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S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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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nSei ] in KIDS
글 쓴 이(By): Music (니꼴리오?~翕)
날 짜 (Date): 1994년11월10일(목) 14시29분29초 KST
제 목(Title): [니꼴라오의 향수] 그리운 외할머니...


나의 외갓집은 칠곡군의 신동이라는 동네이다.

외갓집에서 5분도 안되는 곳에 조그마한 기차역이 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장터가

자리잡고 있다. 시골이지만 동네이름에 걸맞게 논과 밭이 펼쳐진 그런 촌은 아니었고

5일 마다 장이 서고 국민학교도 있는 그런 조그만 읍내이다.

내가 국민학교 때 외갓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대학을 다니시던 작은 외삼촌

이렇게 세식구가 살았고 아주 가까이는 큰이모댁이 있었다. 큰이모댁에는 남자 사촌

둘이 있었는데 정식 이름이 있었지만 보통 '고야'와 '이태'로 불렀다. 고야는 나보다

두살 위였고 이태는 나보다 한살 아래였는데 나도 고야에게 형이라 안 불렀고 이태도

나에게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방학 때가 되면 나, 누나, 동생들이 외갓댁에 며칠씩

놀러 가곤 했었다. 고야와 이태는 국민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때까지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전형적인 시골 촌놈들이었지만 마음씨는 정말 고왔다.

그때만해도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고 집안에 외양간을 두고 소도 키우셨다.

지금도 넓은 들판에서 농약 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과 저녁때면 외양간 옆 아궁이

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소여물 냄새가 기억에 선하다. 소여물은 짚단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약간의 사료를 넣고 가마솥에 끓이는 방법으로 만들어 졌는데 그기서

나는 냄새가 너무 톡특하여 나는 여물통에서 여물을 아주 맛있게 먹는 소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곤 했었다. 낮에는 사촌들이 소를 몰고

방둑으로 꼴 맥이러 가곤 했었다. 사촌들의 소 다루는 솜씨는 능숙하였고 나는 뒤로

멀찍이 떨어져 따라나섰는데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그 방둑의 풍경은 세상의

그 어느 풍경보다 평화로왔다. 

할머니는 예순이 넘으셨는데도 대구로 쌀 팔러 다니셨다. 아침 첫기차를 타고 대구로

나가셔서 오후 1시쯤 돌아오셨다. 아침에 깨보면 항상 할머니는 안 계셨고 

할아버지는 마당 이곳 저곳을 거닐면서 집안을 손실하시고 계셨다. 하루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오후 1시쯤 도착 할머니를 기다리며 기차역 주위를 뛰어다니던

그때였다. 할머니는 항상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았고 같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에

들어가 할머니가 해주시던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삼촌들은 할머니가 쌀팔러 다니시는 것을 극구 반대하셨다. 이제 연세가 그만큼

되셨으니 평안한 여생을 보내라는 것이다. 객지에 나가 있던 큰외삼촌은 외갓집에만

오면 집안에 있는 쌀자루를 모두 찾아내어 칼로 싹둑싹둑 잘랐고 할머니는 외삼촌이

간 다음에 그 짤린 쌀자루를 일일이 꿰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쌀팔러 가셨고

외삼촌이 다시 오실때면 쌀자루를 안보이는데 깊숙히 감추셨다. 그래도 삼촌은

어김없이 찾아내어 또 칼로 짜르고 할머니는 그걸 꿰매고 그건 삼촌이 오시면 의례

하는 무슨 행사처럼 되어 버렸다. 

세월은 흘러흘러 할머니도 더이상 쌀 팔 기력이 다하고서야 그 끝이 안보이던 할머니

와 삼촌의 전쟁은 끝이 맺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할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해

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성당에 다니셨다.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도

받으시고 점점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나도 카돌릭 신자이지만 식사때마다

하시는 할머니의 두손을 모은 간절한 기도는 너무 정성스럽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하였다. 그때, 할머니는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을까? 

예전의 억척스러움은 이제 할머니의 모습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 자리를 

세상누구보다도 온화한 미소가 대신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미소..그건 세상을 쓴맛과

단맛을 다 본 후 지을 수 있는 도저히 흉내내기 힘든 포근한 미소였다.

할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쇠약해져갔다. 쌀장사를 그만두신지 일년도 안되어 

거동이 불편하신가 하더니 금방 자리에 몸져 눕는 신세가 되고 마셨다. 거의 30년을

거르지  않고 해오신 쌀장사가 몸에 너무 큰 부담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작년 여름..나는 울산의 어느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할머니를 방문하러

갔다. 할머니의 코에는 인공호흡기가 팔에는 닝겔주사가 배에는 배설을 위한 호스가

꽃혀 있었다. 할머니의 목에서는 마지막을 앞둔 심장의 맥박이 아주 가늘게 느껴지고

고 있었다. 옆의 외숙모가 "외손자 왔어요.."하고 혼자서는 뜨지 못하는 할머니의

눈꺼풀을 힘겹게 띄울 때 그 할머니의 눈동자에서 나를 느끼셨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생전의 모습으로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또렷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중환자실을 나올 때 출입구에서 다시 한번 되돌아본 할머니의 

모습... 부디 평안하게 잠드소서..

10월... 연고전 첫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에 있는 내동생으로 부터

"월요일날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할머니는 병원에서도 더이상 어쩔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다시 신동으로 옮겨 지셨다.

할아버지의 간호 속에서 고향땅에 온 걸 어떻게 아셨는지 벼원에서의 찡그린 표정은

평안하게 펴졌다고 한다. 그러나, 70 평생의 그 엄청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시고

결국, 월요일 새벽 할아버지의 곁에서 운명하셨다.

그날 저녁, 기숙사로 들어와서 혼자 방에 있으면서 흘러 넘치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눈물 넘어로는 할머니에 대한 어렸을 적 생생한 기억들 그리고 

다시 볼 수 없는 할머니의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지고

있었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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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나를 꿈꾸게 한다..고 한 사람은 누구인가?
                                                              니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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