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Travel ] in KIDS 글 쓴 이(By): charina (보잉~) 날 짜 (Date): 2001년 8월 8일 수요일 오전 01시 30분 52초 제 목(Title): [보잉~]러시아에서 보내는 편지-01 2001.04.25(수) 친구야 보렴. 늘 떠나는 마음은 한결같구나. 고국이든 외국이든. 일하러 떠나는 길은 언제나 설레지. 자꾸만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내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그 길다란 목을 쭈욱 빼고 머리 끝으로 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11900M 상공에서 맛없는 기내식으로 저녁을 때우고도 행복한 거야. 러시아의 여객기는 기내식 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열악하다. 천정의 짐칸은 고속버스처럼 뚜껑이 없고 공간이 좁아. 그래서 사람들은 큰 짐은 의자 밑에 넣지. 어떻게 의자 밑에 큰 짐이 들어 가냐구? 여기 의자는 말야 등받이는 시트쪽으로 접히고, 시트는 등받이 쪽으로 들려서.. 꼭 승합차 문 앞의 접었다 폈다 하는 의자 같아. 보통 비행기의 의자 밑에는 구명조끼가 있잖아. 근데 이 의자는 그런 것이 없어서 아래 공간을 더 크게 사용할 수 있지. 그럼 구명조끼는 어디에 있냐구? 글쎄.. 스튜어디스 언니들이 안내 방송을 안 해 주니 나야 도무지 알 수가 없지. 그리고 여기 스튜어디스 언니들은 별로 친절하지 않아. 러시아엔 미인들이 많다고 해서 내심 기대가 큰데 스튜어디스 언니들은 실망이야. 잘 웃지도 않고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게도 자기 멋대로 러시아 말로 무엇을 마실지를 물어. 분명히 '꼬폐'(러시아어)가 아닌 '커피'(영어)로 대답 했는데도 계속 러시아말로 뭐라 뭐라 묻더라구.. 아마 설탕과 크림이 필요한지를 묻는 것 같았어. 그냥 '다'(러시아말로 '예')라고 대답해 버렸지. '러시아 비행기를 타면 러시아 영화를 보여 줄까?'하는 궁금증은 버리는 게 좋아. 화면도 없고, 해드폰 짹도 없고.. 그래서인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금새 잠에 빠져 버렸지. 나는 가방에서 러시아어 회화 포켓북을 꺼내어 다시금 인사말을 외우기 시작했어. "즈드라-스뜨부이찌"… 아웅. 내가 '안녕하세요?','고맙습니다.','맛있네요!'. 이 세가지 말은 한 10개 국어를 하는데.. 이렇게 긴 인사말은 처음 본다. "즈드라…." 흠. 말 만으론 도저히 외워질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차라리 알파벳을 외우기로 했단다. 글자와 같이 읽으면 그나마 외우기 쉽잖아. "아베베게데예요.." "줴제이..이?" 내가 보기엔 분명 영어의 'N'이 뒤 돌아 서있는 모습인데 '이' 발음이 난다고 하네. 'H'가 '엔','P'는 '에르','C'는 '에스'…영어 알파벳과 모양은 같아도 발음은 전혀 다른 것들이 몇 개 있지. 아무래도 러시아어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구나. 어느 하늘에서나 노을은 붉고 하늘은 푸르고 달은 희다. 하늘에서 보면 이 색깔의 대비들이 더욱 선명하지. 자연과 예술, 그리고 사랑은.. 국경과 이념과 역사와 감정을 초월해서 매한가지로 아름답기만 하지. 이 찬란한 지구에 밤이 내리면 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전혀 다른 세상에 떨어져 있을 거야. 대문호들의 피가 끓어 오르던.. 발레리나의 정교한 손동작과 시베리아의 혹독한 바람과, 9228Km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또한 변화의 상흔이 생생한.. 그 멀기만 했던 러시아로 나는 지금 달려 가고 있는 거야! 그런데 말야. 실은.. 난 지금 걱정이 하나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의외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않잖아. 지금 나의 일행은 SBS 교양 제작국 피디인 신피디와 프리렌서 카메라 감독인 이감독. 이렇게 둘이야. 코디네이터는 러시아에 도착해서 만나기로 했어.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식당을 경영하고 계신 분이래. 그런데 이번 러시아 촬영 팀은 피디도 그렇고 촬영감독도 그렇고 한번도 같이 일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걱정이야. 난 익숙치 않은 사람들과 일할 때는 꼭 언젠가 한번은 부딪히게 되더란 말이지. 뭐 누구나 다 그런 건가? 하여튼.. 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일 할거야. 일 잘하고 싶은 마음은.. 지나치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지. 그래서 그저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는 거야. 그러니 제발 이 기침 좀 멈춰야 할 텐데.. 어제부터 시작된 기침이 오늘은 호흡까지 힘들게 만든다. 주변에 곤히 잠든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까봐 기침을 억지로 참아보려 하는데 잘 되지 않아. 이 노무 기침 때문에 잠도 잘 수가 없구..엉. 오늘은 도착해서도 일이 없어 다행이지만 내일부터는 이렇게 기침이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되는데 말야. 그래..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야! 러시아는 분명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멋지고 불가사의한 나라일 거야. 아무래도 난 러시아를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아. 글쎄.. 이렇게 형편없는 호텔도 사랑할 수 있을까? 블라디보스톡은 큰 도시자나. 그리고 이 블라디보스톡 호텔도 큰 호텔이구. 그런데 방은 우리나라 시골 여관 정도의 수준이야. TV화면은 빨간 물이 들었다가 하얀 물이 들었다가를 반복하고, 침대는 돌아 누울 때마다 삐거덕 소리가 요란해. 엄마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고 싶은데 방에 있는 전화는 아날로그 다이얼-왜 동근 번호판에 손가락 넣어서 돌리는 전화기 있자나.- 이라서 콜링 카드를 쓸 수가 없어. 서비스 제공하는 회사에서 카드번호를 입력 받아야 하는데, 아날로그 다이얼로 보내는 신호는 인식이 안되나 봐. 콜렉트 콜 접속번호도 연결되지 않고.. 화장실은 또 어떻고.. 욕조도 없고, 변기는 왜 이리 작은지. 휴지도 재활용지라 검고 거칠어. 세면대 위에 달랑 하나 놓여 있는 비누는 누군가가 쓰다 남은 작은 조각이구, 수도꼭지를 돌리면 빨간 구리 물이 흘러 나오지. 러시아에 대한 나의 환상은 아까 공항에 내릴 때부터 조금씩 깨어지고 있었어. 뚫어져라 사람들을 바라보는 경찰들도 그렇고, 돈을 내고 짐꾼을 사면 순서따위는 무시되는 엉터리 세관도 그렇고, 공항의 규모나 시설의 수준은 우리나라 인천 공항의 1/20정도 조차도 되어 보이지 않아. 공항에서 호텔이 있는 시내까지 오는 도로는 너무나 덜컹거렸고, 이미 어둠이 내린 블라디보스톡의 첫인상은 썰렁함 그 자체였어.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고풍스런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낡고 어두운.. 마치 전쟁 이후에 폐허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어. 그래. 환상이었겠지. 환상은 언젠가는 깨어지는 거자나. 나는 이제 러시아의 현실속에 들어와 있는 거야. 그리고 이 현실은 어쩌면 환상보다 더 진귀한 것들로 가득 할지도 몰라. 나는 이제 막 러시아에 도착 했는걸. 벌써부터 실망하기는 너무나 이르지. 그리고 당장 내일 아침 일찍부터 난 이곳 사람들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 미래의 발레리나들 말야.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러시아 정통 발레..! 그 꿈나무들을 키워내고 있는 시립 발레 학교에 갈거야. 내일이 첫 날이라 실은 약간 긴장되어 있어. 스텝들이랑도 처음이고, 러시아와도 처음이자나. 베스트 컨디션에서 일 하려면 잠을 푹 자둬야 하는데, 도무지 기침이 멎질 않아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어. 기침약을 먹긴 했지만 소용이 없어. 그래도 잠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아.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야 하니까 이젠 정말 잠들어야 하는데.. |