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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리)
날 짜 (Date): 1998년 7월 25일 토요일 오전 10시 18분 33초
제 목(Title): [푼]4백년동안의 망향가 심수관 14代


 
                                                              

                      박윤석기자의 인물탐험 

                  400년동안의 망향가 심수관 14代 


   7월11일. 심수관(沈壽官·72)은 일주일만에 귀가했다. 언제나처럼
   화산재를 내뿜는 사쿠라시마(櫻島)의 낯익은 자태를 바라보며
   서울발 대한항공 비행기는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鹿兒島)공항에 그를 내려놓았다. 승용차로 1시간이면
   닿는 그의 집이자 도예원, 수관도원(壽官陶苑)에는 주인 내외와
   아들 모두가 자리를 비운 곳에서 10여명의 직원들이 여전히 도예
   전시장과 가마를 지키고 있다. 식구가 함께 이처럼 왕창 집을 비운
   것은 드문 일이다. 일본 전역에서 크고 작은 도예 전시회야 숱하게
   치렀지만 바다 건너 한국 땅에서 1백40여점의 작품을 단독
   전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당대의 작품이 아니라, 집안
   수장고(收藏庫)에 가보(家寶)처럼 소중히 보관해 오던 역대
   선조들의 유품을 처음으로 집 밖으로 꺼내 비행기에 실어 보낸,
   이례적인 행사였다.

   8월10일까지 「일본 속에 꽃 피운 심수관家 도예전」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 특별전시회는 「4백년만의 귀향(歸鄕)」이라는
   머리말을 달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꼭 4백년 동안 14대(代)에
   걸친 沈씨 가문의 삶과 일 모두를 응축해 보여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행사를 그는 「귀국보고전」이라 부른다. 오래 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그의 선대(先代)들을 대신해, 손길마다 그들의
   마음이 배어있는 도예 유품들이 처음으로 고국을 찾아왔음을
   아뢴다는 의미다. 

   그 분신(分身)들이 무사히 귀향해 서울에서 한국인들과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귀가한 것이다. 서울 체류 일주일을 그는 극도의
   감격과 피로감 속에서 보냈다. 숙원을 이루었다는 감회가 깊은 만큼
   전시품들의 안전한 운반 등 행사와 관련한 여러 번다한 일정들이
   그를 잠시도 편안하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마가 막 끝난
   가고시마를 떠나왔던 그는 서울에서 내내 공해물질 가득한 비를
   보며 지냈다. 모처럼 갠 날씨 속에 서울을 떠난 날 그는
   가고시마에서 다시 화산재 뒤섞인 비를 만났다.

   10월에는 비가 오지 말았으면 한다. 불씨를 옮겨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원성(南原城)을 떠나 일본으로 끌려간 그의 초대 선조
   심당길(沈當吉)이 조선(朝鮮)의 도공(陶工)들과 함께 4백년 전
   가고시마에 당도한 12월에 맞춰 그는 남원으로부터 불을 채화해 갈
   계획이다. 불은 4백년 전의 길을 따라 거제도를 거쳐 뱃길로
   가고시마 앞바다 작은 어항 구시키노(串木野)로 들어가 조상들의 첫
   정착지 히야시이치키(東市來)마을에 도착한다. 불은 가고시마를
   포함한 규슈 일대 조선계 도예촌 가마에 나눠질 것이다. 

   1598년, 약간의 흙과 유약을 가지고 연행된 도공들은 일본의 불로
   도기를 구워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격인 사쓰마야키(薩摩火堯)를
   만들어냈다. 그때는 미처 가져가지 못했던 고국의 불로 이제 앞으로
   가마의 밑불을 삼게 된다. 초대 심당길을 기리는 추모비 제막까지
   포함해 11월말까지 진행될 이 모든 행사를 위해 그곳에는
   「사쓰마야키 4백년제 실행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그의 명함에는
   89년 한국정부로부터 받은 가고시마 한국명예총영사 직함과 함께
   「사쓰마야키 4백년제를 성공시키자」는 글귀가 인쇄돼 있다.

   1964년, 병상에서 그의 아버지 13대 수관(壽官)은 격심한 통증과
   고열로 괴로워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33년이 흐르면 초대께서 한국에서 끌려온 지 4백년째가
   된다. 그때의 가주(家主)는 누가 되어 있을까. 너거나, 어쩌면 네
   아들의 시대거나, 누가 되었든 제대로 제(祭)를 올려 드렸으면
   싶다』

   오싹할 정도의 무언가를 느낀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일까 여러모로 궁리해왔다. 결국,
   4백년제의 제 1보는 沈家 역대의 작품들을 들고 서울에 가서,
   한국의 문화의 한 알갱이가 일본의 풍토에서 이렇게 변화하여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라는 보고전(報告展)을 개최해야 한다는
   쪽으로 정리됐다.

   『너는 호랑이 해 호랑이 날의 호랑이 시에 태어났다. 무엇을 하든
   반드시 성공할 게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13대 독자로서
   마침내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의 유지를 받들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은
   그를 한없이 뿌듯하게 한다. 4백년째인 올해는 신기하게도 호랑이
   해다. 하늘을 나는 학과 바다를 작품 속에 자주 새겨 넣었던
   선조들이 오늘 한국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자리를 마련해준 걸까. 

   도자기를 서울로 떠나보내면서 그는 50여 년 전 그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날 때 아버지가 가졌을지도 모를 심경을 생각했었다.

   『무사히 도착해다오. 착실히 모두에게 인정받아다오』

   그의 선조들은 학처럼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비원(悲願)을 도자기에 담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그는 주 3편
   운항하는 한국국적기를 타고 1시간 30분 만에 한국을 오간다.
   도쿄보다 가까운 거리다. 

   고통의 세월은 끝났는가. 4백년의 시간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와
   그의 피붙이의 모습, 한국의 일본의 모습, 그리고 아시아의 모습이
   보일 것이라고 그는 항상 생각해 왔다.


               『나라의 일처리가 아이들 장난같다』 


   1597년 음력 8월16일. 남원성이 함락됐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크게 개축한 지 3개월만이었다. 5년간의 임진왜란 뒤 화의
   결렬로 재발한 2차전쟁, 즉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3월부터 총병력
   14만을 동원해 다시 침략한 일본군은 7월28일부터 호남·호서 지역
   석권 작전을 개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지시에 따라
   우키다(宇喜多秀家)를 총대장으로 고니시(小西行長)가 선봉에 선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침공하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남원을 쳤다. 대명제국(大明帝國) 조선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이끄는 원군이 본영(本營)을 경상도
   성주(星州)에서 남원으로 옮긴 터였다. 

   8월1일 남원성을 에워싸기 시작한 일본군은 14일 남원성을 총공격,
   격전 이틀만에 무너뜨렸다. 전라병사(全羅兵師) 이복남(李福男)을
   비롯한 숱한 전사자가 나고 명(明)나라 원군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겨우 몸만 빠져나가는 등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처절하게 궤멸됐다. 정복군 대장은 임진왜란에 이어 두 번째 출병,
   조선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회자되던 사쓰마(薩摩) 번주(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였다.

   송편 하나 빚어 먹을 겨를도 없이 사상 최악의 8월 대보름 추석을
   보낸 남원성 사람 중 도공(陶工) 등 70여명이 연행됐다. 그 틈에
   심수관의 선조 심당길(沈當吉)이 포함됐다. 조선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일본 가고시마현에는 이들이 끌려가 정착하게 된
   옛 사쓰마번의 기록을 받아 왕가(王家)의 외척 심당길이 왕족
   이금광(李金光)을 호위하다 체포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선조실록」은 이즈음의 정국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8월15일 임금과 신하의 대화.

   『우리나라의 존망은 오로지 남원에 달렸으니 남원에서 차질이
   생기면 와해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계책을 세우고 있는가?』

   『중국은 군기가 매우 엄중하므로 장군과 병사들이 후퇴하거나
   도피하지 못하는데 우리 나라는 한산(閑山)에서 전패하였을 때만
   해도 군율을 위반한 장수와 수령들을 군법에 의해 조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대로 본직을 맡게 하였습니다. 통렬하게 치죄하여
   군정을 엄숙히 해야 할 것입니다』

   16일 사헌부 보고.

   『중국 장수와 관리들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을 수축하면서
   흙과 돌을 운반하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고단하게 일을 하고 허기가
   져 있는데 마침 채소장수를 보자 구걸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하니
   지극히 애닯고 측은합니다. 우리나라의 역군(役軍)이 주식(酒食)을
   장만해 오기라도 하면 중국군은 바라보면서 공동으로 먹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끝내는 실망하고 만다 하니, 이런 비통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을 수축할 때 중국 장수들은 몸소 현장에
   나와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감독하는데 우리나라의 병조·공조
   당상들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여겨 감독하는 책임을
   이행하려는 뜻이 전혀 없으니 지극히 형편없습니다』

   17일 임금의 전교.

   『투항한 왜병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불평하는 말도
   많았는데 나만이 그렇지 않다고 밝히면서 많은 인원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군신들의 저지를 받아 끝내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항왜(降倭)들이 먼저 성 위로 올라가 힘껏 싸워 적병을
   많이 죽이고 심지어 자기 몸이 부상해도 돌아보지 않고 있으니,
   항왜들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는 셈이다』

   17일 남원성 함락 소식을 보고받은 임금과 대신들과의 대화.

   『(중국군을) 무리하게 남원으로 몰아넣어 이 지경을 만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의도에서였던가?』

   『당초 생각으로는 반드시 남원을 지킬 줄 알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이역(異域)에 와서 도로 사정이나 산천
   지세도 알지 못하면서 영접하여 위로해줄 적에 한 마디 말만 듣고서
   즉시 남원으로 가 고수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그 계책을 세움이 자못
   소홀하였다. 적군을 미리 헤아려야 승세를 잡을 수 있을 텐데
   지금껏 적정(敵情)을 알지 못하니 이렇게 하고서야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21일 사헌부 보고

   『남원에서는 우리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도망하매 중국장수로
   하여금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혼자서 지키게 하다가
   함락당하였습니다』

   임금은 『우리 나라의 일 처리가 아이들 장난과 같을 뿐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고 9월13일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도원수 권율(權慄) 등 대신들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왜적의 형세는 임진년에 미치지 못하지만 인심은
   도리어 변란 초기만도 못하게 붕괴되고 있습니다』고 권율은
   보고했다.


                          전쟁과 도자기 


   이어 전주가 무혈점령되고 충청도를 거쳐 일본군은 경기도 경계를
   넘어섰다. 서울은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실의 피란문제가 심각히
   고려될 정도로 동요했지만, 9월부터 전세가 다소 반전되고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일본군은 10월부터 남하,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백리를 따라 재집결했다. 남원을 초토화시켰던 시마즈의
   군대는 사천 일대에 주둔했다. 해가 바뀌어 명나라와 조선 수군과
   해상 대치국면을 벌이던 일본군은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회군을 개시했다. 명나라의 육상공격과 이순신의 해상봉쇄로
   퇴로가 막힌 채 고전하던 순천의 고니시 군대를 구원하러 병선
   5백척을 이끌고 가던 시마즈는 남해 노량에서 이순신 함대에 대패,
   50여척을 겨우 건져 탈출했다. 이 격전 중 이순신이 11월18일
   유탄에 사망했다. 시마즈군은 선발 군단이 이미 주둔지를 불태우고
   철수한 부산 앞바다를 거쳐 11월24일 초라한 몰골로 도주하듯
   일본으로 기수를 돌렸다.

   전쟁은 끝났다. 후유증은 컸으나 조선 사람들은 마침내 7년 전쟁의
   직접적 고통에서 일단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최소한 심당길을
   포함한 연행자 70여명은 예외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게이조(慶長) 3년 겨울, 멀리 바람찬 파도를 넘어 우리들의 開祖,
   이땅에 상륙하다』

   물색 유난히 푸른 구시키노 어촌의 남쪽 시마비라 포구에 심수관
   14대(代)가 만들어 세운 비석 하나가 4백년을 격해 전해져오는
   그날의 정경을 끊긴 영사기 필름처럼 희미하게 비쳐줄 뿐, 남원에서
   체포된 이후 일본 최남단에 당도하게 되기까지 1년 4개월에 걸친
   70여명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거제도를 거쳤다는 것 외에는
   조선에서의 육로 이동 경로나 바닷길 모든 것이 상상력을 부추길
   뿐이다. 

   국가 자체가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잔해더미 같은 상황에 그들
   몇몇 개인은 잡초더미보다 못했고 그들이 탔을 배는 물위의
   가랑잎보다 나을 것도 없는 존재였다.

   출병 군사들은 부산을 떠나 쓰시마를 거쳐 하카다(博多)에 이르는
   회군 항로를 취했지만 조선 도공들은 하카다에 도착하지 않았다.
   곧장 동중국해를 남하해 바로 사쓰마반도로 흘러들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불분명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체포를 명령한 시마즈와 동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마즈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일본 천하가 도쿠가와(德川家康)의 우세로 양분,
   내전 상태로 들어감에 따라 시마즈는 사쓰마로 돌아갈 여유도 없이
   교토로 향했다.

   심당길 일행이 사쓰마의 남단 해안 오지에 닿은 것은 그맘때였다.
   인적 없는 황무지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체포·연행해 조선 땅
   밖으로 배를 태워 보낸 자는 있었을 터인데 일본 땅에서 그들을
   받아주는 자는 없었다. 

   지금도 이곳의 물산은 고구마와 무, 녹차 정도다. 곡물이 풍족하지
   않은 이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됐다. 몇 차례 주거지를
   이동해가며 그릇을 구웠다. 차츰 인근의 원주민들의 눈에 띈 이
   그릇들로 그들은 양식과 물물교환을 하면서 반농반도(半農半陶),
   혹은 반노반도(半奴半陶)의 생활로 접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원주민들이 번번이 흙발로 일터에 들어와 그들의 작업을 방해해
   한인들이 이를 제지하려하나 언어불통, 하릴없이 손을 들어 그
   자들을 밀어낸 바, 그날로 무리를 이루어 일터에 난입, 보복하기를
   마지않았다』고 하는 시마즈 관원들의 후일담이 그때의 정황을
   전해준다. 그들은 마침내 내륙 쪽으로 이동, 20리 쯤 되는 곳에
   고향산천을 닮은 지역을 발견하고 정착했다. 지금의 미야마(美山),
   옛 이름 나에시로가와(苗代川)다.

   『나무 밑 같은 곳을 의지, 그 정경이 매우 처량했다』

   『그 후 오두막을 짓고, 혹은 인근의 농가를 의지하여 지냈다』

   사쓰마번의 기록이 전하고 있는 것 처럼 상륙한 지 대략 7년 동안
   그들의 생활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지역으로
   갔던 숱한 조선인 도공 중 초반 고생을 가장 심하게 한
   도공들이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시마즈 때문에 운명이 갈린
   심당길 일행은 다시 시마즈의 운명의 기복에 따라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정권의 안정을 되찾은 번주의 보호 아래 마침내
   편입된 것이다.

   시마즈는 도쿠가와와 최후로 맞붙은 세키가하라 전투에 西軍으로
   참가, 패퇴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두 차례의 조선
   출병에서 아들과 함께 용맹스럽게 전과를 올리고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바로 그 장기간의 전쟁에서 피폐해진 국민생활로
   봉건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마침내 기존 권력질서가 전면
   개편되는 혁명적 정변을 맞이하는 비운에 처한 것이다. 도쿠가와가
   천하를 잡자 은신하던 그는 2년 뒤에야 겨우 고향 사쓰마로
   돌아갔다. 이후 3년간의 긴 협상 끝에 안정을 찾은 시마즈는 비로소
   붙들려온 조선도공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게 됐다.

   18개 성(姓)을 가진 43명의 조선도공 일행은 사무라이(武士) 혹은
   사족(士族)과 동급의 예우를 받으며 토지와 집, 그리고 봉록을 받아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다. 군역(軍役)의 의무는 없고 오직
   도자기 제작에 전념하고 모두를 번에 납품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들의 대표격이었던 박평의(朴平意) 부자가 오랜 탐색 끝에 이
   지방의 시커먼 흙이 아니라 조선의 백토와 비슷한 흙을 찾아내고
   유약을 개발해내매 머지않아 사쓰마의 트레이드마크는 기존의
   「호전적 용맹」에 「아름다운 고급 도기(陶器)」가 덧붙게 됐다.
   당시 일본은 문자해독률 3%에 자기나 도기는 구경하기 힘들었고
   나무로 만든 물통이 주요 용기였던 시절이다.

   노경에 접어든 시마즈는 나에시로가와를 번립(藩立)공장으로
   만들어 일부 검은색 도자기는 일반인 용으로, 작품성이 높은
   백색계열 도자기는 지배층 전용으로만 구워내게 해 희소성을
   유지시켰다. 『시로사쓰마(白薩摩)는 만금(萬金)을 쌓아도 구할 수
   없다』는 말처럼 조선도공의 작품은 보물처럼 승격되어갔다.
   조선도공들의 세월은 한 번 마련된 궤도를 크게 이탈하지 않고
   흘렀다. 1백년, 2백년, 3백년…. 그러나 1백주년, 2백주년, 3백주년을
   기념할 만한 분위기는 도무지 아닌 세월이었다.


                        하이테크 전수자들 


   『연행된 조선도공들은 실로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도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장뇌라고 하는, 향이 강한
   방충제를 유자나무에서 만들어내는 기술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마을에는 일본전매공사가 「일본 장뇌제조
   발상지」라는 기념비를 세워 그 문화적 공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석공, 봉제, 양봉 등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었습니다』

   1998년 7월6일 심수관 14대는 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념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선조
   심당길이야말로 일행 중 특히 이상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마 도공은 아니었던 것 같고 생활의 근거를 박탈당한
   이역에서 생존을 위해 도예를 어깨너머로 배워 익혔다는 정황이
   짙다. 그로부터 내려오는 무인의 핏줄 영향인지 심씨가문은 대대로
   기골이 장대하다. 14대 심수관은 근래 15년간 한국인삼을 꾸준히
   장복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70대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몸가짐과
   발걸음이 정정하다. 강연회 때 그는 앉은 의자를 번쩍 들고서
   단상과 단하로 오르내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시마즈 번주의 보호 혹은 격리 정책 아래 이들 조선인 도공들은
   독립된 마을을 이뤄 혼인도 주로 조선인끼리 했으며 명치유신
   전까지 조선말이 이어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요컨대 이들은
   지방정권으로부터 피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조선도자기를 계승해줄
   것을 요청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수한 작품을 내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사이의 묵계가 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 마을은 지금도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다닐 정도로
   한적하며 그 흔한 구멍가게나 술집, 여관조차 구경할 수 없다.
   차(茶)·대나무 밭 외에 주변에 눈에 띄는 것이 별로 없는 한적한
   마을이다. 지금은 전원풍 신흥주택가도 들어서고 있지만 이처럼
   황량한 오지에서 지난 4백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신기하다는게
   최근 이 마을을 둘러본 작가 한수산의 느낌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일본인의 취향을 반영한 도예를
   발전시키면서 막부(幕府) 말기와 명치(明治) 초기 사이에 발생한 몇
   차례의 내전(內戰)에 참가하는 등 일본인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암묵적으로 주장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 전투에서 사망한 9명은
   마을 숲 사이 돌비석으로 남아있고 이들이 구워냈던 작품들은 일본
   곳곳의 박물관과 개인 수집가들이 보관하고 있다. 

   이들이 대를 이어 쌓은 공력의 압권은 후일 沈壽官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한 심씨 집안의 12대에 의해 화려하게 꽃피었다. 그
   중에서 일본 국보로 되어 있는 높이 1m55cm의 대화병(大花甁)
   사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화려한 풍경 그림
   하나하나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귀기(鬼氣)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터부를 깨 찬스를 살린다』 


   『말도 지리도 모르고 친구도 없는 일본 땅에서 새로운 도기
   사스마야키를 창조한 초대 일행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화산재로 뒤덮인 대지 밑에서 작업에 적합한 도토를
   발견해낸 일 등 오늘날의 저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대사업입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초대가 발견한 장소에서 재료를 얻고 있습니다.
   초대 일행은 대단히 뛰어난 창의성의 소유주로 단군을 모셔놓은
   사당을 창건하는 등 정신적·문화적으로도 강력한 노선을 이루어
   저희 후세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뜻과 기술을 이어받은 많은
   자손들 가운데서 보석처럼 빛을 발한 사람이 12대 수관, 저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심수관의 말처럼 12대 심수관은 도쿠가와(德川)시대에 태어나
   막부말-명치기 동안 사스마야키의 원조로 맹활약을 하면서
   대선배인 한국이나 중국을 제치고 유럽인들로부터 세계 제일로
   칭송받은 일본 도자기의 공로자다.

   그의 강렬한 창의성과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명치
   초기에 12대 심수관은 유럽의 고층건물이나 교회를 그린 풍경화를
   보고 무척 놀랐다. 당시 2층 짜리 목조건물의 지식밖에 없던
   그로서는, 유럽의 건물에 장식하려면 여간 커다란 화병이 아니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므로 지금까지 만들던 방식으로는
   무리라고 판단, 과감한 기법을 사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옹기, 즉 김칫독이나 된장독을 만드는 기술을
   응용한 것이었다.

   물레 위에 먼저 화병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두껍고 기다란 도토
   가닥을 겹쳐가며 말아올려서 높고 크게 만들어가는 조선 전래의
   항아리 기법. 그러나 이 기술은 오늘날의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일용품을 만들 때는 자주 사용하지만 공예에는 쓰지 않는 이상한
   터부가 있다. 장고 끝에 그는 이 터부에 도전한 것이었다.
   대화병(大花甁)을 이 기술로 만들어 올린 그는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 유럽인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사쓰마야키를 세계에 알린 그는 「사쓰마웨어」라는 상표로 구미
   각국에 수출 길을 텄다.

   한국의 명공 류해강이 그의 집을 방문해 그 커다란 작품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 두드림 기술은 한국에도 훌륭하게 남아 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을 이용해서 미술품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왠지 이유없는 터부로 한국의 도예가들 스스로가 자기
   손발을 묶어놓고 있는 동안, 머리가 유연하고 생각의 폭이 넓은
   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구먼』

   조심스럽게 산다, 그러나 찬스를 살리는 용기와 실현하는 적극성은
   언제든지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다는 신조를 유지했던 그는 아마
   단순한 도공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14대 심수관은 자신의
   할아버지를 평가하고 있다. 

   막부가 타도되고 명치시대가 시작되자 사쓰마의 요업이 더 이상
   지방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걸었을 때에도 12대는
   창작에 전념, 명치정부로부터 수 차례 표창을 받았다. 13대 이후
   가문의 전 세대를 통틀어 심수관으로 이름붙이기로 결정한 것은 이
   12대의 위업과 명성을 기리고 본받는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그의 광휘를 이어받아 20세기 전반을 넘은 13대는 불행한
   세대였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휩쓸려들어가 공방을 지킬 젊은이도
   전쟁터에 나가고 쇠붙이는 모두 무기공장으로 향하던 와중에
   쓸쓸히 도예가문을 지켰다.


                            哲人陶工 


   그의 아들 14대 심수관이 대학을 다니던 무렵, 패전 일본의 경제는
   어려웠고 그의 집안 역시 무거운 세금과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그의 아버지 13대는 산림과 전답을 하나둘 내다 팔아 집안의
   재정위기를 막아냈다. 심씨네가 기운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산림과 전답을 팔면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니까 눈에 띄지 않게
   오래된 도자기를 살짝 내다 팔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준엄하게 꾸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산림이나 전답은 돈만 많이 내면
   언제든지 살 수 있다. 하지만 오래된 도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어가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되살수가 없다. 하물며 우리 집의
   오래된 도자기는 초대 이래 도공의 혼이다. 목숨을 걸고 지켜서
   다음 시대에 전해야 하는 물건이다』

   교토대학 법학부 출신인 아버지 13대는 가업계승이란 굴레 때문에
   자신의 꿈을 펴지 못한 인텔리답게 분명한 철학적 노선을 갖고
   있었고 덕망과 지식을 겸비한 마을 유지이기도 했다. 특히 날씨를
   미리 알아맞히는 데 천부적인 육감이 있어었다. 14대는 아버지를
   「철인도공(哲人陶工)」이었다고 생각한다.

   『저는 어렸을 때 소위 유명한 도예가라는 것에 홀렸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그림자 놀이 같은 존재였지만,
   자신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타인에게 자신을 평가받고 싶다는
   한심스러운 심정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를 아버지는 엄히 꾸짖곤 했다. 그는 울면서 반발했다.

   『저는 무엇 때문에 도공이 되는 건가요』

   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네 아들을 도공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우선이다. 우리 가문의
   역사를 이어온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리, 아들의 고리가 이어져서 십수대의
   역사를 그려왔다. 너도 그 고리의 하나가 되어서 결국 14대
   심수관을 물려받게 된다. 네게 가장 중요한 일은 15대가 될 아들을
   제대로 된 고리로 다듬어서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것 이외엔
   없다』

   지나치다는 생각에 분하고 서운했던 그는 반문했다.

   『그럼 명공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씀인가요』

   아버지는 웃으며 끄덕였다.

   『무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쇠로 된 고리면 충분하다. 튼튼한
   고리로 차례차례 대를 이어가면 된다. 몇 대쯤 지나면 금으로 된
   고리처럼 빛나는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가풍을 올바로
   지키고 가훈을 지켜나가면서 무리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오래 전 그가 소학교 입학식을 마친 날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는 그를 가마로 데려가 동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옆자리에 앉힌 뒤 『오늘은 네가 처음 물레를 돌리는 날이다』라고
   말하며 시범을 보였다. 조선식으로 물레를 발로 차 돌린 아버지는
   그 중심에 조그만 흙 뭉치를 둥글게 말아 눌러붙이더니 그 위에
   작은 바늘 하나를 수직으로 천천히 꽂았다. 그리곤 물었다.

   『어떠냐』

   『잘 돌아 갑니다』

   『바늘은 어떠냐. 똑바로 보아라』

   물레는 돌아도 바늘은 꽂아둔 형체 그대로 미동도 않았다.

   『움직이는 물레 안에 움직이지 않는 한 점, 심(芯)이 있다. 저
   움직이지 않는 바늘은 바로 심의 의지를 뚜렷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심을 찾아서 가는 것이 바로 도공의
   일생이다.너도 심씨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이상 훌륭한 도공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길이라는 것은 단 하나, 전력을 다해
   움직이는 물레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심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물레의 심만 정확히 잡아낸다면 그 위에 흙의 심을 얹고, 또 그 위에
   너의 손가락의 심만 밀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흙을
   네가 원하는 어떤 형태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 심은 이 물레
   안에 있지만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너 자신이다. 도공으로서 완성을
   추구하는 방법은 자신의 노력밖에는 없다』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세파(世波)의
   일점(一点). 인생과 도예의 본질을 생각게 하는 이 철학적인
   가르침은 이후 그의 인생 고비고비마다 되풀이됐다.


                  도공의 후예, 「도고 시게노리」 


   14대는 가고시마대학 의학부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다시 입학했다. 그의 마을에 의사가 없어 불편을 느끼던
   터에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을 의과대학에 넣기로 한 마을
   어른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으나 군의관 하나가 마을에 들어와
   개업을 하게 되자 아버지가 정치학을 권유했던 것이다. 어차피
   가업을 계승할 바에야 미술대학을 갔으면 하는게 그의
   생각이었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전철을 되풀이 하는 게 싫었는지
   아니면 가업을 계승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나름의 꿈을 펼쳐보기를
   바랐던지 『정치를 해 보라』고 했다. 그 모델로 제시한 것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같은 훌륭한 정치가」였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일왕에게
   포츠담선언 수락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종전(終戰) 공작에 큰 공을
   세운 도고 시게노리. 그는 조선 도공의 후예로 심씨 집 이웃이었고
   어릴 때 이름은 朴茂德이었다. 패전 직후에는 일본의 운명을 망친
   매국노로 몰리기도 했지만 일본 번영 후 기념사업회가 생기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저술이 쏟아져 나왔다. 심수관 13대보다
   7세 위였던 도고는 그 마을의 별과도 같은 존재였다. 마을
   어린이들은 「도고 선배의 뒤를 이어라」는 격문을 읽으며
   성장했다. 심수관 14대는 도고가 독일대사로 부임하기 전 성묘를
   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공부
   잘 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고는 12대 심수관과 함께 도자기를 굽던 朴壽勝의 장남으로
   태어나 심수관 13대와 같은 소학교와 중학을 거쳐 동경제대
   독문학부를 나온 수재였다. 법학과를 나와 관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문학도가 된 그는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만주
   봉천(滿洲 奉天) 근무를 시작으로 본부과장 국장 등 요직을 거쳐
   독일 소련 주재대사를 지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외무대신에 올랐고 종전이 가까운 1945년 4월 두 번째 외무대신에
   기용된 그는 패전 후 연합군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전범으로
   기소돼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그의 집안은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명치유신 직후
   정한론(征韓論)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심씨 집안 처럼 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의
   아버지가 만든 작품 한 점이 14대 심수관에 의해 동경대 앞
   골동품상에서 발견돼 보관돼왔다. 황금빛을 주조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정치하고도 화려한 묘사가 한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하는 직경 31cm의 이 접시는 「七賢圖錦手大皿」이란
   작품명과 東鄕壽勝이란 작자명으로 이번 400년 기념 전시회에
   건너와 심씨 가문의 작품들 사이에 끼어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에 무기는 왜 없나요』 


   도고 만한 거물은 되지 못했지만 심수관은 와세다대 졸업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계에 들어섰다. 가고시마 출신 국회의원의
   비서로 입문해 선거운동을 벌이던 이 시절 그는 대학 후배이기도 한
   가이후(海部俊樹) 전 총리와 함께 정치를 배웠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자 그의 짧은 정계생활도 끝났다. 후에 고향마을에서 소학교
   분교에 학생수가 적어 두 학년이 합반하는 현상을 보고 「교육 없는
   곳에 문화 없다」며 가고시마 교육위원회에 합반 기준을 25명에서
   15명으로 완화해 달라고 건의하는 한편 「산골 아이들을 돕는
   모임」이라는 시민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여 관철시킨 것이 그의
   가장 큰 정치적 활동으로 남았다.

   귀향해 본격적인 도예수업을 쌓은 그는 64년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예에 전념했다. 때마치 경제가 급속히 부흥하는 시점을 맞아
   도자기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아버지의 유언 중에는 본관이 있는
   고을인 경북 청송을 꼭 찾아보라는 당부가 있었다. 65년 부산대학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은 그는 청송을 들러 심씨 일가를 만나고
   족보를 열람했다. 초대 심당길의 본명은 찬(贊)으로 올라있음을
   처음 알게 됐다.

   『기차역에 내리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종친들이라고 해 놀랐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산을 몇 고개 넘어
   성묘를 갔지요. 그때 한 어른이 말씀하시길, 옛날에 자네 아버님이
   성묘를 오신 일이 있었네, 그때는 내 아버님이 맨 앞에 서고 자네
   아버님이 그 다음, 그리고 내가 맨 끝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갔었지,
   이제는 내가 앞에 서고 그 다음에 자네, 그리고 그 다음 가방을 들고
   따라오는 게 내 아들….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 것인가. 그 말을
   듣고 뒤를 보니 개미들처럼 심씨 집안 사람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행렬이 대지의 끝, 아니 지구의 끝까지 뻗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는 늘 외롭고 쓸쓸하고 망향의 정에
   젖어 있었는데 지금은 내 친척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에
   대지에 그냥 서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떨림이 엄습해왔습니다』

   종친회에도 참석한 그는 가장 어른 되시는 분이 『우리 집안은 양반
   가문인데 어쩌다 일본에 가서 도자기를 굽느냐, 그것도 한두 해도
   아니고 그렇게 긴 세월을』하며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 어쩔 줄
   몰라했다. 조선의 기준으로 따지면 도공은 하층계급이고 이분들은
   옛날 기준으로 따져 불쌍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한 직업을 14대째
   해온 것만 해도 자부심을 느낄만한, 작위를 줄 만한 집안이라고
   말하는데…. 한편으로 그는 일본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는 수백년
   전의 족보들이 가계의 흐름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음에 작지 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이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대에서 초청강연을 통해 『한국에 와
   보니 일제 36년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3백60년의 고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호방한 성격의
   그는 내친 김에 박정희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해 1시간 가까이
   만나기도 했다. 이런 대화가 있었다.

   『여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니 창이나 칼 등 무기는 구경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박물관에는 반짝반짝 광을 낸 칼과 창이
   진열돼 있는데. 칼과 창이 없나요, 왜 전시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무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기지 결코 예술품이 될
   수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물건 아닙니까. 그런 무기가 꼭
   보고 싶다면 육군사관학교 무기전시장에 무기만 따로 진열된 게
   있으니까 소개해 주겠습니다』


                         「두 개의 심장」 


   그날 이후 30여년간 그는 선대의 몫까지 수십 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때론 기쁘고 때론 조심스러우며 때론 안타깝기도 한
   모국에서의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곤란하다.

   『전통이란 것은 더 큰 무엇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업을 잇기로
   결정됐을 당시 나는 아버님의 지시에 따라 역대 도자기들의 도록을
   만든 적이 있는데 모두가 색깔이며 모양이 다 달랐습니다. 선조들이
   만든 이 작품들 속에서 어떤 것을 본떠야 하느냐고 물었지요.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의 정취, 옛날의 색깔에
   구애받지 말아라. 다만 그 전부를 받아들여 삼켜버리고 다시
   뱉어라. 그리고 그것을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렇지만 품격만은
   절대 떨구어선 안된다. 유지해야 한다…』

   생전에 14대 심수관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와 그의 가계에 대한
   탐방기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를 쓴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심수관가의 도예를 일컬어 산줄기 같은
   것이라고 했다. 조상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지만 그 유작
   하나하나에는 개성이 뚜렷하다는 뜻이다. 또한 시바가 「두 개의
   심장」으로 표현했듯 조선의 선진 도예를 전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조선인의 가슴, 그리고 타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힘을
   다 해 산 일본인의 가슴이 4백년간 14대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沈家의 경우만일까. 작가 한수산은 이를 『조선인으로 고향을 잊은
   적이 없으면서 그러나 일본인으로 살아남았던 그들 생의 비극성이
   보여주는 깊이를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심수관은 이렇게 말한다.

   『도자기는 풍토를 등에 업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도예는 본질적으로 재료 자체가 다릅니다. 일본에서 한국 도자기와
   똑같은 것을 만들려 애를 썼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말이
   쉬워 4백년이지 그 바탕에는 어둡고 힘든 세월이 깔려 있습니다.
   일본이 모든 국내외 문화를 근대화하기 위해 발돋움하던 시절에 그
   파도를 타고 기능을 맘껏 발휘하는 계기를 마련한 분이 12대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나설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데, 좋은 여건을 만났던 것입니다. 13대 아버님은 재능이
   있었음에도 전쟁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불운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의 말처럼 4백주년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것도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짐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심씨 가문에 관한 한 4백년을 통틀어 지금이
   상대적으로 가장 평화롭고 햇살 가득한 시기일 것이다.

   『고민이나 괴로움이 없는 사람도 국가도 없습니다. 짧은 기간에
   이만큼 발전 부흥했고 힘을 가지게 된 한국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큰 걱정을 안 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현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는 없지만 곤경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에도 언제나 고통이 있었고, 이방인으로 차별을
   받았고, 울고싶을 만큼 괴로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 괴로운 시간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이해받을
   수 있다, 이해받지 못한다면 내가 이해받게끔 하리라, 그런
   신념으로 살아온 나이기에 한국의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이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지만은 않으리라 믿는 것입니다』


                       전쟁·문명·망향가 


   4백년 전 큰 전쟁이 있었고 지금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통과하고 있다. 한국기술을 전수받은 일본 도자기가 한국
   도자기를 압도하고 있고, 한국이 이제야 단절된 전통을 복구하는데
   급급한 반면 일본은 오래 전부터 세계시장을 목표로 전통에 현대를
   가미한 독창적 도자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오래된 지적은 아마
   전쟁 중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소리일지 모른다. 큰 전쟁의
   파도 속에는 언제나 여러 작은 전쟁의 포말이 함께 움직여, 큰
   파도가 자고 난 이후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기도 한다.

   일명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기도 하는 임진-정유 7년 전쟁은
   조선땅에서 조선-중국-일본이 벌인 2대1 격투기의 단순 외양을
   넘어 3국이 공히 새로운 세기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치른 거대한
   태풍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은 연산군 시대 이후 문란해진 사회가 전쟁을 계기로 붕괴됐다.
   수면 하에서 일렁이던 모순들은 전쟁이라는 화학반응을 거치면서
   마침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라는 노골적인 형태로
   바닥을 드러냈다. 전쟁의 참화로 인구와 경지가 동시에 줄고 기존
   사회조직이 풀어지면서 인심이 악화되는 한편 군중을 선동해
   내란을 꾀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면서 무기 개량과 군사제도
   개편 등 국가 방위력 체질개선에 주력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 중에
   포탄과 포탄 발사기가 개발됐고 투항한 일본병사로부터
   총기제조술을 익혔다. 전쟁을 겪으며 국민들의 자아반성과
   공동체의식이 새롭게 형성됐으며 원군을 파병한 중국에 대한 숭모
   풍조가 심화됐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로 정권이 교체되는 동시에 도자기 성리학 등
   문화전리품을 토착화해 장차 근대국가로 향하는 길목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조선 파병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된 명나라는 머지
   않아 청나라로 교체되는 운명이 됐다.

   4백년 전의 그 난리는 지금 되돌이켜 보면 문명의 대전환기에
   일어난 아시아대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의 난리는 또 무슨
   문명의 전환을 알리는 전쟁인가.

   심수관의 가문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1592년 전쟁에서 상륙한
   그날로 투항해 일본군을 쳐부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조선에
   귀화한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 사가야(金忠善) 같은 경우도 있다.
   그의 13세손을 심수관은 수년 전 경북 달성의 마을로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일본이 하늘을 거슬러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킬 제, 대인군자의
   나라 조선국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에 선봉이 되어 본국에 온
   것입니다.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는 투항이유서를 썼던 김충선은 후일 다음과 같은
   시문들을 남겼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 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 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 소식 가져온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이내 생전 골육지친 알 길 없어/글로 서러워하노라』

   92년에 귀화 4백주년 기념제가 국내에서 성대히 열린 이래 그의
   마을은 일본관광객의 꾸준한 방문을 받고 있다.


                       영원한 고향은 있는가 


   『오늘이라 오늘이라/ 나는야 언제 가리, 언제 갈거나/ 내 고향
   찾아서 언제 갈거나/오늘이라 오늘이라/나는야 언제 가리, 어이
   가리요, 어이 가리』

   심당길 이래 지금까지 나에시로가와, 지금의 미야마에서 도공들이
   망향가 처럼 부르던 노래다.

   『내 고향은 어디일까. 정말로 남원인가. 선조가 살던 고향은
   조선시대였다. 그 시대는 흘러갔고 땅은 둘로
   갈라져서…대한민국이 되어있다. 영원의 고향은 없다. 우리들의 그
   고향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나 있는 것은 아닐까』

   14대 심수관의 아들은 최근 그의 집을 방문한 한수산에게 92년
   이천의 한 벽촌 마을에서 10개월간 머물며 옹기수업을 한 기억을
   떠올리며 일본말로 그렇게 술회했었다. 

   언론이나 무역 계통의 일을 하고 싶어했던 와세다대 출신의 이
   외동아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진로에 대해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날 『그러면 이 가마터는
   어떡하라고…』하는 말을 듣고 크게 울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쿠라시마로 데려갔다. 용암바위의 숭숭 뚫린
   구멍에 재가 쌓여있고 거기에 자라는 작은 풀들을 가리키며 그는
   아들을 타일렀다.

   『보아라. 저 풀씨는 스스로 원해서 저기에 날아온 게 아닐 것이다.
   바람이, 혹은 비가 그렇게 했겠지. 그러나 저 풀은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뿌리를 내리고 잎을 벌려,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 않으냐. 남의 나라 땅에서 도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도 저 풀과 같다. 묵묵히 그러나 당당히 살아야 할…』

   그는 곧 선조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했던 불씨 한점을 가져간다.
   아마도 15대 심수관이 될 그 아들의 이름은 일휘(一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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