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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alalalalal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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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2009년 09월 05일 (토) 오후 02시 39분 07초
제 목(Title): 김병지 대단하네



역시 능력있는 사람은

코딱지만한 기회의 문도 열 수 있는 것인가?

여튼 사람 인생이란 게

참 신기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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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이란 늘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다. 내가 축구를 시작하고 골기퍼 
장갑을 끼게 된 계기가 아주 우연한 기회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경남 밀양초등학교에서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육상부 단거리 
선수로 활약했던 나를 눈 여겨 보신 축구부 코치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또래들보다 운동 신경이 좋았던 나는 여러 종목을 두루두루 잘 하는 쪽에 
속했다. 축구를 시작하던 당시에도 팀의 상황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번갈아가며 
소화했다. 골키퍼를 맡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우리팀의 골키퍼였던 
친구가 다리에 화상을 입어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임시방편으로 내가 
골문을 지켰던 것이 시작이었다. 워낙 스피드가 빨랐던데다 공의 방향성을 
읽어내는 눈치가 있었던 탓(?)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그 때만 해도 골키퍼는 말할 것도 없고, 축구 선수로 이 
자리까지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건상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축구부 골키퍼로 밀양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후에는 새로운 고민과 맞닥뜨리게 됐다. 성장이 멈춘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는 
골대 크기가 커진다. 점프를 해도 내 손이 크로스바에 닿지 않으니 낙심하게 
됐다. 로빙볼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꼬꼬마’ 골키퍼, 고교 때 20cm 훌쩍 자라

마산공고에 진학할 때까지 내 키는 163cm에서 더 자라지 않았다. 요즘은 
중학교에서도 180cm 이상은 되어야 골키퍼를 맡긴다고 하는데, 시대적인 편차를 
고려하더라도 당시에는 더 이상 골문을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운동을 쉬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내심 운동을 끊고 학업으로 전향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마음 속으로 꿈과 이상을 그리면서도 
현재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적응하는 움직임이 빠른 편이다. 운동을 쉬는 동안 
자격증을 땄고,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생각으로 학업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2년여 쉬는 동안 키가 20cm 이상 커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말의 일이었다. 축구를 다시 하고 싶었다. 마침 부산 
소년의집(현 알로이시오고)에서 골키퍼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학을 가면 
축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만류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축구를 하고 
싶었다. 결국 축구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전학을 결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전학생은 3개월이 지나야 새 팀 선수로 
등록해서 뛸 수 있는데, 내 경우 새 학기 5월이 되어서야 선수 등록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침 88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와도 맞물린 시기였다. 올림픽 
때문에 8월 말까지 모든 국내 대회를 종료해야 했다. 내가 새 팀에서 뛸 수 
있는 기간은 5월부터 8월까지, 단 3개월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그 기간 동안 
내가 목표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운동특기생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전국대회 4강에도 들지 못했고, 특별한 기량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경야축(晝耕夜蹴)의 고단한 생활

8월 대회가 끝난 뒤 나는 선반기술자격증을 따는 한편 입시학원에 등록해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준비했다. 국어, 영어, 수학에 기타 암기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기초가 약한 영어와 수학을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해군사관학교 진학도 실패하고 운동 특기생으로 일반대학에 지원한 
것도 낙방했다. 현실적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취업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직장인 축구팀이 있는 창원의 LG산전(현 LG OTS)에 취직했다. 직장인 
축구팀은 한시적으로 운영됐다. 매년 봄마다 시장배 직장인 축구대회나 
도민체육대회를 하는데, 그 때면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됐다.

고단한 일상 가운데서도 축구에 대한 꿈과 끈은 놓지 않았다. 새로운 돌파구는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일반 선수들은 프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쉽게(?) 들어가는 곳이었지만, 나는 테스트를 거쳐 입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후에 상무의 이강조 감독님은 ‘순발력과 점프력이 특출한 것 
같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축구 인생의 전환점이 된 상무 시절

상무 시절은 내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이전까지 전문적인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던 내가 기초 훈련부터 체력 훈련까지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점프력과 순발력도 정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운동을 쉬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훈련에 열중했다. 20분 먼저 나가서 훈련하고 20분 늦게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식사 후 생기는 개인 시간에는 웨이트 훈련장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체력과 근력을 키웠다.

무엇보다 전국 축구대회에 주전 골키퍼로 참가해 많은 경험을 쌓았던 것이 
도움이 됐다. 당시 대학팀들과 맞대결을 펼치면 상무가 거의 승리를 챙겼다. 
대학팀에는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이다 올림픽대표팀이다 해서 내 또래 선수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을 상대로 반복해서 이기는 경험을 쌓다 보니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상무는 또 실업리그에도 참가하고 있었는데, 
실업리그에서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을 공인받았다. 상무를 제대할 
즈음에는 국민은행, 기업은행 등 당시 실업 최고로 손꼽혔던 팀들의 영입 
제의도 잇따랐다.

어쩌면 그때부터 승부사적 기질이 발동한 것일까. 나는 프로 선수가 되고 
싶었다. 프로팀 입단에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다. 프로축구 드래프트에 지원서를 
넣었다. 드래프트가 진행되던 날, 상무는 차범근 감독님이 계시던 현대(울산)와 
연습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경기가 끝나고 대여섯 시가 지난 오후, 현대가 
추가 선수로 나를 지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공적인 프로 데뷔

프로 선수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꿈에 부풀었다. 당시 현대에는 한국 축구 
골키퍼의 계보를 잇는 선배 두 분이 계셨다. 조병득 코치님과 최인영 선배였다. 
두 분과의 인연은 내게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해도 아니다. 나는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와 서전트 점프력 같은 강점이 있었지만, 
기술적으로는 백지 상태나 다름 없었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두 선배의 
가르침을 빨아들였다. 타고난 운동신경 덕에 내 실력은 눈에 띄게 성장했고, 
선배들과 감독님으로부터 격려도 받았다. 

사실 현대 입단 당시만 해도 2년 간(계약기간) 열심히 배우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출전 기회가 찾아왔다. 92년 7월에 입단했던 
내가 그해 9월 6일 유공과의 후기리그 개막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른 것이다.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긴장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출전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경기에서는 0-1로 패했지만 데뷔전 치고는 잘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날 경기까지 포함해 후기리그는 20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후 나는 남은 
경기에서 꼭 절반인 10경기를 소화하며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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