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8월 20일 목요일 오후 12시 28분 48초 제 목(Title): 펌,최원식/지식인사회의 복원을 위한 단상 지식인 사회의 복원을 위한 단상 최원식 ------------------------------------------------------------------------------- - I. 세기말 풍경, 지식인의 황혼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는 "나는 규탄한다"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성명서를 '로로르L'AURORE'에 발표하였다. 유대인 출신 드레퓌스 대위를 간첩으로 조작한 프랑스 군부에 맞선 졸라의 외로운 봉기에 힘입어 양심적 지식인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서구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이 사건 백 돌에 즈음하여, 프랑스가 요란한 모양이다. 1월 12일 시라크 대통령이 졸라가 살던 집에 기념비를 헌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3일에는 법무부와 국방부의 수장이 졸라가 안치된 팡테옹을 찾아 경의를 바치고, 교육부와 소르본 대학은 학술토론회를 조직하고, 국립박물관은 13일부터 4일 간을 드레퓌스 주간으로 정하여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그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역시, 13일 시라크 대통령이 졸라와 드레퓌스 가족들에게 프랑스의 이름으로 공식 사과 서한을 전달한 일일 것이다(한겨레신문, 1998. 1. 13). 그런데 이 뒤늦은 야단법석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지식인 시대의 종언을 고지하는 우울한 조종(弔鐘)으로 비치는 것은 무슨 일일까? 현존하는 체제와의 근본적 불화 속에서 민중과 연대하여 새로운 대안을 모색 실천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 시대는 과연 황혼에 도달했는가? 졸라의 죽은 혼에 프랑스 정부가 헌정하는 항복 의식은 지식인의 죽음을 선포하는 프랑스 정부의 유연한 자신감의 표현 또는 능란한 예방 혁명의 책략이기 십상이다. 서구는 이미 그렇다 쳐도 한국은 어떠한가? 혁명의 가능성이 거의 봉쇄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들과 달리, 고통 속에서도 활기찬 반주변부 사회의 새로운 변혁 모델의 한 중심으로서 세계적 주목을 받으면서 개발 독재 체제와 끈질긴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영웅적인 지식인 사회를 보존 발전시켜온 한국, 지금 우리 지식인 사회도 적막강산의 형국이다. 우리는 그 동안 말로만 듣던 공황을 실감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최고의 위기 국면으로 급속히 경사하였다. 그런데 혁명적 지식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와 문민 정부의 출범이라는 나라 안팎의 조건 변화에 과잉 반응하며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예찬하던 온갖 포스트주의 지식인들 또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라는 특단의 상황에 직면하여 황금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이 한국 재벌의 해체와 군비 축소를 요구하는 이 기막힌 반전 앞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 지식인 사회는 할 말이 적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그리고 상층·중간층·하층을 불문하고, 우리 사회는 붕괴의 징조로 가득했었다. 이제사 이따위 말을 늘어놓는 일이 뒷북 치는 격으로 부끄럽다. 물론 IMF 이전에도 지식인들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유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선 내 마음부터 들여다보건대, 비판의 진정성이 김영삼 정부 시대의 저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많건 적건 침윤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보다 긴요한 일은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정신, 곧 자기 비판의 용기라고 믿는다. 요즘, 우리 국민은 훌륭한데 정부를 비롯한 지배 블록이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물론, 초반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어온 그들의 책임은 엄중히 물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국민은 그 책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다. 고리키와 루쉰(魯迅)이 그립다. 러시아 민중의 미덕에 대해서는 가없는 사랑을, 그들의 우둔과 교활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판을 바친 고리키, 좌우파의 협공 속에서도 중도(中道)의 간난한 도정에 아슬히 서서 지배층의 위선과 무능과 부패에 대한 공격 못지않게, 오랜 전제 아래 굴종해온 중국 민중의 부정적 성격에 날카로운 풍자를 날린 루쉰. 지배 블록에는 물론이고 국민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핵심에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자리한다. 세기말의 황혼 속으로 속절없이 저무는가, 맹성(猛省) 속에 21세기의 여명을 여는 새로운 정수박이로 거듭나는가? II. 지식인의 기원 손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머리를 사용하여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교양 계층으로서 존재하는 지식인 집단은 인류사의 개시 이래 연면한 것이겠지만, 지배 체제의 핵심 또는 주변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구체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근대적 의미의 지식인intellectual은 자본주의의 발생 발전과 깊은 연관을 가질 터이다. 이 점에서 지식인은 서구 근대의 발명이라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시민 혁명의 길을 연 인문주의자humanist와 계몽주의자들은 근대 지식인의 맹아다. 시민 혁명에 가담하고, 혁명 이후 그 이상을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 지식인들 또한 그 자식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공고한 부르주아지와 지식인의 연대는 시민 혁명의 이상이 부르주아지의 독점적 지배 체제로 귀결되면서 균열한다. "19세기 중엽의 혁명 기간의 종말은 지배 계급으로부터의 교양 계층의 해방"을 촉진했으니, "문화의 대표자가 점차 권력의 대표자로부터 떨어져나오는 해방의 과정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 즉 2월 혁명(1848) 이후의 결정적 상황 변화 속에서 지식인의 대표적 표상,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가 탄생하였던 것이다.1) 그리하여 인텔리겐치아는, 베르자예프Berdyaev의 말대로, "국가와 인민 사이의 비극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2) 이 독특하게 소외된 위치로부터 일찍이 부르주아지의 정신적 전위로 활동했던 지식인들은 부르주아 질서의 비판적 반대자로서 변모하였으니, 여기에는 자기들의 고용주, 즉 경제적 부와 정치 권력을 틀어쥔 부르주아지에 대한 교양 계층의 원한이 서려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3) 원한에 말미암았다고 할지라도 미묘한 위치 이동 속에서 지식인에게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연대 가능성이 증대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가능성이 모든 지식인들을 광범한 민중과 연합하여 반자본주의적 혁명의 길로 나서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차라리 '귀족주의적 도덕 사상가'의 위치로 도피하는 쪽을 택"하게도 하였다.4) 초월과 혁명, 이 기로에서 전자가 주로 선진 자본주의국 지식인의 선택이라면, 후자는 후진 자본주의국 지식인의 대체적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후자의 길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인 것이다. 마침내 세계어의 지위로까지 격상된 인텔리겐치아란 용어는 1860년대에 이류 소설가 보보르이킨Boborykin에 의해 러시아어에 도입되었다 한다.5) 이 용어가 도입과 거의 동시에 러시아 사회 안에서 일종의 지배적 담론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앞 시대,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1830년대 러시아 지식인과는 차별되는 자질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지식인군이 광범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터인데, 두 시대 지식인의 충돌을 전형적으로 드러낸 소설이 바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이다. 귀족적 이상주의자 아버지 세대의 도덕과 관습과 종교를 오직 과학의 이름 아래 거부하는 평민적 유물론자 아들 세대, 작가는 이 새로이 출현한 괴물 같은 지식인 바자로프Bazarov에게 니힐리스트라는 신어(新語)를 사용할 정도로 아들 세대는 급진적이었다. 물론 양자를 아버지와 아들로 지칭한 데서 잘 드러나듯, 전자는 후자의 태반이지만, 양자의 비연속성이 연속성을 압도할 만큼 크기 때문에, 대체로 후자를 좁은 의미의 인텔리겐치아의 진정한 기원으로 삼는 것이다. 러시아의 개혁 운동이 '참회 귀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인데, 그 근원에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있다. 침략에 맞서 조국 방위 전쟁에 참여했던 러시아 귀족들은 시민 혁명 이후 새 세상을 열어가는 서구의 실상에 접한 충격으로 전후에 오히려 러시아의 낙후성에 절망한다. "우리는 폭군으로부터 조국을 구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여전히 우리를 압제하고 있다."6) 이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의식을 간명하게 요약한 이 말로부터 러시아를 개혁하려는 참회 귀족들의 봉기, 12월당의 반란(1825)이 싹텄던 것이다. 약간은 희극적으로 끝난 이 반란은 더욱 가혹한 반동을 초래했지만, 이후 거의 한 세기에 걸친 러시아 혁명 운동의 단서를 열었던 터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정책의 전진 속에서 종래의 사관학교 중심 교육 제도가 시민 교육의 망으로 확대되면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 청년들이 참회 귀족을 대신해서 새로운 지적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푸슈킨의 죽음(1837)은 그 교체의 상징적 사건이다. "귀족 출신의 근위장교가 전시대의 지적 엘리트의 대표였듯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학생이 새로운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이 된다."7) 러시아 농민 반란의 전설적 지도자 푸가초프가 1774년 체포되었을 때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까마귀가 아니라 새끼 새다. 진짜 까마귀는 아직도 하늘을 배회하고 있다." 러시아의 구체제를 진정으로 위협할 진짜 까마귀가 바로 "대학의 푸가초프Pugachev d'universit " 즉 1860년대 이후 출현한 인텔리겐치아였던 것이다.8) 인텔리겐치아는 참회 귀족과 달리 잡계급적(雜階級的)이다. "새로운 교양 계층은 귀족과 평민을 아울러 포함하고 상하층의 계급 이탈자들로서 보충되는 잡다한 집단이다. 한편으로는 [……]'참회하는 귀족'들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상인, 하급 관리, 도시의 성직자, 해방된 농노 등의 아들로서 흔히 '혼합된 혈통의 사람들'이라 불리며 그 중 대부분은 '자유스러운 예술인,' 학생, 가정교사, 신문 기자 등의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성직자의 아들들로서, 이들은 가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교양과 지적 감수성을 갖춘 데다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자연 발생적 반항 심리에 의해 인텔리겐치아의 반종교적·반전통적 태도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표현하게 된다."9) 특히 인텔리겐치아의 핵심이 성직적 배경에서 나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인텔리겐치아의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는 마틴 메일리어는 참회 귀족의 제일 외국어가 불어라면 인텔리겐치아의 주요한 외국어는 성직의 언어인 라틴어라는 점에 주목, 두 세대 지식인의 교양적 뿌리의 미묘한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10) 성직적 배경에 유의할 때 우리는 인텔리겐치아의 반종교적 종교성을 요해하게 된다. 그들은 반종교적 외관에도 불구하고 근본에 있어 묵시록적 파국으로 치닫는 천년왕국적 역사관에 지펴 있기 때문에 점진적 진화보다는 총체적 종말 뒤의 구원(救援)의 합창으로 마감하는 급진적 혁명을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11) 이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끌어낸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거의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추동력의 근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텔리겐치아의 독자적 활동이 가능하게 된 사정이 특히 189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의 추진과 관련된다는 점을 지나쳐선 안 된다. 비록 위로부터의 근대화일망정 산업화는 지주 귀족과 농노라는 두 계급으로 나누어진 러시아 사회의 단순성을 해체함으로써 서구에 준하는 계급 계층의 다기화를 초래했으니,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충원된 잡계급적 인텔리겐치아의 성립 자체가 근대화의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혁명을 주도할 만큼 독자적 역량을 지니지 못한 점, 산업화의 유동성 속에서 민중에 대한 정부의 장악력이 이전보다 현저히 약화된 점, 그리고 비록 소수지만 소명 의식으로 충만한 인텔리겐치아의 맹렬한 활동력이 가세함으로써 러시아 제국은 그 파국을 향해 돌진하였다. 부르주아지의 성숙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과 일종의 인식론적 단절을 보이는 레닌의 전위당 모델이란 바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혁명대행론에 다름아니었다. 이 독특한 성격이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만, 또한 소비에트 사회를 진정한 사회주의로부터 일탈시켜 결국 붕괴로 귀결시킨 빌미의 하나가 되었던 사정은 여기서 다시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와 같은 변질 속에서 러시아 혁명 이후 진정한 의미의 인텔리겐치아가 급속히 소멸한 사실이야말로 통렬한 반어가 아닐 수 없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는 소비에트 당이 인텔리겐치아는 "독립적 계급이 아니라 정신 노동을 팔아서 살아가는 특수한 사회 집단"이라거나, "사회적 생산 체계에서 특별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분리된 계급이 아니"12)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러시아 혁명의 강력한 기반의 하나였던 인텔리겐치아의 힘을 해체하여 소비에트 권력 안에 편제하고자 하는 정책적 배려에서 말미암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인텔리겐치아를 기본 계급들로부터 독립적인 일종의 중간 계급으로 보고자 했던 부하린N. Bukharin이나 만하임K. Mannheim의 관점13)을 거부하고, 인텔리겐치아의 동요를 더욱 부각하곤 했다. 가령 해방 직후 한국에서 출판된 좌파 사전들에 나오는 인텔리겐치아의 정의는 그 극치다. 하나만 보자. 보통 '지식 계급'이라 역(譯)하나 엄밀히 말하면 어느 계급이 아니고 관리·회사원·교원·기자·저술가 등과 같이 직접의 생산적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대다수는 자본가 급(及) 기(其) 정치 기관 밑에 피고(被雇)되어 지적·사무적 노무에 복(服)하며 타방으로는 노동자를 지배하는 직분을 부하(負荷)하고 있는 중간 계층이다. 고로 그네들은 자본가에 피고되어 있는 점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하고 자본가를 원조한다는 방면에서 보면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다. 스탈린은 그에 대하여 말한다: "지식 계급은 노동 계급과 결합한 때에 강한 것이고 노동 계급에 반대할 때는 무력하게 되는 것이다"라고.14) 이처럼 명쾌한 교조주의를 통해서 소련 사회에서 인텔리겐치아는 오히려 인텔리겐치아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전문 관료 또는 기술자 비슷한 체제 지향적 지식인으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III. 한국 지식인 사회의 계보 한국의 지식인 문제를 궁구할 때, 채만식(蔡萬植)의 「레디메이드인생」(1934)은 한 단서를 제공한다. 주인공 P가 신문사에 취직을 부탁하러 갔다가 거절당하고 광화문 네거리 기념비각(지금도 교보문고 앞에 있다)에서 구한말 이후 지식인의 역사를 추상(追想)하는 이 단편의 3장이 특히 흥미롭다. 그는 3 운동의 획기성을 지식인사와 관련하여 주목한다. "자유주의 사조는 기미년에 비로소 확실한 걸음을 내어디디었"는데, 이 운동 이후 크게 일어난 교육열을 사이토 미노루(齋藤實) 총독의 문화 정치와 아울러 "지식 계급을 대량으로 주문"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흥기와 연동시킨다. 그리하여 1920년대가 근대적 지식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성립한 시대였음을 풍자적 어조로 다음과 같이 개관한다. 면서기를 공급하고 순사를 공급하고 군청 고원[雇員: 관청에서 관리의 사무를 돕기 위해 특별히 고용하는 직원: 필자]을 공급하고 [……] 농사 개량 기수[技手: 기술에 관한 사무를 맡는 공무원: 필자]를 공급하였다. 은행원이 생기고 회사 사원이 생기었다. 학교 교원이 생기고 교회의 목사가 생기었다. 신문 기자가 생기고 잡지 기자가 생기었다. [……] 의사와 변호사의 벌이가 윤택하여졌다. 소설가가 원고료를 얻어먹고 미술가가 그림을 팔아먹고 음악가가 광대의 천호(賤號)에서 벗어났다. 인쇄소와 책장사가 세월을 만나고 양복점 구둣방이 늘비하여졌다. 연애 결혼에 목사의 부수입이 생기고 문화 주택을 짓느라고 청부업자가 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가보'를 잡고 공부한 일부 지식꾼은 진주(다섯 끗)를 잡았다. [……]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수요가 아니 되니 그들은 결국 꼬임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이 대목을 음미하노라면, 3 운동을 고비로 갑신정변(1884) 이래 참회 귀족 또는 개명 양반층이 주도하던 민족 운동의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제 운동의 주도권이 잡계급적 인텔리겐치아의 수중에 넘어갔음을 실감하게 된다. 물론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 새로이 성립한 조선 지식 계급의 많은 부분이 총독부와 토착 부르주아지의 식민지 근대화 추진에 있어서 그 하부에 편제되었지만, 이 유착도 대공황(1929)에 즈음하여 파열하게 된다. 이는 일본 자본주의의 후발성에도 연유하는 것이지만, 총독부가 추구하는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란 근본적으로 일본 자본의 관리 아래 조선을 묶어두는 구도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량으로 배출된 조선의 지식 계급은 공황의 여파 속에서 식민지 권력과 토착 부르주아지, 식민지 권력과 민중, 그리고 토착 부르주아지와 민중 사이에서 일종의 내적 망명 상태로 함몰되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치아가 산출될 유사한 조건이 형성되었으니, 주인공 P가 자신의 아이를 인쇄소 노동자로 맡기는 이 단편의 결말은 극히 상징적이다. 지식 계급의 다수를 이루는 체제 지향적 기술 지식인 속에서 민중과 결합하는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대두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물론 1920년대에도 혁명적 인텔리겐치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 관찰하면, 3 운동 이후 합법적 공간의 일정한 확대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급진적 운동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1920년대가 1930년대보다 인텔리겐치아의 혁명적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고 볼 수도 있다. 천황제 파시즘의 성립과 함께 1930년대에 일체의 운동이 탄압 속에 현상적으로는 소멸해간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20년대 혁명 운동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민중적 회로에 연결되었다기보다는 거의 지식인 내부 체계로 수렴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소시민적 급진주의를 시원하게 넘어섰다고 보기 어렵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30년대 지식인들은 민중 결합의 혈로를 뚫는 다양한 시도에 나섰으니, 예컨대 30년대의 유명한 '브 나로드' 운동이 그 합법적 형태를, 적색 노동조합과 적색 농민조합 운동은 그 비합법적 투쟁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1930년대에 두드러진 조선 지식 계급의 급진화는 일본과도 흥미롭게 대응한다. 대체로 메이지(明治) 시대의 지식인들은 체제 지향적이었으니, 후쿠자와 유기치는 "그저 정부만 쳐다보고, 정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이에 매달려 이전부터 품어온 청운의 꿈을 이루어보겠다는 욕망"에 "민(民)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고, 정부 관리가 될 꿈만 꾸"는 메이지 지식인들을 "한학(漢學)의 몸체에 양학(洋學)의 의상을 걸친 꼴"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을 정도다.15) 그런데 쇼와(昭和) 시대의 개막(1926)을 즈음하여 일본의 지식 계급은 이전 시대에 비해서 급격히 비판적 자세를 강화한바, 혁명 운동에 투신하는 지식인을 영웅시하는 기풍이 젊은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일어나는 인텔리겐치아의 이탈 양상일 것인데, 그럼에도 반체제적 지식인들의 존재 전이가 선량(選良) 의식 또는 특권 의식의 포기라기보다는 그 극단적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지식인들과 상통한다는 분석은 유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16) 식민지 조선의 지식 계급은 일본의 지식인들보다 더욱 소명 의식에 충만해 있었다. 나라를 잃었다는 조건이 국사(國士) 의식을 강화하는 온상인 데다가, 일본과 달리 전통 사회의 지배 계급이 무사가 아니라 문인 학사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 계급은 반중세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어도 내밀하게는 전통 사회의 사대부를 후계하고 있는 점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함으로써, 대체로 무사에 시봉하는 실무 역량으로 국한했던 일본의 전통적 지식인들과는 사회적 위상에서 작지 않은 차별을 보였던 것이다. 이는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내면화되어 오늘날까지 연면한 바가 없지 않다. 그런데 한국 지식인 사회의 유별난 국사 의식이 비판적 풍기를 배양하는 기반의 하나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만큼 오늘날 지식인 사회의 내적 붕괴를 초래한 걸림돌 노릇도 해왔다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이제는 지나칠 수 없다. 하여튼 1930년대에 비판적 내지는 혁명적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에 유의할 때, 우리는 해방 직후 한국 사회에 고조된 혁명적 분위기를 요해하게 된다. 천황제 파시즘의 발호 아래 합법적 비합법적 공간에서 소극적 또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인텔리겐치아들이 해방이라는 조건과 함께 대분출하면서 한국 사회는 장기간에 걸친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냉전의 진군과 6 5 이후 분단 체제의 성립으로 우리 지식인 사회는 대파국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혁명 이후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소멸해간 과정을 유사하게 복제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 지식인 사회가 간난한 복원의 길을 더듬어갔다는 점이야말로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6 5가 가진 중층적 의의에 대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총역량에 대한 대규모의 파멸을 초래했음에도, 6 5는 여전히 강고하게 잔존한 전통적 농업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함으로써 비록 천민적이지만 남한 사회의 본격적 자본주의화를 추동하게 되었으니, 1920년대와는 또 다른 수준에서 지식 계급을 대량 주문하였다. 모든 사회 계층, 특히 농민층으로부터 충원된 학생들이 대거 도시의 대학으로 몰려들면서 대학은 잡계급적 인텔리겐치아 출현의 온상으로 변모한다. 여기에 4월 혁명의 비밀이 있다. 그들이 바로 4월 혁명을 이끈 '대학의 푸가초프'였던 것이다. 4월 세대와 그 비판적 후계자들과 5 6 쿠데타의 개발 독재 세력과 그 희극적 계승자들 사이의 충돌이 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이루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격렬한 대립을 거듭했음에도 대체로 농민적 기원이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맹목적 근대 추종으로 치달은 전자나 낭만적 근대 부정으로 함몰되곤 했던 후자나, 그 저류에는 강렬한 민족주의가 공통적으로 잠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1989)와 문민 정부의 출범(1993)이라는 안팎의 조건 변화 속에서,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긴 기간에 걸쳐 투쟁을 지속해온 우리 지식인 사회가 순식간에 일종의 내적 붕괴 상태로 돌입하게 된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IMF 관리 체제라는 미증유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지식인 사회의 명예로운 전통을 근본적으로 재음미하면서 지식인 사회의 복원을 위한 사고의 발본적 쇄신을 모색할 바로 그때일 것이다. IV.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나는 앞에서 한국의 근대 지식인 사회가 표면적인 반중세의 기치에도 불구하고 전통 사회의 사대부적 체질을 온존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정치 권력 중심의 사대부적 학문 전통을 해체하는 일의 긴요성이 요즘 들어 더욱 절실해진다. 이우성은 「이조 사대부의 기본 성격」(1979)에서 "독서하는 사람을 사라 하고 행정에 종사하는 사람을 대부라 한다(讀書曰士 從政爲大夫)"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정의에 근거하여, "우리나라 사대부는 독서하는 사와 종정하는 대부의 복합어이며,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두 사람이 아니고, 독서하는 사로서 종정하는 대부가 되는 즉 양자를 겸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17) 재야(在野)의 선비가 절차를 거쳐 재조(在朝)의 관리로 되고, 재조의 관리가 자신의 경륜을 펼칠 수 없을 때는 언제나 재야의 선비로 낙향하는 이 절묘한 순환 체계는 중소 지주로서의 사대부의 경제적 토대에 기초한 것인데, 이 때문에 재야의 선비도 어디까지나 지배 권력 내측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 순환성은 조선 사회의 모순이 격화, 권력의 독점이 심화되는 것과 동반하여 파열하게 된다. 말하자면 재야의 선비와 재조의 관리가 점차 분리 고정되는 경향을 보였으니, 남산골 샌님 또는 남산골 딸깍발이로 대표되는 재야의 궁핍한 선비는 이 점에서 근대 지식인의 맹아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허생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그들이 겪은 소외에도 불구하고 그 사고는 민중과 결합하여 체제를 변혁하는 길로 나서기보다는 지배 체제의 개혁을 촉구하는 방향에 서 있기 때문에 근대 지식인의 존재 양태와는 큰 차별을 보인다고 하겠다. 임형택은 「이조 전기의 사대부 문학」(1974)에서 재야의 선비 또는 처사(處士)와 재조의 관리 외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에 기원을 두는 방외인(方外人)이라는 제3의 존재를 설정하였다. "세속과 예교(禮敎)의 얽매임으로부터" 탈출하여 "마침내 체제의 바깥─방외로 이탈"한 "중세기의 반체제적인 인간 유형"이 바로 방외인이라는 것이다.18) 그런데 이미 임형택이 지적하고 있듯이, 방외인의 저항은 그저 개인적 울분의 토로에 그칠 따름이다. 방외인은 전통 지식인 사회의 균열이 더욱 심화된 단계를 보여주지만, 그들의 일탈이 주변의 여건에 비해 워낙 조숙하게 이루어진 탓에 그 자기 붕괴의 조짐은 될지언정 존재 전이의 근대적 맹아로 파악하기에는 난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조금 더 궁리를 밀고 나가면, 그들이 처했다고 믿은 체제의 바깥이라는 것이 과연 텍스트의 바깥일까? 처사와 관료에 대한 방외인의 격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 그들 역시 중세 체제의 텍스트 안에서 반중세적 포즈로 존재했던 것이다. 지배 체제의 핵심에 참여하건 그 주변부에 위치하건 심지어 체제의 바깥으로 이탈하건, 지식과 권력이 혼연일체가 되어 돌아갔던 전통적 지식인 사회가 3 운동을 고비로 잡계급적 인텔리겐치아로 교체 변화되었어도, 그 내적 연속성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의연하다. 친체제·반체제를 불문하고 정치 권력을 향한 저 치열한 질주는 한국의 지식 사회를 남근 숭배의 적나라한 전시장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중국의 제3세대 지식인 천스허(陳思和)는 중국 지식인의 저 뿌리 깊은 정치 권력 지향, 묘당주의(廟堂主義)의 극복을 제안한다. 묘당주의는 중국의 근대 지식인 사회 형성의 결정적 기틀로 되었던 5 운동 세대에서부터 뚜렷했으니, "'5 '세대 지식인의 치열한 '반전통'이란 전통 문화의 벽을 철저히 제거하고 [……] 서구 학술의 전통 위에 지식인의 중심적 지위를 확보하려고 바랐"던 점에서 "의연히 전통 사대부형"이었다.19) 이는 묘당 바깥에 '민간의 묘당'을 건설하고 민중에 의거, 당대의 정치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듭한 루쉰적 전통을 따랐던 지식인들이 "중국의 명운을 철저히 구제할 새로운 '도통(道統)'으로 공산당이란 신(新)묘당 숭배로 떨어짐으로써 종국에는 '민간의 묘당' 자체를 스스로 파괴해버린 데서 다시 변형 반복되었던 것이다.20) 얼마 전 어느 신문에 한국 정치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권모술수의 교과서 노릇을 해온 『삼국지연의』를 우리 국민이 그만 읽어야 한다는 파격적 제안을 담은 칼럼이 실린 적이 있다. 이 위대한 소설을 그처럼 천박하게 이해하는 칼럼 필자의 안목에 문제가 있지만, 이 제안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여전한 인기의 비밀에는 한국 남성들의 집요한 정치지상주의의 상상적 대리 충족이 자리하고 있을 터인데, 특히 지식인들에게 제갈량(諸葛亮)은 묘당주의 서사의 한 원형이다. 초야에서 몸을 일으켜 제왕의 사부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는 공명(孔明) 선생! 이제 공명 선생의 신화를 해체할 때다. 한국 지식인 사회의 복원을 위한 선차적 과제는 우리 지식 사회의 중심에 모셔져 있는 묘당으로부터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분리하여, 공부길에 들어설 때 지식인들이 가졌던 초발심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옛날 학자들은 자기를 위하더니 요즘 학자들은 남을 위하더라(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論語』, 「憲問篇」). 옛날에 배울 때는 무심코 넘어간 이 구절이 요새 와서는 그렇게 사무칠 수가 없다. 공자(孔子) 시절에도 배우고 묻는 일(學問)을 통해 자기 마음자리의 근원을 밝히는 근본은 팽개치고, 천하를 구원한다고 정치 권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갈 자리 못 갈 자리 구분 없이 쏘다니며 설쳐대는 지식인들이 넘쳐났던 모양이다. 바라건대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돌아가자. 이 말을 정치로부터의 자유, 즉 동양적 자유로 복귀하자는 취지로 오해해선 아니 된다. 위기는 단순한 이기(利己)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해 정자(程子)는 "옛날 학자들의 위기는 그 마침내 물을 이룸에 이르지만, 요즘 학자들의 위인은 그 마침내 자기를 망치는 데 이른다(古之學者 爲己 其終至於成物 今之學者 爲人其終至於喪己)"고 풀었다. 위인지학이 기실 이기에 지나지 않으며, 위기는 마침내 세상이 지극한 상태에 도달하는 '성물'로 이행하는 것이다. 묘당주의의 극복 문제를 제기할 때 우리는 지식인의 전문성이라는 해묵은 쟁점에 부딪히게 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전문성은 강화되어야 한다. 그 동안 한국 사회가 걸어온 간난한 행보 속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었던 특수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지식인의 전문성에 관한 본격적 논의가 봉쇄된 측면이 없지 않다. 지식 사회의 정화(精華)라고 할 대학, 과연 한국의 대학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의 씨도 먹히지 않은 곳으로 대학·언론·종교를 드는 우스갯소리는 결코 농담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학의 양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대가는커녕 각 분야의 쓸 만한 전문가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실감에 낙담하다 보면, 우리 지식 사회가 성수대교의 붕괴를 앞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슬아슬함을 금할 길이 없다. 이 점에서 군자불기론(君子不器論)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자는 지식인의 이상형으로 군자를 들어올리면서 시종일관 소인(小人)을 폄하한 바 있다.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에 관한 논의가 무성하지만, 그 결정적 지표의 하나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論語』, 「爲政篇」)라는 공자의 지침이다. 여기서 그릇이란 한정된 쓰임새를 지칭하매, 소인이 실무적 전문가를, 군자는 거대 담론을 생산하고 실천하는 지식 사회의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이란 말 대신에 군자유와 소인유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가령 자신의 뛰어난 제자의 하나인 자하(子夏)에게 "너는 군자유가 되지 소인유는 되지 말라(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論語』, 「雍也篇」)고 가르치는 대목이 그 예다. 유(儒)는 원래 무당을 뜻하는 말로서 고대의 주술적 의식이나 장례에 종사하던 하층민을 지칭하였으니, 소인유란 무당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일종의 기도기능사다. 이에 대해 군자유는 고전에 대한 깊은 학구에 의거, 소인유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킨 사상유(思想儒), 즉 당대 최고의 지식층이다. 공자는 바로 소인유가 군자유로 변화하는 데 한 획을 그은 걸출한 인물이었던 것이다.21) 그런데 군자유와 소인유란 말이 공자가 자하에게 준 가르침이란 문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이즈카 시게키는 공자의 제자를 나누는 선진(先進)과 후진(後進), 양파 사이에 미묘한 갈등에 주목한 바 있다. 안연(顔淵)과 자로(子路)로 대표되는 선진파는 일찍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와 정치적 풍운에 휩싸인 공자와 고락을 함께한 선배 제자들로서, "인간 각 개인의 주관 속에 존재하는 인(仁)이란 덕 자체를 내성(內省)하는" 인문학파라면, 자유(子游)와 자하를 비롯한 후진파는 공자를 탁발한 학자로서만 존중한 후배 제자들로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인 자체보다는 그 외면화된 예(禮)란 객관적 사회 질서에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사회과학파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22) 공자는 양파 사이에서 어느 쪽을 더 지지했을까? 공자 가라사대, "선진은 예악에 있어서 야인이고 후진은 예악에 있어서 군자라 하나, 만약 쓸 것 같으면, 나는 선진을 따르리라." 子曰 "先進 於禮樂 野人也 後進 於禮樂 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論語』, 「先進篇」) 그는 선진의 손을 들어주었다. 위 인용문의 '군자'는 약간의 조롱기가 담긴 반어적 표현일 터인데, 이 문맥에서 자하에게 군자유가 되라고 권고하는 대목을 다시 생각해보면, 후진이 선진보다 소인유에 가깝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물론 우리는 공자가 왜 후진을 살짝 억눌렀는지 그 충정을 이해하지만, 이것이 후대에 병통으로 변한다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 소인유에 대한 군자유의 절대적 우위는 '작은 배움'에 대한 경시 속에서 결국 '작은 배움'과 '큰 배움'이 함께 파괴되는 길로 나아가기 십상이었으니, 소인유와 군자유의 통일, 다시 말하면 전문성의 강화를 통한 인간다움의 연마를 나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학인(學人)의 길을 '장부'의 일대 사업으로 삼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묘당의 해체와 군자불기론의 극복을 우리 지식인 사회 복원의 긴절한 화두로 잡아나갈 때, 소인유의 현대적 변형인 기술 지식인의 '투항'도 아니고, 군자유의 현대적 변신인 인텔리겐치아의 '혁명'도 아닌 제3의 길의 가능성을 제대로 묻는 작업이 가능해질 터인데, 시간은 빠르고 할 일은 많다. ▨ [문학평론가·인하대 국문과 교수] 주 1) A.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 백낙청·염무웅 공역(창작과비평사, 1974), p. 134. 2) Benzamin Schwartz, "The Intelligentsia in Communist China: A Tentative Comparision,"Richard Pipes ed., The Russian Intelligentsia(New York: Columbia Uni. Press, 1961), p. 165에서 재인용. 3) A. 하우저, 앞의 책, p. 135. 4) A. 하우저, 앞의 책, pp. 136∼37. 5) Martin Malia, "What is the Intelligentsia?"Richard Pipes ed., 앞의 책, p. 1. 6) Philip Pomper, The Russian Revolutionary Intelligentsia(Arlington Heights: AHM Publishing Co., 1970), p. 12에서 재인용. 7) A. 하우저, 앞의 책, p. 139. 8) Martin Malia, 앞의 글, pp. 7∼8. 9) A. 하우저, 앞의 책, p. 138. 10) Martin Malia, 앞의 글, p. 18. 11) Benzamin Schwartz, 앞의 글, p. 168. 12) L. G. Churchward, The Soviet Intelligentsia(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3), pp. 3∼4에서 각각 재인용. 13) L. G. Churchward, 앞의 책, p. 3. 14) 『新語辭典』(民潮社, 1946), p. 106. 15) 福澤諭吉, 林宗元 Q, 『학문의 권장』(시사일본어사, 1994), p. 46. 16) 淸水幾太郞 編, 『現代思想事典』(東京: 講談社, 1977), pp. 444∼45. 17) 李佑成,『韓國의 歷史像』(창작과비평사, 1982), p. 214. 18) 林熒澤, 『한국 문학사의 시각』(창작과비평사, 1984), p. 362. 19) 陳思和, 「文化的失落感に陷った中國知識人」 上, 坂井洋史 Q, 『世界』, 1996. 6, p. 298. 20) 陳思和, 앞의 글 下, 『世界』, 1996. 7, p. 286. 21) 加地伸行, 『儒敎とは何か』(東京: 中央公論社, 1996), pp. 56∼57. 이 책은 필자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유교 해석서의 하나지만, 저자의 유교자본주의론에 대해서 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밝혀둔다. 22) 貝塚茂樹, 『諸子百家』(東京: 岩波書店, 1985), pp. 14∼15.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활쏘기는 군자의 덕성과 비슷한 바 가 있으니, 활을 쏘아 과녁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 이유 를 자기 몸에서 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