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dycap (도영 ) 날 짜 (Date): 1998년 11월 14일 토요일 오전 10시 51분 24초 제 목(Title): 부여의 시작과 끝 그리고 고구려 2 의병을 일으킨 고두막 즉 동명은 스스로 단제(천제?)의 위에 오르고 한나라 침략군을 몰아내는데 힘씁니다. 북부여기 하권에 나오는 기사들중 한사군문제와 연관시켜 보았을 때 매우흥미로운 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기원전 108년 여름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곧이어 한나라 침략군은 4군을 설치합니다. 이것이 약 20여년이 지나서 진번과 임둔이 폐지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20여년이 지난 기원전87년과 86년 기사에서 동명이 한나라 침략군과 여러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라는 글이 있습니데.. 바로 졸본부여의 세력이 한나라 군을 몰아내어 한 측에서는 진번과 임둔을 폐지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쨌건 동명이 다시 북부여를 차지하고 원래 있던 북부여의 단제 해부루를 제후로 낮추어서 분능이라는 곳으로 쫓아 냅니다. 해서 해부루는 국상 아란 불의 말을 쫓아서 가섭원 부여 즉 동부여를 시작하게 됩니다. 해서 여기까지 고조선에서 이어진 우리나라가 북부여에서 북부여(졸본부여)와 동부여(가섭원 부여)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임인년(기원전 79년)에 주몽이 태어남니다. 주몽을 동명과 혼동하지 마시기를 삼국사기에 왜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 칭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북부여기에서는 확실히 이 두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주몽의 아버� 이름은 고모수입니다. 먼저 글에 나온 고진이라는 사람의 손자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아버지가 해모수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주몽을 낳은 유화는 처녀의 몸으로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라갔다고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래서 가섭원부여에서 주몽은 크게 되는데 삼국사기에서 이 가섭원부여사람들이 주몽을 보고 왕에게 간하기를 대충 주몽이 태어난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고 재주가 뛰어나니 제거하자고 했는데( 여기서 종래에는 주몽이 알에서 태어나서 난 것이 다르다라는 말을 해석한듯 한데 그게 아니라 부여의 황손 고모수의 후예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나중에 주몽이 당당하게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말한것을 보면 난 것이 보통사람과 다르다라는 것은 바로 그가 부여황손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서 주몽은 친한 친구 세명과 함께 졸본부여로 도망칩니다. 근데 그곳의 단제 즉 임검인 고무서(동명의 아들)는 아들이 없었고 고주몽의 비상함을 알고 딸을 주어 대통을 잇게 하였습니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건국기사에도 동일 한 내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주몽이 이 딸을 비로 맞아 왕위에 오르고 다시 전처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자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하하게 되는거죠.. 주몽이 23세때 즉위하였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22세때라고 나와있군요. 그리고 여기서 연대가 20년정도의 차이로 북부여기의 주몽의 즉위 연대가 기원전 58년으로 나오는 군요. 79년에 태어난 사람이 58년에 즉위했으니까. 22 23세가 적당한 나이겠죠. 근데 삼국사기와 비교했을 때 삼국사기에서는 기원38년 이 주몽왕 원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후에 주몽이 국호를 고구려로 고쳤 을 때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주몽은 22,23세때 북부여 즉 졸본부여를 이었으나 그로부터 이십여년이 지나서 고구려를 정식 명칭 으로 하지 않았을까? 제가 왜 이런식으로 연대를 맞추려고 하나 하면 이 책의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 기사와 삼국사기의 동명성왕의 기사에서 북옥저 정벌 연대가 일치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여기 고구려본기와 북부여기 가섭원 부여기 에 기술한 기사들이 모두 사실이고 연대도 잘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상에서 보면 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와 부여(동부여로 가섭원부여)가 피가 터지 게 싸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북부여가 세워진 이래로 동명이 한나라 침략 군을 물리치면서 형성한 무력으로 북부여를 계승하고 기존이 지배계층은 가섭원이 라는 곳에서 새로운 부여(가섭원 부여)를 시작하게 됩니다. 동명이 계승한 부여는 졸본부여로 고구려의 전신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적대세력이 되었던 가섭원부여 와 졸본부여였기에 이 졸본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는 필연적으로 가섭원 부여(삼국 사기에 나오는 부여)와 천하를 놓고 다투지 않았을까 싶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