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요키에로타) 날 짜 (Date): 1998년 10월 18일 일요일 오전 05시 28분 18초 제 목(Title): 도정일/플라톤의 욕망론과 창조신화 플라톤의 욕망론과 창조신화 ―혼은 어떻게 시간과 섞이는가 도정일 1. 두 욕망론의 대립 고전 철학시대의 아테네 지식인들을 등장시켜 ‘사랑’(Eros)이라는 주제를 놓고 의견을 개진하게 한 『향연Symposium』에는 널리 알려진, 그러나 다시 읽을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촉발시키는 놀랄 만한 이야기 두 편이 등장한다. 하나는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으로 개진하는 ‘총체인간’(hermaphrodites)의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디오티마의 가르침’이다. 『향연』이 세계 지성사상 정전(canons) 중의 정전으로 꼽히는 것은 거기 수록된 이들 두 편의 이야기가 사실상 후대의 거의 모든 욕망론에 출발의 발판을 제공한 최초의 조직적 욕망론이기 때문이다. 황소가 언덕에 등 부비듯 욕망에 관한 후대 사유들은 『향연』의 언덕에 등을 부빈다. 그러므로, 누가 그 유명한 이야기들을 감히 모를 수 있으리? 그러나 비판적 독자는 그것들의 내용을 그냥 ‘아는’ 선에서 만족할 수 없다. “그거라면 나도 알지”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그는 그 두 편의 서사가 사실은 서로 상반된 이해관계로부터 나온 갈등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대립관계는 더 큰 긴장과 갈등에 접속되어 있다는 것 등에 대한 쓸 만한 판단정보를 확보해야 한다. 이 연재물의 관심과 연결지어 말하면, 그것들은 플라톤과 신화전통 사이의 갈등을 욕망론의 차원에서 다시 노정시키는 또하나의 극적 순간임과 동시에 플라톤이 자기 체계의 완성을 위해 만들어내야 했던 창조신화로 우리를 안내하는 유용한 비밀통로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말은 명사로 써놓아도 언제나 동사이다. 사랑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 곧 객체 대상을 갖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이다. 대상을 전제해야 하고 대상을 목적어로 놓아야 하기 때문에 사랑은(어느 순간 이후 사랑 그 자체가 대상이 된 기묘한 변신을 일단 무시할 때) “사랑한다”라는 동작술어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주체가 대상을 ‘가까이 끌어당겨’ 소유하거나 획득하려는 욕망의 동사이며 그리움의 에너지이다. 그런데 이 욕망의 에너지는 왜 발동되는가? 욕망주체가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려는 대상은 무엇인가? “나는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 주체가 추구하고 소유하려는 대상(object)은 어떤 지위의 것인가? 『향연』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들이 중요한 구체적 이유는 그것들이 욕망의 성질, 구조, 대상에 관한 플라톤의 조직적 사유방식과 사유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총체인간의 신화는 인간이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사랑이며, 따라서 그 반쪽의 회복을 통해 존재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욕망―곧 ‘전체성에 대한 그리움’이 사랑이라 규정한다. 사랑의 성질에 대한 이 통찰은 충분히 매혹적이다. 원래 인간은 자웅(남녀), 웅웅(남남), 자자(여여)의 결합형식으로 묶여진 세 종류의 총체인간 형태로 존재했으나 이들의 힘을 두려워한 제우스가 도끼로 찍어 반으로 쪼개놓는다. 그 이후 인간은 모두 반쪽이며, 이 반쪽의 인간은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한다. 자웅결합체였다가 쪼개진 인간은 자기 반쪽인 남자나 여자를, 웅웅형식이었다가 쪼개진 인간은 자기 반쪽인 남자를, 자자형식이었다가 분할된 인간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 여자를 찾고자 한다. 이 신화가 보여주는 것은 자그마치 욕망의 기원(“욕망은 왜 발생하는가?”)에 대한 관찰이다. 총체인간의 분할은 인간 존재에 소외와 결핍이 도입되는 사건이다.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뉨으로써 모든 반쪽은 다른 반쪽에 대해 ‘타자’가 되고 이 소외된 반쪽 타자를 획득하여 ‘나’로 다시 통합되기까지 모든 반쪽은 근원적인 결핍상태에 빠진다. 이 결핍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부재이자 상실이다. 반쪽의 상실은 이미 그 자체로 반쪽의 부재이고 이 부재는 동시에 전체성의 상실―곧 통일성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욕망의 발생론적 근원이 되는 것은 소외, 결핍, 상실, 부재이다. 사랑은 이 네 개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려는 욕망이며, 전체성(totality)의 회복은 욕망의 최종 목적이 된다. 이 욕망은 불가피하게 자기목적적 에너지이다. 더 세밀하게 말하면, 이 경우 욕망의 추구 대상은 기묘하게도 ‘나’이다. 그것은 상실된 반쪽을 찾아 통일적 전체로서의 ‘나’를 재확립하려는 욕망이며,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욕망주체가 ‘나’를 회복 대상으로 하는 자기목적적(autotelic) 욕망이고 자기애적(autoerotic) 욕망의 일종이다.(현대 욕망론의 관점에서 문제를 더 복잡화할 경우 이 형태의 욕망이 회복코자 하는 전체성은 라캉이 말한 상상계의 허구적 통일성과 유사한 데가 있다. 또 이 종류의 욕망은 주체가 주체 자신을 획득하려는, 그래서 기이하게도 궁극적으로는 ‘대상이 없게 되는’ 나르시스적 욕망의 성격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지금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향연』의 마지막 주제 발표자인 소크라테스를 통해 전개되는 또하나의 욕망담론이 이른바 ‘디오티마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진 플라톤의 대표적 욕망론이다.(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에 대한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여성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녀는 플라톤이 만들어낸 가상의 여인이다.) 이 욕망론은 플라톤이 총체인간의 신화에서 명징하게 언급하지 않은 부분, 곧 ‘욕망은 결핍(lack)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명제화하는 눈부신 통찰의 한 순간을 열고 있다. 욕망과 관계지어 ‘결핍’이라는 어휘가 도입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욕망의 구조 분석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낸 것도 이 디오티마의 가르침이 사실상 처음이다. 이를테면 이 이야기에 포함된 ‘에로스의 탄생 비밀’에 관한 대목은 그리스 신화 첫머리에서부터 등장하는 에로스를 플라톤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재가공한 것인데, 이 가공의 목적은 결핍이 어째서 욕망의 구조적 속성인가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분명 문제적인 알레고리일 테지만, 풍요(plenitude)의 남성신과 빈곤(poverty)의 여성신 사이에 태어난 것이 에로스이다. 욕망이 충족과 결핍의 두 순간을 부단히 왕래하는 이유는 충족과 결핍이 에로스가 아비/어미로부터 물려받은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 성질로 인해 욕망은 충족의 순간 다시 결핍으로 빠지고 결핍의 순간 다시 충족을 지향한다.(후일 헤겔이 “욕망은 언제나 충족을 한 발 앞서간다”라는 말로 인간에게 운명적 멍에―헤겔의 용어로는 ‘인간학적 저주’―처럼 지워진 욕망의 이상한 성질을 규정한 것은 이 디오티마의 가르침에 빚지고 있는 경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총체인간의 신화와 디오티마의 가르침은 욕망과 결핍에 대한 빼어난 통찰을 제시하면서도 사실은 서로 통합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두 개의 이질적 욕망론을 구성하고 있다. 두 이야기는 대립한다. 플라톤은 무엇 때문에 두 사람의 입을 빌려 각각 다른 욕망론을 제시한 것일까? 두 욕망론은 성격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플라톤의 사유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평등하지 않다. 디오티마의 가르침은 총체인간의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동기의 문법 위에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편의상 총체인간의 신화를 ‘제1욕망론’으로, 디오티마의 가르침을 ‘제2욕망론’으로 명명한다면, 플라톤의 설계는 제2욕망론으로 제1욕망론을 뛰어넘으려는 고전 변증법의 구도를 갖고 있다. 이 구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 전반에 대한 플라톤의 불만, 더 정확히 말하면 철학이 왜 신화를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플라톤의 치열한 문제의식이다. 그러므로 제1, 제2욕망론 사이의 긴장과 대립에 주목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소득은 두 욕망론의 대조적 관찰이라는 단순한 수준을 넘어 플라톤적 사유가 신화전통에 건 도전의 핵심부에 어떤 근본적 쟁점이 놓여 있었던가라는 문제에 대한 한층 선명한 파악―곧 갈등의 이해이다. 이 쟁점은 두어 단계를 거쳐 여기 쉽게 재현될 수 있다. 우선, 위의 두 욕망론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것은 욕망을 발생시키는 그 결핍이라는 것이 근원적으로 ‘무엇의’ 결핍인가라는 문제에서이다. 결핍을 무엇의 결핍으로 규정하는가는 인간 욕망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대한 규정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 대상 규정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곧장 욕망론의 차이로 귀결한다. 플라톤은 마치 심문이라도 하듯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으로 개진된 총체인간의 신화를 비판한다. 지금 우리의 목적을 위해 질문 형태로 고쳐 쓰면 그 비판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그래, 사랑이라는 것이 잃어버린 반쪽 혹은 상실된 전체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이라 치자. 그러나 그 반쪽 혹은 전체성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의 회복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신체 일부가 병들고 썩으면 인간은 기꺼이 그 병든 부분을 잘라내지 않는가? 반쪽 찾기는 단순히 전체성의 회복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의 회복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의미 있다. 반쪽 혹은 전체성의 회복을 향한 욕망이라는 것은 그 자체 선한 것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아닐 때는 무의미하다. 인간에게 근원적 결핍은 선의 결핍이며 따라서 욕망이 회복하려는 것은 그 근원적 결핍으로서의 선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진정한 대상은 ‘선’이다. 에로스란 ‘선을 항구하게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런데 대상 그 자체가 항구하고 영원하지 않다면 그것은 욕망의 항구한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욕망이 소유하고자 하는 선은 항구하고 영원한 불멸성(immortality)의 것이다. 선을 항구하게 소유하려는 에로스는 결국 불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생식(procreation)은 불멸에 대한 욕망의 한 형태 같아 보이지만, 이 경우 욕망의 대상은 여전히 가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 세계의 것이다. 욕망은 불멸의 실재(reality)를 향해 있고 선은 바로 그 욕망의 대상이 되는 불멸 실재이다. 결핍으로부터 출발하여 선의 문제에 도달하는 플라톤의 이 변증논리는 지각 세계(sensible world)를 뛰어넘어 비지각의 실재계(intelligible forms)로 날아가는 사유의 교묘한 비상을 보여준다. 이 고전 변증법적 비상을 준비하기 위해 『향연』은 제2욕망론을 심포지엄의 마지막 발표 순번에 배치하고 있다. 제1, 제2욕망론 사이에 도입된 날카로운 대립은 결국 욕망의 대상이 시간과 공간에 지배되고 가멸성에 종속된 이 지각 세계의 대상인가 아니면 시공간을 벗어난 비지각 세계의 불변 실재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것이다. 제1욕망론이 욕망의 대상으로 제시한 반쪽 혹은 전체성은 시공간과 변화와 가멸성에 종속된 지각 세계의 대상이다. 그러나 제2욕망론이 규정하는 욕망의 대상인 선은 지각 세계를 넘어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존재한다. 제1욕망론이 대상을 여전히 가멸성의 세계에 위치시키는 반면, 제2욕망론에서의 욕망 대상은 시공간을 벗어나 있다. 불변의 선은 지각 세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각 세계가 갖고 있지 못한 것, 곧 지각 세계의 거대한 결핍이며 이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욕망은 시공간에 굴절되고 국지적 우연성과 변화에 종속되는 가멸성의 지각 대상들을 넘어 비지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성으로서의 선의 실재를 향해야 하며 그 실재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플라톤이 전개하는 욕망의 변증법은 그의 다른 대화록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의 선’(The Good)을 향해 있고 그 선의 실재성 논증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런데 욕망론에 느닷없이 선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플라톤의 논리는 무엇을 노린 것이며 그 논리의 배면 동기는 무엇인가? 플라톤이 노린 것은 신화가 응답하지 못한다고 그가 판단한 ‘보편성’(universality)의 요구에 대한 철학의 응답력을 보이자는 것이다. 이 보편성의 요구야말로 철학이 신화전통을 향해 제기한 도전의 핵심적 쟁점―말하자면, “철학이 왜 신화를 극복해야 하는가를 보라. 철학은 보편성의 요구에 응답하는 반면 신화는 응답하지 못한다”는 도전장의 내용이다. 이 보편성의 요구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응답은 존재론, 인식론, 도덕론 등의 몇 개 차원에 걸쳐 있다. 존재론의 층위에서 보면, 지각 세계의 모든 일시적이고 가멸적인 현상들은 불변 실재인 형상(forms)의 세계에 의존하고 그 세계를 모사한 이미지들이다. 철학은 불변 실재계를 알고 그것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모든 가멸 현상들의 존재론적 기초와 그것들의 생성, 소멸,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화는 지각 세계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을 다시 모사한 이중 삼중의 이미지들이며, 이 모사물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이미지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동굴의 신화’(『국가론』)에 등장하는 그림자의 포로들처럼 신화는 이미지의 세계에 현혹되어 동굴 바깥에 존재하는 빛나는 실재의 세계로 나가지 못한다. 신화는 존재의 보편기초에 대한 지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불변 실재계의 존재는 인식론의 층위에서도 지식과 비지식, 진리와 허위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보편기준을 제공한다. 불변의 형상 세계(forms)에 대한 지식만이 ‘지식’(episteme)이며 지각 세계에 대한 모든 지각의 내용은 지식이 아니라 ‘의견’(doxa)에 불과하다. 안정된 불변 대상이 아닌 것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가변 대상에 대한 지각은 지식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이 인식론은 지금도 일부 문학이론, 특히 텍스트 해석이론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재계를 사유하지 못하는 신화는 진리 인식의 능력도, 지식의 지위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진/위에 대한 보편적 판별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 인식론을 욕망론에 적용했을 때, 선을 지향하지 않는 모든 욕망은 ‘오류’이며 ‘착각’이다.(이 판단은 “신God을 향하지 않은 모든 욕망은 오류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류 욕망의 판정 속으로 고스란히 상속된다.) 그러나 신화는 틀린 욕망, 혹은 욕망의 오류를 판별하지 못한다. 신화가 그려내는 것은 감관에 감지되는 지각의 세계이지 사유가 감각을 넘어 이성의 힘으로 파악하는 가해성의 세계가 아니다. 신화작가들이 제우스를 엉터리로 그려내고 신들의 세계에 허위, 사악성, 기만, 오류를 도입하는 것은 진/위에 대한 인식론적 판별의 능력과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의 층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보편선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신화의 세계에서 이를테면 정의(justice)는 시공간을 넘어 보편성에 기초한 정의가 아니라 변덕과 우연에 지배되는 불안한 스캔들로 등장한다. 제우스가 어떤 때는 정의의 신으로, 어떤 때는 불의의 신으로 변덕스럽게 그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플라톤이 『향연』에서 왜 두 개의 욕망론을 들고 나왔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그의 전체적 체계 안에서 각각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 제2욕망론은 철학적 사유와 신화적 상상력 사이의 긴장을 욕망론의 차원에서 다시 극화하고 철학이 문제 삼는 쟁점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거기 전개된 사유의 비상은 오랜 세월 헬레네스 세계를 지배해온 신화전통이 마침내, 소크라테스 이후 아테네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아카데미아 지식인들의 손에서 왜, 어떤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도전은 지성사의 한 대사건이다. 그 순간 이후 아테네에는 철학시대로 불리는 새로운 사유의 계절이 열린다. 그 계절이 익어가면서 서사 세계의 동사와 형용사들은 대거 명사로 전환되고, 은유들은 단단한 개념어로 대체되고, 이미지, 상징, 알레고리의 베일들은 명징한 해명과 설명의 논리에 의해 벗겨지는 지성사적 변화들이 발생하게 된다.(후일 니체에 앞서 장 자크 루소는 바로 이 개념언어의 출분이 ‘악의 시대’를 열었다고 규탄한다.) 2. 불멸성과 가멸성―혼의 추락과 귀향 현상 세계의 모든 일시적 존재물들을 항구한 존재의 기초 위에 묶어보려는 플라톤의 작업이 ‘영혼’(soul)이라는 것의 성격, 구조, 지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식을 내놓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인간 내부에 불멸 실재를 환기하고 사유할 수 있는 어떤 에이전시가 없다면 실재에 대한 사유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내세운 영혼은 바로 그 에이전시이다. 신화 이야기꾼들의 손에 맡겨두었을 때 육체가 스러진 이후의 영혼은 기억과 사유를 박탈당한 초라한 혼령 혹은 망령에 불과하다. 그 망령은 지하 세계에 유폐되고 예외적으로 ‘기억’이 허용되는 순간이 부여되어도 그 기억은 그가 살았을 때의 기억, 곧 이 지상에 관한 기억뿐이다. 짐작할 수 있듯, 플라톤의 신체계에서 보면 신화에 그려진 혼령의 이런 지위, 특히 그 기억의 지위는 그가 당장 손대어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적 부분이다. 지상의 세계 자체가 실재로부터 한 단계 떨어진 이미지이자 복사물인데, 인간 혼이 겨우 그 덧없는 그림자의 세계만을 유일하게 기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니! 육체의 삶과 죽음에 관계 없이 혼은 기억할 만한 것,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의 온당한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존재의 본향인 실재계여야 한다. 『파에드루스Phaedrus』 『국가론』 기타의 대화록들에서 플라톤은 제우스를 두들겨 바로 펴듯 영혼의 지위를 바로 세우기 위한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전개한다. 이 작업은 세 개의 핵심적 부분들로 나뉠 수 있다. 영혼 그 자체에 모종의 불멸성을 부여하는 일, 불멸의 영혼이 가멸성의 범주인 육체와 결합하는 이유, 그리고 영혼의 구성구조를 밝히는 일이 그것이다. 이 세 부분은 혼의 천상(天上) 기원, 지상으로의 추락, 지상에서의 삶과 기원지로의 귀향이라는 방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파에드루스』에 전개된 ‘영혼의 서사’에 따르면 혼의 본향은 땅이 아니라 하늘, 더 정확히는 플라톤이 자신의 창조신화에서 ‘세계혼’(world soul)이라 부른 것이 존재하는 천상의 어떤 지점이다. 세계혼은 불멸이며 그 불멸의 상계를 고향으로 하는 영혼도 불멸이다.(물론 이 불멸의 혼 그 자체는 불멸 실재계의 형상과는 다르다.) 그 영원한 상계에서 혼이 하는 일은 진리의 세계인 실재계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노상 그 실재계를 사유, 관조, 명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모종의 실수, 착각, 혹은 게으름에 빠져 실재계에 대한 관조의 성실도에 순간적 이완을 발생시킨 혼은 그 실수로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추락한다.(그러나 혼의 추락 사유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아주 미약하다. 실수를 저지르고 추락할 수 있다면 그 혼은 이미 처음부터 부패의 소지를 안고 있지 않은가?) 추락한 혼이 담기는 곳이 이 지각 세계의 여러 육체 형식이다. 육체는 망각의 자루여서 거기 담기는 순간 혼은 자기 고향과 고향에서의 사업(실재계의 관조)을 망각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망각은 완전하지 않다. 불멸의 혼에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고 그 기억의 힘에 의거하여 혼은 고향과 실재계의 존재를 상기하며, 그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운동(관조사업)을 시작한다. 육체를 뒤집어쓰고 난 다음에도 고향에 대한 기억의 정도에 따라 지상에서의 영혼들의 삶에는 아홉 개의 등급이 매겨지는데 이는 곧 인간의 서열등급이기도 하다. 1등급은 철학자의 자리이고 꼴찌 9등급은 독재자폭군의 몫이다. 시인, 신화작가의 자리는 농사꾼의 자리보다도 처지는 6등급이다. 이들 등급은 동시에 혼이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가장 고귀한 실천’으로서의 진리 사유의 능력과 정도에 대한 지수이기도 하다. 철학자는 그 실천(관조와 사유)에 가장 부지런하고 따라서 가장 지혜로우며, 독재자폭군은 그 실천의 정도가 가장 미약해서 그 수준이 말하자면 개돼지와 비슷하다. 이 영혼의 서사를 정리하면, 지상 세계는 혼의 유배지이고 육체와의 결합은 혼의 소외이며 이 세계에 거주하는 전 기간을 통해 혼은 실향민이자 이방인이다. 진리 사유와 실재계의 관조는 혼이 이 지각 세계에서도 자기 소외를 극복하고 귀향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자 형식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이 이미지의 세계를 탈출하려 하고 미망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지의 세계에 이끌린다. 전자에게 욕망(에로스)은 탈출을 돕는 매개임에 반해 후자에게 그것은 미망에의 유혹이다. 불멸의 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국가론』에서의 구조분석에 따르면, 지상으로 추락하여 육체에 담기기 이전의 혼은 이성(reason) 혹은 이성성(the rational)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이성적 성질이 혼의 불멸성이다. 그러나 육체에 담기는 순간 인간 혼에는 모종의 치명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란 불멸의 혼에 다른 가멸적 성분이 첨가되는 사건이다. 육체는 육체이기 때문에 공격이나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야 하고, 영양상태의 유지와 번식의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육체 보호를 위해 혼에 첨가되는 것이 ‘분’(憤, the irascible)이라는 성분이고, 번식을 위해 혼에 첨가되는 것이 ‘육욕’(lust)이라는 성분이다. 그러니까 지상에 떨어지면서 혼은 불멸성과 가멸성이 서로 섞이는 혼합을 경험한다. 이성성은 혼의 불멸 성분이고 분과 육욕은 가멸적 성분이다. 불멸 성분으로서의 이성성은 시간을 떠날 수 있는 반면 분과 육욕은 시간과 섞인 가멸 성분이므로 육체가 스러지는 순간 그 성분들도 소멸한다. 다시 욕망론의 경우로 이동하면, 이들 세 개의 성분들 중에 이성의 욕망이 진정한 에로스라면 분과 육욕을 도발하는 욕망은 오류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혼의 이성성은 나머지 두 개의 가멸적 성분들과 그것들의 욕망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이 하필 『국가론』에서 혼의 구성도를 그려 보이는 것은 혼의 구조 위에 이상국가의 구성과 권력구조를 기초시키기 위해서이다. 혼의 구성과 국가의 구성은 동일한 구조여야 하고 동질적 성격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권력이 변덕 아닌 진리를 기초로 하여 진리 위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국가의 권력구조와 사회계급은 혼의 구성도와 일치해야 한다. 혼이 세 개의 성분으로 되어 있듯 국가도 세 개의 계급으로 구성된다. 첫째 계급인 통치자 계급은 혼의 최상층 구성 성분인 이성성과 조응하고, 두번째 계급인 수호자 계급(가디언)은 혼의 두번째 성분인 분과 조응하며 세번째인 생산계급(농공상)은 혼의 육욕 성분과 조응한다. 진리의 실재계를 알고 사유하는 최고의 능력이 혼의 이성성이고 이 이성성에 조응하는 것은 철학자이므로 권력의 최상부는 철학자왕의 몫이다. 이 철학적 통치자의 덕목은 지혜이고 수호자 계급의 덕목은 (분에 맞추어) 용기이며, 생산계급의 덕목은 절제이다.(이 절제의 덕목은 다른 두 상부 계급에서도 강조된다.) 이들 세 계급 구성원들의 교육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가? 아테네 젊은이들의 교육을 지배해온 신화전통에 대한 플라톤의 불만은 교육권 쟁탈의 구상에서도 아주 치열하다. 권력의 최상층부에게는 특별히 철학과 수학이, 수호자 계급에게는 음악, 신화 일반, 그리고 체육이, 생산자 계급에는 엄선된 신화가 교육 과목이어야 한다. 물론 통치자 계급은 수호자 계급이 배우는 음악, 체육, 신화 일반을 거칠 수 있다. 생산자 계급에게 한정된 신화만이 허용되는 것은 그 계급이 알레고리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신화의 불경스런 장면들과 틀린 재현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모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경우에도 이런 모방의 위험이 있으므로 세 계급을 통틀어 나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역시 신화의 엄선이 필요하다. 잘못된 신화 교육은 이성적 판단, 지혜, 지식, 절제보다는 감정(‘웃음과 눈물’)과 변덕에 지배되는 사회성원들을 길러낼 수 있다. 다시 욕망의 문제로 돌아가서 보면, 세 계급 중에서 현세적 욕망의 통제, 포기, 금지를 가장 강하게 요구받는 것은 통치자수호자 계급이다. 이들에게는 과도한 웃음은 금지되고, 맛좋은 음식, 과자, 술, 고기 등의 쾌락 항목들도 금지되며 사유재산, 가족도 허락되지 않는다. 우생학적 요구에 따른 생식은 가족 구성 아닌 다른 방식으로 추구된다. 욕망, 혼, 국가, 교육, 권력구조의 여러 분야들을 신화적 상상력 아닌 보편선의 실재에 기초시키고 그것에 통합시키려는 플라톤의 작업은 천지창조의 과정에까지도 손대지 않을 수 없다. 천지창조부터가 이성적 창조의 질서를 구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티마에우스』에서 플라톤은 천지창조가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이 그려내듯 혼돈으로부터의 분화에 따른 신화적 코스모고니가 아니라 이성적 질서에 의한 코스몰로지임을 그려 보인다. 플라톤의 창조서사에 따르면, 태초부터 있었던 것은 선의 형상 그 자체이다. 선의 실재계는 무슨 창조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제1원칙이기 때문에 그 존재는 타율에 의존하는 피창조물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실재의 형상이 물질 세계를 만든 창조자인 것도 아니다. 실재계는 무결핍의 완전계이므로 물질 세계를 만들어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물질계는 어디서 왔는가? 상계의 혼이 왜 추락하는가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미약한 것과 유사하게, 물질계가 있게 된 사유 부분에서의 그의 설명도 논리적으로는 퍽 허약하다. 그는 다만 실재계와 구분되는 무질서, 무의식의 수동적 물질 재료를 ‘아난케’(Ananke)로 명명하고, 이 아난케도 “처음부터 있었다”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아난케는 신화의 혼돈과 유사하다. 그러나 신화의 혼돈이 그 내부로부터 무언가를 토해내는 힘을 발휘하는 반면, 플라톤의 아난케는 제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완벽한 수동성 그 자체이다. 이 움직이지 않는 아난케를 주무르고 설득하여 질서(코스모스)를 만들어내는 우주의 장인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데미우르고스’라는 세계혼이다. 천지창조는 이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이며 그 창조과정은 이성적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제멋대로 작업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델에 기초하고 그 모델을 모사하여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모델은 말할 것도 없이 불변 실재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거주하는 이 지각 세계는 혼돈의 산물도 우연의 결과도 아닌, 불변 실재계를 본따 만들어진 모사물이고 이 세계의 모든 존재물들도 그러하다. 모든 존재물은 실재계에 그 존재의 기초를 두고 있다. 존재의 기초로서의 실재계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므로 파괴되지 않고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시작된 창조의 이성적 질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존재물들의 물질 재료는 아난케의 것이므로 그 아난케의 재료로 만들어진 지각 세계 존재물들의 몸뚱어리는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가멸성에 종속된다. 아난케라는 비정신성의 재료가 어떻게 데미우르고스에게 ‘설득’되어 창조를 허락하는가? 설득과 허락을 논리적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아난케도 창조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아무 혼도 욕망도 의식도 없는 아난케가 어떻게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가? 논리의 층위에서 플라톤의 창조서사는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를 허다히 안고 있다. 이런 사실은 『티마에우스』에 개진된 이 개인적 창조서사가 그야말로 ‘서사’로 읽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플라톤의 창조신화는 창조의 전 과정을 합리화하려는 그의 의도를 빼고 나면 그가 도전적으로 비판했던 ‘신화’의 범주 속에 있다. 더구나 그의 창조신화는 그의 욕망서사들에 비하면 훨씬 그 서사적 상상력의 품질이 떨어진다. 이미 짐작할 수 있듯, 모델―장인―재료―지각 세계로 구성된 이 창조신화의 구조는 조잡스럽게도 남성 원칙(능동적 세계혼)과 여성 원칙(수동적 재료)의 결합, 그리고 그 결합의 결과로서의 아들딸(지각 세계)이라는 생물적 모델에 입각하거나 그것을 원용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인정할 것은 지각 세계의 모든 법과 질서를 안정된 기초 위에 올려세우려 했던 플라톤의 열정이다. 그 열정은 그의 개인적 성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파악한 자기 시대의 절박한 요청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응답은 역사적인 것이다. -------------------------------------------------------------------------------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