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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vel ] in KIDS
글 쓴 이(By): charina (보잉~)
날 짜 (Date): 2001년 8월  9일 목요일 오전 01시 10분 24초
제 목(Title): [보잉~]러시아에서 보내는 편지-02


2001.04.26(목)

나이 29세. 기혼 남자. 2살짜리 아들이 하나. 물결이 이는 갈색 머리. 깊고 
푸른 눈. 훤칠한 키에 날렵한 자태. 올렉은 전형적인 러시아 남자야. 그런데 이 
러시아 남자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게 상상이 가니? 우리의 현지 
통역인인 올렉은 한국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데도 어찌나 한국말을 잘 하는지 
첨엔 그저 신기하기만 했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대. 러시아는 예전에 
북한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있다는 거야. 아무래도 
통역인이 러시아 사람이면 촬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한국사람이 얘기하는 
것 보다야 같은 러시아 사람이 얘기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니. 현지 사정도 잘 
알겠고 말야. 하여튼 이곳에서 머물 일주일동안은 덕분에 촬영이 잘 될 것만 
같아.

오늘 갔던 '블라디보스톡 발레학교'에는 별로 신기한 광경은 없었어. 하지만 난 
정말 인형같이 예쁜 꼬맹이들을 실컷 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지. 두 팔을 
우아하게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도도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들한테 누구든 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이 아리따운 모습에서 
숭고하고 화려한 대륙의 멋이 느껴지는 구나.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천사들이 연습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투철한 정신력의 
소유자들로 변하게 되지. 두시간이 넘게 쉴새 없이 스트레칭을 하는 아이들의 
그 고운 턱밑으로 고이는 구술 같은 땀방울들이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닦여질 때는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지.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하는 숙명이라니.. 발레는 아마도 우리 인생의 
단편이 아닐까. 마룻바닥을 차고 높이 뛰어 오르는 네 살 아이의 진지한 발 
동작에서 나는 러시아 발레의 전통과 깊이를 보았단다. 
 중학교 2학년 희진이는 블라디보스톡 발레학교에 있는 유일한 한국 학생이지. 
그 어린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오직 발레만을 의지하며 이땅에 뿌리 내리고 
있는 소녀. 고국에 있는 부모님에게 한마디 전하라고 했더니 역시나 눈물부터 
뚝뚝 흘리더구나. 그녀의 꿈처럼 지젤의 주인공이 되어 한국 무대에.. 아니 
세계 무대에서 춤추는 그녀의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다.

아마도 내가 저녁에 먹은 게를 쫙 펴보면 내 팔 길이보다 더 클 것 같아. 
먹어도 먹어도 도무지 끝이 없더라구. 몸통이 내 얼굴만하고 집게 발 하나가 
주먹만한 거 있지. 연어 알에 밥을 비벼 먹자니 블라디 보스톡에 온 것이 
비로서 실감이 난다.
'블라디 보스톡'은 러시아 말로 '동방을 점령하라'라는 뜻이래.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배웠었잖아.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이라구. 1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는 이곳 밖에 없기 때문에 군사적 목적으로 이 도시를 만들었던 거지. 
그래서 전에는 일반인이나 외국인에겐 통제구역이었데. 
한참이나 저녁을 먹었는데도 아직도 날이 환하더구나. 시계를 보니 저녁 9시. 
이 시간에 대낮처럼 환할 수 있다니.. 그래 바로 이것이 백야라는 것이지. 
한여름이 되면 정말 밤새도록 환하다고 하는데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해가 
아까워서 우리는 또 일을 하러 나갔지. 블라디 보스톡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갔어. 시내 전경을 찍기 위해서였지. 바다가에 높이 솟은 
절벽 꼭대기였는데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나는 맨트를 할 수가 없었단다. 
마이크에 내 목소리보다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어오기 때문에 도저히 쓸 수 
없는 그림이었지. 그래서 오디오는 빼고 그림만 쓰려고 스케치만 하고 
내려왔지. 전망이 정말 좋은 곳이었어. 그곳에서 배를 타고 조금만 가면 북한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러웠지. 하기야 서울에서 블라디까지 
비행기로 네 시간 정도 밖에 오지 않았으니까..  우리와는 참으로 가까운 
곳이지. 그런데 어쩜 이렇게 사람은 틀린지. 완전히 다른 인종이자나. 역사는 
너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고, 난 그것을 다 알기엔 너무나 유한한 인간이지. 
그래도 너한테 물어 보면 뭐든 궁금한 건 알아 낼 수 있을 텐데 너무 아쉽다. 
넌 인터넷 정보사냥꾼이자나. 질문만 떨어지면 그것이 무엇이든 5분 안에 답이 
나오자나. 너 같은 친구를 둔 것이 내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나도 네게 
'다행스런' 친구가 되길 바라며..  이 편지들을 끝까지 성실하게 써내려 
갈거야.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그런데 기침은 참으로 괴롭구나. 왜 하필 이런 때. 어느 때보다 힘과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이때. 생에 가장 혹독한 기침 감기가 걸렸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은 서커스 촬영을 간다고 하네. 여기서 차 타고 4시간이나 간데. 그래서 
아침 일찍 출발한단다. 이제 자야겠다. 너도 잘자. 블라디에서의 첫날은.. 조금 
피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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