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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ues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senkreutz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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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2010년 03월 26일 (금) 오후 11시 01분 16초
제 목(Title): 청산리전투의 진실


 별 이유 없이 안중근 이야기 나온 김에 김좌진 위키에 가 봤더니 이런 내용이 

있네(Citation도 위키에 있음). 이미 대강은 알고 있는 내용인데 그래도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퍼옴.


나도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청산리 전투에서 일제군 2000명 가량을 죽였다고 

배웠는데, 실제 일본군 사상자수는 400-500선이라는군. 그리고 독립군도 만만치 

않게 죽었는데, 역사과 출신 친구 말에 의하면 야간에 아군끼리 총격을 

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독립군의 희생이 더 컸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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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의 청산리 전투 전과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는 독립군 사령부 보고에 의해 
1600명, 중국 관헌 보고에 의해 1300명, 그리고 일본영사 비밀보고(존재여부 
미확인)에 의해 가노 노부테루(加納信暉) 연대장 이하 연대장 2명, 소대장 9명, 
병졸 900여 명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범석의 《우둥불》에서는 1000여 명으로 
주장하는 등, 한국측 자료에서는 일본군의 피해에 대해 1000명 대의 전사자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일본군의 기록인 조선군사령관 보고 및 일본 육군 
19사단의《間島事件鮮支人死傷者調》에서는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으로 보고 
있으며, 장교의 사상은 없다.[2]

하지만 한국측과 일본측 기록 모두가 신빙성이 부족한걸로 보인다. 즉, 
한국측은 그 숫자를 너무 과장했고, 일본측은 그 숫자를 너무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먼저 일본측을 보자면 일본측은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으로 
기록되어있지만, <自大正7年至大正9年 戰鬪死傷, 病死表>를 보면

 1920. 4. 5.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     122명
       4. 5.        스파스카야           85명
       4. 5-8.      하바로프스크        290명
       4. 4-6.      슬레첸스크           32명
       4. 8.        베클레미셰보         38명
       4. 25-27     체르노프스키,자스체프나야,호포바 부근 35명
       4. 11.       하이랄               29명
       10. 22.      봉밀구(蜂密溝)       74명

즉, 1920년 10월 22일 봉밀구 전투에서만 74명의 사상자가 생겼음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기밀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3][4]

또한 한국측 자료는 그 차이가 너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있다. 임시정부 내부 
문서(조선독립운동연감)에는 일본군 600명이 피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범석의 우둥불에는 사상자 3300명 대한군정서 보고에 따르면 일본군(日本軍)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1,254명(이 중에 
적(敵)의 자상격살자(自傷擊殺者) 500여명), 합계 1,257명이며, ② 부상자는 
장교 이하 200여명이라고 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일본군 약 2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다 1919년 6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김경천은 위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1921년 3월 하순 청산리 대첩에 관한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문을 보고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기록했다.

"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 군무부의 출판으로 북간도 군정서 총재 "서일"군의 
포고문이 북로군 전투상보라 하는 것이 왔기에 나는 큰 희망으로 보니 매우 
심장을 斷케 하는 통념한 어구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좀 과도한 철란이 
있는가 한다. 물론 북간도 금번 사건은 나도 대개는 아는 것이다. 그 상보에 曰 
일본군의 死者가 연대장 1인 대대장2인 장교이하 1254인 傷者가 장교 이하 
200여인이라 하며 그 군정서 군대는 死者 1인이요 傷者가 5인이오, 포로가 된 
자 2인 이라 한다. (중략) 나는 우리 민족이 虛言을 좋아하며 실행이 缺에 
不伴하는 因性이 있음을 한하는 바러니 今도 亦然이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독립전쟁의 당사자 였던 김경천은 청산리 대첩에 
대한 군무부측의 전과보고 기록이 상당히 과장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문에 가납 대좌가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나 1920년 
10월 27일 이후에도 중극측 문서에 활동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청산리 전투에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문을 믿지 않고 있다.

또한 한국측 기록에는 독립군의 피해가 경미했다고 되어 있으나 당시 홍범도 
휘하에서 싸웠던 김승빈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측이 오히려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회고하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으며 홍범도는 후일 일본군 마적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회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대략 일본군 400~500명의 사상자가 난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독립군측도 그에 못지 않은 희생을 치른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임시정부가 만주에 파견한 간북시찰원 안정근의 보고에 10월22일부터 25일 
3일간 쌍방의 피해가 사상자 300명 이라는 것을 보고 추정한것이라 생각된다. 
안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실제로 종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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