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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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SA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7일 토요일 오전 12시 19분 24초
제 목(Title): 송기도/과테말라 내전과 미국의 사죄 


과테말라 내전과 36년만에 이루어진 미국의 사죄 

송 기 도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파바로티와 친구들’

이탈리아의 테너 루시아노 파바로티가 세계적 팝 가수들과 함께 공연을 하는 모습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1) 잘 알다시피 파바로티는 스페인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까레라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알려져 있다. 특히 ‘미성(美聲)’으로 더욱 
유명한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테너이다. 
파바로티는 6월 1일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라는 
자선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에는 미국의 머라이어 캐리, 라이오넬 리치, 마이클 
잭슨, 글로리아 에스테판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참석했는데 이 자선공연은 
과테말라와 코소보 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2) 다시 말해 공연 수익금은 모두 
과테말라와 코소보 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코소보 난민을 위한 자선 공연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과테말라는 언뜻 
이해가 안 간다. 코소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난민에 관해서는 최근 두 달 
동안 대부분의 언론들이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도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 
전쟁이라기 보다는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구 연합군이 유고를 일방적으로 폭격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쨌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고 이는 국제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과테말라 난민이 코소보 난민과 같이 비교가 될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가? 
도대체 과테말라에 어떤 일이 있었나? 과테말라에서 코소보처럼 엄청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왠일인가? 최근 신문에 과테말라에 대해 별다른 소식이 
없었는데……. 왜 갑작스럽게 과테말라인가? 아니 우리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과테말라 난민들을 위해 대규모 국제 
공연을 벌일 정도인데.

미국의 개입과 과테말라 내전

과테말라는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미의 조그만 나라다. 지도에서 찾아 
보면 아주 조그만 나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면적이 한반도의 
2분의 1로 남한보다 큰 나라(10만8천8백89㎢)이다. 그러니 그냥 ‘작은 나라’라고 
말하기엔 조금 미안하다. 
그러나 인구는 1천 1백만 명(1998년)으로 우리 나라의 4분의 1에 불과해 분명히 
우리보다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로 그냥 
‘작은 나라’라고 말하기엔 또 조금 미안하다. 
과테말라는 마야 문명의 본거지이다. 따라서 인디언의 국가라고 할만큼 인디언의 
수가 많다. 전체 인구 중 55%가 마야 인디언으로 중남미에서 페루와 함께 인디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그리고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42%에 달한다. 
과테말라 내전은 한마디로 이야기해 1954년 미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군사 
쿠데타로부터 기인한다. 52년 아르벤즈 정권은 대토지 소유주의 농지를 유상 
몰수하여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과테말라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푸르츠(United Fruits)의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물론 
유나이티드 푸르츠사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54년 미국은 CIA와 미 해병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반군을 앞세워 과테말라를 
침공하고 아르벤즈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로써 지난 45년부터 10년 동안 
지속되었던 과테말라의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이후 30년 이상 군부에 의한 
통치와 암흑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45∼54년의 개혁을 지지하는 반군이 60년 무장 봉기했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일부는 산으로 피신하여 ‘무장혁명세력’(FAR)을 조직했다. 정치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평화적인 방법을 봉쇄 당한 사람들이 반군이 된 것이다. 이후 
반군과의 내전이 36년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미국은 군사독재정부에 대한 군사, 
경제원조를 강화하고 이 지역에서 패권을 공고히 하였다. 과테말라는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의 ‘모범국가’였다. 
85년 과테말라 군부는 시민정부에 권력을 이양하였고, 이에 따라 기독민주당의 
세레조 정부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인권유린은 
계속됐다. ‘무늬만 민주정부’가 들어선 것이었다.
어쨌든 민간정부가 지속되면서 군부의 영향력은 조금씩 축소됐지만 군부에 의한 
인권유린은 여전하였다. 90년에는 인권유린을 이유로 미국이 3백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삭감했다.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군사원조는 
삭감됐지만 CIA를 통한 지원이 비밀리에 계속됐음이 후일 밝혀졌다. CIA는 1천만 
달러에 달하는 재정원조와 군사기술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96년 대통령에 당선된 중도우파의 아르주 이리고엔 대통령은 반군 대표와 직접 
만나는 등 반군과의 평화협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줄어들도록 많은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36년간에 걸친 
내전을 마치기 위해 과테말라 정부와 좌익반군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사이에 평화협상이 96년 12월 29일 체결됐다. 유엔의 중재로 정부와 반군 사이에 
평화협상이 체결되었고 이제 내전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테말라는 지난 60년부터 96년까지 36년 동안 20여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내전의 고통을 겪어왔다. 그 기간동안 1백만 명이 외국으로 탈출했다. 85년 
군정종식 이후 민간정부가 들어서고 내전 종식이 논의됐으나 많은 어려움 끝에 
평화협상이 이뤄진 것이다. 이제 반군이 총을 내려놓는 대신 정부는 군 병력을 
줄이며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새롭게 진행하고, 인권유린에 대한 조사위원회의 
설치를 약속하였다. 또한 정부는 원주민에 대해 과거 인권유린 사실을 시인하고 
마야 원주민의 종교, 언어, 관습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역사규명위원회’(CEH)

‘진실위원회’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유엔 ‘역사규명위원회’는 지난 96년 12월 
29일 과테말라 정부군과 좌익 반군 사이에 맺어진 평화협정의 일환으로 내전 
당사자인 정부군과 반군의 만행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270여 명의 
실무자로 구성된 ‘유엔 역사규명위원회’는 2년 간의 조사 후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들’이라는 3,600 쪽 분량의 방대한 보고서를 지난 2월 25일 제출하였다.3) 
각계의 분쟁당사자 9,200 명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는 지난 54년 미국의 
사주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우익 군부세력이 집권하면서 분열된 과테말라를 
화합시키기 위한 첫 번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보고서에 의하면 60년부터 96년 12월 29일 평화협정 체결까지 36년간 마야 원주민 
등 2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중 15만 명은 살해되고 5만 명이 
실종되었다. 또한 사망자 4만2천 명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이중 93%가 정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반군에 의한 인권유린은 3%이고, 나머지 4%는 알 수 
없다. 이중 2만9천 명은 약식으로 처형되었다. 
따라서 크리스티안 토우사트 ‘유엔 역사규명위원회’ 위원장은 “정부군의 만행이 
분명히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며 계획적인 전략이었다”고 지적하고 “정부군은 
반군을 추격하면서 마야족 사회를 철저히 없앴으며 주거지와 가축, 농작물을 
파괴했다”고 말했다.4) 또한 정부군은 미국이 제공하는 돈과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보고서가 발표될 시점에 과테말라를 방문중이었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대 때문에 대통령궁의 뒷문을 통해 알바로 
아르수 과테말라 대통령을 예방해야 했다.5) 
보고서는 “과테말라는 지난 81∼83년 수행된 반군 토벌작전 중 내륙 오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정부군은 마야 원주민을 좌익 반군의 동맹자로 간주해 대부분의 
원주민 마을을 불태우거나 파괴했다고 지적했다. 정부군은 마야족이 ‘내부의 
적’이며 게릴라들의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지지기반’이라고 간주하고, 
범법자들의 목적은 ‘마야족을 최대한 많이 죽이는 것’으로, 신원이 완전히 
확인된 희생자 가운데 83%가 마야족이고 17%는 유럽계였다고 말했다. 92년 
노벨상위원회는 인권운동가인 마야족 출신의 멘추(Rigoberta Menchu)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과테말라 정부군의 인권유린을 강력히 비판하고 이들 
인디언의 인권 보호를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내전의 희생자들을 위해 국가가 배상프로그램을 만들 것과 암매장된 
사람들의 주검 발굴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의 직접적인 책임자들의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과테말라 유엔지부’(MINUGUA)6)는 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인권 지도자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며, 지난해 인권유린 사실을 폭로한 후 살해당한 헤라르디 
주교의 죽음이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헤라르디(Juan Gerardi) 주교 피살

과테말라 천주교 인권위원회 오차에따 국장의 집에 복면을 한 3명의 괴한이 
침입하여 집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봉투에는 시멘트 한 
조각이 들어있었다. 두말할 필요없이 이는 살해 협박이었다. 1년전 헤라르디 
주교도 시멘트 조각에 의해서 피살당했었다.7) 
평화협상이 매듭되면서 과테말라는 내전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내전기간 
저질러진 인권유린에 대한 단죄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반성없이 
진정한 민주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헤라르디 주교는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인권연구소에서 내전 당시 인권침해 사례를 수집 정리해 “역사적 기억의 
회복을 위한 보고서(Informe para la Recuperaci   de la Memoria Hist  
ica)”라는 인권백서를 출간했다. 백서는 지난 36년간 저질러진 무자비한 인권유린 
사례들을 수집했고 이중 80% 이상이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군부 등 
우익집단의 테러이고, 7%가 반군의 소행임을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수많은 노력을 하였다. 
‘과테말라의 로메로’로 불리는 75세의 헤라르디 주교는 98년 4월 28일 
인권백서를 출판한 이틀 뒤 피살되었다. 10여 차례 둔기에 머리를 맞아 두부가 
완전히 으깨진 채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지루하게 계속된 수사는 같이 생활한 
오란떼스 신부, 요리사인 마르가리따 양, 그리고 애견 발루를 구속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요리사와 애견 발루는 구속 후 곧바로 석방되었는데, 오란떼스 신부는 
7개월이 지나서야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담당 똘레도 변호사도 살해 
협박을 당했으며, 2명의 검사와 3명의 판사가 교체되었다.8) 그의 죽음과 일련의 
수사와 재판과정은 96년 말 정부와 반군간에 체결된 평화협정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어려운 길을 더 가야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5월 16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당연히 통과되리라고 예상했던 헌법개정안이 
부결되었다. 18.5%의 저조한 투표율에 50.63%가 반대함으로써 아르수 대통령의 
대국민설득이 실패한 것이다. 이로서 반군과의 평화협상이 결렬되고 금년 말로 
예정된 대선을 포함하여 정국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아르수 대통령은 86년 
군부독재 종식후 세 번째 민선대통령으로 군부의 영향력이 막강한 과테말라 
정치에서 군부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의 청산과 좌파 반군과의 내전 
종식에 정치력을 집중해 국민의 많은 지지를 받았었다. 
사실 작년 10월 의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23개 원주민 언어를 지역별 공용어로 하고 
인디언의 전통 사법제도를 인정하는 등 6백만 명에 달하는 인디언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쉽게 통과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정부와 
반군간의 36년간의 내전 끝에 타결한 평화협상의 법적 토대 마련, 수많은 
인권유린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대통령 경호실의 폐지, 군 병력을 5만 명에서 
3만3천 명으로 감축, 군부의 역할을 국방으로 국한하는 등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9) 클린턴 대통령의 반성과 약속?

우리는 민중봉기의 우려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우리의 양심을 억누르고 있다. 
살인이건 고문이건 행하는 주체가 우리고 대상이 빨갱이라면 괜찮다는 식이다.…… 
과테말라 군부가 그런 짓들을 저지르도록 우리가 부추기지 않았느냐는 역사의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지금부터 31년전인 68년 피터 바키 과테말라 주재 미국공사가 이임하면서 미 
국무부에 보낸 메모의 일부다.10) 미국이 과테말라 군부의 인권유린과 양민학살에 
깊숙이 개입해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미국은 과테말라의 
군부를 끊임없이 지지해왔고 과테말라는 미국의 대중미 정책의 대표적 
성공사례였다. 그러나 이 성공의 결과는 36년간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이었다. 
99년 3월 중미국가를 순방중인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과테말라를 방문해 아르수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과거 미국이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시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이 후원한 과테말라의 ‘진실위원회’가 지난 2월 25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군부가 36년간의 격렬한 내전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했으며, 미국이 이런 만행에 직간접으로 개입했다고 비난한 것과 관련해서 
“미국이 이 보고서에 묘사된 폭력적이고 광범위한 탄압을 자행한 군대와 
정보기관들을 지원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1) 
바키 공사가 31년 전 제기한 ‘역사의 질문’에 너무 늦긴했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을 대신해서 대답을 하였다. 미국이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확답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을까? 그 뻔한 사실을 시인하는데 20만 명의 사람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의 손에 무참히 학살되고 31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만일 미국의 ‘국가 
이익’이 침해받거나 훼손되었을 때 미국이 “아! 당신 국가의 이익이 우선이니 
우리는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손쉽게 포기할까? 혹시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뻔히 아는 일을 뒤에 숨어서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닐까. 훨씬 비용도 
많이 들고 나중에 들통나면 ─ 진실은 항시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까─ 입장도 
곤란하고. 소위 ‘저강도전쟁’으로 불리는 지난 80년대의 전쟁 아닌 전쟁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말 아닐까? 이왕 하려면 보스니아에서처럼 진짜 전쟁으로 
해야지, 전쟁이 아닌 것처럼 감춰가면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 미국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데 이제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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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사상 7월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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