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화이트헤드) 날 짜 (Date): 1998년 8월 23일 일요일 오전 06시 18분 53초 제 목(Title): 명제 윤증의 전환기사상 /윈지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화이트헤드) on 'Economics' Title: 명제 윤증의 전환기사상/ 윈지 Date: Sat Jan 17 01:23:17 1998 제4권 1호(통권32호) 1998. 1. 1 집중기획 2 <Picture: WIN><Picture> 역사인물 탐구 <Picture>전환기 사상 임란·호란 이후 민심통합 절감 경직된 지배 이데올로기 배격 고세훈 <시사월간 WIN 기자> ------------------------------------------------------------------------ <Picture>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의 사상을 관념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理)가 먼저인가 기(氣)가 먼저인가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인 문제로 해가 지고 달이 기운 것으로 여긴다. 때론 이가 먼저면 어떻고 기가 먼저면 어떤가 라는 냉소주의가 현대인들의 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상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무형의 물질이 아니다. 지금부터 약 3세기 전 윤증(1629~1714년)이 살던 시대는 사회 전반적인 혼란기였다. 윤증이 태어난 인조 7년(1629)은 2년 전 일어났던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참상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정묘호란은 시작에 불과했다. 윤증이 아홉 살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국토가 유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윤증은 병자호란으로 어머니를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군에게 잡혀 고초를 맛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즉 양란(兩亂)이 준 영향은 윤증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이란 국가가 그 영향으로 휘청거렸다. 왜란 전 1백70만 결에 달했던 농지 면적이 임란 후에는 3분의 1 수준인 54만 결로 줄어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전염병이 횡행했다. 광해군 때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한 것은 기근과 질병이 횡행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기도 했다. 양란은 조선사회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현재 한국의 지배이념이 자본주의이자 자유민주주의라면 조선의 지배이념은 성리학이었다. 남송의 주희(朱憙)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사대부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학문이었다. 양란은 바로 사대부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한가 라는 의문을 제기한 계기가 됐다. 그나마 선조의 뒤를 이어 집권한 광해군 때의 북인정권은 실리적인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 북인의 종주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다른 주자학자들이 이기론(理氣論)을 가지고 다툴 때 이를 공리공담으로 일축하고 스스로 밭을 갈며 인격 도야에 일생을 바친 프래그머티스트였다. 서인들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의 이런 개혁정책들을 성리학적 지배체제에서 일탈한 사도(邪道)로 보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등거리 외교는 명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소리(小利)를 좇는 행위였고, 인목대비를 내쫓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인륜을 저버린 패륜(悖倫)으로 보맘年 것이다.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은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세웠다. 쿠데타로 장악한 권력은 자신들이 무너뜨린 정권의 모든 것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서인정권은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명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청을 배격하고 명과 가까이 지내는」 배청친명(排淸親明) 외교정책으로 전환했다. 그것이 주자학에서 말하는 명분론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명분을 뒷받침할 힘이었다. 정통으로 자부하는 중국의 남송이 오랑캐라 멸시했던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무릎을 꿇은 것처럼 인조정권도 여진족이 세운 후금, 곧 청나라에 무릎 꿇고 말았다.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끌려갔다. 겨우 임진왜란의 상흔이 아물어 가는가 싶었는데 백성들은 또다시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청군의 말발굽이 농토를 휩쓸었고 백성들은 다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이런 현상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반성을 요구했다. 조선 성리학의 두 대가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퇴계 이황이 주희의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인물이라면 율곡 이이는 이를 조선화시킨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율곡은 시대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율곡이 바라볼 때 임란 직전의 조선은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경장기(更張期)였다. 그는 각종 개혁정책을 주창했다. 잡다한 공납을 쌀로 통일해 받자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과 경제정책을 관할하는 경제사(經濟司)의 설치 주장 등이 이런 개혁정치의 예다. 예론 통해 사회체제 확립하려는 지배층 <Picture>하지만 사상적인 면에서 율곡은 그의 개혁사상을 이을 인물을 길러내지 못했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인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꼽는다. 하지만 김장생은 이이의 현실개혁적인 이학(理學)사상을 본받지 않고 예학 쪽에 치중한 학자였다. 김장생이 지은 『상례비고』(喪禮備考)나 『가례집람』(家禮輯覽)은 당시 예학의 거봉이었던 송익필의 『가례주해』(家禮註解)의 바탕 위에서 저술된 책들이라 할 수 있다. 김장생이 예학에 집착한 것은 예학이 양란 이후 무너지는 사회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학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말한 예는 사양하는 마음이다. 즉 자기 욕심을 버리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 예의 마음이다. 양란 이후 조선 농민들은 양반 사대부들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마음속으로는 그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양반들의 입장에서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는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이었고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성리학이 예학으로 흐른 것은 무너지는 사회 기강을 예로써 다시 잡으려 한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양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들이 예학의 힘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들은 아니었다. 사회적 혼란은 당면 현안이 해결돼 안정되어야지, 예를 강조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로 조선 중후기 사대부의 사상사가 예학으로 흐른 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시 조선사회가 요구하는 사상은 주자학의 절대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상, 상대성을 인정하는 융통성 있는 사상이었다. 주자학적 절대주의에 반발하는 흐름들 주자학적 절대주의 체제로 사회혼란을 수습하려는 방안에 대해 사대부 사회 내부에서 반발하는 흐름도 있었다. 윤휴가 주희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이런 흐름의 하나다. 조선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일 것이다.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에 주희가 주(注)를 달아 놓은 책이다. 즉 『사서집주』는 공자나 맹자의 사상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다. 주희의 이 해석 자체섟 조선시대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나의 「성전」(聖典)이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면 「유학을 어지럽힌 적」이란 뜻의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렸다. 이런 주희의 해석에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남인 학자인 백호(白湖) 윤휴였다. 윤휴는 주희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했다.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하자 당시 주자학의 대표학자 송시열은 발끈해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사문난적으로 몰린다는 것은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윤휴 또한 자신의 사상적 확신에 의해 주희의 학설을 비판했으므로 물러서지 않았다. 송시열이 자신을 사문난적으로 공격하자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이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윤휴의 학설은 주자학이 지배이념인 조선에서 위험한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나선 격이었다. 윤휴가 자신의 학설을 철회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는 당시 지식인 사회의 커다란 현안이 되었다. 많은 사대부들은 송시열의 위세에 눌려 윤휴를 비판했지만 윤휴를 옹호한 일부 사대부도 있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그런 인물이었다. 윤선거가 윤휴를 옹호하자 송시열은 윤선거도 비판했고 그 결과 저명한 서인학자들 사이에 강경에 있는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에서 회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윤선거가 윤휴를 지지한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자기 반성이었다. 즉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로는 더이상 사회를 이끌고 갈 수 없음을 자각한 일부 지배층이 사상면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주자학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송시열과 주자학 상대주의를 인정하려는 윤선거의 입장 차이는 회니시비(懷泥是非)라 불리는 조선시대 유명했던 한 논쟁으로 표출된다. 싸움의 한 당사자인 송시열이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고 다른 당사자인 윤증이 충청도 이성(泥城·현 논산시 노성면)에 살았기에 두 사람의 거주지 지명 첫글자를 따서 회니시비라고 불렀다. 회니시비는 표면적으로는 윤선거가 사망한 후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비문집필을 부탁한 데서 비롯됐다. 송시열은 비문집필은 수락했지만 대신 아주 불성실한 비문을 지어 보내는 것으로 주자학에서 일탈했다고 판단한 윤선거의 삶을 격하했다. 송시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짓지 않고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따라 생전의 행적과 관직을 기술한 후, 「박세채가 극진한 행장을 지었기에 나는 옮기기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述而不作)라고 덧붙여서 비문을 끝맺었다. 박세채가 윤선거의 생애를 극찬했으므로 자신은 새로 짓지 않고 박세채의 행장에 따라 옮기기만 했다는 조롱이다. 이는 윤선거의 생애에 관한 모독이었다. 송시열의 비문에 감정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그가 윤선거가 죽었을 때 보낸 제문(祭文)을 보면 명백해진다. 비문 집필을 의뢰받기 4년 전인 현종 10년(1669) 윤선거가 죽었을 때 송시열은 극진한 제문을 보내 조상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천지가 어지러운데 별 하나 밝았고 연꽃으로 옷 입고 난초로 띠를 하니 맑아 때가 없도다」 「별·연꽃·난초」 등으로 윤선거의 삶을 극찬했다. 사실 송시열과 윤선거는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40년지기 친구였다. 서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윤증이 윤휴의 제문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뒤 송시열은 「윤씨 부자는 역시 윤휴와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주자학자 송시열에게 윤휴는 사문난적이었다. 윤휴와 교제하는 윤선거 부자 또한 주자학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불성실한 비문을 지어 보낸 것이다. 이런 내용의 비문을 부친의 무덤 앞에 세워 놓을 수 없었던 윤증은 여러 차례 긴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 비문을 고쳐 줄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숙종 2년(1676년)에는 송시열이 유배된 경상도 장기(長耆)까지 찾아가 비문을 고쳐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몇군데 지엽적인 글자를 고치는 시늉만 했을 뿐 원뜻은 조금도 손보지 않았다.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는 데도 비문을 고쳐 주지 않는 송시열을 윤증은 속으로 원망했다. 하지만 비문을 고쳐 주지 않았다고 스승인 송시열을 드러내 놓고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국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사제의 연을 끊는 데까지 발전했다. ▶ 계속… ------------------------------------------------------------------------ <Picture><Picture: 목차><Picture: 다음> ------------------------------------------------------------------------ Copyright (c)1995-97. <Picture> All Right Reserved.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화이트헤드) on 'Economics' Title: 명제 윤증의 전환기사상/ 윈지 Date: Sat Jan 17 01:24:46 1998 제4권 1호(통권32호) 1998. 1. 1 집중기획 2 <Picture: WIN><Picture> 역사인물 탐구 <Picture>전환기 사상 임란·호란 이후 민심통합 절감 경직된 지배 이데올로기 배격 고세훈 <시사월간 WIN 기자> ------------------------------------------------------------------------ <Picture>윤선거 공박하는 강화도사건 재론 이런 와중에 송시열과 그 문도들은 강화도 사건을 재론하고 나섰다. 윤선거의 친구들과 부인이 죽었는 데도 윤선거 혼자 살아남은 것은 의를 저버린 비겁한 행위라는 비판이었다. 회니시비가 격화된 것이다. 같이 순절하기로 한 친구들이 죽고 부인까지 자결했는데 혼자 강화도를 빠져나온 윤선거의 행적은 명분론이 횡행하던 당시 분명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다. 윤선거 자신은 효종에게 상소를 올려 성이 함락된 상태에서 그냥 죽기보다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와병 중의 부친 윤황을 만나고 난 뒤에 죽기 위해 강화도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강화도사건을 가장 뼈아프게 여긴 인물은 다름아닌 윤선거 자신이었다. 그는 강화도 사건 이후 벼슬과 재혼도 단념한 채 독신으로 고향에서 학문과 후학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강화도 사건에 대해 근신하는 자세로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강화도 사건에 대한 송시열측의 비판은 한마디로 말해 왜 죽지 않고 살아 남았느냐는 것이다. 강화도 사건에서 약 3백5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윤선거의 행적에 대한 비난은 50보 도망간 사람이 1백보 도망간 사람을 비난하는 자기 모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처럼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나 송시열처럼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 마찬가지 입장이다. 치욕적인 역사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 함께 져야 할 한 시대의 부채지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비판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문문제와 강화도사건에 대한 회니시비는 당시 사회 지배층이 정권을 지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됐다.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에 반기를 든 상대주의 세력에 대한 정치공세였던 것이다. 강화도 사건에 대한 송시열측의 비판이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송시열이 일찍이 강화도사건에 대해 한여석(韓汝碩)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강화도 사건은 내가 항상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사문난적 논쟁, 예송 논쟁 등이 발생하면서 「너그럽게 생각」하던 강화도 사건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좋은 재료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를 둘러싸고 두 세력은 확연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즉 송시열 중심의 노론(老論)과 윤증 중심의 소론(少論)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노론은 주자학을 절대시한 반면 소론은 상대주의적 자세를 취했다. 또한 노론이 이상주의적·명분론적 정치을 지니고 있었다면 소론은 현실주의적·실질적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이 당시 노론이 얼마나 명분론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으로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다. 삼전도 비문이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자리에 세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현 서울시 송파구 소재)를 말한다. 서인, 소론과 노론으로 갈리다 <Picture>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이경석(李景錫)이었다.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쓴 이유는 그가 친청파였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의 직책이 문한을 담당했던 예문관 제학(提學)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책상 할 수 없이 맡은 악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 12년(1671) 이경석이 사망했을 때 송시열과 그 문도들은 그가 생전에 삼전도 비문을 찬술한 것을 비판하고 나섰다. 노론의 이경석 비판에 소론은 분개했다. 소론 남구만의 항변은 이에 대한 소론측의 입장을 잘 나타낸다. 「삼전도 비문은 청나라에 항복한 상황에서 조정의 누구라도 지어야 할 글이었다. 신하들이 짓지 않으면 인조임금 자신이라도 지어야 했을 글이다」 남구만의 항의처럼 삼전도 비문은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과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자 패전국의 시대적 부채이지 비문을 짓지 않아도 좋을 직책에 있었던 인사가 비문을 지을 직책에 있었던 인물을 비난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었다. 이경석이 김자점같은 친청파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경석은 친청파가 아니라 북벌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청나라에 체포되어 사형 위기에 처했다가 인조가 막대한 뇌물을 조사관들에게 주어서 겨우 목숨을 건진 반청파였다. 그는 의주 백마산성에 구금돼 있었다. 청나라 임금은 이경석을 「조선 조정에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석방을 허락했던 대표적인 반청인사였다. 이런 이경석을 삼전도 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본(本)은 저버린 채 말(末)에만 집착하는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경석의 비문에 대한 논쟁은 소론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에 대한 공세의 성격도 있었다. 박세당은 윤증의 매형인 박세구(朴世垢)의 형이었다. 박세당은 삼전도 비문 논쟁 때 송시열을 거침없이 비난했다. 그가 만년에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희의 견해를 비판하고 윤휴처럼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세우자 노론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박세당은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가는 도중 죽고 말았다. 윤증이 영수로 있던 소론은 노론측의 이런 명분론적 정치행위에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윤증은 예송논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예론을 가지고 서로 싸운 지 10년이 넘었다. 혹 서인들이 옳고 남인들이 그르며, 혹 남인들이 옳고 서인들이 그르다 한들 무슨 큰 차이가 나겠는가? 내가 3년복이 맞고 1년복이 틀리다는 견해를 바꾸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이미 결정이 되었는 데도 서로 공격하여 끝없는 화를 만들고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아주 작은 복제에 관한 의논 한가지일 뿐이니 그 모양이 얼마나 우습고 괴이한가?」며 통절해 했다. 윤증이 숙종 7년 작성한 「신유의서」(辛酉擬書)에는 송시열이 이끄는 허구적인 명분론적 정치행위에 대한 더욱 강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선생(송시열)이 대의(大義·북벌)를 주창하던 초기에는 인심을 각성시키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으나 대의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실상이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때문에 내정(內政)과 국방(國防)을 튼튼히 해 청나라에 설욕하려는 기도가 실효를 거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고작해서 선생의 작위가 높아진 것과 명성이 넘쳐 흐르는 것뿐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 노론의 정치행위에 대한 비판이었다. 윤증은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해 무자비한 정치보복을 감행하고, 주자학 절대주의를 통해 체제 강화에 힘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윤증은 이 글을 송시열에게 보내기 앞서 박세채에게 보여주었다. 박세채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강경하다며 보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윤증은 이 충고에 따라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박세채의 사위이자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宋淳錫)이 이를 박세채의 집에서 몰래 가져다 송시열에게 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본 송시열은 대노했다. 「반드시 윤증이 나를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유의서」는 단순히 송시열에 대한 개인적 비판이 아니라 송시열의 정치행태에 대한 비판이자 윤증 자신의 독자적인 정견을 명확히 한 글이다. 윤증의 이런 정치관에 젊은 서인들이 대거 동조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서인이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갈라지자 노론은 윤증을 스승을 배신한 배사(背師)인물로 몰았다. 하지만 이 또한 노론의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윤증의 가장 큰 스승은 송시열이 아니라 아버지 윤선거였기 때문이다. 윤증은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시작해 윤선거가 사망하는 42세 때까지 아버지에게 사사했다. 송시열은 한때의 스승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몸과 학문을 준 평생의 스승이었다. 윤선거와 송시열의 틈이 벌어져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을 때 윤증이 아버지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를 택한 행위를 배사로 몰아세운다면 윤증이 아버지를 버리고 송시열을 택했을 때는 아버지를 버린 패륜이 되는 것이다. 양명학은 당시 용납되지 않던 「불온사상」 조선사상사에는 외주내왕(外主內王), 혹은 양주음왕(陽主陰王)이라는 특이한 용어들이 존재한다. 겉으로는 주자학자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은 양명학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숨기고 양명학을 주장했던 인물로는 이광사(李匡師)·이긍익(李肯翊) 등이 있다. 윤증은 외주내왕적인 인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증은 조선의 대표적 양명학자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불운한 처지를 위로하고 학문적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외주내왕은 주자학 절대주의 시대가 만든 굴절된 철학용어요 정치용어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의 비참한 종말이 윤증으로 하여금 양명학을 공개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막았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신중하고 내성적 성격이었던 윤증은 부친과 같은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윤휴와 박세당이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하여 사문난적으로 몰린 판에 주자학 자체를 비판하는 양명학을 표방했을 경우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양명학은 인식과 실천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이었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물론 성리학이 실천을 경시하는 학문은 아니지만 성리학은 변화하는 사회현상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성리학이 양반 지주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했다면 양명학은 보다 농민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해석했다. 윤증보다 20세 연하였던 정제두는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놓고 안산(安山)으로 내려가 칩거하며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이곳에서 노성에 칩거한 윤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윤증의 신중한 성격은 양명학에 대한 자세에서도 나타난다. 윤증은 정제두에게 숙종 25년(1699)에 보낸 편지에서 「예전의 사우(師友)들과 함께 보았던 양명학 서적들을 지금은 버렸는지 아닌지 알 수 없소」라고 적고 있다. 이는 윤증이 사우들과 함께 양명학 서적들을 읽어 보았다는 유력한 증거다. 그리고 양명학 서적들은 오늘날의 「불온서적」으로 여겨져, 보고 나면 없애 버리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다. 숙종 30년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과연 내가 주위 사람들을 양명학으로 빠뜨려 성리학으로 돌아올 수 없게 하였다면 어찌 후세의 책망을 면할 수 있겠소?』 정제두는 숙종 35년(1709) 안산을 떠나 강화도의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에서 조선 양명학의 본산인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시킨다. 만약 그가 강화도가 아닌 서울에서 양명학을 연구했다면 그 또한 윤휴나 박세당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적어도 강화도동 칩거한 그의 양명학이 정권에 위험시되지 않았기에 온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제두가 강화로 이주하자 정쟁에서 패배했거나 당쟁의 화를 피해 이광명(李匡明)·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강화로 이주해 와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주자학 절대주의가 횡행하던 조선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자유가 숨쉬는 공간이었다. 윤증이 칩거한 충청도 노성과 정제두가 칩거한 강화도 사이에 오갔던 편지는 절대주의 시대에 조선 학문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가느다란 끈이었다. i ▶ 계속… ------------------------------------------------------------------------ <Picture><Picture: 이전><Picture: 목차> ------------------------------------------------------------------------ Copyright (c)1995-97. <Picture> All Right Reserved.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화이트헤드) on 'Economics' Title: 윤증의 심리분석/ 윈 Date: Sat Jan 17 01:37:14 1998 제4권 1호(통권32호) 1998. 1. 1 집중기획 2 <Picture: WIN><Picture> 역사인물 탐구 <Picture>심리분석 9세때 병사호란의 경험 속깊은 감성적 성격으로 발전 김정일 <김정일 정신과의원 원장> ------------------------------------------------------------------------ <Picture>내성적이지만 감성 살아 있는 인물형 윤증은 아버지의 비문 문제로 스승인 송시열과 갈라지게 된다. 군사부일체를 강조하던 조선시대에 스승을 배신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러나 윤증은 자기 중심적인, 인간 중심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런 외형적인 억압에 별로 개의치 않고 송시열과 사제 관계를 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배반함은 융이 스승 프로이트를 배반한 것과 비슷한 패턴이었던 것 같다. 즉, 송시열이나 프로이트는 겉과 틀을 중요시하는 외향적인 성격이었기에 내향적인 윤증과 융과는 성격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깊고도 많았던 것이다. 이같이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표면화한 노소 분당에는 대표적인 외향적 성격과 내향적 성격의 충돌이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한다. 윤증이 내성적인 성격이면서도 현실에서 소론의 영수로 지낼 수 있음은 그는 감정이 살아 있고 학문적인 수련을 통해 인격을 자꾸 넓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통 내성적인 사람들은 현실에서 웅크리고 살기가 쉬운데 용기있게 자신을 주장하고 현실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견지하는 사람들은 내성적이면서도 감정이 살아 있는 인물(Introverted feeling type)이다. 어떤 현실에 직면하면 우리 의식에서는 생각이 떠오르고 무의식에서는 감정이 떠오르는데 이 감정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의 잠재된 에너지와 항상 만나면서 자신을 강화시킬 수가 있다. 또 감정은 살아 있는 무의식의 반응, 에너지로서 산화를 요구하기 때문에 현실에 계속 부딪치기도 한다. 윤증이 한번도 관직에 나간 일이 없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상소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편지들을 통해 자기 의견을 피력한 것은 그가 감정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의 감정형들은 젊었을 때는 시행착오를 많이 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리를 잡는 대기 만성형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학문적으로 대성한 융 또한 전형적인 내향성 감정형 인물이었다. 윤증은 높은 학식과 수양으로 자기의 의식을 자꾸 넓히고 또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감정을 현실감있게 소중히 하여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나 한다. 그가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 등에 부응하는 실리론적 실학과 정론을 주장한 것은 이런 성숙된 감정적·성격적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송시열의 북벌론이나, 조정이 예학과 같은 관념론에 얽혀 세월을 보낼 때 용감히 맞선 것은 윤증이 위축된 내향성이 아니라 활발히 살아 있는 감정형 내향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보통 영웅들의 성격을 보면 내향형 감정형이 참 많다. 그들은 겉으로는 겁 많고 수줍은 것 같으면서도 내면으로는 감정이 살아있어 용기있고 또 자기의 안목을 고집하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거나 기존의 틀에 얽매이는 법이 별로 없다. 이순신 장군이나 박정희 대통령, 백범 김구, 세종대왕, 강감찬 장군, 임경업 장군 등 난세의 영웅들을 보면 그들은 속이 깊고 용맹한 내향형·감정형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모든 내향형·감정형들이 다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웅의 조건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앞장서서 헤쳐나가 일반 사람들을 리드해야 한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가지 못하는 영웅들은 아쉽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많이 관찰하곤 한다. 윤증 또한 그런 예에 속하지 않나 한다. 바로 9살 때 어머니가 자살하고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도망친 삶을 선택해 두고두고 세간의 비난을 산 것이 그의 인격 형성에서 콤플렉스가 되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회니 논쟁」이나 「3대 명분론」 등이 그러하다. 콤플렉스는 당사자를 현실보다는 과거에 묶이게 한다. 그래서 현실의 판단을 그르치게도 하는데 깊은 자기 반성과 성찰, 껍질을 깨는 노력이 없으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현실 직시하는 내향성·감성형 지도자 필요 윤증은 높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묘비명을 둘러싼 송시열과의 회니 논쟁에서 힘든 싸움을 하게 된다. 윤증이 송시열과 격한 대립을 감수하면서까지 회니 논쟁을 확대한 이면에는 부모로 인한 평생의 콤플렉스가 높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만일 그가 부모 콤플렉스를 잘 극복해 현실에서 앞서 나아감에 주저함이 없었다면 역사에서 그의 족적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 걸까? 혹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구한말을 앞둔 것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라가 반쪽이 나 부모·자식·형제와 헤어진 지 50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는 아직도 현대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IMF(국제통화기금) 빚더미에 시달리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걸까? 역사는 모두 현대사라는 말처럼 우리 민족 내부에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근대 정치사 속에서 실익은 도외시한 채 명분(독재니 민민주 등)만 내세우면서 편가르기에 골몰하는 당쟁을 반복해서 보아왔다. 국민을 위한답시고 실제 국민을 위하기 보다는 편들기에 많이 편승해 왔다. 그들 싸움에 경제와 국민의 삶은 계속 시들어가고 결국 나라 전체가 국제적 부도 위기에 휩싸이는 난국에까지 봉착하고 말았다. 경제는 발전해 있지만 정치만은 여전히 혼탁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Picture> 왜 이런 정치가 계속되는 걸까? 정말 우리 민족성에는 일본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나라를 망하게 이끄는 당파성(당쟁망국론)이 있는 걸까? 그러나 그렇게 망해야 할 나라가 끈끈하게 단일 민족을 이루어 5천년 역사와 문화를 빛내고 있다. 우리보다 활짝 피었던 거란·여진·만주족 등은 벌써 사라졌지만 우리 한민족은 아직까지도 끈끈하게 생존하고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것은 명분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주장하는 무리들에 비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 빼어나게 피어난 소수의 영웅들이 우리 국민들의 정신과 영혼에 커다란 자욱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당쟁을 일삼는 무리들이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금방 잊혀져도 소수 영웅들이 묵묵히 보여준 소신있고 자기 희생적인 영웅적인 행동은 국민들의 가슴에 오래 살아남는다. 우리가 맞을 미래 사회는 빠른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미래의 지도자는 격변하는 정세,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화 시대에서 순발력있게 판단하고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지도자는 성장과정의 시련을 잘 극복한 내향적 감정형일 것이다. 미래는 여성의 시대, 감성의 시대라는 말도 있듯이 미래의 영웅은 정신의 여성인 내향성 성격에서 나올 것이다. 내향성의 지도자는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에 부딪치기보다는 자기 안으로 쉽게 함몰하기 때문이다. 내향성 감정형의 인간이 미래의 지도자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현실이 비교적 안전해야 한다. 내향성 감정형의 윤증이 정치에 나가는 전제조건으로 「3대 명분론」을 제시한 것같이 미래 사회에서 진정한 영웅, 지도자를 맞이하려면 우리는 가능성 있는 영웅들을 아끼고 보호하고 키워야 한다. 미래 사회는 열린 사회로 우리끼리 아무리 잘잘못을 따지고 상대를 깎아내린다고 득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시탐탐 빈 틈만 노리고 있는 외국에게 먹힐 뿐이다. 우리 민족의 수많은 영웅들은 세종대왕을 제외하고는 무수히 모함당하고 암살당하고 싹을 잘려 왔다. 영웅의 싹을 도려내는 이무기들의 관행은 우리 민족이 세계화의 시대에 적응하기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주범이다. 이제는 우리도 현실을 똑바로 보고 실질적이고 용기있는 제안을 하는 내향적 감정형의 윤증 같은 정치가가 칩거하지만 말고 정치 일선에 나와 재능을 발휘하도록 영웅의 싹을 아끼고 사랑하고 키워야 할 것이다. 영웅은 자기 자신보다는 국민들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인간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계속… ------------------------------------------------------------------------ <Picture><Picture: 이전><Picture: 목차> ------------------------------------------------------------------------ Copyright (c)1995-97. <Picture> All Right Reserved.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화이트헤드) on 'Economics' Title: 윤증의 생애와 발자취/ 윈 Date: Sat Jan 17 01:45:08 1998 제4권 1호(통권32호) 1998. 1. 1 집중기획 2 <Picture: WIN><Picture> 역사인물 탐구 <Picture>생애와 발자취 20여차례 벼슬 제수 거부 지역화합등 대통합 정치 역설 이덕일 <숭실대 강사> ------------------------------------------------------------------------ <Picture>서기 1714년 86세의 윤증이 사망했을 때 『숙종실록』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윤증은 스승 송시열을 배신하여 사림(士林)에 죄를 얻었다. 또 유계(兪棨)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수년 후 그 일이 탄로나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화가 나서 절교 편지를 보냈다. 윤증은 어렸을 때 유계에게 배웠는데 일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윤증이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했으니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숙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바라본 윤증은 두 스승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인물이다. 그것도 스승이 쓴 책을 자신의 부친이 쓴 책으로 만들려다 들통이 나 절교당하는 비양심적인 인물이다.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君師父)가 하나로 취급되던 유교사회 조선에서 두 스승을 배신했다는 평가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이었다. 하지만 윤증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당시의 임금 숙종은 이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했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도다」 또한 『윤증연보』(尹拯年譜)에 의하면 그의 장례 때 조문한 인사가 무려 2천3백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야말로 당대에 이름깨나 있던 선비들은 대부분 조문한 것이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수백명의 관학(館學) 유생들이 포함돼 있었다. 「앞뒤로 두 스승을 배신해 그 죄를 더욱 용서하기 어려운」 배은망덕한 인물에 대한 숙종의 추모시와 밀물 같은 조문객은 어떤 연유일까? 더구나 그의 집은 서울도 아니었다. 그의 집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라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집 뒤로는 노성산이, 문 밖으로는 계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윤증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성(泥城)이라고 불렸던 이 한적한 농촌까지 2천여명의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조문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상반된 두 현상은 그만큼 그의 생애가 논란의 한가운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증의 생애에 관한 상반된 두 평가 중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 국가의 공적 기록인 「실록」을 「정사」(正史)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적 기록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하물며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의 기록은 비록 「실록」이라 하더라도 사관이 어느 당파 사람인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오늘날도 여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과 야당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물평이 다른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윤증에 대한 상반된 평가 <Picture> 『숙종실록』은 윤증의 생애를 배신으로 점철된 인생으로 기술했지만 사실상 그는 한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사였다. 이 말이 그가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당시 남인·노론(老論)과 함께 3대 정당 중의 하나인 소론(少論)을 이끌었던 저명한 정치가였다. 바로 이 때문에 『숙종실록』의 사관이 그의 생애를 혹평한 것이다. 그 사관은 반대당인 노론(老論)측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다. 송시열은 윤증의 스승인 동시에 정적(政敵)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송시열과 윤증은 은원(恩怨)으로 얽힌 모순된 존재였다. 윤선거와 윤증의 관계 또한 일반적인 부자지간은 아니었다. 윤선거는 그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자 강화도 사건이라는 평생 씻지 못할 콤플렉스를 안겨준 모순된 존재였다. 윤증과 송시열, 그리고 윤선거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드라마는 개인적인 인연에만 연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 사람이 엮어 가는 이야기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당면해 있던 심각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해법이 담겨 있었다. 그 해법에 따른 정치적 행보는 아직까지도 윤선거와 윤증의 파평(坡平) 윤씨와 송시열의 은진(恩津) 송씨 후손들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송시열은 윤선거 생전에 그와 한바탕 다툰 데 이어 그의 아들 윤증과도 크게 다투었다. 이렇게 말하면 두 집안이 대대로 원수 사이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 사이였다. 조선에서 동문 사이는 곧 같은 당인(黨人)임을 뜻한다. 조선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학통이 곧 당파를 이루는 학문정치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이황의 후학들은 대체로 동인과 남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이 되는 조선정당의 계보는 조선정치의 이런 특성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한 윤선거와 송시열이 같은 정당인 서인이었던 점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당시 서인은 집권당이었으므로 이 두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여당인(與黨人)들이었다. 같은 당 소속이었던 윤선거와 송시열은 사돈 사이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장녀는 윤선거의 형인 문거(文擧)의 며느리, 즉 윤선거의 조카며느리였다. 자유롭게 남녀가 교제하는 현재도 우리나라 지배층들은 혼인을 서로의 권력과 재력을 극대화시키는 유력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부모에게 있던 조선시대에 결혼은 곧 집안끼리의 결합이었다. 따라서 두 집안이 사돈이란 의미는 두 집안이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유력한 증거다. 같은 당파이자 사돈 사이인 가까운 관계가 왜 악화되어 현재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일까? 윤증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학문집안이었다. 그의 집안이 당대의 학문가였음을 말해 주는 유적은 현재도 남아 있다. 논산시 노성면에 현존하는 종학당(宗學堂)이 바로 그곳이다. 종학당은 글자 그대로 일가(宗)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學) 집(堂)이었다. 종학당은 인조 후반기인 1640년경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尹舜擧)가 세운 일종의 집안 학교였다. 윤증의 일가 자제들은 눈 아래 병사저수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이곳 종학당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학문을 전수받았다. 학문 높은 집안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가의 자제들이 함께 모여 배우는 종학당 학습법이 효과만점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종학당 출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만 무려 42명이었다니 그 위력을 알 만하다. 윤증의 할아버지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성혼은 선조 때 이이와 함께 서인을 이끈 서인의 영수였다. 윤선거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제자였으니 윤증의 집안은 서인의 두 영수 이이와 성혼의 양쪽 학맥을 이은 셈이다. 즉 윤증은 한몸에 이이의 학통에다 성혼의 외손이란 두 정기를 받은 셈이자 조선 유학의 종주를 이은 셈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송시열·송준길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가장 학문이 높은 학생으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하지만 윤증의 어린시절은 국가의 치욕이었던 병자호란으로 크게 영향받는다. 9살 어린 나이에 겪은 병자호란은 너무도 큰 상처를 심었고 평생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청나라가 침입하자 그의 아버지는 부인과 어린 남매를 이끌고 강화도로 피란했다. 북방의 기마민족은 전통적으로 수전(水戰)에 약하다. 세계를 정복한 몽고족은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멀지 않은 바다를 끝내 건너지 못했다. 인조도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기마민족인 만주족에 맞서 장기 항전하기로 결정했다. 봉림대군과 비빈(妃嬪)들은 미리 강화도로 들어갔고 윤선거 같은 양반 가문들도 강화도로 피신했다. 문제는 정작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다 길이 끊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인조 14년인 병자년, 바람도 찬 12월이었다. 이 바람에 무수한 이산가족이 생겼다. 왕실과 많은 양반가족들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윤증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윤증의 할아버지인 윤황이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다.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친구 권순장·김익겸과 함께 청군이 상륙하면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포를 거쳐 갑문(閘門)을 통해 상륙한 청군이 삽시간에 밀려들면서 조선군은 대응 한번 제대로 못하고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성은 어느새 청군으로 뒤덮였다. 이때 순절을 약속했던 윤선거의 두 친구는 김상용이 분신하자 그들도 따라서 죽었다. 그러나 윤선거는 약속대로 죽지 않고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의 명으로 남한산성에 파견되던 침원군(琛原君) 이세완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했다. 이 사건이 훗날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사이에 의리론을 두고 벌어지는 「회니시비」(懷泥是非)의 논쟁거리가 된다. 자결한 것은 윤선거의 두 친구뿐이 아니었다. 윤증의 어머니 이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37년 정월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자 시세가 급박해졌다. 윤선거는 사우(士友)들과 앞으로의 처신을 논의하고 있는데 부인 이씨가 여종을 보내왔다. 윤선거를 만난 부인 이씨는 『적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뵙고 결별하려고 오시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자결했다. 윤선거는 부인을 말릴 수도, 그 의지를 칭찬할 수도 없는 곤란한 입장이어서 차마 부인의 자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 계속… ------------------------------------------------------------------------ <Picture><Picture: 목차><Picture: 다음> ------------------------------------------------------------------------ Copyright (c)1995-97. <Picture> All Right Reserved.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화이트헤드) on 'Economics' Title: 윤증의 생애와 발자취/ 윈 Date: Sat Jan 17 01:46:31 1998 제4권 1호(통권32호) 1998. 1. 1 집중기획 2 <Picture: WIN><Picture> 역사인물 탐구 <Picture>생애와 발자취 20여차례 벼슬 제수 거부 지역화합등 대통합 정치 역설 이덕일 <숭실대 강사> ------------------------------------------------------------------------ <Picture>9세 때 어머니 사후 손수 장례 치러 한편 윤증과 그 누이는 곁에서 통곡할 따름이었다. 부인 이씨는 여종에게 후사를 부탁한 후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하직했다. 사우들에게 돌아간 아버지의 소식이 끊어지고 어머니는 자결했지만 윤증은 의연했다. 윤증은 한 살 위의 누이와 함께 노비들을 인솔해 손수 염을 하고 입관(入棺)한 다음 임시로 거처하던 강화도 사람 정파총(鄭把摠)의 집 마루 아래 빈소(殯所)를 정했다. 윤증은 마당을 파 관을 묻고 사방 모서리에 돌 여덟개를 놓은 후 중간에 숯으로 표식을 삼았다. 윤증과 누이는 슬프게 곡(哭)을 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윤증은 침착했다. 그는 허리에 차고 다니던 작은 수첩을 꺼내 누이에게 주었다. 족보가 적혀 있는 수첩이었다. 윤증은 누이에게 족보를 외우게 하였다. 『만일 서로 헤어지게 되면 누님은 여자이니 이것으로 서로 알아보아야 한다』는 속깊은 의도였다. 청군이 성을 점령한 상태에서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윤증은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과연 윤증과 누이는 혼란한 와중에 헤어지게 되었다. 윤증은 성안 사람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김포의 청군 진영으로 끌려갔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후 풀려났다. 그의 누이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남의 여종이 되어 의주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족보를 말했는데 다행히 의주에서 만난 어사(御史) 이시매(李時煤)가 아버지 윤선거와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몸값을 대신 지불해 풀려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윤증의 재치가 없었다면 그의 누이는 머나먼 변방에서 남의 종으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증이 김포에서 풀려났을 때 어린 그를 업고 다닌 인물은 여종 동절(冬節)이었다. 동절은 윤선거가 강화도로 피란 와서 거주하던 집의 주인인 정파총(鄭把摠)의 소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관을 내주어 빈소를 차리게 한 사람도 동절이었다. 그런 동절이 늙어 죽은 후 제상(祭床) 차릴 아들이 없자 윤증은 몸소 제상을 차려 주었다. 그것도 윤증이 기력이 남아 있던 85세 때까지 제사를 지내 주었다. 85세는 그가 몸이 쇠약해져 새벽에 가묘(家廟)에 참배하는 것을 그만둔 해이니 조상을 지내는 정성으로 여종의 은혜를 기린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 자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다. 윤증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이 모두 출타해 가묘(家廟)에 참배할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사당에 참배하게 하자 다른 사촌들은 마지못해 참배한 후 모여 낄낄거렸으나 윤증은 양손을 단정히 하고 용모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이를 본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말하니 할아버지 윤황은 『이 아이는 보통 아이와 다르다』며 더욱 귀여워하였다. 벼슬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키로 결심 <Picture> 윤증은 다른 사촌들이 시샘을 할 정도로 어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만약 벼슬에 뜻을 두었으면 그 누구보다 빨리 출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증은 일찍이 벼슬을 포기했다. 그는 학문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것을 최고의 효도로 쳤던 당시에 이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한번도 과거를 보지 않았다. 조선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증 같은 이름있는 학자에게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출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황이 척화신(斥和臣)으로 절개를 드높인 데다 서인의 정통학통을 이은 그에게 관직이 제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37세 때 제수받은 벼슬은 정6품 공조좌랑(工曹佐郞)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뜻이 없었기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43세 때인 현종 12년에는 정4품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진선(進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세자의 교육을 맡는 곳으로 학덕이 뛰어난 인물만이 임명될 수 있는 영예로운 관직이었다. 윤증은 벼슬에 뜻이 없었다. 그는 41세 때인 현종 10년(1669)에 여러 집안 어른과 당대 유학의 원로들에게 이런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저는 처음부터 과거를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실제 그는 이후 정4품 사헌부 장령(掌令), 종3품 사헌부 집의(執義) 등 모든 벼슬하는 이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청요직(淸要職)이 제수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다. 그에게 당쟁은 거의 운명처럼 보인다. 일찍이 벼슬을 포기했고, 또 여러번 제수된 벼슬에 단 한번도 나가지 않았으면서도 격심한 노소분당의 한 가운데 그는 서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쟁의 두 당사자가 아버지 윤선거와 스승 송시열이었던 탓이다. 이 두 사람이 부딪친 당쟁에 아들이자 제자인 그가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윤선거와 송시열이 부딪친 발단은 백호(白湖) 윤휴문제였다. 그 유명한 사문난적(斯門亂賊) 논쟁에 휘말린 것이었다. 사문난적 논쟁은 원래 윤휴와 송시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문난적 논쟁은 위기를 맞이한 조선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지식인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송시열은 양란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주자학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에게 주자는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인 효종에게까지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신 분이 주자이며, 하시는 일마다 모두 정당하신 분이 주자』라고 했을 정도로 주자를 절대시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성리학 체제로는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희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하는 데 격분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공격했다. 송시열의 분노는 이 한마디 말로 요약된다. 『윤휴가 끼친 해독은 사나운 맹수와 홍수보다도 심하다』 하지만 서인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반대당파 남인인 윤휴를 『그는 고명한 학자이므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할 수 있다』고 감싸고 나섰다. 그러자 윤휴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린 서인들은 황산서원(黃山書院·죽림서원)에 모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황산서원은 충남 강경의 금강 근처에 세워진 서원이다. 오늘날은 세계화의 현란한 구호 속에 천시받는 국학(國學)의 현주소를 말해주듯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 조선 유학의 학통을 이은 대유학자들을 모신 핵심적인 서원이었다. 이 황산서원에 송시열·윤선거 등 저명한 서인학자 10여명이 모인 때는 1653년(효종 4)이었다. 언덕 위 팔우재에서 바라보는 금강은 고요하게 흘렀으나 이들의 논의는 긴장이 감돌았다. 윤휴가 사문난적이냐 아니냐는 주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모는 데 윤선거가 끝내 동의하지 않자 송시열은 극단적으로 나왔다. 『주자를 이기려 한 윤휴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는 죽음 이외의 형벌이 없소. 임금이 춘추의 법으로 다스릴 때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공(윤선거)은 응당 윤휴보다 먼저 죽게 될 것이오』 『주자가 옳습니까? 윤휴가 옳습니까?』 이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양단간에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주자가 옳습니까? 윤휴가 옳습니까?』 당시는 주자학 절대주의 시기였다. 이는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에서 「스탈린이 옳은가? 트로츠키가 옳은가?」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이미 사상이나 학문의 차원을 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종교나 이념의 차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윤휴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음양(陰陽)으로 말한다면 주자가 양(陽)이고 윤휴가 음(陰)이 되겠습니다』 황산서원 회합이 송시열의 승리로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주희가 옳은가 윤휴가 옳은가 라는 개인간의 선택 차원이 아니라 조선 주자학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가 아닌가 라는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선택 차원의 논쟁이었다. 주희가 틀리고 윤휴가 옳다고 말한다면 윤휴처럼 사문난적으로 몰릴 판이었기에 윤선거로서는 윤휴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산서원 회합은 외견상 송시열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승리한 송시열 또한 이를 법적인 문제로 비화시키지는 않았다. 송시열은 윤휴문제에 대해 서인학자 사이의 합의를 도출한 것에 만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황산서원 회합에서 쌓인 감정의 앙금은 불씨를 안은 채 잠복한 상태였다. 효종의 죽음이 계기가 된 예송논쟁은 이 감정의 앙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예송논쟁은 그 배후에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한 것이냐는 심각한 문제를 깔고 있지만 그 표면적 모습은 효종의 국상(國喪)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단순한 것이었다. 예법에 따르면 성인인 맏아들이 죽었을 경우 부모는 3년복을 입게 돼 있었고 기타의 경우는 1년복을 입게 돼 있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송시열의 1년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기 위해서 1년설을 주장한 것이라며 3년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1차 예송논쟁은 가까스로 집권당인 서인의 승리로 끝났으나 15년 후인 현종 15년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때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의 승리로 끝났다. 2차 예송논쟁 결과 정권이 교체됐고 남인들이 집권했다. 실각한 송시열은 귀양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함경도 덕원에서 경상도 장기까지 북에서 남으로 유배지를 전전하면서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송시열은 그 누구보다 효종과 가까웠던 자신을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역적으로 모는 데 분개했다. 하지만 송시열에 대한 남인들의 적대감은 뿌리깊은 것이었다. 남인들은 유배지의 송시열을 계속 압박했다. 그의 유배지에는 바깥으로 나올 수 없도록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6년 뒤 다시 정권은 서인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서인계 척신(왕실의 인척)들이 주축이 돼 남인들에게 정치보복이 가해졌다.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물고 물리는 싸움이 계속되면서 윤휴가 처형되고 이어 무려 1백여명의 남인들이 사형·유배·삭탈관작 등의 화를 입었다. ▶ 계속… ------------------------------------------------------------------------ <Picture><Picture: 이전><Picture: 목차><Picture: 다음> ------------------------------------------------------------------------ Copyright (c)1995-97. <Picture> All Right Reserved.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화이트헤드) on 'Economics' Title: 윤증의 생애와 발자취/ 윈 Date: Sat Jan 17 01:48:07 1998 제4권 1호(통권32호) 1998. 1. 1 집중기획 2 <Picture: WIN><Picture> 역사인물 탐구 <Picture>생애와 발자취 20여차례 벼슬 제수 거부 지역화합등 대통합 정치 역설 이덕일 <숭실대 강사> ------------------------------------------------------------------------ <Picture>집권 서인으로서 화해의 정치 주장 서인계 척신들의 이런 정치행태에 대해 서인 내부에서도 반발이 터져나왔다. 남인들에 대한 공작정치에 소장파 서인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소장파 서인들은 공작정치의 실행자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송시열이 나서서 척신들의 공작정치를 중지시켜 주기를 바랐다. 송시열이 조정에 나온 것은 이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반목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휩쓸리는 모습을 보였다. 소장파 서인들은 송시열의 이런 처사에 반발해 일제히 등을 돌렸다. 이들은 송시열과 함께 부름을 받은 두 선비 박세채와 윤증을 주목했다. 윤증이 서울길에 오른 것은 소장파 서인들의 이런 바람 속에서였다. 숙종 9년 5월 윤증은 생애에서 딱 한번 출사할 생각을 품은 채 서울길에 올랐다. 한해 전 그에게 내려진 벼슬은 정3품 호조참의(戶曹參議)였다. 윤증은 지나치리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곧장 서울로 올라가 임금을 알현하는 대신 과천에 머물렀다. 과천에는 부친의 제자이자 자신과 동문 사이인 나량좌(羅良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나량좌의 집에 머물면서 정국을 관망했다. 임금에게 대죄(待罪)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속내는 정국 관망에 있음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차렸다. 윤증이 과천에서 올라오지 않자 송시열과 비슷한 시기 출사한 박세채가 과천까지 찾아와 함께 뜻을 펼 것을 종용했다. 두 사람은 밤을 새우면서 당시 정국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이 자리에서 윤증은 유명한 「3대 명분론」, 즉 자신이 정계에 참여하기 위한 3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지금 잇단 정치공작에 희생된 남인들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남인과 서인을 화해시킬 수 있겠는가? 둘째, 정치에 부당하게 간여하는 외척들을 축출할 수 있겠는가? 셋째, 현 집권자들이 자기 당 사람만 등용하고 반대 당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데 이를 시정할 수 있겠는가?」 첫째 조건은 정치공작에 희생된 남인들의 원한을 풀고 정치화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둘째는 김석주 등 왕실 친인척의 부당한 정치간섭을 막을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이고, 셋째는 반대당 사람들, 즉 남인들도 등용함으로써 정치화합·지역화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이었다. 당시 서인들은 기호지방에 주로 분포하고 남인들은 영남지방에 주로 분포해 벼슬아치들은 물론 일반 유생들 사이에서도 지역감정이 심각한 때였다. 일반 백성들은 아니었지만 사대부들 사이에는 지금 못지않게 지역감정이 팽배했다. 심지어 남인 지역인 대구에 거주하는 유생이 서인인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찬성했다 해서 그를 동네에서 내쫓고 집을 연못으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윤증은 이런 상황에서 기호지방의 유력한 학자로서 반대지역인 영남지역과의 화해를 주장한 것이다. 또한 서인의 유력인사로서 반대당파인 남인에 대한 포용을 주장한 것이었다. 정치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척신정치의 폐지를 요구한 것은 집권자들의 친인척이 사사로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과 공작정치를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는 정치공작과 지역감정이 횡행하는 현재의 정치현실에 3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던지는 현인(賢人)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윤증은 당적으로 볼 때는 서인이었다. 큰 틀로 보아 공작정치의 가해자 입장이었다. 이는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과제에 많은 시사를 준다. 즉 화해는 가해자의 자기반성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지역감정의 피해자가 누구이고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따진다면 해결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자명해질 것이다. 정치화합과 지역화합, 그리고 권력자 친인척의 정치간여 금지는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는 원칙이지만 그만큼 지켜지기 어려운 원칙이기도 하다. 윤증이 제시한 이런 과제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박세채 또한 3대 명분론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정치판의 상황에서 이를 실현할 수 없음을 토로했다. 윤증은 자신의 뜻을 펼칠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미련없이 고향인 이성으로 돌아갔다. 박세채도 서울에 올라온 후 송시열은 만나지도 않고 숙종에게만 사의를 표명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름을 받은 세 사람 중 둘이 물러가자 혼자 머쓱해진 송시열 또한 벼슬을 내놓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윤증과 박세채의 처신은 오늘날 국민이 부른다며 정계에 나섰다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은 채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지거나 추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요즘 정치인의 행태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윤증과 박세채의 처신은 「때가 되면 나아가 도(道)를 펼치고 때가 아니면 물러나 학문을 탐구하고 후학을 가르친다」는 율곡의 출사관과 같은 것이었다. 기존 정계의 문제점이 곧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해 섣불리 나섰다가 구악(舊惡)을 뺨치는 신악(新惡)만 보태는 현재의 일부 정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처세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문 짓지 말라고 유언 <Picture> 윤증이 제기한 3가지 조건, 즉 「3대 명분론」에는 남인과 서인의 화해, 척신 정치구조의 타파, 당색과 지역색을 배제한 고른 등용이라는 당시 조선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해법이 그대로 제시되어 있었다. 이는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투쟁의 정치에서 화해의 정치로, 증오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로 나가자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또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증의 이런 처신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도 있었다. 정계에 문제가 있다면 나아가 개혁하는 것이 선비의 바른 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윤증은 이런 비판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언덕에 있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 함께 물에 빠져 허우적대서야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윤증은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엄격한 선비였다. 평상시에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나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손수 방과 마루를 쓴 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종일 책을 읽었다. 혼자 있을 때도 손님과 함께 있는 듯이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한번도 태만하게 누워 쉬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맞을 때도 노소귀천(老少貴賤)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했다. 윤증은 검소한 삶을 스스로 실천했다. 집안은 아주 검소하였으나 거처하기는 편안하게 했으니 실질을 숭상한 기풍을 알 수 있다. 현미밥과 거친 옷을 입는 것을 분수에 맞다고 여겼다. 집안 여자들에게도 절대로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름난 효자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눈물이 옷소매를 다 적셨으며 삼년상을 지낼 때는 종이 주머니에 소금과 후추 약간을 양념으로 갖추고 삼년 내내 두가지 반찬만으로 끼니를 이을 정도였다.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새벽에 가묘에 참배하고 제사를 스스로 받드는 것을 보고 건강을 염려한 어떤 사람은 『주자도 70세에 이르자 손자에게 제사를 대신 받들게 했는데 이제 그만 쉬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증은 『내 근력이 아직 제사를 받들 만한데 어찌 자식에게 대신케 하겠는가』라고 받았다. 그가 새벽에 사당 참배하는 것을 중지한 것은 죽기 1년 전인 85세 때였다. 숙종 35년, 그의 나이 81세 때는 정1품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윤증은 그때까지 숙종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조선 전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정승 자리를 제수한 예는 윤증이 전무후무하다. 물론 이때도 윤증은 18번이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31세 때부터 평생 20여번 이상 벼슬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사양의 상소를 올리는 데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쏟았다는 우스개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는 당시로는 극히 드문 나이인 86세까지 살다가 유봉정사(酉峯精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맞는 그의 자세 또한 남달랐다. 웬만한 벼슬만 지내도 화려한 수사가 담긴 검은 오석(烏石) 비문을 무덤 앞에 세우는 것이 관례인데 그는 자신의 비문을 짓지 말도록 유언했다.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문제로 송시열과 다투었던 것이 한으로 남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그의 무덤가에 서 있는 비문의 내용은 아주 특이하다. 「유명조선국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有名朝鮮國徵士坡平尹公諱拯之墓) 해석하면 「조정에서 부른 학덕이 높은 선비 윤증의 무덤」이란 뜻이다. 비문의 하단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노서(魯西·윤선거) 선생 묘(墓)에서 석호(石湖·윤문거) 선생께서 13자를 따서 옮겼다」 즉 윤선거의 묘비에서 13자를 따서 옮겼다는 뜻이다. 비문을 짓지 말라는 유언을 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묘 앞에 비문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었던 후손들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논산시 노성면의 그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산길 양편에는 한 손아귀에 잡지 못할 정도의 푸른 대나무들이 그의 굵직한 생애를 말해주는 듯 늘어서 있다. 묘를 등지고 내려오는 길에 댓잎이 바람에 서걱이며 울었다. ▶ 계속… ------------------------------------------------------------------------ <Picture><Picture: 이전><Picture: 목차><Picture: 다음> ------------------------------------------------------------------------ Copyright (c)1995-97. <Picture> All Right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