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neArt ] in KIDS 글 쓴 이(By): imnot (반이정) 날 짜 (Date): 2002년 4월 10일 수요일 오전 12시 38분 47초 제 목(Title): 광주 비엔날레 미술. 이제 멈춰버릴 것인가? - 2002 광주 비엔날레 이상 기온의 여파로, 그렇지 않아도 남쪽에 위치한 광주의 낮 기온은 초여름 같다. 그 가운데, 행렬에 떠밀려서 관람을 했다던 95년 첫 회 때와 비교하면, 4회째에 접어든 올해 광주 비엔날레는 필자가 평일 찾아가서 인지, 개막 초반임에도 차분하고 국제행사 치곤 한산한 분위기다. 하지만 광주비엔날레측은 개막 이후 5일 간 4만3455명의 관람객 집계를 들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세계 33개국 328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는 ‘멈-춤, P-A-U-S-E, -止-’이다. 이 주제는 이전 비엔날레들과의 차별성을 꾀하려는 기획의도를 드러낸다. 즉 “예술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예술 수용의 외연 확장...공적인 성격 강조(예술 감독 성완경)”하려는 취지가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서구 유명 작가들 일색이던 과거와는 달리, 국내를 포함, 제 3세계 비주류 작가들에게 많은 공간적 안배가 이뤄졌다. 또 ‘촉수엄금’이나 ‘접근금지’같은 낯익은 전시장의 경고문이 많이 자취를 감춘 느낌이다. 관객의 능동적 참여와 관객의 휴식 유도는 이번 기획전이 내세우는 주제이자 의도인 탓이다. ‘멈춤’이라는 주제와 관객참여라는 오랜 딜레마 다만 4개의 프로젝트로 구성된 비엔날레의 취지가 주제인‘멈춤’과 휴식이라는 기획의도의 독보성을 확보했다고 볼 순 없다는 점이다. 대형 전시장 특유의 만성화된 공간적 제약인 탓이기에 기획자를 나무랄 순 없지만, 찬찬히 관람하기엔 너무 방대한 출품작들, 전시장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 우왕좌왕하는 인파 속에 흐트러지는 동선의 흐름 등은 ‘멈춤’이나 ‘휴식’에서 소원하게 되는 필연적 한계 상황이다. 그리고 어째서 ‘멈춤’과 연관되는 건지 알쏭달쏭한 작품 해설, 대안 공간들의 실험작들이 전면 배치되었다지만, 이들 역시 최근 현대 미술 경향을 반영하는 큰 지류일 순 있을지언정, 이번 비엔날레만의 고유함을 부각시켜줄 장치가 되진 못할 것이다. 비엔날레가 내세우는 관객참여라는 미술의 공공성 확보 역시 독보적인 매력은 못 될 것 같다. 우선 현대미술에서 관객 참여는 어제 오늘의 화두가 아닌데다가, 널찍한 이벤트 행사장에 드문드문 놓여진 관객참여용 작품에 스스럼없이 투신(?)을 감행하는 관람객을 목격하기란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미술은 항시 조심스러운 대상이다. 오랜 학습이 그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비근한 예를 들자. 과연 어떤 통배짱 관객이 작품 취지(Nicolai 의 Big Sneaker라는 거대한 나이키 신발 작품은 관객들이 그 위에서 쉬라고 권한다.)에 따라, 관람 행렬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작품 위에 올라앉아 한가롭게‘휴식’을 취하겠는가? 대부분의 관객 참여 미술품의 한계란 이런 것이다. 한편, 80년 광주를 다룬 <프로젝트의 3>에 전시된 당시 정황을 기록물로 재구성한 작품들은, 이미 그 주제를 다룬 바 있는 철 지난 TV 르포들과 어떻게 차별되는가? 오히려 파괴력 면에선 TV가 미술보다 매체적으로 진보해있다. 그런 모든 문제들은 일반인의 ‘미술= 난해함,’‘미술 = 고급 문화’라는 빛바랜 인식적 틀을 깨주지 못하는 한, 그리고 작가와 기획자들이 미술계의 진부한 틀 안에 안주하는 한, ‘소통’과 ‘정체성’이라는 미술의 과제는 앞으로도 쳇바퀴를 돌 것 같다. 하지만 그 고색창연한 틀이야말로 미술이 안주하고 있는 근거이기에 악순환은 계속된다. 미술이 스스로의 죽음을 목도하고 인정할 때, 거듭 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번 비엔날레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미술과 미술행사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