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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eeeXpression ] in KIDS
글 쓴 이(By): limelite (호기심)
날 짜 (Date): 2001년 2월 15일 목요일 오후 10시 57분 13초
제 목(Title): 답글2 : 자연관...

결정적인 부분에 접근하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다보니 이상한 관점
들도 자꾸 튀어나오고 그러는군요. 말을 꺼낸 제가 정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이제부터 좀 더 직접적인 접근을 해 보겠습니다. 이해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자료들이 어느 정도 축적이 되었으며, 저도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이해된 것 같습니다.
적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예상하기로는 글을 두조각으로 나누어서,
두번째 글에서 나우시카 같은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인간 대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놀라운 것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대한 현대적인 관점에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언론매체를 통해서, 일상 생활을
통해서, 인간은 동등하다는 이야기를 늘상 주고 받으며, 고대
그리이스 민주주의니 프랑스 혁명이니를 배우면서 이런 동등
성의 개념의 역사가 오래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인간 동등성에
대한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히 자리 잡은지는 얼마되지 않습
니다.
20세기 초만해도 민주주의에 앞섰다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조차 남성이나 지배 계층에게 더 유리한 참정권이 부여되기도
했었고요. 독일에서 유태인에 대한 민족차별 논리가 먹혀들었
듯이, 발달한 민주주의에 대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민족에
대한 차별의식은 제2차대전 전까지 유럽 전역에 여전히 적잖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 잔재가 극복이 많이 되기도
하고 편차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오늘날의 유럽 여러
국가들에 남아 있고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준 2차세계대전 이 후 세계에서 가장 영향
력 있는 국가였던 미국은 이 점에서 더욱 심해, 표면적으로
자유와 인권을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심각한 인종
차별, 외부적으로 세계 패권을 위해 다른 나라 억누르기를 일삼
았지요. 그러면서, 모든 언론매체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와 인권의 나라라는 환상을 자국과 타국에 심어주었고,
미국식 지배논리에 희생을 당하면서도 최면에 걸린 듯 미국식을
숭상하는 나라 사람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피지배자가 핍박
당하면서도 지배자를 숭상하는 상황이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최악입니다) 그런 최면을 만들었던 대표적인 매체로 예를 들면
바로 미국영화가 되겠지요.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봉건 신분제 사회의 잔재가 식민지
경험 등의 이유로 늦게 청산되어, 인간이 동등하다는 개념이
천천히 도입되었으며, 8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꼽힐 만큼 미국식 지배논리에 모순되게 희생당하는 나라
이기도 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온 지금, 한국 땅에는 평등이라는
개념은 무척 익숙한 개념이고, 20~30년 전에 비해서 상황은
비약적으로 나아졌지만, 아직도 자신이 남녀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신분제적
잔재에 물들어 있다는 것 역시 납득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 학교에서 학생 하나가 교수와 학생은
동등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동등성을 행동으로 보인다고 합시다.
그 학생은 교수들과의 관계에서도 버티지 못할 뿐 아니라,
주변의 동료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배겨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나라 상황에서 누군가 전하는 북유럽 어느 국가의
교수와 학생과의 관계나 학생의 위상은 그림의 떡으로 요원
하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대 인간의 동등성을 인간
대 자연으로 확장하자는 주장은 너무 무리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제 질문을 던져봅시다. 왜 인간은 동등해야 할까요? 왜 남자와
여자는 성적 차이가 있음에도 동등해야 할까요? 왜 노동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과 정상인은 동등해야 합니까? 왜 잘생겨서
호감을 주는 사람과 못생겨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 동등해야
하지요? 왜 가진 것이 많아 할 능력이 많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동등해야 할까요? 왜 교육을 많이 받아서 능력있는 똑똑한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이 동등해야 하지요? 왜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부려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동등해야 합니까? 왜 기독교도와 회교도와 불교
도는 동등하지요? 왜 왕과 귀족과 평민은 동등합니까? 왜 양반과
상민과 천민이 동등하고요?
왜 수도권과 경상도에 우리나라의 부가 집중되는 것이 잘못되었
습니까? 왜 한민족과 중화민족은 동등해야 하지요? 왜 발달한 문명
속의 사회인과 미개해서 자연상태 거의 그대로 사는 원주민이
동등합니까? 왜 피부색도 다른데 흑인과 백인은 동등해야 할까요?
왜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과 우리는 동등해야 해야 합니까? 왜
유태인과 게르만족과 우리는 동등해야 하지요?
동등성이 효율적이기 때문에요? 생산적이지 못한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의 존재나, 온전하지 못한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의
헛소리가 사회의 성장을 가로막고 생산보다 비용을 더 많이
발생시키는데도, 그들을 똑 같은 인간으로서 기회를 주라는
동등성이 효율적일까요? 효율을 위해서라면, 동등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좋지 않겠고, 완전한 동등성 인정보다 일정 정도
동등성을 부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가능성이 높아보이는데요.

인간으로서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이란,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인간임을 이해하고, 내가 다른 사람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른 사람의
목적에 의해 부당하게 억눌릴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목적에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억누를 수 없고, 인간이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효율의 적용 대상이 아니며, 내가 인간답게 살 기회를 충분히 가지고
사는 것이 온당한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인간답게 살 기회를 충분히
가지고 사는 것이 온당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동등성이란 사실 별로 어렵지 않으며 단순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쉬운 인간 동등성의 개념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사람들은 개인이 가진 여러가지 차이를 동등하지 않은 인간
으로 여기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성별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사회적 위치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생활
수준이 다른 것들이 차별의 이유가 되었지요.
역사가 발전하고 인간의 사물과 인간 자신에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
지면서, 동등성의 적용 범위도 확장되어 왔습니다. 현대의 우리에
게는 당연한 듯 보이는 인간에 대한 동등성의 개념 확장에는, 많은
경우 각 역사적 시대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들의 거쎈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간 동등성의 개념은 저 위의
수 많은 왜라는 질문을 딛고 여태 그 많은 역사적 난관을 넘어서,
굳건하게 확립되고 그 영역을 확장시켜 현대에 이러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현대적인 인간 동등성 개념이 그 많은 난관을 넘어
형성되어 왔고, 이제 확고한 논리적 근거를 가졌으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별, 혈연, 지연, 사회적 지위,
종교, 민족, 인종을 뛰어 넘어 확실히 인정받기란 갈 길이 먼
면이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의 현대적인 동등성의 완전한 적용도 갈 길이
먼 세상에, 인간 대 자연에 대해 동등성의 개념을 확대 적용하자는
-동등성 개념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대해 확장시켜왔듯이- 것이,
현대적인 자연관입니다.
이런 자연에 대한 동등성 확장은 인간 사회와 같은 인공의 환경
속에 편입된 애완동물을 인간의 기준으로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늑대와 집개가 대화를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생의 늑대는 인간의 집에 사는 개가 인간
도움을 받아 호의호식하는 것에 부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개의
목에 있는 개목걸이를 보고는 호의호식보다는 야생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낫겠다며 발길을 돌리지요.
우리가 자연 속의 생물들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면, 여러 생물
들이 자연 속의 자신의 위치에 알맞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자기
삶을 가지면서 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자연 그대로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처음부터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동물이나
식물 등의 삶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이해의 영역을
넓혀가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것 역시 마치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마치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 아름다운 생물의 삶이 함부로
제약받고 훼손되는 것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일인가를 점점 더
깨닫게 되고, 인간이 그렇게 함부로 다른 생물의 삶을 훼손하는
행위를 얼마나 많이했는지도 반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애정과 이해의 영역을 넓혀가면서, 결국 대자연 속에서
여러 생물들의 삶이 순환하는 것에 이해가 닿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인간들 중 한 부분에만 애정을 두고 다른 부분은
애정을 두지 않고 수단화했을 때 차별에 의한 여러 비극을 만들
었듯이, 자연의 어느 한 부분에만 애정을 두고(예를 들어 인간
에게 예쁘게 보이는 초식 동물이나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동물, 또는 아름다운 꽃) 다른 부분을 함부로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 대자연의 순환을 막고 많은 비극과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런 순환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배고픈 사자가 어린
양을 잡아 먹는 것도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이건 받아들여야 하고
존중받아야 할 자연의 섭리임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자연의
순환과 그 대자연 속의 여러 생물과 인간의 위치를 함께 생각하면서,
자연 속의 여러 생물의 삶 역시 부당하게 인간의 수단으로 훼손되어
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현대적이니 하는 수식어로 낯설어 보이는 자연 대 인간의
동등성은 풀어서 쓰면, 자연 속의 여러 생물의 삶이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자기 모습 그대로 훼손되지 않고 영위되어야 할 것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 동등성에 대한 개념처럼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워보이지 않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인간 동등성이
인정받는 과정이 험난했듯이, 자연의 동등성이 인정 받기도 그렇게
쉬워보이지는 않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이런 관점의 자연관이 어떤 과정으로 형성되어 왔는
가는, 제가 어릴 적부터 즐거보던 동물 다큐멘타리의 내용을 통해
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적 보던 동물 다큐멘타리들은,
예의 좋은 동물 나쁜 동물에 대한 분류가 적용되었습니다. 각 방영
분마다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잡아 먹는 동물은 흉악한 모습을,
잡아 먹히는 동물은 가련한 모습을, 하이에나 같은 동물은 비겁한
모습을 좀 더 카메라에 잡았지요. 그러다가, 점점 더 이들의 관계를
공평하게 카메라에 담기 시작하고, 지구의 순환에 대한 다른 분야의
연구가 진척되는 것과 궤를 맞춰서 동식물 세계의 순환에 시각을
가지는 동물 다큐멘타리가 점점 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동등성과 순환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동물 다큐멘타리를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어럽게 되었습니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숫사자는 게으르고 암사자에 빌붙어 살며,
숫사자의 갈기는 암사자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오해가 일반적이었을만큼 동물의 세계와 자연에 대한 이해는 그리
멀지 않는 과거인 10~20년 전만 해도 오늘날과 상당히 다르고 의외로
낙후되어 있던 분야입니다. 다른 관점에서는 그 만큼 이해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뜻도 되겠고, 덕분에 저의 짧은 일생 안에
자연관이 바뀌어가면서 궁극적 지향점에 접근하는 과정을 볼 수도
있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럼, 여기서도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인간은 자연을 그렇게
동등한 대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이런 관점이 당위 수준이 되는
근거는 이해로부터 나옵니다.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동등성의
영역을 확대하는데 대한 당위가, 다른 그리고 달라 보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얻어졌듯이, 인간 대 자연 관계의 동등성에 대한
당위도 자연에 대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라도와 경상도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지역 동등성이란 당위가 되지 않으며, 동등성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한 사람에게만 당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해가 충분한 사회적 합의로 도출되어서 강제성을 가지기
까지는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그 이해에 동의해야 하며, 여기
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노예가 당연시 되던 시절, 동등한
한 인간을 노예로 두고 제약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에 불과했지만, 사회구성원 전체에 그런 동등성에 대한 이해가
확산되고, 어느 정도 이상 확산되자 결국 노예제 폐지가 강제적인
법규가 되었던 것과 비교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인간의 동등성에 대한 이해를 자연에까지 확대한 현대
적인 자연관은 아직은 하나의 관점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미래를 누구라도 쉽게 확신할 수는 없음에도, 인간의 이해 확대
역사에 비추어서, 저는 이 현대적인 자연관이 앞으로 점점 더 동의를
얻어갈 것이며, 결국은 사회적 당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종종 의혹의 대상이 되는 많이 이질화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순환과 생물계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대한
많은 연구도 보충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동등성의 확장과 대자연이 순환의 개념이 연결된 자연관은 자연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주의 깊게 이해하고 그 이해를 순환하는 대자연
전체에 확장시켜서 얻을 수도 있겠고요(동물애호가들의 이해는 이
쪽에 가깝겠군요),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순환하며, 인간 역시 그
순환의 한 부분이라는 철학적인 이해로부터 얻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적 이해는 이쪽에 가깝겠지요).
이런 자연관에 대해서, 인간이 현재처럼 지구를 자기 중심적으로
발전 변형시키는 것 역시 본성적이 아니냐는 의문을 여전히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 의문에 대해서 일단 직접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영화보드에 "어릴 적 봤던 영화..."라는 글을 올렸는데요,
그 글 속의 영화와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의 행동이 그런 의문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화 속의
극단화된 설정을 통해서 생각을 가져보자는 뜻이지요.)

여기까지 적는데도(여기는 "대"가 맞나요? "데"가 맞나요?) 생각
보다 무척 어렵군요. 간단한 글이 아니어서 그런지... 원래 예정
에는 이 글과 다음 글을 같이 적는 것이었는데, 여기까지 적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네요. 다음 글, 나우시카 영화 등에 적용한 이야
기는 좀 더 후에 적겠습니다.(원래는 다음 글도 같이 적어 soulman
님과 aegis님에 대해서도 좀 더 직접적인 답글을 할려고 했습니다만)
관심이 많은 저라고 회의 없고 시간이 남아서 한 없이 글을 적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양해하시겠지요? ^^

@솔직히 이런 토론에 끼어들어서 말참견은 참견대로 하면서, 회의
 있고 바쁘다, 관심도 없다, 이런 말을 툭툭하는 것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 않더군요. 제 사아칸 이미지로 말하면... "그런 놈들이 꼭
 결함있는 것 좋아하면서 정작 남은 이해를 못해요." 이런 말이
 나오겠지요. ^^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하고, "안좋게 보인다면서 왜 너는
 그런 말 하는데?" 이렇게 삼천포로 가는 분은  없겠지요? 있을려나... -_-;

@하나 더 첨언을 하면, 적는데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제 글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은 듯해서, 교정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논리적 비약도 일부 보이지만 글을 올렸습니다. 틈틈이 고치
 겠지만, 일단 양해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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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즈 = 하나두 안사아칸 라임의 즐거운 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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