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ducationLearning ] in KIDS 글 쓴 이(By): inst (타마라) 날 짜 (Date): 1998년01월18일(일) 10시07분02초 ROK 제 목(Title): 베끼기...히히히.. 교육부터 개혁하자 황병하/ 문학평론가·광주여대 교수 현대의 교육은 ‘신데렐라’와 같다는 교육학자 S.J. 에드윈의 지적은 우리의 교육과 관련하여 경청할 바가 많다. 그는 현대사회가 계모격인 지식습득과 실용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개인들의 존재적 가능성 개발이라는 교육의 본령을 천덕꾸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근대화니 산업화니 하는 논리에 입각해 사회 전반을 끌어왔던 우리나라야말로 그러한 폐해를 자초한 가장 대표적인 나라들 중의 하나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각하고 있는 바다. 초·중·고 수업시간 오후2시까지로 우리는 지금 50년 만의 정권교체와 IMF 구제금융의 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 전반을 구조조정하지 않을 수 없는 기회적 위난에 봉착해 있다. 작게는 개개인의 자질구레한 삶의 양식으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전반적 체제까지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혁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 된 이러한 좌초의 시대에 이제 우리는 뼈를 깎는 아픔으로 보다 정밀하고 철저하게 지난 세대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마치 미래 같은 것은 없다는 듯 정신없이 치달아온 우리 사회. 물론 급한 불부터 꺼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 및 행정체제의 살신성인적 개혁을 먼저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어 그것으로부터 파생될 수밖에 없는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구조의 조정. 그러나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위기가 언급한 대로 미래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지식 습득과 실용성 위주의 교육에 일관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각 개인들이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열게끔 도와주는 이른바 교육의 본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육이 단지 실용적 지식의 전달이 아닌, 미결정된 자기존재를 ‘창조적’으로 펼쳐나가게끔 이끌어주는 적극적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과 관련하여 창조적이라 함은 자율적 독창성의 함양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현장은 어떠한가. 비록 올해 대학 수능시험이 예년에 비해 쉽게 출제되고 그 기조가 계속 유지된다고 하지만 그 정도의 조치로는 절대 미흡하다. 만일 앞서 말한 자율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인간의 개발이라는 진정한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번의 위기적 기회를 이용해 교육에 대한 일대 수술을 단행해야 한다. 먼저 우리 교육을 자발적 독창성의 수준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초·중· 고의 수업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외국의 많은 경우처럼 월-금 오후2시까지 정도가 가장 적당할 것이다. 이어 국어, 한국사, 제1외국어, 컴퓨터 외의 모든 과목은 기초과목을 제외하고 선택으로 돌려야 한다. 이렇게 하자고 하면 당장에 학생들의 지적 수준 및 경쟁력 하락을 지적하고 나올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3이나 고1 정도 수준의 수학밖에 배우지 않고 대학에 진학한 미국의 수학과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수학과 학생들 수준보다 전반적으로 높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예다. 이렇게 시간과 선택의 기회를 폭넓게 열어주어야만 모두 엇비슷하게 규격된 로봇들이 아닌,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열어나가는 경쟁력 있는 참 인간들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사회교육을 강화하자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패, 지역감정, 인맥, 학맥 중심의 사회구조와 같은 다양한 사회병리현상들은 이제까지 우리의 학교들이 자율성과 자기책무성의 교육을 방기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자율성과 자기책무성을 고양시키자면 초·중·고에서 인문사회과학 관련 과목들의 교육을 보다 강화시켜야 한다. 불건전하고 부정한 사회일수록 법과 규제가 양산되어 있는 법이고, 규제는 항상 자율성보다 그 효율이 떨어진다. 효능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에서도 우리는, 벌칙 때문이 아니라 자율성에 의해 수많은 병폐들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분야는 현상의 분석보다는 새로운 현실의 창조에 보다 주안점을 두는 인문사회과학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의 본질적 목표는 한 사회를 통제와 관리가 아닌 자율성과 자기책무성의 기조 위에서 건강하면서도 동시에 능률적으로 만드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천덕꾸러기 신데렐라가 되어버린 우리의 교육에게 왕자를 찾아주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자식들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마음껏 사유하고 꿈꾸도록 만들어주자. 그렇게 그들이 창조력과 의무감을 동시에 배우고 익혀서 아귀처럼 추악한 모습을 가진 우리의 새로운 복제품이 되지 않도록 사려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자. 한겨레21 1998년 01월 22일 제19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