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guest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alalalalalal Guest Auth Key: 984d9569d97c516b64121141768fe707 날 짜 (Date): 2009년 12월 01일 (화) 오전 11시 33분 38초 제 목(Title): 야구선수들의 취업 고등학교, 대학에서 뛰는 수많은 야구 전업 선수들 중에 프로에 선택받는 이는 많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나두 프로선택을 못 받으면 어디로 갈까? 궁금했었는데.. 요즘에는 일본 독립리그로 진출을 많이 한다는 구만. 월급 20만엔이면 아예 백수로 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고.. 공돌이 인생이 생각나더라. 그래도 삼전같이 받아주는 회사가 있으니 징징징거리지만 먹고는 살잖아. 만일 기업이 없다면...예를 들자면 바이오 전공이라면 연봉 1800만원에 만족하면서 살던가 아니면 외국진출을 노려야 했겠지. 여튼 국내 프로 방출 후에 일본 독립리그로 떠난 사람의 이야기네. 왜 국내실업팀 입단은 안 된건지도 궁금하긴 한데... ------- 2008년 11월 어느 날. 홍성용(23)은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봤다. 홍성용은 "더 이상 뛸 곳이 없습니다. 야구를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포기했지만 아버지는 아니었다. "성용아, 한번만 더 해보자." 사실 홍성용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LG서 방출통보를 받은 뒤 타 구단 스카우트에게 전화도 했다. 아버지의 간청에도 홍성용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기회는 생각지 못한 곳에서 왔다. LG서 함께 방출됐던 박가람(23)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 독립리그에서 입단테스트를 한다는데 함께 가보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대한해협을 건넜고, 간사이리그 오사카 골드비리켄즈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정확히 1년 뒤 홍성용은 아버지를 찾았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노력도 배신을 하더라." 천안북일고 시절 홍성용은 주목받는 왼손투수였다. 최정(SK)·김명제(두산) 등 동기생, 1년 후배 한기주(KIA)·강정호(히어로즈) 등과 청소년대표에서 함께 뛰기도 했다. 2005년 2차 5지명으로 계약금 5000만원을 받고, LG에 입단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넘치는 그였다. 하지만 130㎞중반의 구속으로 프로의 벽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홍성용은 "죽어라 했는데도 안됐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에게는 안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08년에는 서울에도 한번 안갔다. 구리 훈련장에서 연습만 했다. 그런데도 구속은 여전히 130㎞초중반이었다. 너클볼을 배우는 것이 살 길이라는 생각에 남들이 경기하는 시간에 공 한 박스를 들고가 던져보기도 했다. 손이 찢어지면 붕대로 싸매고 던졌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가슴 아프지만 결국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홍성용은 단 한 차례도 1군 마운드를 밟지 못한 채 2008년 11월 방출통보를 받았다. "김영직 2군 감독님·김용수 코치님·조정희 트레이너님이 모두 나를 도와줬다. 그러니 원망할 사람은 나 자신 뿐이었다." 독립리그의 한인 스타, 홍성용 좌절감 속에 찾은 일본 고베. 홍성용에게 신세계가 열렸다. 선을 보인 3개팀에서 모두 관심을 표했다. 처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홍성용은 월급 20만엔을 9개월간 지급해준다는 오사카와 계약을 체결했다. 처음으로 '인기'도 실감했다. "독립리그의 한국인은 낯선만큼 흥행요소를 지녔다고 하더라. 일본 신문(오사카 지역지)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간사이리그 개막일에도 홍성용을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개막전을 앞두고 한 신문에 요시다 에리와 홍성용을 비교하는 기사까지 나왔다. 요시다는 일본 최초의 프로야구에 진출한 여성 선수로 관심을 모았다. 3월 27일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열린 개막전의 메인 테마는 '너클공주' 요시다와 '한국 프로출신' 홍성용의 맞대결이었다. 홍성용은 "개막전에 1만 5000명의 관중이 오셨다. 그렇게 많은 팬들 앞에서 요시다도 나왔고, 나도 2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졌다"고 감격적인 순간을 떠올렸다. 홍성용을 알아보는 팬들이 점점 늘었다. 그럴수록 홍성용은 더욱 힘이 났다. 그는 "4년동안 1군서 한번도 던지지 못했던 내가 2009년 독립리그서 40경기에 나왔다. 그런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웃었다. 그는 간사이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일본 언론이 선정한 'NPB 입단이 가능한 5인의 독립리그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신에게 받고픈 선물, 구속 5㎞ 더 2009년 11월, 홍성용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었지만 뿌듯한 성과를 쥔 채였다. 홍성용은 "미에 스리아로즈와 입단계약을 했다. 오사카보다 한 단계 높은 팀이다. 대우도 더 나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최소한 2010년 '야구백수'로 전락할 가능성은 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홍성용의 꿈은 다시 한국을 향한다. "일본에서 제시한 조건보다 더 열악한 조건을 내세워도 한국 구단이 불러준다면 돌아갈 것이다. 어떤 선수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1군 경기 등판은 내 소원이다." 목표는 한결같다. 구속 5㎞. 홍성용은 "신이 계시다면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10억·100억 그런 것 말고, 구속 5㎞만 선물해주셨으면…. 직구 구속이 140㎞만 되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5년간 그의 소원을 외면했던 신이다. 대신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고, 포기하지 않는 힘을 선사했다. "제 스스로 해야하는 거죠?" 의지할 이는 자신 뿐임을 홍성용도 알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