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eXpression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freeeXpression ] in KIDS
글 쓴 이(By): zeo (ZeoDtr)
날 짜 (Date): 1994년03월17일(목) 13시48분33초 KST
제 목(Title): [진화론] 엔트로피 II 제 4 장 (1)



애고, 요새 바빠서 kid에 글을 쓸 시간이 없따.
그래도 책 베낀 것은 올릴 만큼이 되었으니까 올려 볼랍니다.

우선, 제가 베껴 올리는 엔트로피 II라는 책은

1984년 1월 30일 초판발행
저자: 제레미 레프킨
발행처: 원음출판사

입니다.
워낙 책이 오래돼서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뭐,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미래 예측에 관한 책들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네요.

어쨌든, 한사람이라도 원했으니 책을 베껴 올려야겠습니다.
저는 요약이나 저의 사견같은 걸 넣지 않겠습니다. 그저 노가다만 하겠습니다.
저의 색안경으로 괜히 왜곡시킬 필요는 없을테니까요.
우선 제 3 장의 마지막 부분과 제 4 장의 (1)을 올립니다.
제 4 장은 과학적 관점이 아닌, 역사/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진화론을 본 것입니다.
하지만, 진화론 자체가 사회 파급 효과가 워낙 큰 것이기 때문에, 또 저자의 내용
전개를 따라간다는 의미에서 올립니다. 제 5 장이 과학적인 관점에서 비판한 거죠.
지겨우시더라도 참고 봐주세요. (못참겠으면 q 치셔)
참고로, 저의 hterm에서는 키보드 관계로 한자를 입력할 수 없어서 (한자)식으로
쓰여진 것은 그냥 말로 풀었습니다. 이것때문에 key를 remapping 하려니까 귀찮아서.

-------------------------

제 3 장 자연관과 생명관에 숨어 있는 문제점

...왕창생략...

<자연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긴 자연관의 문제점>

  자연관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자연관은 자연의 모습을 파악한 것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서양인이 기계를 만들고 자신들의 이미지에 맞춘 세계관을 만들어내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경향인 것이다.
  지금까지 상세히 언급해 온 것처럼, 자연관이란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다른 생물과의 관계나 죽음의 운명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강렬한
소망을 반영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윈의 자연관조차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계의 안팎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학술지나 일반잡지에는 매달 다윈의 학설을 비판하는 논문이 개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자나 사회비평가들의 논쟁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다윈설을 둘러싼 문제는 종의 기원이나 발달에 관한 이론만은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우리들 세계관의 중심의 하나인 이상, 지금 우리들의 우주론 자체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리를 분병하기 전부터 다윈의 학설 속에서 자라왔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경쟁인데 이러한 투쟁 속에서 승리해야만 살아남는다고 교육을 받아왔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상, 타인보다 우수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자랐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행해서 돌진해 가는 것은 선(좋은 것)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에 대해서도 플러스를 가져온다고 배웠다.
  그리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적자만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다. 그러한 [상식]은 모두 다윈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 이후 이것들은 인간사회의 진실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윈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해마다 높아져서 그의 학설이 붕괴될
날도 시간문제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도달했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와버린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다윈설의 탄생과 그 시대적 배경을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다윈이 그러한 학설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다윈에게
번쩍여졌다고 일컬어지는 영감이 그 시대의 다른 사상가에게서도 보여진다는 점,
또한 다윈이 발견한 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니고, 사실은 산업 혁명을 맞은 영국
공업화사회의 이념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검증해 보고 싶다.
  다윈은 이것을 자연계에 적용하여 확대해석을 했던 것 뿐이며, 그 때문에 산업
혁명과 그 시대의 종언은 다윈의 세계관의 종언에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금 우리들의 삶도 자연관도 완전히 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도(미래 그림)는 제 6 장에서 고찰하기로 하고ㅡ 그 이전에
우선 과거의 사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아무래도 있는 것이다.


제 4 장 [진화론]은 왜 진리로 되었는가
- 이 이론이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서 침투한 진상


(1) 공업화 사회의 요청에 부응한 [진화론]
= 다윈의 이론이 탄생하기까지 무엇이 일어났던가


<자연도태란 자연계에서 보다는 인간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다윈의 진화론은 역사상 되풀이되어 경제적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이익의 추구에
이용되어 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즉, 이것은 [사회진화론]이라는
것이고 1백여 년 이상에 걸쳐 연구, 논의, 분석이 행해져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은, "다윈의 이론 그 자체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자연 관찰 위에 성립된 것으로써 사회나 문화의 영향에서 독립된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다윈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한 것 뿐이고 사회가 그의
생각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것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 다윈의 이론 자체가 사회적 편견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정싱분석의인 오토 랑크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써 그의 저서 <심리학을
넘어서> 속에서, "다윈은 자신의 모습을 자연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있는 한
사람의 부르조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의미심장안 설명은
아직 생물학 교과서에 나올 턱이 없는 것이지만 다윈은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었고
빅토리아 시대(1837-1901)의 사회정세 속에서 이론을 확립시켰다는 설이 현재 주류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코네티컷 대학의 역사학자인 존 C. 그린이 말하는 것처럼, "다윈도 다른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자연을 분석했다는 것은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윈이 생존했던 빅토리아 시대라고 하는 것은, 봉건적 농업경제로부터 자본주의
경제에로 이행해가는 바로 그 전환기에 해당된다. 영국은 유럽 전체의 경제 생활을
바꾸어 가던 산업혁명의 최전성에 있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 걸음 빨리 개혁에 손을 대고, 그 때문에 경제 혁명이
불러 일으킨 혼란을 정리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제 혁명을 계기로 해서 영국은 소박한 초원의 나라에서 굴뚝 투성이 국가로
바뀌었다. 존 C. 그린은 "19세기 전반에 자연도태론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영국인이었다. 그것은 왜 그랬던가? 과학에 국경이 없다면 이것은 얼마간 괴상한
이야기가 아닌가"하고 말하고 있다. 또한 생물학자 알렉산더 샌더도 "진화론은
자본주의의 대두기에 그것이 가장 강렬한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역사가들도 시간과 장소를 같이해서 일어난 진화론의 발생과 산업자본주의의
발흥이라는 현상은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영국의
정치/경제는 경쟁에서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영국인의
경쟁기질이라는 것과 부합시켜 생각할 때 다윈이 동식물계를 관찰하고 그것을
이론화하는 단계에서 경쟁 및 투쟁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그린의 의견에 찬의를 나타내고 있다.

<사회는 변모와 동시에 새로운 우주론을 요구한다>

  19세기 전반에 영국이나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경제 변혁은 슈메르 최초의 도시
국가나, 전면적 농업의 출현과 맞먹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근본적이고 또한
대규모적인 변동이었다. 왜냐하면 몇천 년이나 농업생활이 계속된 뒤에 전혀 다른
새로운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태고적부터 선조가 경작해 온 밭에서 몇백만의 사람들이 삽과 괭이를 버렸다.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을 어깨에 둘러메고 태양을 등에 지고 컴컴한 공장 속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공장 속에서 새로운 도구나 공업기계에 매달렸다. 몇천년 동안 넓은 밭에서
태양을 등 뒤로 받으며 일하고, 그 위대한 힘이 토지를 기름지게 해 줄 날을
인내깊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몸을 구부리고 석탄이라는 검은 태양을
삽으로 파내서 용광로 속에다 던져 넣는 것이었다.
  농업 생활에서 공업화시대로 옮겨가자 에너지원도 태양의 빛에서 석탄이라는
압축된 태양에너지로 변해갔다. 그 때까지는 새벽과 일몰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은 자연의 리듬에 따라서 생활해 나가게 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태양의 정확한 움직임을 따라서 살아왔다.
  그러나 석탄을 태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는 자연에서 떨어져 나가, 자유롭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지구의 자원을 이용해 간다. 몇억 년이 걸려서 축적되어진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가면서 인간은 경제활동의 속도를 가속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바로 훌륭한 대표적인 예이었다. 공업화시대의 특징은 급격한
변화의 가속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은 모든 면에서 가속화 되었다.
이에 수반하여 차례차례로 새로운 사건이 생기고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미래 예측과 계획성이 더욱 더 필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서 의식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과 동시에 자연의 개념조차도 바꾸어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 문제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거대한 계급의 사슬은
하나씩 느슨해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이 그것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미크러스 테이크와 로버트 영이 <자연 속의 인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퀴나스의 우주론은 변화가 적은 소규모 경제 사회에 적합한
것이었고, 다윈의 진화론은 급격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 공업화 사회에 적합한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에 인간은 어떤 자연관을 필요로 했는가>

  찰스 다윈은 5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눈 앞에 펼쳐지는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스펙터클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예리한 관찰력을 갖고
있었던 그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탄생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해명해
보고 싶다는 열의에 불타올라서 <종의 기원>을 저술한 것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영국인의 생활과 환경은 급격히
변해가고 있었다. 메시지를 무선으로 몇초 사이에 몇백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또한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철의 궤도 위를 증기로 움직여 가는 기계를 보라.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그 강시의 영국인이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었다.
  영국인의 창의력은 기술과 어울려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당시 "영국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면 다윈은 <자조론>을 저작한
사회사상가인 사뮤엘 스마일즈와 똑같이 거대한 기계가 칙칙폭폭하는 소리를 내며
새롭게 구축된 기계적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섬이라고 대답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것은 바로 기계의 시대였다. 여기저기서 화제는 오로지 기계의 발명이었으며,
당시의 사람들은 완전히 그것에 열중해 있었다. 1851년 런던에서 최초의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만국산업기계 대박람회(제 1 회 만국박람회)라고 불리워졌는데,
강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크리스탈 팰리스 대회장에는 존재하는 모든 발명기계가
진열되었다. 영국인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을 보라고 세계 속의 사람들에게 열심히
외쳐댔던 것이다.
  이러한 기계가 그 시대의 물질적인 면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그 시대의 다른 한
면을 상징하는 것은 생존경쟁이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새로운 사회의
이익에 한몫 끼어 보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던 시대였다.
  일반적으로 예의바른 영국신사, 소박하고 유순한 노동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은 이 시대에 그들은 사방팔방으로 고함을 질러가며 앞으로 앞으로 돌진해
나가면서 기계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하며, 조금이라도 제몫을 더 찾아 먹으려고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질이 오가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투쟁 정신은 다윈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볼
베어링처럼 다윈의 세계관도 당시의 사회에 빈틈없이 맞아들어갔던 것이다.
  <다윈전>을 저술한 조프리 웨스트는, "다윈은 기계화시대에 기계적인 생물사회의
개념을 확립한 것이다. 인간사회의 투쟁을 동식물의 투쟁으로 바꾸어 놓아 보였다.
사유재산 상속제의 사회에 있어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정 중요한 것은 점유와
유전이라고 말했다"아고 말하고 있다.
  다윈이 남긴 많은 글이나 일기, 책 들을 살펴보면, 연구자는 틀림없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다윈은 자연 속에서 영국사회를 보고 영국인의 욕망이나
행동과 같은 것을 자연에서 보았으며, 또한 자유경쟁의 원리를 보았던 것이다.
  다윈은 당시의 사회 가운데서 몇 가지 이미지를 추출해 내어 그것을 자연에
적용시켰다. 그리고 일상생활과 비슷한 새로운 자연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윈의 개인적 사정과 진화론의 관계>

  다윈의 양친은 모두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고, 사려분별이 뚜렷하고 안정된 재산
덕분에 생활에 대한 걱정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엄격한 개인주의자이고 진지하고 독립심도 강했으며, 문화나 예술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고, 어떤 일에 부딪혀도 단호하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의지가 굳센 영국인
타입이었다.
  다윈 자신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쾌적하긴 했지만 특히 기록할 만한
것도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다고 쓰고 있다. 소년시절의 그는 발육이 좋은 극히
전형적인 양가의 자녀였다. 후에 세계를 뒤엎어 놓을 정도의 인간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특히 지적으로 월들하게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정도의 성적을 올리는
학생이었다. 부친이 이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없지 않겠느냐고
진정으로 장래를 걱정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퍼블릭 스쿨에서 배운 뒤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 되어 가라파고스 제도의
탐험으로 유명한 [비글호]의 항해에 동행했다. 그 뒤 결혼해서 다운이라는 40호
가량의 인가와 교회가 있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런던의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에 자리를 잡고서부터 다윈은 생물의
진화에 관한 집필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상스럽게도 그는 조용한, 그 당시의
산업혁명과는 전연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시대의 정신에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는 듯한 이론을 창조해 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다윈에 관해서 이상한 점이 몇 가지가 있다. 생존경쟁이라는 이론을
만들어낸 다윈 자신은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병약해서 여러가지 질병으로 계속
고통을 당하고, 나날의 생활도 만족하게 보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30세가 된 때부터 죽기까지 약 40년 동안 하루도 보통의 건강한 사람들처럼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고, 그의 일생은 피로와 병고와의 기나긴 투쟁이었다.
  타고난 병약한 체질에 대하여 다윈은 "강자가 승리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자신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구역질, 현기증, 울렁거림, 나른함
따위는 다윈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친구들은 내가 히포콘데리(우울증)
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는 전기 작가에게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에게도 매우 매력적인 테마이다.
다윈의 정신상태나 건강상태에 대해서는 시간이 경과하면 좀더 여러 가지 사실이
판명되겠지만, 다윈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태어나면서부터의 갑상선 질병이
그의 사고나 사색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또한 이것도 운명의 심술궂은 장난이랄까, 자연계에서의 생존경쟁이라는 이론을
만들어낸 그는 생존경쟁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이 생활은 충분히 보장되어져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친이 남겨준 유산으로 안락하게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윈은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지 않는 것에 떳떳치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할 수 없는
자신은 부적응자라고 하는 강렬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꾸여 나간다는 생각 자체가 다윈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었다. 자신의 병약한 체질을 이어받은 다윈 가의 아이들에게도
그러한 능력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인 에라스무스도 "우리들 불행한 가족은 모두 병약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물이 자연도태, 적자생존이라는 산업문명 사회를 조직화하는 우주론을
묘사했던 것이다. 병약함 때문에 사회로부터 떨어져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생활을
보내고 있던 인간이 말이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에게 결함이 있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러한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우주론이라는 것은 그것의 가장 강한 잠재적 소망, 기대나 욕망, 열망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품중개량 기술이 다윈에게 가져다 준 중대한 힌트>

  어쨌든 간에 진화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여러가지 설이 있어 왔다. 그것이 다윈에
의해서 처음으로 체계화되고 이론화된 것이다.
  자연 운동의 메카니즘을 해명하는 힌트로써 다윈은 인간이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을
관찰했다. 농업기술의 진보에 대한 착안이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1750년대에 대규모적인 농업혁명에 착수했다. 인구증가에 따르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가지의 근본적인 기술개량책이 실시되었다. 중세 초기
이래의 농지는 일변하게 되었다. 의회는 일련의 사유지 구획법을 공포하여 18,9
세기에는 영국 국토의 약 6백 50만 에이커는 합리적으로 구획되어진 사각의 밭으로
변했다.
  농업개량가들은 "한 장의 잎밖에 나지 않은 곳에 이번에는 두 장의 잎을 심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열광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품질개량 기술의 발달에 의해서
농업은 크게 진보되어 있었다. 다윈은 이러한 현상에 착안했던 것이다.
  품종이란 단어가 축산업계에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760년대 로버트 베크웰의
소, 말, 양의 조직적 품종개량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하여 유명한 라이세스타셔
종의 양이나 딧슈레종의 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뒤에 품종개량 기술은 발달을
계속해서 동물에서 식물로 확대되었고, 새로운 산업기술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공 교배에 의해서 가축의 품종은 엄청나게 개선되었고 그것에 수반하여 생산고도
대폭적으로 향상되었다.
  다윈은 축산업자들의 주목할 만한 성공에 대하여 크게 흥미를 느끼고 품종개량
기술의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동식물의 품종개량, 즉, 인간에 의한 선택적 교배에 있어서의 다양한 변종의
발생을 보면 종의 기원의 문제도 조금은 해명되지 않겠는가 하고 직관했다고 한다.
  1837년에 그는 축산업협회의 회원이 되어 수십 권의 노트를 가득 채울 만큼 자료를
수집했는데, 이것은 모두 인공선택에 의한 교배의 메카니즘을 알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공 교배에 의해 보다 많은 변종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과, 하나는 변종 가운데서도 특히 우수한 것은 인간이 특별히
취급하여 대대로 그 성질을 전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열등한 소나 말은 교배시키지 않고 그 일대(한세대)로 끝나버리는 셈이다. 다윈은
종의 형태가 인간에 의한 선택에 의해서 변하는 이상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법칙이
존재할 것이며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연계의 진화를 해명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롭게 두 가지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초의 난관은 가축에 있어서
어떤 종에서 무수한 변종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전혀 [새로운 종]이 발생한
경우는 없었다. 즉 몇백 종류의 소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소 이외의 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엾었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사실을 다윈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다윈은 "인간의
품종개량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탄하는 한편, 오랜 시간을 두고 노력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갈림길로써 그 때까지의 관찰과 실증에서 떠나, 그는 상상력과
추측을 가지고 자연을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인류의 역사보다도 휠씬 오랜
시간을 사용해서 변종에서 변종으로의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면, 마지막에는 전혀
새로운 종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다윈은 상상했던 것이다.

<결정적 영향을 준 말사스의 <인구론>>

  다윈이 부딪힌 다른 하나의 문제는 누가, 혹은 무엇이 도태를 행하고 자손을
남기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를 나누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다윈은 축산업자가 육종에 있어서 새로운 특성을 골라내는 것처럼
자연 속에서도 무엇인가 이것과 비슷한 메카니즘이 작동한다고 가정했다. 자연계의
식물이나 동물도 가축처럼 무엇인가의 기준에 의해서 틀림없이 선택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설이라고 하더라도 다윈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확고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면 여기저기에 우수한 신종(새로운 종)의 가축이나 작물이 엄청난
기세로 보급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자연계에 있어서의 도태는 인간의 인공교배 따위보다는 훨씬 정확할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이라고 하는 것은 한없이 복잡하고 격심한 조건에 순응하지 않고서는
견디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 <종의 기원>에서

  그러나 최후에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었다.자연도태의 메카니즘 그 자체란
무엇인가, 또한 어떤 특성이 살아남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을
다윈은 뜻밖의 장소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그는 자서전 속에서 "1838년 10월 우연히 말사스의 <인구론>을 읽고 있을 때
해답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이론이야말로 내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사회 시스템론을 자연과학에 도입한 다윈의 오류>

  토머스 말사스(1766-1834)는 1798년에 <인구론>을 출판했다. "세상에는 굶어 죽는
자가 넘쳐 흐르고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 마을을 버리고 도시로 밀려 들어왔다.
가난한 사람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말사스는 사회의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우려의 결과가 저 유명한 인구와 자원의 관계에 관한 법칙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말사스는 "식량생산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이지만,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이다"라고
논했다. 즉 인구의 증가에 대하여 식량의 증가는 항상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서 기아나 빈곤, 악이나 범죄,
질병이나 기근, 혁명이나 전쟁과 같은 갖가지의 가혹한 사회상황이 발생하고
인구조정이 행하여진다. 즉 생존 경쟁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강자는 승리하고
약자는 전멸할 숙명에 있다는 학설을 전개한 것이었다.
  경제학은 별명으로 [음울한 학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지만,
이러한 원인을 만등 장본인도 말사스였다. 말사스는 인간의 식욕은 도저히
식량생산을 좇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것은 신의 섭리라고 주장했다.
  신은 인간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끝없는 수요와 한정된 식량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와같이 냉혹한 신의 섭리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훨씬 옛날에 나태한
야만인으로 다시 되돌아갔을 것이다. 굶주림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은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서 진보를 거듭해온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말사스는 자연을 성능좋은 체(착착 쳐서 걸러내는 것)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
체에 의하여 자연계에서는 생산력이 있는, 근면하고 강한 자가 살아남고, 허약하고
나태하며 게으른 자는 떨려나간다.
  이와같이 뚜렷한 형태도 없이 사람들이 막연하게 품고 있던 생각이 말사스의
구체적이고 이론적인 표현을 얻어 사회에 정착한 것이다.
  당시의 인간사회에서도 [적자생존]이야말로 진리라고 말하면서 부르조아 계급은
활발하게 경제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정의의 경제 개입에는 반대를
했다.
  시장도 사회도 방치헤 놓으면 자연히 좋아지는 것이다. 근면한 자는 번영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탈락하게끔 자연히 되어 있는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부르조아 계급은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본래적인 우위를 믿었으며 그러한
신념을 뒷받침해 줄 이론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말사스가 확고한 법칙을
부여했던 것이다.
  다윈은 즉각 말사스의 이론에 매달렸다. 후에 버트란드 러셀도 지적한 것처럼
다윈은 본질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 경제와 말사스의 <인구론>을 가지고 동물계와
식물계를 설명한 것이다. 즉 그는 이렇게 해서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그 밖의
수많은 위대한 자연 철학자들과 견줄 수 있는 지위를 역사 위에 쌓아 올렸던 것이다.
  우선 최초로 다윈은 인간에 의한 육종과 자연계에서의 교미의 기본적인 차이를
확인했다. 인공육종의 경우, 바람직한 특성을 어미에게서 새끼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축산업자의 희망에 따라 암컷과 수컷이 선정된다.
  그러나 자연계에서는 이와 같은 계획적인 육종은 물론 행하여 지지 않고 교미는
대부분 기회나 상황을 선택하지 않고 우발적으로 행하여진다. 그러한 결과로써 각양
각종의 새끼가 태어나는데 이들 자손에 나타나는 특성에는 전혀 아무런 계획성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다윈은 자연에 있어서의 교미가 전혀 우발적으로 행하여짐에도 [살아남아서
자손을 남기는 것]과 [전멸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무엇인가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자연계에서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물만이
생존 경쟁에 이기고 자손을 늘려 갈 수 있다"고 하는 유명한 진화론의 기본
념이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말사스가 통찰한 사실을
생물계에 응용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자유방임주의 경제 하의 당시의 영국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생각은 이미
경제인의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즉 그것은 "경쟁이 심한 산업계를 헤쳐나가며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적자(적당한 놈)만이고, 우수한 자가 승리하고 열등한 자가
패한다는 법칙은 엄연히 적용한다"라는 것이고 다윈의 진화론도 이러한 인간이나
사회 관찰에 근거를 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

우와... 왕 노가다.
다음에는 `(2) 다윈과 정치체제와의 관련'을 베껴 올려 보겠습니다.

                                   ZZZZZZ
                                     zZZ  eeee  ooo
                                    zZ    Eeee O   O
                                   ZZZZZZ Eeee  OoO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