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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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nSei ] in KIDS
글 쓴 이(By): rheeyj (TinSoldier맧)
날 짜 (Date): 1998년02월25일(수) 00시57분55초 ROK
제 목(Title): 철학자 비둘기



* 오랫만에 들어와서 글 하나도 안 올리고 가면 유니콘이 삐지겠지?  :b



작년 여름, 장마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나는 기말고사 시험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쏟아지는 비, 그리고 차들이 지나가면서 튀겨대는 멀건 물 덩어리들이 나의 

등교길을 아주 괴롭게 했다.

문득, 인도옆 구정물 속에 무엇인가를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음에는 누군가 버려 놓은 양말 내지는 넝마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비둘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이, 비 피할 생각은 고사하고, 바로 옆에서 달리는 차 바퀴에서

튀어 오는 그 "멀건 물덩어리"들을 피하지 않고 그저 맞고만 있는 것이었다.


'금방 죽겠군.'


...


시험을 보러 가야하는 나의 머리에서는 이런 차갑기 짝이 없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

비둘기를 뒤로하고 계속 걸어 가려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비둘기는 내 소망대로 날아가 주지 않았다.

다섯 걸음을 떼기 전에 나는 돌아 설 수 밖에 없었고

다시 그 비둘기에게 다가갔다.

꼼짝도 않하는 것이 죽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몸은 똑바로 가누고 있었다.

그 물보라 속에서도 말이다.

내가 가까이서 손을 내밀자 어렵게 몸을 움직이며 피하려 했다.

"해치지 않을께, 도망가지마."


...

내가... 비둘기에게 말도 하네...

...

두 손으로 녀석을 감싸 안고 나는 다시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축축한 깃털 속에서 녀석의 체온과 심장 뛰는 것이 두 손바닥에 퍼져 나갔다.

어차피 살아 나긴 힘들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그 곳, 그 물 튀기는 곳에서 녀석을 죽게 놔둘수는 도저히 없었다.


시험보러 간다고 나간 내가 5분도 안되서 집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좀 놀라셨다.

나는 길에서 집없는 동물을 주워 온 어린 아이처럼 뭐라 할 말 찾고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좋은 말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나는 그냥 성큼성큼 집 베란다를 

향해 걸어 갔다.

(마땅이 할 말이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난 그나마도 길에서 집없는

동물을 주워 온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베란다의 마른 바닥에 녀석을 놓자, 그는 화초들 사이로 숨어 버렸다.

"밖에서 그대로 죽게 놔둘 수가 없었어요."

나의 한마디에 어머니는 수긍하시는 표정을 지으셨고, 그리고

그것은 그 녀석을 어머니께서 돌봐 주실 것임을 내게 알려 주시는 것이었다.


다시 집을 나서서 조금 전 그 녀석이 우두커니 비맞으며 서있던 곳을 

지날 때, 나는 조금 전 내가 한일이 얼마나 잘한 것인지를 다시 느꼈다.

학교로 가서, 빈자리를 찾아 도서관을 헤맸고, 결국 4층 열람실에 공책 한 권 

들고 들어가 공책장을 넘기는둥 마는둥하며 창밖을 내다 보았고, 그때도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집에 있는 그 녀석이 살아서 기력을 회복할지 여부가 나의 관심사였고

이미 그때부터 내 성적은 결정이 나있었다.

...

어린 시절 병아리 몇 마리 키우게 되면, 사실 학교 수업 따위는 별 관심이

없게 되곤 했다. 빨리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서 병아리들 돌볼 생각 뿐이었다.

그때 내가 또 그랬다.


당연하게 시험은 망쳤고, 그리고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을 안 쓰며 나는 귀가길을 재촉했다.

집에 들어가서 보니...

녀석은 아지 살아있었다.

그런데 좀 희한한 것이...

녀석은 모이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그저 창밖만 골똘히 내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비둘기 철학자 비둘기인가 보다."

농담처럼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한바탕 웃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비는 그쳤고, 녀석은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는 부동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나가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 녀석이 나갈 수 있을 만큼

창문을 열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나를 깨우셨고, 그 녀석이 밤새, 혹은 새벽에 날아

간 것 갔다고 하셨다.


혹시 그 부동자세를 하고 졸다가 창밖으로 떨어진 것은 아닌가 

밖에 나가 보셨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고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철학자" 비둘기가 결국 하늘 향해 훨훨 날아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렇게 믿기로 했고,

그렇게 하여 "철학자" 비둘기 사건은 

내 성적표에 가슴 아픈 흔적을 남긴 채 끝났다.


...

비둘기에게 말을 걸고, 그리고 그 녀석 생각에 시험도 망친 내 모습을 보며

새삼 발견한 것은 

아직도 내게 남겨져 있는 "희망"이었고

그러기에...

그 비둘기를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적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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