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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virOnment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31일 토요일 오전 01시 54분 09초
제 목(Title): 뉴스+/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사람과 삶/'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 교수 
생명문화 이끄는 '녹색인' 

 
     
 
생태적 인문잡지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교수를 만나러 대구행 기차를 탔다. 
이즈음 그가 비평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삼인), 생태에세이를 모은 '간디의 
물레'(녹색평론사) 두 권의 책을 한꺼번에 펴낸 것을 핑계로, 자꾸만 고사하는 
그에게서 우격다짐하듯 인터뷰 허락을 받아낸 참이었다. 간밤 열대야로 잠을 설쳐 
머리가 무거웠지만, 차창 밖 풍경이 무료해 그의 새로나온 책을 펼쳐들었다. 

'오늘의 이 가공할 위기를 진지하게 돌아볼 때, 지금 도처에서 불거지고 있는 환경 
재난은 산업문화의 퇴폐성과 직결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 우리 자신의 
개개인의 인간성이 극도로 피폐해져 버린 것과 완전히 내면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환경파괴와 문화와 인간성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문제임을 인식할 때, 철저히 변혁되어야 하는 것은, 사회의 
외면적인 구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의 구조, 즉 감수성과 욕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중에서). 

일견 차분한 목소리지만, 상당히 격렬하고 급진적이다. 작금의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저 재활용기술이나 환경산업 발전 같은 미봉책이 아닌 
산업사회 자체를 바꿔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소비문화와 욕망을 포기하는 
'정신적 개종'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일관된 논지다. 

우리나라 환경생태운동 동남아보다 못해 

동대구역에서 차로 10분 남짓 걸리는 수성구 범어동. 허름한 상가건물 2층에 
'녹색평론' 사무실이 있다. 91년말 창간한 이래 내내 같은 자리. 편집실과 책창고, 
맨 안쪽에는 책과 잡지가 빼곡이 들어찬 김종철교수의 방이 있다.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냉방장치라곤 활짝 연 창문과 선풍기 한 대가 고작이다. 마침 
여름방학 기간이기도 하지만, 잡지를 창간한 이후 그는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이곳에서 지내곤 했다. '녹색평론'을 창간하고부터 해외 논문이나 책을 번역하고 
외부에 원고를 청탁해 싣는 편집작업의 대부분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측이나 동료교수, 학생들에겐 "그저 미안할 뿐"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나온 책에 대해서도 그는 자꾸 손사레를 치며 
물러선다. "지금도 안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첫 평론집 '시와 
역사적 상상력'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지 무려 21년만이니 조금은 기뻐해도 
좋으련만, 그는 심지어 책 '간디의 물레' 서문에 '아까운 나무들을 대규모로 
희생시키는 출판행위'를 언급하며 회의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래도 재생지 사용을 고수하며 8년간 발간해온 격월간지 '녹색평론'으로 이야기를 
옮기자 그의 목소리에 조금쯤 흐뭇함이 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8000부 발행에 
정기구독자가 5000명. 농민과 문학예술인과 대학생과 주부가 함께 보고 목사와 
신부와 스님이 같이 참여하는, 국내 유일의 생태적 인문잡지다. 

"이런 매체가 우리나라에 필요하다는 생각은 10년전부터 했지요. 하지만 설마 내가 
하게 되리라는 건 예상치 못했습니다. 돈과 인적 자원이 서울에 몰려 있으니, 
언젠가는 거기서 터져나오리라 여겼던 거죠. 그런데 서울 몇군데 출판사에 
알아보면서 편집은 당분간 내가 도와주마고까지 제의했는데도 실행에 옮기는 곳이 
없더군요. 91년 당시 개인적으로는 여름에 모친이 돌아가셔서 집중할 일이 
필요했고, 사회적으로는 대구 페놀사건으로 인해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분위기에도 편승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녹색평론'의 창간은 그 자신과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 속에서 한 돌파구의 
실마리를 제공했지만, 대신 문학비평가로서의 활동은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갑상선 종양수술까지 받은 약체의 몸도 더 이상의 작업을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넌 커서 뭐할 거냐'고 물으시기에 '평생 학생하고 
싶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유독 선명합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약골이었고, 학교 
가기 싫어 지각과 조퇴를 밥먹듯 하던 주제에 말입니다. 그저 한없이 책보고 
글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가 봅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소극적이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전국 대학의 
영문학과 교수 가운데 외국인이랑 붙여놓으면 말 한마디 못할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자아비판(?)까지 덧붙인다. 그런 탓에 자신이 8년전 잡지란 걸 시작하고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랍고 우스울 뿐이다. 

"지금이 주식·골프 얘기나 할 때입니까" 

"딴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한 게 아니라 내가 살려고, 뭔가 속이 꽉 막혀 뭐라도 
해야겠다는 강박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덕분에 내 세계도 
달라졌지요. 이틀전 원주와 홍성 언저리를 다녀왔습니다. 토지문화관을 환경의 
메카로 만들려는 박경리선생이 만나길 청해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우리 잡지에 
자주 소개한 풀무학교도 들렀죠. 농사지으러 내려간 '녹색평론' 초대 편집장도 
이참에 보고 와서 숙제좀 한 기분이었습니다. 장길섭이란 친구인데, 
'녹색평론'에서 주장하는 대로 홍성에서 완전 유기농법으로 6000평쯤 농사를 
지어요. 3년 됐는데, 소주 한잔 못먹던 사람이 장골에 완전 농사꾼이 다 됐더군요. 
세상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 같고, 나도 시골 근처로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말이 혹여 잡지에서 손을 뗀다는 뜻인가 싶다. "처음 창간할 땐 길어봤자 2, 
3년만 하고 물려주거나 다른 잡지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요. 몇몇 환경단체들이 
잡지를 냈긴 한데, 내가 바라던 것은 아니더군요. '녹색평론'도 여기저기 물어가며 
만들고는 있지만 부족함을 느껴 그동안 몇번 편집위원을 구성하려 노력도 했고…. 
하지만 잡지의 방향이 희미해질 우려도 있고, 역시 한 사람이 끌고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모든 의견에 열린 잡지도 아니고, 나대로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는 얼마전 '대세'와 이견을 빚었던 '수돗물 불소화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강경한 입장이다. "막연하고 추상적 문제였다면 반향이 작았겠지만, 구체적 
사안이고 이해집단이 있다보니 소리가 커지나 봅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 논쟁중이고, 나는 우리나라에선 수돗물 불소화가 필요없다고 확신합니다. 
나와 반대입장인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쪽에선 '비전문가의 
소견'으로 치부하지만, 민족마다 다른 식생활이나 광천수와 수돗물의 차이는 왜 
고려하지 않는지, 유럽에서는 수돗물 불소화를 안하는 이유는 생각해 봤는지,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국내 기초자료 조사조차 왜 안하고 있는지 등을 반문하고 
싶군요." 

김교수는 자신이 '격렬하고 급진적이다'는 점을 수긍한다. 이는 생태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며, 우리 자신의 생존과 후손의 미래를 위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환경생태운동이 최소한 동남아 수준까지는 
가야 할 게 아닌가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그가 천착하고 '녹색평론'에 담아나갈 주제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하다. 
외국에서는 이미 논의가 진전됐지만 우리나라에선 생소하기만 한 생태경제학을 
소개하고, 환경윤리를 우리 전통사상의 맥락 속에서 찾아보는 일, 과학 기술 
의료문제에서 이른바 '전문가'들과의 싸움, 금년 안에 생명공학관계 논문집을 내고 
세계화와 무역자유화 문제에 대해 종합적 검토작업을 해보는 일도 숙제다. 바로 
이웃나라인 중국의 행보에도 피상적 차원을 떠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보면 온통 정치싸움과 주식시장, 펀드니, 골프니 하는 얘기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데 한눈 팔고 있을 때가 아닌데요." 

피로한 얼굴의 김종철교수는 기차시간에 맞춰 나오는 기자를 배웅하며 정말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김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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