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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eAr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2일 월요일 오전 12시 02분 37초
제 목(Title): 신동아/'누드'의 기원


 [2] 제목 : [누드화의 세계] '누드'의 기원

  알몸을  조형화하고 예술 양식으로 남기려 한 인류의 ‘알몸 예찬’
  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  개인의  성장기록을 보면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집착기를 크게 두 
  번 겪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위행위를 자
  연스럽게 했던 경험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다른 사회에서도 자위행위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으며, 자위행위
  는  나쁜 성적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세계
  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될 때, 자신과 세계, 즉 안팎의 관계를 
  정립할 수 없어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구체적인 사고체계에서 이루어질 
  때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우며 타자와 
  자신을  구별케 하는 힘이 된다. 즉 하나의 규준을 만들면서 자신과 
  바깥세계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은 자신의 몸이다. 당연히 자신의 몸은 너무 예쁘고 가장 이
  상적인  대상이며  유일하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위란  성적 흥분에 그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확인하
  는  적극적인 자기 개입이 된다. 알몸에 대한 예찬은 사회적인 공공
  성을  띠면서 시대정신과 이데올로기로 묶여 한 시대, 한 사회를 구
  명하는 사회적 이유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 문화사에 ‘알몸 예찬’은 그리스 예술로부터 기록으로 등장한
  다. 기원전 5세기경 등장하는 그리스의 예술형식에서 도기 장식화나 
  각종 조각·조상들을 보면 그리스인들이 눈부신 누드 표현에 둘러싸
  여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비슷한 시기에 다른 문화권에서는 그리스처럼 누드 
  표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지중해 연안에서만 누드 표
  현이  활발했으며 현대 국가 개념으로 구분하자면 유독 그리스와 이
  탈리아 지역에서만 누드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 
  
  한층  더 주목할 것은, 이 지역에서조차 한정된 시기에만 누드 표현
  이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다양하고 과감한 그리스 문화권의 누드 표
  현은 기독교가 공인되기 1세기 전에 미술의 주요 소재에서 밀려났으
  며 중세를 거치면서 철저하게 중단된 표현 소재였다. 르네상스 시기
  에  와서야 다시 등장하게 되는 누드 표현은, 그러니까 1000여년 동
  안  그리스 외의 지역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으며 서구 사회에서 철저
  하게 차단된, 금기시된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리스에서는 알몸에 대한 예찬이 가능했을까? 다시 한 번 우리
  는  그리스로  돌아가, 알몸에 대한 이미지 형성에 공헌했던 유일한 
  문화권이라 할 그리스의 정신에 대해 몇 가지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이유이면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로 그리스인들이 
  갖고  있던 수학에 대한 정열을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문화를 이
  해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그들이 측정 가능한 비례에 대한 
  신념을  어떻게 현실화했는지 알아야 한다. 이미 피타고라스 시대에 
  그리스  사상에는 기하학의 가시적인 형태가 주어졌다. 모든 예술은 
  신앙에 기반하고 있었으므로 조화로운 수의 개념에 대한 그리스인들
  의 시각적 표현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다른 청동
  기  문화권과 비교해 보아도 유독 그리스인들이 수학에 대한 열정과 
  현실적  결과들을 성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쉽게도 그러한 
  수학적 인식태도와 비례에 대한 표현방법에 대해 알려지거나 남겨진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 조각가들이 건축가에 비견될 만큼 정교
  하고  고도로 완성된 체계에 정통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
  다.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둔 로마제국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짧은 
  기록을  보면,  그리스의 수학적 비례 인식이 어떻게 인체의 구조를 
  규범화하고 누드 표현을 시도하게 되었는지의 단초를 잡게 된다. 그
  는  “인체는 비례의 모범형이다. 왜냐하면 팔이나 다리를 뻗음으로
  써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
  다”라고  쓰고 있다. 이 간단한 명제는 훗날 르네상스기 수많은 화
  가와 조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쨌든 인체가 모범적인 비례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인체의  표현을 통해 수학적 사고가 도달한 어떤 경지를 외형화하는 
  데 유효하다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도달한 
  높은 경지, 지적인 경험인 수학적 사고방식을 쉽게 밖으로 표출하는 
  방식으로  인체를  매우 중요한 소재로 삼았으며 옷을 입히기보다는 
  옷을  벗겨냄으로써  비례의 완벽성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
  다. 
  
  결국  감각과 질서를 연결하는 끈으로 예술품에 등장하는 인체가 자
  연스럽게 알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예술의  한  형식으로 누드의 발견이 이상주의의 실현 방식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리스인들이 육체를 자랑스러운 것이며 완벽하게 다듬
  어야  하는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드 표현의 등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나신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자신을 야만인과 구별하는 과정
  을  기록하면서  올림픽 경기에 나체로 참가해야 한다는 참가규칙을 
  명시하고  있다.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다는 것은 시민의 특권이었으
  며, 젊고 민첩한 육체를 가진 유일성의 확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젊
  고  민첩한 육체를 가진 청년은 곧 그리스의 지배계급인 시민이었고 
  노예사회를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에서 차별성을 강조하
  는  특권 계급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미개한 주변 민족들을 압
  박했던 정복자로서 위상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육체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신뢰는 그들의 철학과 관련시키면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육체에 대한 신뢰란 인간 전체성에 대한 모든 의식
  을  표현한다. 인간의 전체에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떼어내어 회피
  하거나  편의상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도덕적 인간이라면 
  자신의 육체로부터 이탈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듯한 우리의 교육제
  도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못하고 죄악시하는 경향을 
  가지면서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 문제들이 이에 대한 쉬운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듯 육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는가 하는 
  진지한  그리스인들의  의식은 관능성과 심미주의라는 함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누드 표현을 보여주는 예술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금기시되는  우리 사회의 몸에 대한 표현은 그리스의 누드 
  표현과 달리 극적인 대립 현상을 보인다. 결국 육체에 대한 표현 방
  식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누드 표현을 저속한 것으로, 그리고 음습한 
  곳에서만 생존하는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라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그들이 왜 유일하게 
  누드 표현을 했던 문화권을 형성했는지 쉽게 이해하게 만든다. 그들
  은  정신과  합일된 육체를 갈망했고 신뢰했기에 신화에서도 신들을 
  가시적인 인체를 가진 존재로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흔히 미인의 
  육체적 조건으로 일컫는 팔등신 인체 비례는 그리스인들이 조작해낸 
  이미지의  원형에  기인한다. 인간의 육체를 가진 신은 누드 표현이 
  자연스러웠던 그리스인들에게 사람과 다른 어떤 외형적 조건의 필요
  성을  부추기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비례
  를  설정하여 신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이때 얼굴 크기가 인
  체의  1/8이 되도록 고안한 이상형 비례 감각이 오늘날 모든 여성에
  게 미의 전형으로 통용되는 팔등신의 이미지다. 
  
  
  ◆ 새로운 눈뜸
  
  그리스인들의 육체에 대한 신뢰와 신들에 대한 신앙, 합리적인 비례
  에  대한  신념을 융합시키고 통합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결국 누드, 
  즉  알몸에 대한 예찬이었다. 그들이 취한 누드는 곧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합리적인 세계였고, 수학적 질서가 감각으로 
  외연하는  형태였다. 또한 누드로 등장하는 인체는 신계와 인간계가 
  동일하다는 신앙의 완성형태로 전이되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생명을 
  부여하는 미로서의 알몸 드러내기는 곧 죽음이라는 공포감을 완충하
  는 형식으로 옮겨간 것이다.
  
  현대의  누드  표현을 보면 그리스인들이 이상화했던 인체의 외형은 
  파괴되었다. 오히려 목욕탕에서 만나게 되는 축 늘어진 뚱보 아저씨
  의  배, 주름진 얼굴과 이상 비례로 보이는 팔과 다리의 비례 등 일
  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옷 벗음 그 자체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도발성은 그러나 그리 오래 된 누드 표현 방식이 아니다. 근대 
  이후  서구미술에서 조금씩 변화 조짐을 보여온 모던 프로젝트와 함
  께 그 모던 프로젝트가 끝나버린 공동화 현상 사이에 불거져나온 인
  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결국 누드의 이상화를 파괴하였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그리스 고전에 준한 아카데믹한 누드도 많다. 또한 그 
  그리스의  정신을 망각한 채 누드의 외설적 전형을 추구하는 수많은 
  ‘누드’가  시각적으로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
  서 누드에 대한 새로운 눈뜸은 언제나 당대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면서 표현의 방식과 한계를 맞추어왔
  다. 
  
  그리스인들에게  누드 표현은 건축물처럼 이상적인 도식과 기능적인 
  필요성  간의  균형을 잃지 않고 인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누드 예술가들은 인체 각 부분의 구성 요소들을 완고한 하나의 규칙 
  안에서 조형화했다. 특히 여체에 대한 이 규칙의 엄격성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미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그 비례의 규칙 중 하나를 
  들자면,  유방 사이 거리와 유방 아랫부분에서 배꼽까지의 거리, 그
  리고  배꼽에서 두 다리가 갈라지는 음부까지의 거리가 동일한 단위
  로  수치화 되어 있었다. 이런 구성은 1세기까지 철저하게 지켜져왔
  으며 후세의 예술가들이 그리스 조각을 모방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
  기는 기술적 부분이었다. 그러나 15세기의 전형적인 고딕미술에서는 
  허리가  길고 달걀 모양의 작은 가슴과 고전적 구성에 비해 두 배나 
  길게  아래쪽에 위치한 배꼽을 보게 된다. 이러한 누드 양식의 변화
  는  시대의 이상에 합당하는 인체, 즉 당시 사람들이 보고 싶어했던 
  그런 형상의 인체를 창안해내는 것이다.
  
  
  ◆ 남성누드에서 여성누드로
  
  누드화는  르네상스기에 그리스 이후 최고의 부흥기를 맞는다. 새로
  운 이념으로 무장한 르네상스기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훈련법을 통해 
  중세기까지  직인으로 만족하던 지위를 지식인의 반열에 들여놓기를 
  갈망하였다.  그 새로운 훈련법이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그리기
  와 함께 누드 데생과 고대 조상들의 데생, 원근법의 습득, 해부학에 
  대한 지식 습득이었다. 
  
  특히  해부학 지식의 습득과 원근법의 습득은 가위 혁명적인 훈련법
  이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를 지식인으로 대접케 하는 혁신적인 신지
  식이었다. 따라서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는 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
  으로 격상되었으며 이에 맞추어 고전을 새롭게 이해하고 신계로부터 
  인간계에  복귀하려는 문예사조에 부응하여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정
  교한 상징체계들이 누드에 끼어들게 된다. 귀족과 부유한 계층은 이 
  상징체계를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교회
  가  그랬듯이 자신들의 특권을 고귀한 천부성으로 홍보하는 데 적합
  한 아이템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르네상스기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누드화는 고대 그리스의 
  신으로  분장한(위장한) 당대의 현안들을 곧잘 표현하게 되었다. 또
  한 알몸의 여성상이란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한 주제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아카데믹한 이념으로 누드의 외설성을 약화시
  키려 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 시기의 누드화는 남성누드에서 여성 
  누드의  우위를  확보해 나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르네상스 초기 
  해부학의  발달로 인해 여전히 남성 누드가 대종을 이루었지만 차츰 
  남성의  지배이데올로기가 강해지면서 동시에 약혼녀의 나신을 그려 
  거실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취향이 확산됨에 따라 여성의 누드 표현
  이 강화되어간다. 더구나 고전적 이상에 대한 경의로 남성을 채택하
  던  누드표현이 점차 고전적 이상과 무관한 현세적 쾌락의 대상으로 
  선호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나신을 절대 소재로 삼게 되었던 것이
  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해부학에 대한 관심의 쇠퇴가 깊게 관련돼 있
  다.  여성 누드가 최종적으로 절대 지위를 확립하는 데는 여성 신체 
  특유의 관능성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증폭된 관
  심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여성의 육체가 추상적인 근거에 의해 조형적으로 더 가치
  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여
  성의 나신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는 점은, 여성성을 기하학적 디자
  인의 원형적 요소로 사용하는 성적 디자인이 상품화되어갔다는 점에
  서  설득력이 있을 뿐이다. 누드의 개념은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개
  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모되기 전까지 줄곧 성의 상품화에 맞
  추어져  400여 년간 서구미술에서 소모되고 소비되었다는 사실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 발가벗겨진 인체와 사회의 솔직성
  
  한국에  누드화가 소개된 것은 근대 미술기 일본에서 공부한 화가들
  을  통해서다. 그들이 수업기에 일본의 미술대학에서 제작한 아카데
  믹한 누드작업들이 그 시작이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김관호의 작
  품이  일본미술대학 졸업작품전에서 수상함으로써 우리 신문에 실리
  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누드화가 소개되었는 점이다. 물론 그 당시 사
  회적  논란거리를 제공했던 그 그림의 국내 전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카데믹한 교육과정 안에서만 작동하던 우리 누드화의 80여년 전통
  은  결국 누드화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추지 못하고 관상용 여성 신
  체만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작가들도 모델의 완벽한 조형을 화면에서 구사하기보다 이미 세팅으
  로  완성하고 단순하게 전사하는 기능인 역할만을 하고 있으며 상징
  체계는 물론 은유적 표현조차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하여 모델링에만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진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는데 다
  행인 것은 젊은 작가군이 보여주는 새로운 해석의 누드 표현들이 90
  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드 표현은 곧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조건을 시대
  정신과 결부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인간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 그러므로 누드 표현의 외설성은 때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포한 도전일 수 있으며 위장된 진실을 파헤치는 예리한 무기
  일 수 있다. 
  
  더욱이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사회 전분야에 걸쳐 새롭게 불거
  지고  있는  최근 문화 전반의 경향을 볼 때, 누드 표현의 소재로서 
  여성성은 전반적으로 반성적 사고에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대개  알몸에 대한 거부감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데, 사실 
  우리가  자신의  신체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다거나, 옷을 벗었다는 
  이유  하나로  ‘음란한 것’이라며 신체를 공격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혐오만 키울 것이며 누드 표현의 모든 결과는 늘 
  그늘진  곳에서  포르노그라피화해 상품으로만 진열될 것이다. 누드 
  표현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호기심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그만큼 그 
  사회가 몸에 대해, 신체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또한 그
  런 사회에서는 누드로 매몰되어 있는 육체의 억압이 존재할 뿐이다. 
  
  최근  미술에서  다뤄지는 누드는 오히려 알몸으로 불리기를 바라며 
  누드로 포장되어 있던 비현실적 이상을 몸에서 박리시키려 한다. 스
  스럼  없이  자신의 알몸을 사진으로 찍거나, 몸을 해체시켜 추악한 
  육체의 현실을 보여주는 경향이 농후하다. 또한 누드로 위장했던 인
  체를  현실로  끌어내려 비정형의 불완전한 모습으로 표현한다든지, 
  성기의  과감한 부각을 통해 몸과 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하
  고 있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보면 역시 현대 시각예술 전반에서 다루는 혁신
  적인  누드 표현조차 시대가 요구하는 문화의 큰 흐름 안에 놓여 있
  는 것이다. 결국 문화 보편주의가 해체되고 상대주의가 각광받고 있
  으며,  집단의 거대 담론이 해체되고 개체의 역할과 담론 해체 이후
  의  발언들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체는 
  새로운 양식을 찾아내 안주하게 될 것이다. 
  


 [3] 제목 : [누드화의 세계] 육체의 신비, 누드화의 세계

  누드 크로키전을 공개적으로 진행하던 한 행사장에서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화지와 연필을 주었다. 왜? 멀뚱거리며 
  누드 모델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선이 비문화적이라고 판단했기 때
  문이다.  한편으로는 입장료를 받고 발가벗은 알몸을 보여준다는 일 
  자체를  외설스러운 공연이라고 행사 주최자가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관람객들이 모델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면 그 상황
  은  모델에게도 민망하고 예술혼을 불태우려는 화가들에게도 치명적
  인 외설성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옷을 벗고 있는 것을 보면 괜스레 얼굴을 붉히
  게 된다. 반대로 누구라도 뭇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함부로 옷을 벗
  어 자신의 알몸을 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혹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 당사자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까지 당혹해하거나 창피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완상용 알몸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알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옷을 벗어버리는 단순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단순한 행동은 상당히 개인적이며 폐쇄적인 공간에서
  만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 알몸을 우리가 ‘누드’
  라고  부를 때 이 단어를 통해 어떤 교양을 느끼고 사회적으로 용인
  된,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벌거벗은 신체를 연상하게 된
  다.  이 ‘누드’라는 단어가 투영하는 이미지는 분명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옷을 벗어던지고 드러난 알몸이 아니라 균형 
  잡히고  다듬어진 ‘어떤 신체’를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사
  실이 아닐지라도 신체의 이미지는 늘 ‘누드’라는 말을 통해 한 사
  회에서 정형화된 미의 표상으로 차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드로 표현되는 ‘어떤 신체’는 시각예술가의 재능을 통
  해  재구성되는  육체를 일컫는다. 재구성되는 육체란 곧 한 사회와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누드화는 온통 당대의 이데올로기로 범벅되어 있으며 상징과 
  은유로 지배이념을 교묘히 교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매우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누드(Nude)’는 18세기 서양미
  술에 등장하는 신조어로 서구 문화의 보편주의로부터 파생된 개념이
  다.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을 의미하는 누드라는 말은 
  그 기원에 있어 모든 민족이나 계층에 공통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서구 사회가 신대륙 발견이 가져온 식민지 경영을 통해 마주치게 된 
  이질적인 문화현상 중 옷을 벗고 사는 원주민은 가장 대표적인 이질
  문화의 단편으로 작용한다. 이 교양 없는 원주민으로부터 이미 나신
  을  묘사하는 그림과 조각으로 한 방 가득 실내를 꾸미고 있던 자신
  들을 구별하고 평가해야 하는 고된 의무가 당시 서구 미술계에 하나
  의 과제로 등장한다.
  
  사람의 알몸을 예술의 중심에 두고 있던 서구 사회에서 정당하게 제
  작되고 평가받는 고상한 자신들의 문화와 예술작품들은 당연히 무방
  비 상태로 노출되는 ‘옷 벗은 몸’이 아니라 이상화된 육체로 억지
  스럽게 각색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 오페라와 ‘누드’
  
  “참가번호 OO번, 미스 서울은 36-24-36, 키는 170
  
  cm, 체중은 45kg입니다.” 와와 하는 함성과 박수소리, 당당하게 행
  진하는  젊은 여성의 쭉 빠진 미끈한 다리. 미인대회의 전형적인 이 
  장면은 인체를 형식적으로 완벽한 어떤 조건에 맞추어보려는 각고의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형식적 완성도가 결
  국  미의  전형이라는 내용으로 전이되며 형식과 내용의 합일이라는 
  꽤나 어려운 미학적 조건으로 완결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화가나 조각가들조차 누드를 간혹 자신의 작업세계에서 불멸의 주제
  로  오해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곧잘 누드에 대해 이야기하
  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성의 육체에서 발견되는 
  인체비례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좀더 노골적인 표현으로 여성의 
  알몸에서  드러나는 곡선이야말로 자연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상적인 
  미의  형태라고 한다. 그래서 미인선발 대회를 보면 가장 완벽한 곡
  선미를  지근거리에서 찾아내려고 참가하는 모든 여성을 발가벗기는 
  지경에까지 몰고 간다. 그리곤 인체의 굴곡을 정확한 치수로 환산하
  여  가슴둘레-허리-엉덩이의 사이즈를 크게 부르고 자막처리까지 하
  는  친절을  보여준다. 그래서 찾아낸 미의 여신은 이상적인 여성의 
  몸에서 완전성으로 포장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형식을 좇으면서 지속적으로 그 내용의 함축성을 강조하는, 이런 여
  성의  몸에  대한 예찬을 보고 있으면 오페라 또는 서구 고전음악에 
  대한  경찬을 떠올리게 된다. 오페라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창안된 
  극  양식이다.  누드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창안된 시각예술의 
  한 양식이다. 
  
  오페라는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되는 극중 등장인물들이 대사와 함께 
  대사처리  대신에 노래를 하는 게 특징인 공연 양식이다. 당연히 그
  와  다른 양식의 공연극과 구별되며 오페라에서 사용되는 노래 또한 
  여타의 노래 양식이나 가사내용과 구별된다. 그 양식의 차별성은 오
  페라답게  만들 뿐이지 그 이상의 오페라다운 내용으로 전이되지 않
  는다. 
  
  누드는  발가벗은 몸을 소재로 차용하는 시각예술의 한 양식일 뿐이
  며 코스튬(옷을 입고 있는 인물화를 지칭함)과 대칭적인 것이다. 당
  연히  알몸을 표현한다는 것은 시각예술 전분야에 걸쳐 불멸의 주제
  가  아닌,  오래 된 예술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신체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만날 때만 누드라는 형식을 통해 왜곡
  되거나 과장되는 것일 뿐 여체의 굴곡과 인체의 비례가 회화가 추구
  하는 절대미와 연관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본 것을 동일시하고 그 결과물인 창작물
  을  예술품이라 지칭한다. 이것은 미학 연구자들이 말하는 감정이입
  의  과정인데 주로 자연물로부터지만 누구나 이런 행복한 경험을 갖
  고  있다.  가령 수려한 풍경에 대한 기쁜 추억과 함께 그와 유사한 
  느낌이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보고 매료되는 개인적 체험을 쉽게 기
  억해낼  것이다. 그러나 벌거벗은 인체를 보면서 감정이입의 과정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창조 활동을 부추기는 정신 상태에서 인
  체는 자연과 사뭇 다른 현상으로 작용한다. 
  
  알몸을  보면서  우리는 환멸과 실망, 원초적인 오르가슴과 흥분 등 
  감정 상태가 복잡해지며 모방의 충동보다 완벽하게 대상을 과장하려
  는  표현 충동을 갖게 된다. 우리는 육체의 영역에서 늘 보잘것없는 
  대상의  보완심리를  느끼며, 이상적인 형태를 떠올리는 보상심리를 
  갖게 된다. 오랜 습관에 따라 인체의 부위별 크기와 형태에 대한 비
  확정적 인식에 매달려 현상을 스스로 왜곡시키려 든다. 가슴이 풍만
  한  여성을 선호하는 요즘의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빈약한 가슴
  을 가진 여성 모델을 보면서 봉긋한 가슴을 표현하려 하며, 오랜 관
  습  때문에 복숭아 형태의 젖가슴을 이상적인 형태로 인식하여 무의
  식적 원형에 맞추어 표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따르다 보면 누드란 곧 어떤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선
  택된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어떤 태도나 심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알몸을 재구성하는 양식임이 명확하게 드러난
  다. 
  
  이런 인체에 대한 태도는 아카데믹한 미술교육과정에도 잘 드러나고 
  사진작업이나 영상 관련 이미지 제작 과정에서 한결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마음에 드는 모델이 있다는 가정하에, 그 모델이 상대적으로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미의 
  개념에  일치되도록  임의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든지 조명을 알맞게 
  조절하는  물리적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그 모델의 인체를 수정하려 
  든다. 
  
  그리고  우리는 익숙해진 인체 표현의 이상형을 머리에 떠올리며 작
  은 결함들, 주름이라든지 처진 살 등을 피해가려 한다. 당연히 유기
  체로서 인체는 사라지고 디자인되는 하나의 전형이 남는 것이다. 완
  벽해야  한다는 규준이 덜 엄격한 나무나 돌, 동물을 묘사한 그림이
  나  사진과 비교해 본다면 발가벗겨진 인체의 표현인 누드는 재현이 
  아니라 ‘어떻게 그려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사회적 견해를 표현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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