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neArt ] in KIDS 글 쓴 이(By): YMH (마린보이) 날 짜 (Date): 1999년 2월 5일 금요일 오전 06시 53분 52초 제 목(Title): 우리것을 알기위한 노력2 우리가 미술시간에도 어떤 서양미술 전시를 봐도 거기에는 종교적 성향이 많이 보여진다. 유명한 박물관에 걸려있다는 그림들을 책으로 봐도 거기에는 크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듯한 그림이나 벽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그 당시에 그러한 그림만 있었다고 믿는것은 편협한 사고라고 간과하지 안을수 없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시점으로 종교에 의한 미술의 발달은 현재까지도 그맥을 찾을수가 있다. 그 발달이 기술의 향상을 가져왔고 많은 예술인들에게도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현대에 미술에서 얘기하는 "장르"라는 개념도 그때 그 축이 형성된다. 종교가 갖는 사회성이란 매우 강한 여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단지 교회를 혹은 다른 종교의 의식에 참여하는게 개인의 선택에 의한 행위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성향에 연결되어질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도교의 침투는 (편의상 이렇게 표현하겠다) 잠정적으론 그 사상에다한 사회구조의 구축을 요구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일제의 침입을 받아 나르대로의 자연적인 근대화의 길이 끊기긴 했어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기독교의 전파력은 우리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침입니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변했을것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 우리가 근대 국가적 형태 즉 서구 사회의 시스템을 받아드린것도 1세기가 되지 안는다. 미술도 그러하다. 우리가 60년대 이후부터 산업의 기적을 이룩한것 처럼 미술또한 빠른 시간내에 우리내 교육과정에 스며들었다. 서양미술, 서양학과 등등 서양이란 말이 붙은 학과가 생겨났고 그 방식 또한 그내들이 사용한 교육과정임을 부정할수는 없다. - 요즘들어 장르간의 벽이 파괴되고 있다지만 아직까진 한 작가가 어느 장소 혹은 장르에서 출발한 것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럿듯 우리의 서양적인 방식에서 비롯된 한국 현대미술도 우리의 국가적 위치같이 제 3세계에 머물고 있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또 그것은 경제력 혹은 국력과도 관계가 있다. 현대 미술의 리더라고 불릴수 있느 작가들은 대부분 미국 사람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힘의 이동에서 비롯된 문화의 흐름이다. 그리고 이런 새 조류에 갖는 우리 미술계의 관심은 절대적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생겨났을때도 그것에 대한 논란보다 그것에 대한 설명서를 구하기가 급급했던 시기가 있었다. 팝아트가 그것으로써 불리울때도 그러한 현상들이 미술학교내에서 많았음을 내 학창시적을 돌이켜보면 쉽게 기억할수가 있다. 하지만 미술학교의 모든 학과는 한결같이 "우리것"을 외친다.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럿듯 미술계에서는 장르의 고유성에 고수와 장르간의 벽"의 파괴하는 이중성으로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이 또한 제 3세계 국가가 겪는 초기적 현상이다. 여하간 우리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각을 찾는것은 의외로 간단한 작업일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시각을 취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 유명한 르브르 박물관의 작품들을 서양미술이라고 얘기할수 있는것 처럼 서양인들도 우리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구닥다리들이 동양의 그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자랑하는 고려청자도 세계 경매장에서는 가장 비싼값에 팔리고 있고 일본 사람들도 한국 도자기 하면 재떨이라도 좋다며 뒤로 넘어가곤 하다. 흔히 얘기하는 우리의 "현대 미술"이라하면 한마디로 서양의 유행을 따라 휸내낸것이라고 볼수가 있다. 가끔 몇몇 한국 예술가 들이 다른 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하지만 그건 극소수에다 사람의 재능 문제니 거론할 가치는 없다. 그들은 그쪽 사회에서의 일원으로 성장하여 그내들에게 인정을 받은것이지 우리것을 세계에 떨친다는 사명감있는 작가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우리것은 우리땅 안에서만 존재한다. 다만 약간의 한국적인 모티브는 외국인들에게 색다른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것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그내들 방식에서늬 하나의 우리것의 접합을 의미하지 우리가 객관적으로 자본주의의 예술안에서 똑같이 평가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흉내낸 그내들의 것들은 그들에게 부족해 보일 따름이다. 우린 우리 스스로 세련되어지고 있고 생각한다고 하지만은 (또 우리끼린 그런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폼잡아도 모자라는 것은 모자란 것이다. 예를들어 TV 프로그램을 보면 대부분에 프로가 일본것들 혹은 미국것들에서 표절해오기가 바쁘다. 사람만 바뀐다고 한국인이 만든 프로라고 얘기할수가 있나? 또 그것을 본 외국인 (그 프로의 오리지날을 본적있는) 이 그걸 우리것으로 인정해주나.. 절대로 아니다.. 내용이 약간 색다를수는 있지만 그건 카피되어 온 것일 뿐이다. 이렇게 외향적인 성향을 봐도 서양인들( 그냥 통틀어서) 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반에서 계속 진행을 시켜온 상태이고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수입해 그대로 배우다가 다시 우리것을 찾자고 말만 하며 지내고 있다. 어쩜 우리내 사회구조와 이렇게도 똑같을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술계의 현실적 혼란은 서양의 그것이 들어왔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이 초기적 현상이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우리내 관념과 현대사회의 괴리감은 우리 생활에서도 쉽게 찾을수가 있지 안은가? 하물며 예술이야.... 내가 마치 세상의 조류와 싸워나가려는 듯 하게 애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싸운다고도 혹은 피한다고도 얘기할수가 없는 상태이다. 나도한 이 세상에 포함된 하나의 피조물이고 내가 극단적으로 "옛날로 돌아가자!"라고 한들 세상은 나완 상관없이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나또한 우리것 이라는 명제아래 객관성을 잃어버린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우리것을 알아나아가는 내 생활속에서의 작업은 나에게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한 상징적인 행위가 다른 한편으론 우리것을 알기위한 사고적인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교인이 예수를 닮고 싶어하듯 나도 우리내 인간으로 가까워지고 싶을 따름이다. 매우 머나먼 길일지 모르고 또 현실에서 그것을 keep doing 하기란 쉽지 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개동철학과는 달리 현실과의 규합을 때론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수는 없지만 이것은 언,사,행 일치가 현대 사회에서는 힘들다는 것을 시사한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이 짓을 평생토록 하고 싶다는 것이다. connecting이 불안정해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니가 다음에 계속..... 인생이 한편의 영화라면 난 여지껏 몇장의 필름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대본은 어떤가? 과연 언제쯤 편집이 가능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