌발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시기에 이미 심각한 상황을 체험했으나 그런대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금에 들어 외쳐대던 ‘세계화’논리, 한파처럼 밀어닥친 경제위기로 민족문화는 설자리를 잃고 있으며, 민족 자체의 존립까지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인류적 차원에서는 제어장치가 없는 발전·개발·과다소비의 구조로 생태계의 파괴와 자원의 고갈이 진작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나아가 인간 자체의 양식(良識)이 온통 물신주의에 오염되어 마비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이 인류적 재난은 자본주의의 자기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니 문명적 위기로 규정할 수 있다. 양자가 서로 차원은 다르지만 원인은 한 곳에 있으니 해결의 방도 또한 함께 모색해야 할 노릇이다. 이 가공스런 부채를 금세기의 우리는 다음 세기로 대책없이 물려주게 되었다. 21세기는 문화의 비중이 과대해질 것이라고들 말한다. 정보문화의 시대로 점쳐진다. 과연 어떤 형태의 문화가 판을 칠 것인가? 정보통신기술의 놀라운 발전, 거기에 상응하는 (상업주의적인) 문화상품이 현란하게 펼쳐지리라고 대체로 예상하고 있다. 앞으로 인간들은 신세기 문화상품의 향락자로, 소비자로 만족하며 순응할 것인가? 지금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방안을 보면 경제논리 이외의 다른 반성적 사고는 아예 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당면한 경제위기로부터 용케 벗어난다 해도 문화적·문명적 위기는 악화일로를 걸어 머잖아 치유불가능의 사태에 이르지 않을까. 이에 저항하여 사태를 바로잡는 방도를 찾자면 아마도 문화운동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신세기를 대비하는 문화운동은 문화의 ‘반문화적 횡포’에 맞서 반역적·창조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문화상품으로 성공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