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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holic ] in KIDS
글 쓴 이(By): Konzert (#$%&~_^\{})
날 짜 (Date): 1999년 10월  8일 금요일 오후 04시 33분 04초
제 목(Title): 십자가 지고‘고난의 가시밭길’25년


시사저널        1999/10/06 00:00


[종교] 십자가 지고‘고난의 가시밭길’25년


  바로 그 날 명동성당에서는 천주교 신부·신
도 1천2백여 명이 민주 회복과 구속자  석방
을 요구하는 기도회를 연 뒤 거리를  행진했
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천주교의 ‘순교자 
축일’이었다. 

  거리 행진은 무척이나 긴장된  것이었다. 그
해  1월 정부는 이미 긴급조치 1·2호를 선
포해 시민의 손발을 묶고, 언론에 재갈을 물
렸다. 그것도 모자라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
련 사건을 빌미로 그 해 4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해 놓았다. 신부와 신도  들은 ‘유신헌
법 철폐’ ‘중앙정보부 해체’ ‘민주 인사 
석방’을 외쳤다. 


 계속되는 고행길…현재 무기한 단식 농성중


  민주화·인권·통일 운동의  한  구심점이던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사제단)
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로부터 25년 뒤
인 99년 9월7일 사제단 소속 신부 40여 명은 
각 교구에서 ‘국가보안법폐지’를  요구하
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단식 농성
은 개신교·불교 등 종교단체와  경실련·참
여연대·민변을 비롯한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벌이는 ‘국보법 철폐 운동’의 하나였지만, 
무기한 단식이라는 극한 투쟁 방법을 선택한 
쪽은 오직사제단뿐이었다. 사제단의 ‘고난
의 가시밭길’은 현재까지도 줄기차게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에게 사제단의  피 어린  민주화
역정은, 70∼80년대에 일어난  몇몇 역사적인 
민주화 관련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 땅에 민
주화운동의 불길을 본격적으로 당긴  ‘민주 
회복 국민 선언 대회’(74년 11월27일 결성), 
정치인과 재야 인사가  한데 뭉쳐  민주화를 
외쳤던 ‘3·1  민주 구국선언’(76년  3월1
일) 그리고 80년대 이후 벌어진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82년)과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
(87년), 임수경양·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89
년)….

  이 역사적 사건에서 사제단은 늘 선봉에  있
었다. 사제단은 이처럼 25년간 변함 없이 민
주화 도정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의 묘한 손길’을 느끼며 감사
하고 있다.

  천주교 신부들이 처음부터 민주화 투쟁을 위
해 사제단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제단 창
립 당시 팔팔한 30대 신부였던 그들은  ‘정
의야말로 하느님의 본질과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며  ‘진정한 
신앙은 교회 안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믿
고 있었다. 

  공안 당국으로서는 오로지 신앙심으로만  뭉
쳐 ‘이름만 덜렁  있었던’ 사제단을  만든 
이들이 늘 애물단지였다. 민주  세력을 싹쓸
이하기 위해 이들을  이용해 뭔가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려 해도, 이들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조직 체계가 공안 당국의 그림  재료로
는 부적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빈약
한 조직은 정작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엄청
난 파괴력을 자랑하곤 했다.

  70년대 말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유신 체제
가 종말로 치닫던 이 시기,  공안 당국은 사
제단 신부들을 불러모아 ‘조직 해체’를 요
구했다. 당시에는  극악한 탄압으로   웬만한 
인권 단체·재야 단체가 주저앉던 무렵이다. 
사제단 신부들은 “우리는 해체 대상이 아니
다. 우리는  둘만 모여도   사제단이다”라고 
우겼다. 신부들의 주장에 한발짝 물러선 공
안 당국은 새 제안을 내놓았다. 사제단 공식 
명칭에 들어 있는 ‘정의’라는 두 글자만이
라도 빼달라고 했다. 사제단은  이같은 ‘양
보안’마저 거부했다. 정의는 하느님의 본질
인데, 이를 어떻게 없애느냐고  끝까지 버텼
던 것이다.


유신 정권이 10·26의 총성으로 무너지고 전
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사제단도 좌절을 겪었
다. 유신 정권이 무너지는가 했더니, 그에 못
지 않은 ‘폭력 정권’이 들어서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80년  5월 보안사에 끌
려갔던 함세웅 신부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
상한다. “우리는 ‘박’이 죽으면  모든 고
난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
은 곧 착각임이 드러났다.  보안사에 끌려갔
더니 ‘여러분   입에서 다시는  민주화·인
권·자유 따위 말이 못나온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 아닌가.”


  시국 사건에서 ‘약방의 감초’ 노릇


  신부들은 곧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같은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는 했지만, 
80년대 내내 독재 정권의  망령에 시달렸다. 
심지어 사제단은 자기네가 그토록  신성시하
며 열망했던‘정의’가‘정의 사회  구현’
이라는 5공화국의  슬로건 문구로  둔갑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까지 목격했다.  5공 정부
는 출범 초기부터 사제단을 ‘용공의 온상’
으로 몰았다.

  87년 전두환 정권 호헌 방침에 치명타를  가
한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면
서 사제단의 운명은 또 한번 전기를 맞았다. 
박군을 죽음으로 몰고간 경찰은 물론 언론마
저 쉬쉬했던 고문  진상을 사제단이  미사를 
통해 폭로했던 것이다. 사건은  당시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씨(현 한나라
당 원내총무)가 교도소 안에  떠돌던 소문을 
바깥으로 전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사제단
이 광주항쟁 7주기 추도 미사 때 이  사실을 
폭로했는데, 이것이 6·10 항쟁을 부르는 도
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89년, 아마도 사제단 역사상 최대 사
건이라 할 문규현 신부(현 사제단  대표) 북
한 파견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 이후 ‘통
일의 꽃’이라는 별명을 얻은 임수경씨는 그 
해 6월 말 ‘전대협’의 이름으로 이미 북한
에 들어가 있었다. 사제단은 격론 끝에 문규
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사제들의  비장한 심경
은 7월26일 기자회견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7월5일 전국
상임위원회에서 사제단의 일원인 문규현 신
부를 우리의 대표로 북한에 파견하여 임수경
양과 함께 판문점을  거쳐 귀환토록  결의했
다. … 우리는 이 일로  말미암아 우리 사제
들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정부 당국에 의해 
실정법에 따라 처벌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위험들이  우리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부 권력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제정·시행되는 실정법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양심의 
법임을 믿기 때문이며, 통일은  반드시 이루
어지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
로 인하여 우리가  고난받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몇 차례 분열 고비 맞기도


  김택암·김병상·김승훈·류강하·박승원·
박원출·송기인·신현봉·안승길·안충석·
이계장·최기식·함세웅·황상조 신부  등은 
이른바 ‘초창기’부터  사제단을  이끌어온 
주요 인물이다. 이들은 최근 문규현 신부(현 
사제단 대표)  등에게 ‘멍에와  십자가’를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앉았다. 이 중 함세웅 
신부는 이른바 ‘3·1 사건’ 이후 시국  사
건에 ‘약방의 감초’처럼 얼굴을 내밀며 민
주화 현장을 지켰다. 최근  지병으로 병상을 
들락거리는 김승훈 신부는 저 유명한 ‘박종
철 고문 치사 사건’ 때 경찰 수사가 조작되
었음을 폭로해 널리 알려졌다.  최기식 신부
는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때 사건 주모자들
을 숨겨 주었다는 죄목으로 구속된 경력으로 
유명하다.

  사제단 신부들은 대개  대건신학대학(당시에
는 천주교 설립 신학교가  한 곳뿐이었다)의 
선후배 사이다. 같은 사제의 길을 걸을 뿐만 
아니라, 선후배 관계로 엮여 있어 이들의 연
대감은 누구보다 강력했다. 이것이 구속·고
문 등 온갖 박해가 가해지는 와중에도  민주
화 현장을 꿋꿋하게 지키게 한 원동력이  되
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속력과 사회에 대한 입장이
천주교 안에서 언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
다. 오히려  이들은  바깥으로는 민주화 투
쟁·통일운동에 나서면서도,  안에서는 보수 
색채가 강한 교회 지도자들과  싸워야 했다. 
‘지역주의’가 교회에 침투해 보편성을  자
랑으로 여겼던 교단의  전통을 훼손한  적도 
있다. 박정희 정권이 씨 뿌린 지역주의가 교
회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며 갈등을 빚기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제단이 경계한 것은  바깥에서
의 편견과 탄압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할지 
모를 분열이었다. 사제단은 몇 차례 분열 고
비를 맞기도 했다. 특히 87년 대선을 앞두고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민주 
진영 내부가 격렬한 논쟁을 벌일 때  사제단
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비판적   지지
론’과 ‘후보 단일화론’을 두고 진통을 겪
기도 했다.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는 사제단은 또 한
번 변신과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교회 바깥
에 쏟았던 정열을  이제는 자기를  정화하는 
데 돌려야 할  때라는 지적도  있다. 아울러 
사제단은 21세기의 주요 사업으로 북한 동포 
돕기와 통일 운동을 꼽아놓고 있다. 70∼90년
대에 비해 2000년대는 상대적으로 더 다원화
하고 전문화한 시대이므로 사제단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한지 모른다. 그런데도  25회 생
일을 눈앞에 두고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이
는 신부들에게서 결코  변치 않을  사제단의 
미래 모습이 발견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
더라도 ‘십자가’를 어깨에서 내려놓은  사
제단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
다.              

  朴晟濬 기자








Lingua Franca [It. = 'Frankish tongue']: a mixed language or jargon used in 
the Levant, consisting largely of Italian words without their inflexions.  
Also, transf., any mixed jargon used for intercourse between people speaking 
different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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